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남녀 13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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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2,086회 작성일소설 읽기 : 이계남녀 139화
139 무혼과 아이네스(2)
마계에서 마신들이 창조신의 명에 의해 처절히 박살 나는 동안 인간계에서는 연합군이 무혼을 선두로 동맹국을 향해 진격하고 있었다.
이미 마신의 소멸에 대한 소식이 동맹군 전체에 퍼져 있었기에 무혼의 앞길을 막는 동맹군은 없었고 그들은 한없이 뒤로 밀려나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가이오스트의 모든 신전에 신의 계시가 내려왔다.
동맹군에게 불리한 내용이 다수 있었음에도 천신들과 마신들의 계시가 같았다. 연합군과 동맹군은 그 명에 따라 기나긴 백 년간의 평화 조약을 맺게 되었다.
인간계와 시간이 다르게 흐르는 관조자의 영역을 걷고 있던 엘라드는 그의 앞에 나타난 계단을 보았다.
계단을 내려와 인간계로 간 지 이제 수백 년. 이렇게 빨리 이 계단을 다시 보게 될 줄 몰랐다.
“그냥 영역에 들어오면 원하는 곳에 바로 도착하게 만들면 안 되려나?”
아무도 듣지 않는 불평을 늘어놓으며 수백 년 만에 다시 밟아보는 기나긴 계단을 걸어 끝에 올라서니 넓은 공간에 많은 것이 어우러져 있다. 초원과 사막이 섞여 있고 불과 물이 서로를 휘감으며 빛과 어둠이 물결처럼 흐르며 수시로 자리를 바꾸고 있다.
그 모습을 한동안 골똘히 쳐다보던 엘라드의 입가에 살짝 미소가 걸렸다.
“마지막으로 계단을 내려갈 때는 전혀 마음에 들지 않았었는데, 지금 보니 나름대로 괜찮네? 생각하는 법이 바뀌어서 그런 걸까?”
엘라드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걸어갔다. 그가 어린 시절, 그토록 보기 싫었던 영역의 풍경이 지금은 전혀 달라 보였다.
‘어린 치기였을까? 아니면 내가 성숙한 걸까?’
눈으로는 주위의 풍경을 놓치지 않으면서 머릿속에서는 많은 생각이 떠올랐다.
그리고 엘라드는 드문드문 보이는 건물 중 네모반듯한 모양을 하고 있는 건물의 문 앞에 섰다. 그는 건물을 훑어보며 중얼거렸다.
“아버지…….”
겉으로 보기에는 작은 여관의 크기였으나 문을 열고 들어서니 반대쪽의 벽이 까마득하게 보였다. 그것을 보던 엘라드는 다시 한번 중얼거린다.
“큰 집 좋아하시는 건 안 변하셨군. 하지만 구조가 많이 바뀌었는데? 어디에 계실까?”
문 앞에서 중얼거리던 엘라드는 뒤에서 갑자기 벌컥 열리는 문에 부딪혀 앞으로 튕겼다.
“끄아아악.”
“응? 엘라드 왔니?”
“으그그그.”
아직 신의 몸이 아니기에 어느 정도 고통을 느끼는 엘라드로서는 신력으로 문을 거세게 연 그의 아버지가 미워 보였다.
“아들을 잡으시려고요?”
“오호, 네 손에 든 것을 보니 네가 애비를 잡으려고 하는 모양이구나? 네놈이 신력이 없으니 어디서 그럴싸한 것을 구해온 모양인데, 그 손에 든 것으로 치면 애비 잡겠다? 왜? 나의 자리가 탐나느냐, 아들아?”
“줘도 받기 싫어요. 제발 오래오래 버텨서 그 자리를 늦게 넘겨주세요.”
잠시 동안 침묵과 함께 기묘한 자세의 대치를 이루던 평등의 관조자는 엘라드처럼 머리를 꼬며 자세를 바로잡았다.
“오랜만에 애비의 재롱을 보니 어떻든?”
“전혀 재미없어요.”
“하하, 일단 안으로 들어가자.”
관조자 부자는 기나긴 복도를 나란히 걷기 시작했다.
“그래, 인간 세상은 마음에 드느냐?”
“요즘에 좀 마음에 들었어요.”
“수백 년간 한 번도 집에 안 들리던 네가 갑자기 부모가 보고 싶었다는 황당한 이유는 아닐 테고 그것 때문이냐?”
“예.”
그러자 엘라드의 아버지는 그에게 손을 내밀었고 엘라드는 손에 쥔 백색의 신검을 그에게 넘겨주었다.
엘라드가 준 검의 기운을 살펴보던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쉽구나.”
“왜요.”
그가 백색의 신검을 휘감는 기운을 보며 입맛을 다시자 엘라드는 궁금한 얼굴로 그를 보았다.
“얼마 전에 창조신의 부름을 받아 마신 녀석들을 패러 갔었는데 그때 이게 있었다면 좀 더 재미있었을 텐데.”
“인간계에 있기에는 너무 위험한 기운이죠?”
“인간계에서라면 신도 때려잡을 수 있겠는데?”
“그 검을 쓰던 인간은 정말 마신을 때려잡았어요.”
“어? 황토인이 이 검을 쓰고 있었니? 어느 공주에게 검을 빌려주었다고 들었는데?”
“그 공주와 황토인이 바꿔치기 된 거예요. 검 주위에 맴도는 기운을 소멸시켜주실 수 있죠?”
“응? 이 기운은 걱정마라. 내가 조용히 소멸시켜주마.”
“그리고 부탁이 하나 있어요. 공주와 황토인을 다시 원래대로 바꿔주고 싶어요.”
“흐음…….”
관조자는 심각한 얼굴로 하더니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그것을 본 엘라드는 한 번 더 부탁을 했다.
“전에는 바꿔치기하는 것을 허락해 주셨잖아요. 부탁드려요.”
“허락한 게 아니라 네가 내 고유 권한의 마법을 마음대로 훔쳐 사용했잖아? 빛의 신들 중에 그 마법을 사용할 수 있던 놈이 신마전쟁 때 소멸했기에 이젠 나밖에 사용 못 하는 거야. 하지만 한 번 사용할 때마다 창조신에게 얼마나 많이 혼나야 하는지 알아?”
“그럼 마법을 구동시켰을 때 왜 캔슬을 안 시키셨어요? 아버지가 눈감아 주지 않았다면 실행이 불가능한 마법이잖아요.”
“아들 녀석이 애비의 마법을 처음으로 훔쳐 사용하는 데 어느 애비가 그걸 막겠냐? 당연히 눈감아 주는 거지. 너도 그럴 줄 알고 마법을 시전한 거잖아?”
그 말을 들은 엘라드가 심통이 난 얼굴로 말없이 걷자 그의 눈치를 보던 평등의 관조자는 슬쩍 입을 열었다.
“꼭 사용하고 싶냐?”
“…….”
“흐음, 뭐 창조신에게 한두 번 혼난 것도 아니고. 이번에는 아들의 첫 부탁이니 눈감아주마. 하지만 다시는 안 돼. 그리고 나머지 필요한 것들은 네가 알아서 해야 하고.”
“고마워요, 아버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던 엘라드의 아버지는 잠시 머뭇거리는 듯하더니 결국 물어보았다.
“그런데 아직도 너의 어머니와 엘세타가 싫으니?”
하지만 엘라드가 아무 말이 없이 걸어가니 엘라드의 얼굴을 살피던 그도 말없이 나란히 걸었다.
“이제는…….”
“응?”
대답을 기대하지 않았건만, 엘라드가 먼저 말을 꺼내자 그의 눈길이 엘라드의 얼굴로 다시 향했고 엘라드는 두 손가락을 튕긴 후 손을 폈다.
그러자 펼친 손바닥에서 흑마나가 조그마하게 회오리치는 것이 보였다.
“아직 확신할 수 없지만, 이제는 싫어하지 않을 것 같아요.”
“잘 되었구나.”
엘라드와 그의 아버지의 입가에 동시에 미소가 실렸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엘라드가 집에서 오랜만의 휴식을 취한 후 인간 세상으로 돌아가기 위해 밖으로 나오니 문 앞에 상기된 얼굴로 그의 눈치를 살피는 엘세타가 있었다.
엘라드가 한동안 엘세타의 얼굴을 조용히 바라보자 그녀는 바닥으로 눈길을 내리며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그, 그때… 그러니까… 그 인간 여자…….”
“엘세타.”
“미안해요.”
엘라드가 이름을 부르자 엘세타가 몸을 움찔 떨더니 풀이 죽은 얼굴과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사과를 했다. 그러나 엘라드는 고개를 흔든 후 다시 그녀를 불렀다.
“엘세타.”
“예…….”
“난 엘세타의 도움이 필요해요. 도와줄래요?”
엘라드가 다시 부르자 힘없이 그의 얼굴을 보던 엘세타의 눈이 점점 동그랗게 커지더니 얼굴에 웃음을 띠고 힘찬 목소리로 대답한다.
“예!”
“그럼 같이 갈래요?”
엘라드는 손을 내밀며 그의 아버지 앞에서 했듯이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손 위에서 약간의 흑마나가 소용돌이를 친다. 그것을 본 엘세타의 눈에 눈물이 살짝 고였다.
“엘라드, 드디어…….”
“같이 가지 않을래요? 그럼 나중에 볼까요?”
“아니에요! 같이 가요!”
어느새 눈가의 눈물을 훔쳐내고 환한 웃음을 짓고 있는 엘세타는 엘라드가 내민 팔을 꼭 잡으며 그를 따라 영역의 계단을 향해 걸어갔다.
“엘세타.”
“예?”
“이걸 가지고 싶어 했죠?”
“그렇기는 하지만… 백색의 신검은 엘라드가 가장 좋아하는 것이잖아요.”
“나는 이제부터 흑색의 신검을 쓸 거예요. 그래야 흑마나에 빨리 익숙해질 테니까요. 이건 엘세타에게 줄게요. 대신 내가 꼭 필요할 때는 나에게 빌려주세요.”
“언제라도 빌려줄게요!”
빛의 연합군과 어둠의 동맹군의 평화협정을 끝으로 전쟁이 끝나자 무혼은 카세팜 후작과 함께 미라크네 성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러지 말고 우리 모블러시 제국으로 가자니까?”
“후작님, 전 미라크네 왕궁의 9별궁이 더 편합니다.”
“그곳에 가봤자 눈칫밥밖에 더 먹겠나? 제국의 내 영지로 가면 누구도 부럽지 않게 대우함세.”
봄이 찾아오기 시작한 길 위에서 젊은 황토인과 백발의 무인은 투덕거리며 말을 몰아가고 있었다.
“내 영지에 가면 수많은 미녀들과 맛있는 음식, 그리고 자네가 원한다면 황제 폐하께 주청을 올려 높은 직위도 받게 해줄 수 있네.”
“그냥 전 조그마한 수련장만 있어도 만족합니다. 그리고 후작님의 그 제의를 아이네스 공주님이 들었다면 내 몸을 빌려서라도 후작님에게 마법을 날릴지도 모릅니다.”
“허허. 괜찮네. 설마 날 죽이기야 하겠나? 그리고 수련장이라, 내 영지에 큰 산도 몇 개 있으니 수련장이 필요하면 산 하나를 통째로 수련장으로 만들어주지. 다른 것 바라지 않네. 그냥 하루에 한두 시간 나랑 말동무나 해주면 되네. 어떤가? 이 정도면 어딜 가도 절대 밑지는 거래는 아닐걸세.”
무혼은 무인의 순수한 호의로 말하는 것을 알기에 카세팜 후작을 매몰차게 거절하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무혼은 아이네스를 위해 미라크네의 왕궁에서 머물고자 했었다.
뒤에서 따라가며 두 사람이 이야기를 듣고 있던 미라크네의 기사들과 모블러시의 기사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벌써 며칠째 저러고 있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기나긴 길을 오면서 지치지도 않고 무혼을 데리고 가려는 후작이나 그런 후작의 제의를 일일이 응수하며 계속 거절하는 무혼이나 그들이 보기엔 둘 다 괴물이었다.
그렇게 정다운(?) 이야기를 나누며 미라크네의 왕궁에 도착한 무혼과 카세팜 후작이 9별궁에 여장을 풀었을 때 무혼을 찾아온 자가 있었다.
“엘라드, 잘 지냈습니까?”
“예, 무혼 경도 안색이 좋아 보이시네요? 후작님도 안녕하세요?”
“안녕하시오. 난 잘 지냈다오.”
무혼과 같이 지내면서 엘라드라는 존재가 보통의 존재가 아님을 느낀 카세팜 후작은 나름대로 예를 갖추었다.
“무혼 경, 중원으로 돌아가실 마음은 아직 있죠?”
엘라드의 말에 무혼의 눈동자가 커졌다. 사실 반쯤 포기했었기에 엘라드의 말은 더욱 반가울 수밖에 없었다.
“그게 가능한 일입니까?”
“예, 딱 한 번뿐이지만 기회가 생겼어요.”
그 말을 들은 무혼은 천정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잠시 후 고개를 내린 무혼은 엘라드의 손을 잡고 얼굴에 환한 미소를 띠며 입을 열었다.
“부탁드립니다, 엘라드. 아이네스 소저와 상의해서 빠른 시간 내에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허허, 축하하네.”
“감사합니다, 후작님.”
후작은 무혼을 떠나보내기가 아쉬웠지만 무혼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니 한편으로는 기쁜 마음이 들기도 했다.
처음 전장에서 만나서 같이 돌아다니는 동안 무혼의 털털한 성격이 몹시도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이곳의 사람이 아니니 돌아갈 기회가 있을 때 돌아가는 것도 좋은 일인 듯했다.
- 정말이에요, 무혼 경?”
- 예. 딱 한 번의 기회이지만 돌아갈 수 있다고 합니다.”
- 정말 잘 되었어요.”
아이네스는 기뻤다. 요즘에 왜 이렇게 기쁜 일이 연달아 생기는지 불안한 마음이 들 정도였다.
무혼의 활약으로 수십 년간 가이오스트 대륙을 피로 물들인 전쟁도 종료되었고 무혼과 자신이 다시 원래의 세상으로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 그리고 중원의 문제도 무혼이 온다면 여러모로 잘 풀릴 것이다.
- 이제 무혼 경이 돌아와 흑백공존의 길을 찾으시면 되는군요.
- 예, 아이네스 소저. 그동안 도와주시느라 고생하신 점. 정말 감사드립니다.
- 아니에요. 무혼 경은 가이오스트 대륙에 평화를 찾아주셨는데요.
서로 고맙다고 계속 말을 하던 그들의 대화는 결국 무혼의 패배로 끝났다.
- 무혼 경, 대륙의 전쟁을 끝냈으니 내가 더 고마워해야 하는 거예요. 알겠어요?
- 예, 예, 알겠습니다.
아이네스가 투정 반 고집 반으로 목소리를 높이자 무혼이 이기질 못한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토닥거리던 두 사람은 즐겁기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