대륙지존기 72화
무료소설 대륙지존기: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2,025회 작성일소설 읽기 : 대륙지존기 72화
제5장 이간계(離間計) (4)
‘이걸 그냥! 확!’
여인은 화가 치밀어 올랐다. 평소에 여자라고 배려해주는 것을 절대 고맙게 여기지 않았지만 이토록 무시하고, 배려조차 없는 처우를 당하자 어안이 벙벙하다 못해 화가 치솟았다. 조금쯤 남의 마음을 신경 써주는 것이 도리 아닌가!
“그래서 어떻게 했는데?”
“사람을 시켰으니 장사를 치를 것이다.”
“그건 다행이네. 그런데 돈은?”
“물론 네 돈으로 했지.”
무진은 더 이상 대화를 나눌 가치를 느끼지 못했는지 일어섰다. 여인과 이렇게 오래 대화한 것도 오랜만이었다. 나름 신선했지만 원하는 대화는 아니다. 여인의 투정을 받아주는 것도 귀찮았다.
“이제 네 갈길 가라.”
필요한 말을 끝내고 방을 나가려고 하자 여인이 붙잡았다.
“잠…깐!”
무진이 돌아섰다. 표정의 변화는 없었지만 여인이 보기에 자신을 귀찮아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아리따운 여인을 귀찮은 짐 보따리로 취급하다니 무척이나 예의 없는 놈이라고 생각되었다. 마음 같아서는 꺼져버리라고 하고 싶지만 여인은 잡지 않을 수 없다. 이곳에서 자신을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은 무진뿐이다.
“나…좀…도…와…줘.”
개미가 소리를 지르는 것 같다. 너무 작아서 일반 사람은 듣지 못할 소리지만 무진은 들을 수 있었다.
“싫다.”
일언반구도 없이 거절하자 여인은 황당함을 넘어 허탈하기까지 했다. 대화를 하면서 무뚝뚝하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이 정도인 줄은 몰랐다.
“왜 싫은데!”
“약속이 있다.”
“나처럼 연약하고 아리따운 여인이 도움을 청하는데 고민 한번 안 하고 매몰차게 거절할 수 있는 거야!”
“무공을 익힌 여인이 연약하다 이건가.”
직선적이다. 거칠 것이 없으며 군더더기가 없다. 대화의 맥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자치고 대화를 오래 끌고 가는 사람 없다. 이유는 상대방의 말문을 막아버리기 때문이다.
여인은 포기할 수 없었다. 꽃다운 이팔청춘에 죽고 싶지는 않다. 어떻게 해서든 위기를 벗어나야 했다. 그녀가 기절하기 직전에 본 것이 현실인지 환상인지 구분하기 어렵지만 진정이라면 무진은 절대고수였다.
“어제 덤빈 놈들 봤잖아! 아무리 내가 강해도 또 잡힐 수도 있다고!”
“그것까지 내가 신경 써야 하나.”
“네가 그랬잖아! 협의를 위해 나섰다고!”
“음!”
억지라는 것을 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사정을 다 밝힐 수 없는 상태에서 도움을 청할 수 있는 존재는 무진뿐이다. 그를 어떻게 해서든 끌어들여야 했다.
“장사에 가야 한다.”
“아!”
그녀의 안색이 급하게 좋아졌다. 어차피 돌아가기에는 너무 멀리 왔다. 목적지에 도착한 다음에 도움을 청하는 것이 현명했다.
“나도 장사에 가는 중이었거든. 같이 가면 되겠네.”
무진의 표정은 처음과 같다. 다만 망설이는 듯한 기색이 언뜻 비추어졌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녀로서는 알 도리가 없다.
“귀찮군.”
“야! 인마!”
“함부로 소리 지르지 마라.”
지저(地底)의 암흑을 지닌 눈동자가 여인의 눈동자를 투영했다.
움찔!
여인은 무저갱 속에 빨려 들어가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이 이상 입을 열면 큰일 날 것 같았다.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그녀의 자존심을 아는 사람이 봤다면 놀라서 기겁했을 것이다.
‘제…기랄!’
기가 죽었다는 것을 알자 기분이 몹시 나빠졌다. 그렇지만 소리를 지르지는 못했다. 무진의 몸에서 흐르는 기운은 아버지조차 갖지 못한 것이었다. 본능적으로 위축되게 만들었다.
‘도대체 이놈은 뭐야?’
고민을 하던 무진이 입을 열었다.
“좋다.”
좀전에 느꼈던 오싹한 기운을 잊은 채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무진이 거절하지 않을까 안절부절못했었다. 기분이 나쁜 것은 둘째 치고, 우선은 살고 봐야 하지 않은가!
“무진이다.”
“뭐? 아! 나는 하영이야!”
하영은 무진을 이상하게 보았다. 성을 물어 보지도 않는다. 그냥 부르기 편한 이름이면 상관없다는 듯했다. 솔직히 하영은 이렇게까지 해야 할 필요가 있는지 의문이었다. 무시당하기 싫은 여인 특유의 반발심이 작용한 것인지도 몰랐다.
* * *
검은색으로 된 종이를 펼쳐본 자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종이의 바탕이 검은색이라 글씨를 알아보기 어려웠지만 불빛 사이로 비추면 단어가 나열된다. 나열된 단어를 일정한 규칙에 따라 조합을 하면 뜻을 이해할 수 있다.
“실패했단 말인가!”
목표물을 확인하고 귀천마단 20명을 파견했다. 그 정도면 충분하다고 여겼다. 그런데 계획이 실패로 돌아갔다.
“귀천마단까지 전멸하다니.”
여인과 5명밖에 되지 않는 호위로는 귀천마단을 막아낼 수 없다. 의도하지 않은 누군가가 개입한 것이 분명했다.
“어떤 놈인지 몰라도 가만두지 않는다!”
뿌드드득!
그는 험악한 표정을 지으며 이를 갈았다. 귀천마단은 그가 보유한 전력의 3분지 1이나 되었다. 한순간에 공중으로 사라져 버린 것은 크나큰 손실이었다.
“계집이 어떻게 할 것 같지?”
“돌아가기에는 너무 멉니다. 목적지까지 배를 타고 갔을 가능성이 큽니다.”
“따라잡으려면 도착한 후겠지.”
“그렇습니다.”
일이 난감하게 되어 갔다. 될 수 있으면 마찰을 빚지 않고 은밀하게 처리해 버리려고 했는데 꼬이고 말았다.
며칠 전에 성에서 연락이 왔다.
‘서둘러 데려오지 않으면 내 목숨은 없다!’
그는 필사적이었다.
“전력을 다해 계집을 잡는다.”
“예!”
돌아서기에는 신의 분노가 너무 컸다. 그 뒷감당을 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 그는 상상만 해도 오금이 저렸다.
* * *
강바람이 시원하다. 햇살을 머금은 바람은 마음마저 선선하게 만들어 주었다. 하영은 배를 타자 우울했던 마음이 조금은 진정되었다. 무진은 그녀의 옆에서 강을 응시하고 있었다.
무진과 하영은 홍호(洪湖)에서 배를 타서 악양(岳陽)을 지나 동정호(洞庭湖)의 중간을 지나고 있었다.
하영은 찢겨진 면사 대신 새 면사를 쓰고 다녔다. 맨 얼굴을 드러내놓고 다니기에는 그녀의 외모가 너무 눈부셨다. 물론 하영의 옆에 자리한 무진은 달랐다. 무진은 필요한 말을 제외하고는 그녀에게 말을 걸지도, 답하지도 않았다.
하영은 그런 무진의 무관심에 심술이 났지만 먼저 다가가기에는 자존심이 상했다. 무진과 같이 있으면 자꾸만 작아지는 자신을 느껴야 했기 때문이다. 특별히 위압감을 주려는 것도 아닌데 주눅이 들었다.
‘내가 왜 이러지! 저놈만 보면 자꾸 쫄기나 하고!’
그녀는 애써 무시했다. 이대로 무진에게 끌려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녀도 한다면 하는 당찬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무진은 그녀의 시선을 피하지 않는다. 굳이 일부러 피할 필요도 없을뿐더러 하영에게 감정을 느끼는 것도 아니다.
여정은 그가 계획한 일의 일부분이다. 하영이 먼저 손을 내민 것처럼 보여도, 무진이 손을 내밀도록 상황을 유도했다.
‘하지만.’
무진의 시선이 다가오는 3척의 배에 향했다. 계획을 세우다 보면 종종 뜻하지 않은 것들이 덤벼들기 마련이다. 목표물은 접근하지 않고 다른 것들이 걸려드는 것을 무진은 원하지 않는다.
‘우선은 지켜보지.’
하영도 접근하는 배를 보았다. 뜻하지 않은 배의 출현에 그녀는 긴장했다. 며칠 전에 습격한 놈들일 수도 있었다. 더군다나 육지도 아니고 강 위에서 결전을 벌이면 도망갈 곳도 없다.
“수적이 겁나나.”
“내가 언제 겁먹었다고 그래! 그리고 수적이 아닐 수도 있잖아.”
“멍청하군.”
“뭐야!”
“절정고수가 적의 기세도 파악하지 못하나.”
“그……!”
대꾸할 말이 딱히 떠오르지 않았다. 무턱대고 긴장을 한 탓에 적의 기세를 파악하지 못했다. 자세히 살펴보면 수적들이라는 것을 금세 알 수 있었다. 괜히 지레 겁먹고 호들갑을 떤 것 같아 쪽이 팔렸다.
선장이 배에 탄 이들에게 적정한 돈을 모았다. 일정 수준의 양을 바치면 대부분 무사히 보내주었다. 돈 때문에 목숨을 잃는 것은 바보같은 짓이었다. 한두 번 당한 일이 아니라 사람들도 알아서 돈을 냈다.
선장이 돈을 걷고 있을 때 동정호의 수적들이 근처까지 접근했다. 3척의 배 중에서 1척이 배를 갖다 붙였다. 3척 중 1척만 배를 댄 것은 만약을 위해서다. 사람들이 타고 있는 배에 위험한 놈들이 있을 경우를 대비한 것이다.
그놈들이 탑선(搭船)하면 수적들도 곤란했다. 괜한 피해는 원치 않았다. 거리를 두면 웬만한 고수라도 수적들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수적들은 동정호 일대를 무대로 활약하는 동정십팔채(洞庭十八寨)의 수룡채(水龍砦)였다. 정천맹이 굳건할 때는 기승을 부리지 않았지만 요즘 들어 정천맹이 휘청거리자 활개를 쳤다.
하영에게도 선원이 와서 손을 내밀었다. 하영은 수적 따위에게 돈을 주고픈 마음이 없다. 수적에게 돈을 준다는 것 자체가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다.
“줘라.”
“내가 왜?”
“말썽을 일으켜서 좋을 건 없지 않나.”
“일으키면 어쩔 건데!”
반발심에 대들었다. 그러나 상대는 무진이다. 본전도 찾지 못할 말은 하는 게 아니다.
“도와주지 않겠다.”
매몰찬 대답이다. 무진의 태도에 화가 치밀지만 하영은 더 이상 대들지 못했다. 무진이 도와주지 않으면 하영의 목숨은 바람 앞에 등불일 수 있었다. 더군다나 무진의 성격상 한번 한다면 할 것이다. 하영의 목숨이 경각에 달린다고 해도 도와주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냉정한 놈! 독한 놈!’
하영은 마지못해 돈을 지불했다. 그것도 무진의 몫까지 함께 지불해야 했다.
‘접시 물에 코 박고 뒈질 놈! 벼룩에 간을 빼 먹어라!’
하영이 보기에 무진은 가난뱅이가 아니다. 가난뱅이가 무늬가 선명하게 수놓아진 특상급의 비단옷을 입고 다니지는 않는다. 그런데도 자기 돈을 절대 쓰지 않는다. 보호받는 입장만 아니면 가만있지 않았을 것이다.
무진과 하영이 귀찮은 일을 피하기 위해서 돈을 내는 반면에 다른 곳에서 일이 터졌다.
일남일녀 중 여인이 강하게 반발했다. 보통 이상의 미모를 지닌 여인이다. 입은 옷과, 잘 제련된 도(刀)를 찬 것을 봐서 명문가의 후손일 가능성이 컸다.
“나보고 돈을 내라고!”
여인의 앙칼진 목소리가 배를 울렸다. 그녀는 분기탱천한 듯 배에 올라탄 수적을 향해 소리쳤다.
배에 승선한 자는 수룡채의 채주를 맡고 있는 동정혈부(洞庭血斧) 진무쌍이었다. 총채주 동정용왕(洞庭龍王) 강패를 제외하고 가장 강하다. 진무쌍은 독 오른 암고양이 같은 목소리에 살기가 치밀었다.
“네년이 진정 죽고 싶은 모양이구나!”
“흥! 감히 수적 따위가 용호장을 건드리고 무사할 줄 알아!”
멈칫!
진무쌍은 상황이 조금 껄끄럽다는 것을 깨달았다. 용호장(龍虎莊)의 전력은 크지 않다. 2백이 넘지 않는 작은 규모의 장원이다. 동정십팔채의 총 인원에 비하면 현저히 부족하다.
하지만 그를 상쇄하고도 남는 존재가 용호장에 있다. 천하16대고수에 속하는 천중도왕(天中刀王) 용사군이 버티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화가 나서 동정십팔채를 공격하면 여간 곤란한 일이 아니다. 물에서 진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엄청난 타격을 받을 것이 분명하다. 그런 일은 되도록 겪지 않는 것이 나았다.
“소저는 누구시오?”
“용연비다!”
천중일미(天中一美) 용연비.
사실 그녀의 외모만 가지고서는 하늘 아래 가장 아름답다는 말은 오해의 소지가 있다. 그녀의 아버지가 천중도왕 용사군이기에 얻은 별호였다.
진무쌍은 그녀의 정체를 듣자 한발 물러섰다. 괜한 혈투는 원하지 않았다. 동정의 혈부라고 불리는 그는 덩치에 걸맞지 않게 이해타산을 가릴 줄 알았다.
“우리는 용호장과 척을 질 생각이 없소이다! 그러니 우리의 일에는 관여하지 말아주시오!”
“닥쳐랏! 선량한 양민의 돈을 갈취하는 네놈들의 악행을 그냥 둘 내가 아니다!”
“꼭 이렇게까지 해야겠소!”
“강호무림의 협의를 지키기 위해 네놈들을 단죄해주마!”
진무쌍의 눈빛이 변했다. 안면 근육이 흉찍하게 일그러졌다.
‘빌어먹을 년이 이만큼이나 양보했는데도 내 체면을 무시해!’
똥개도 자기 집 안마당에서는 3할을 먹고 들어간다고 하지 않는가! 동정호는 진무쌍의 무대다. 남의 문파가 이래라저래라 한다는 것 자체가 짜증이 나는 일이다.
적당히 영업을 하고 돌아가는 것이 서로를 위해 좋은 타협점이라 여겼건만 건방진 애송이 년이 끝까지 물고 늘어지고 있었다. 이대로 물러서기에도 애매해졌다. 계집년의 협박에 못 이겨 물러서면 수적질을 하기도 힘들어진다.
“어린 년이 정녕 겁을 상실했구나!”
“뭐라고! 더러운 수적이 감히 누구에게!”
용연비가 화가 났는지 먼저 도를 꺼내들었다. 진무쌍도 물러서지 않고 도끼를 들어올렸다.
“세상 물정 모르고 덤빈 대가를 치러주마!”
“닥쳐랏! 강호의 협의가 살아 있음을 깨닫게 해주겠다!”
갑판 위의 분위기가 흉악해졌다.
사람들은 용연비가 나선 것이 하나도 고맙지가 않았다. 평상시대로 적정한 보상만 하면 물러날 수적들이다. 그들도 일정 수준 이상을 강요하지는 않았고 싸움이 일어나면 죽는 것은 양민들이다.
피해를 고스란히 다 받고 난 후 이겨봐야 무슨 소용인가! 배에 탄 사람들은 용연비를 원망스럽게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