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륙지존기 64화
무료소설 대륙지존기: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2,075회 작성일소설 읽기 : 대륙지존기 64화
제3장 단죄(斷罪)의 장 (3)
팽관혁은 찢어 죽여도 시원찮을 존재를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했다는 것이 수치스럽고, 분했다. 어찌나 세게 이를 악물었는지 입술 사이로 핏물이 맺혔다.
“세상을 제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여기던 놈들이 하늘을 들먹인다는 것 자체가 우습지 않나.”
“닥…쳐랏!”
정곡을 찔렀다. 무진의 한마디가 비수가 되어 그들의 심장을 후벼 팠다. 그들이 언제 하늘을 우러러보았는가! 세상의 중심이 바로 그들이었다. 천하를 좌지우지할 수 있기에 무엇이든 이룰 수 있다고 여겼다. 감히 어느 누구도 그들 앞에서 당당할 수 없었다.
무진에 의해 힘을 잃지 않았다면 하늘을 거론하는 참담한 경우를 겪지 않았을 것이다.
“네놈들은 여기가 끝이라고 여기겠지.”
“무…슨 말이냐?”
“아직 시작도 안 했다는 뜻이다.”
씨익!
사이한 미소를 짓는 무진의 모습을 보자 전신의 솜털이 곤두서는 오싹한 소름이 돋았다.
그들은 더 이상 추락할 곳이 없다고 여겼다. 이보다 더 극악한 상황이 어디 있는가! 공력을 잃은 순간부터 그들은 무인이라고 할 수 없게 되었다. 무공을 사용하지 못하는 무인이 된 이상 두려울 것이 없을 줄 알았다.
“도대체… 무슨 수작이냐?”
“단죄의 장이다.”
단죄란 죄를 물어 처단한다는 뜻이다. 지금 이 순간 공오대사, 육진풍, 팽관혁, 남궁훈, 당사혁, 제갈수혁은 이해하기 힘든 표정을 지었다.
무진은 펼쳐진 책의 한 부분을 찢었다. 그리고 놈들에게 던져주었다. 찢어진 종이는 정확하게 날아갔다.
그들은 무진이 던진 종이에 적힌 내용을 보았다. 굳이 집중해서 볼 필요도 없는 간단한 내용이다.
-구천십육마 추적, 멸살.
-운부촌 학살.
그들은 내용을 읽고 선뜻 이유를 파악하기 힘들었다. 강호공적으로 악명을 날린 구천십육마에 대해서는 알고 있다. 그렇기에 구천십육마를 추적 멸살한 것은 강호무림의 대의를 위한 일이었다.
반면에 운부촌 학살은 들어보지도 못한 일이다. 운부촌이라는 마을 자체를 알지도 못한다.
다른 이들과 다르게 육진풍은 순간 섬뜩한 느낌을 받았다. 운부촌은 들어보지 못했다. 다만 구천십육마를 추살(追殺)하기 위해서 한 마을을 지워버렸다. 살아 숨 쉬는 존재 자체를 소멸시켜버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설…마?’
육진풍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날 벌어진 일은 누구도 발설하지 못한다. 추적한 자들만이 알고 있는 진실이다.
추적에 참여한 자들 전부가 중원무림의 대의를 위한 일이라 여겼다. 하지만 그들도 명색이 정도의 표상인 강호의 명숙들이다. 공공연하게 입에 담을 내용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세월이 흐르면서 잊힌 일이 되어 버렸다.
육진풍이 과거를 회상할 때 차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무진이 다른 누구도 아닌 육진풍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진의 눈을 보는 순간 육진풍은 마음속에 숨어 있는 진실들이 낱낱이 까발려지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기분 나쁜 미소를 짓고 있는 무진을 볼수록 불안감이 현실이 될 것 같았다.
“그…럴 리 없다!”
육진풍은 강하게 부정했다. 40년이 넘는 세월이 지나갔다. 무진이 그 당시의 일을 알고 있다는 것 자체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살인멸구라, 방법은 아주 좋았다.”
무진은 육진풍을 칭찬했다. 하지만 육진풍은 웃을 수 없었다. 스산한 한기가 그의 몸을 옥죄고 있었다. 마치 그날의 진실이 명명백백하게 밝혀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후환은 남기지 말았어야지.”
육진풍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까마득히 잊혔던 기억 속에 종남신검 나주환의 주검이 떠올랐다. 정체불명의 고수에 의해서 일수에 죽었다. 명예가 걸린 일이기에 쉬쉬하며 덮어 버렸다. 그런데 오늘 그날의 일이 피를 머금은 혈륜(血輪)이 되어 돌아왔다.
“그렇…다면 네…놈은?”
“후환이지.”
“그…럴…리 없다!”
“어차피 네놈들에게는 스쳐 지나가는 일이었겠지.”
육진풍과 무진의 대화를 들을수록 나머지 5인의 얼굴은 심각해지고 있었다. 단죄라는 뜻이 복수를 뜻한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강호에서 목숨은 목숨 값으로 받는다고 하지.”
“뭘…어떻게 한다는 말이냐?”
육진풍은 흔들리는 자신을 주체하기 힘들었다.
“똑같이 해줬지.”
“그…게 무슨?”
무진이 눈짓을 보냈다. 차중천이 가지고 온 함(函)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시중에서 구리돈 몇 문이면 손쉽게 구할 수 있는 볼품없는 나무함이었다.
그러나 함에서 나온 물건을 본 육진풍은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키지 못했다. 함지박만 하게 커진 눈과, 벌어진 입, 떨리는 전신은 제어가 불가능할 지경이다.
무진이 들고 있는 것은 화산의 상징과 같다. 화산의 모든 무인들의 생사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권능을 지닌 물건이다. 그것은 화산의 장문영부인 매화검령이었다.
육진풍은 가짜일 수도 있다고 여겼다. 하지만 매화검령 특유의 기운과 향기는 결코 만들어 낼 수 없는 것이었다. 무진이 들고 있는 것이 매화검령임을 부정하지 못했다.
“그…것을 어떻게?”
“화산은 장문영부를 아무한테나 주나 보지?”
육진풍은 순간 소름이 끼쳤다.
부들! 부들!
“그…렇…다…면 네…놈이 화산파를!”
차마 말을 잇기 힘들었다. 화산파는 구파일방의 검문이며, 최강의 문파다. 화산파가 개인에 의해서 무너진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현실을 인정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눈앞에 매화검령이 자리했다. 화산파를 상징하는 매화검령이 외부로 반출된 경우는 없다. 있다면 문파가 사라졌을 때나 가능했다.
“후후!”
무진이 희미하게 웃으며 가혹한 진실을 알려주었다. 육진풍은 귀를 틀어막고 싶었다.
“이제 화산파는 없다.”
“웃…기지 마라!”
육진풍은 진저리를 치며 부정했다.
“육여은이라고 했던가.”
멈칫!
육여은은 육진풍의 손녀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손녀가 바로 육여은이었다. 무진의 입에서 육여은이라는 말이 흘러나오자 육진풍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 흔들렸다.
“개처럼 빌더군.”
“이…놈! 여은이를 어떻게 했느냐?”
“그래서 개처럼 밟아 죽였지.”
“으…아아아악!”
탕! 탕! 탕!
참지 못한 육진풍이 괴성을 내질렀다. 주먹이 부서져라 철창을 내리쳤다. 무진을 죽이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다. 눈에서 광기가 번뜩이고 있었다.
중원을 질타했던 매화검제는 이제 사라지고 없다. 광기에 사로잡혀 미쳐 가는 광인이 있었다. 화산파가 불타고, 손자와 손녀가 전부 죽었다. 미치지 않는 게 더 이상할 것이다.
“네…놈이 사람이란 말이냐! 악마 같은 놈!”
“적반하장 아닌가.”
“오랑캐 따위가 죽든지 말든지 무슨 상관이냐! 쓰레기 같은 놈들과 화산파가 비교가 되냔 말이다!”
육진풍의 마음속에 간직한 진실이었다. 그는 변방의 오랑캐를 사람으로 여기지 않는다. 화산파를 그들과 같은 위치에 놓는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육진풍은 뼛속 깊이 중원인이다. 중원이 세상의 전부고 그 외의 것들은 쓰레기라 여겼다.
“솔직해서 좋군. 후후후.”
“철창을 열어! 어서 열란 말이야! 죽여 버리겠다!”
“나도 너와 같이 생각한다. 세상의 중심은 바로 나다. 나를 중심으로 세상이 돌아간다. 그 주변에 있는 것들은 모두 나를 위해 존재하는 것들이다. 네놈들 따위가 나와 비교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냐.”
오만함을 넘어 지존광대했다.
세상을 제 마음대로 조정하겠다는 뜻이 아닌가!
예전이었다면 광인의 헛소리로 치부하겠지만 지금은 어느 누구도 흘려듣지 못했다. 무진의 말이 진실이 될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중원대륙이 무진의 손아귀에서 좌지우지 될 것 같았다.
“더러운 오랑캐놈아! 문을 열란 말이다! 네놈을 갈아 마셔 버리겠다! 크아아아악!”
“시끄럽다.”
퍼퍽! 쿠당탕!
철창을 잡고 소리치던 육진풍이 차중천의 권을 무방비로 맞았다. 육진풍은 감옥 끝 벽에 부딪친 후 튕겨 나와 바닥에 쓰러졌다. 한동안 바들거리더니 혼절해 버렸다.
공오대사를 비롯한 이들은 처참한 상황에 기가 막힐 뿐이었다. 고작 일격을 버티지 못하는 것이 그들의 현실이었다. 천하16대고수였던 시절은 이제 꿈이 되어 버렸다.
무진의 시선이 그들을 향했다. 육진풍을 걱정하는 그들이 가소로울 따름이다. 지금 남 걱정할 때가 아니다. 그들 자신부터 걱정할 때였다.
“너희들의 문파는 무사할 것이라 보는 건가.”
움찔!
몸이 경직됐다. 그들이 속한 문파가 어딘가. 중원의 명문이며, 최강이라는 자부심을 가진 곳이다. 소림사, 남궁세가, 사천당가, 제갈세가, 하북팽가. 천하에 산재한 무수히 많은 방파 중에서도 서열 10위 안에 드는 막강한 세력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쉬이 불안감을 떨치지 못했다. 방금 전에 화산이 무너졌다고 하지 않는가! 육진풍이 화산의 진산지보를 모를 리 없다. 그렇다면 사실일 가능성이 컸다.
“그…럴 리가!”
“말도…안 된다!”
“거…짓…말이다!”
흔들리는 그들과 다르게 무진은 차분했다.
“믿기 싫으면 믿지 않아도 된다.”
무진의 말투는 크지도 작지도 않았다. 참혹한 상황과는 어울리지 않는 무심함이 느껴졌다. 차가운 기운조차 이제는 사라지고 없다. 복수를 한다는 것조차 믿어지지 않을 분위기를 자아냈다. 너무나 담담한 모습에 오히려 그들은 두려웠다.
무진이 눈짓을 보내자 이번에도 어김없이 차중천이 함에서 기물(器物)을 꺼냈다. 잡동사니를 집어 드는 것처럼 대충 꺼내든 물건이 공개되었다. 청록색의 오묘함이 깃든 신성한 지팡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은은하게 퍼지는 녹옥의 우아함과 불도의 깊은 수양이 느껴졌다.
녹옥의 지팡이를 보는 순간 공오대사가 벌떡 일어났다. 그의 80년 생애 이토록 놀란 적은 단연코 없다. 무진과 악연을 맺는 순간부터 감히 상상하기 힘든 일이 연속적으로 벌어지고 있었다.
무진이 손에 들고 있는 것은 소림의 장문인이 지니고 있는 녹옥불장(綠玉佛杖)이다. 소림사의 방장실에 모셔져야 할 진산지물이 왜 이곳에 있는가!
부인하고 싶지만 그럴 수 없었다. 녹옥불장의 끝에 새겨진 모양과 녹옥에서 흘러나오는 기운은 절대 거짓이 아니었다.
“그…것이 왜?”
놀람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다. 무진은 사천당가와 제갈세가의 보물이라고 할 수 있는 천독주(天毒珠)와 제풍선(制風扇)도 지니고 있었다.
“이럴…수가 있단 말인가!”
“어떻게 이런…말도 안 되는…일이!”
한곳에 모이기도 힘든 장문영부와 세가의 상징이 한자리에 모였다. 세상 누구도 문파의 상징을 외부인에게 주지 않는다.
화산파를 무너뜨리고 가져온 것처럼 소림, 제갈세가, 사천당가도 같은 일을 당했을 것이다. 생각만 해도 끔찍하고 무서운 일이었다.
“이…놈! 네놈이 진정 사람이란 말이냐!”
“죽일…놈!”
“으아아아악!”
타탕! 타탕! 타탕!
당사혁과 제갈수혁 역시 육진풍과 다르지 않았다. 그들은 피눈물을 흘리며 죽일 듯이 달려들었다. 공오대사도 떨리는 마음을 주체하기 힘들었다. 간신히 참고는 있지만 몸이 떨리고 있었다.
팽관혁과 남궁훈도 떨리기는 마찬가지였다. 차중천이 세가의 물건을 꺼낼 것만 같았다. 하지만 예상과는 다르게 차중천은 더 이상 각 문파의 기물을 꺼내지 않았다. 그래서 팽관혁과 남궁훈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무진이 팽관혁과 남궁훈을 보며 다소 미안해하는 듯한 말을 꺼냈다.
“기대했을 텐데 미안하군. 시간이 바빠서 하북팽가와 남궁세가를 들러보지 못했어. 뭐, 조만간 방문할 테니 서운해 하지는 마라.”
“안…돼!”
“안…되오!”
무진의 방문이 뜻하는 바는 한 가지다. 세가를 멸문시켜 버리겠다는 것과 같다.
한순간 안심했던 것이 거짓말처럼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불안감은 이전의 사람들보다 크다. 잃어버린 자는 절망하겠지만 남아 있는 자는 두려움과 공포에 잠을 이룰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