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남녀 13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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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2,184회 작성일소설 읽기 : 이계남녀 134화
134 시작되는 전투(2)
크아아아!
벌써 이성을 잃은 듯한 하급 마인 하나가 그의 앞을 막았으나 무혼은 그에게 눈길조차 돌리지 않았다.
무혼의 모든 감각을 움켜쥐고 있는 자가 있는 곳, 그곳에서 눈을 떼지 않으며 자신의 길을 막는 하급 마인을 향해 검을 쥔 오른손을 예리하게 휘둘렀다.
파아앗!
검에 응축된 기운이 일으키는 파공성은 검의 주인의 의지를 따라 대기를 반으로 가르고 대지에 일선(一線)을 그렸다.
그 대기와 함께 무혼의 앞을 막아선 하급 마인도 양쪽으로 갈라지며 뒤로 튕겼고 그 위를 무혼이 거침없이 달려갔다.
무혼의 기운을 느낀 하급 마인들은 괴성과 함께 흥분 속에서 날뛰었으나 무혼이 달리며 만들어가는 한 줄기의 선 위는 조용한 파공성과 함께 기묘한 침묵이 흐르고 있었다.
그 침묵을 깨트리며 무혼의 길을 가르는 것이 있다. 투박하게 다듬어진 쇠몽둥이인 듯했지만, 그것에 실려 있는 것은 성벽도 일순간에 무너뜨릴 강렬함이었다.
검은 안개에 파고든 후 무혼은 처음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곳에는 쇠몽둥이가 잘 어울리는 덩치가 있었다.
그리고 그 덩치의 칙칙한 검붉은 눈 속에 담겨 있는 광기는 주위에 있는 하급 마인들과 격을 달리했다.
‘또 다른 중급 마인.’
챙!
오른손에 쥔 검으로 몽둥이를 막으며 이제까지 달려오던 속도를 이용해 몸을 돌리며 왼발로 혈난연환퇴(血亂連環腿)의 수법으로 중급 마인의 머리에 있는 5개의 사혈을 노리며 뻗어 갔다.
그러나 중급 마인은 덩치와 무관하게 빠른 움직임을 무혼에게 보여주었다.
머리가 옆으로 피하며 생긴 빈 공간에 긴 손톱을 가진 두터운 손이 무혼의 발목을 잡으려는 듯 희미한 잔상을 그리며 솟구치고 있었다.
무혼은 혈난연환퇴를 거두어들이고 오른발이 왼발과 교차하며 혈운난풍(血雲亂風)의 초식으로 펼치자 여덟 개의 허상과 한 개의 실상으로 바뀐 발이 동시에 떨어져 내린다.
마인의 눈은 아홉 개의 형태를 보며 형태 중 하나를 노렸으며 마인의 손이 허상 중 하나를 잡은 것을 확인한 무혼이 마인의 움켜쥔 손을 밟고 가벼운 동작으로 제비돌기를 하며 뒤로 뛰어들었다.
그러나 자세를 가다듬을 틈은 없었다. 무혼을 놓쳤다는 것을 깨달은 마인이 비정상적일 정도로 허리를 돌리며 오른손에 쥔 쇠몽둥이로 대기와 땅을 휩쓸어왔기에 무혼도 검에서 맴돌고 있는 검은 안개의 기운을 일부 개방하면서 내력을 밀어 넣고 마인의 몽둥이와 거세게 부딪쳐갔다.
콰아아아아앙!
흉폭한 기세를 분출하던 마인의 쇠몽둥이와 강렬한 기세를 머금은 무혼의 검이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충돌하자 두 사람을 중심으로 커다란 폭음과 함께 내력과 마나를 머금은 공기가 그들 주위의 하급 마인들을 찢어발기며 공중으로 날렸다.
우둑우둑 우두두둑.
충격파에 몸이 갈가리 찢긴 하급 마인의 시체들이 바닥에 떨어질 무렵, 두 사람을 감싸고 있던 흙먼지도 가라앉고 있었다.
서로의 기세에 대한 반발로 뒤로 밀려난 두 사람이 발을 딛고 있는 대지는 무사하였으나 그들 주위 십여 미터의 땅은 사람이 들어가 앉으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푹 파였다.
“크흐흐흐.”
침묵은 눈을 번들거리며 웃음을 터뜨리는 마인에 의해 깨진다. 마인은 왼손으로 입가를 닦으며 다시 쇠몽둥이를 휘둘러본다.
그의 눈은 어느새 동공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검붉은 빛이 강해져 있었다.
‘남아 있는 마인들이 더욱 강한 자들이라고 하더니.’
앞의 두 마인들보다 확실히 더 강했다. 사실 두 번째 마인은 첫 번째 마인보다 오히려 허약했기에 오늘의 싸움에 무혼은 은근히 기대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눈앞의 마인보다 더욱 무혼의 신경을 자극하는 자가 멀지 않은 곳에 있다. 그자는 둘의 싸움을 보며 무혼을 기다리고 있으리라.
‘오래 기다리게 하면 짜증 낼지도.’
마인이 서서히 허리를 굽히며 자세를 낮추기 시작했고 무혼도 그에 호응하여 허리와 무릎의 탄력을 위해 내력을 끌어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검을 다시 고쳐 쥐었을 때 마인의 모습이 사라졌다.
콰콰콰쾅!
무혼의 뒤에서 나타난 쇠몽둥이가 무혼을 가르며 땅에 내려꽂히자 대지는 저항할 힘을 잃고 쇠몽둥이를 기준으로 오 미터가량이 움푹 파일 수밖에 없었다. 그것을 보던 마인은 두리번거렸다.
“더럽게 빠른 녀석이군.”
순간적으로 움직임이 너무 빨랐기에 쇠몽둥이는 무혼의 잔상을 내려쳤음을 쇠몽둥이에 걸리는 느낌으로 즉시 알아차렸다. 그리고 등 뒤로 파고드는 다섯 개의 열기.
황토인의 공격에 열기가 배여 있고 그가 동시에 여러 개의 기운을 뿜어낼 수 있음을 인지하고 있던 마인은 그 자리를 벗어나 쇠몽둥이를 회전시키며 공간을 휘저었다.
퍼퍼퍼퍼펑!
조금 전과 같은 기세를 예상하던 마인은 작은 폭음만이 들리자 재빠르게 눈으로 훑고 지나갔다. 그곳에는 다섯 개의 불탄 자국만이 보일 뿐이었다.
그리고 다시 뒤에서 느껴지는 짜릿한 느낌. 약간의 거리가 느껴졌기에 팔을 길게 늘어뜨리며 몸을 돌린 마인은 검은 안개의 기운과 붉은 기운이 맴도는 검을 겨누며 공중에서 빠르게 쏟아지고 있는 것을 보았다.
“크아! 죽어랏!”
쇠몽둥이를 쥔 마인의 팔은 무혼이 있는 삼십여 미터의 거리만큼 늘어나며 무혼을 짓누르려는 듯 강하게 후려쳤다. 그러나 그의 촉감은 허공을 갈랐다는 것을 말해 준다.
‘공중에서? 어떻게?’
등 뒤에서 그를 밀어붙일 듯한 기세가 새어 나온다. 그곳으로 눈길을 던진 마인은 공간의 틈을 통해 나오는 무혼의 눈빛을 볼 수 있었다.
‘마법 블링크…….’
마인의 늘어난 팔은 마인의 의지에 따라 급속히 줄어들며 공간을 빠져나오는 무혼을 조각내고자 하였으나 무혼과 함께 공간을 빠져나온 백색의 신검에 담긴 기세는 마인의 머리와 등뼈, 그리고 마인의 안에서 소멸의 위협을 느끼며 깨어나기 시작한 중급 마족까지 모두 가르고 지나갔다.
쿠우우우웅!
깨어나는 마족의 기운과 농축된 검은 안개의 기세가 부딪치며 다시 한번 거대한 폭음이 일어나자 삼백여 미터 떨어진 곳에 마련된 의자에서 보고 있던 베트란이 몸을 일으켰다.
“기대해도 되겠군. 크흐흐흐흐.”
무혼과 마인의 싸움으로 주변의 풍경은 엉망으로 변해 있었다. 마인의 뒤를 따르고 있던 동맹군의 기사들과 병사들로 이루어진 대열은 두 사람의 싸움이 일으키는 폭발력에 무너져버렸고 갑옷마저 찌그러트리며 몸을 가르는 충격파에 목숨을 잃은 동료들을 남겨둔 채 뒤로 도망치듯 후퇴했다.
어차피 인간계의 존재라 보기 힘든 자들의 싸움이다. 기사들과 병사들은 싸움의 승패와 상관없이 진격하기 위해 모여 있는 것이다.
만일 무혼이 진다면 마인의 뒤를 쫓아 빛의 연합군을 무너뜨리기 위해 진격을 할 것이고 마인이 진다면 무혼과 연합군에게 최대한 피해를 주고 장렬한 전사를 하기 위해 돌진할 것이다.
그것은 미타모할 성에 모여 있는 연합군도 다르지 않았다. 그들이 이기기를 원하는 자가 동맹군과 다를 뿐, 무혼이 지게 된다면 그들은 이 성에서 모두 뼈를 묻게 될 것이다.
그렇기에 성에 있는 연합군의 병사들에게 직접적인 피해는 아직 없었지만, 뒤에서 들려오는 폭음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가끔 성안까지 밀려드는 흙먼지와 기류는 싸움의 격렬함을 설명해 주었고 저 싸움의 결과에 그들과 그들의 가족이 있는 빛의 왕국들의 운명이 결정되는 것이다.
벌써 세 번째 지휘관이 연설하는 중이었다.
이미 연합군의 기사들과 병사들은 정해진 방식에 맞춰 편안한 자세로 병장기를 옆에 두고 싸움의 결과를 기다리며 경청하는 중이다.
가이오스트 대륙의 남북을 잇는 기나긴 전선의 성들은 모두 조용히 침묵을 지키며 미타모할 성의 결과를 기다리고 있다. 서로가 마인과 황토인이라는 하나의 패밖에 없었기에 패를 잃게 되는 쪽이 무너지게 되리라.
국경의 성에서 경계를 하고 있는 병사들은 가끔 미타모할 성이 있을 방향으로 눈길을 던지며 얼굴에 불안한 빛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대륙의 어느 예언가도 예언하지 못했던 가이오스트의 대륙 전쟁과 많은 왕국들의 운명을 결정할 무혼과 베트란의 격돌이 시작되고자 하고 있다.
두근, 두근.
동맹군들을 둘러보던 무혼의 심장이 흥분을 느끼며 신호를 보내고 있다.
두근, 두근, 두근.
동맹군의 한쪽에 검은 안개가 모여드는 듯 점점 진한 흑색으로 변해 간다. 무혼의 감각이 그곳에 이제까지 기다리던 자가 오고 있다고 알려주었다.
그리고 무혼의 주위를 감싸는 안개가 연해졌기에 다시 채우려는 듯 무혼의 눈길이 닿아 있는 곳에서 안개가 밀려들며 햇빛을 가리기 시작했다.
대열에서 툭 튀어나온 듯한 형상을 보여주며 무혼이 있는 곳까지 감싼 거대한 원의 안개 속을 검은 갑옷을 입고 당당한 걸음으로 걸어오는 자가 보였다.
아무도 거느리지 않고 온몸을 흑색의 갑옷으로 휘감은 그가 걸어올 때마다 무혼은 혈관을 관통하는 흥분과 함께 익숙한 느낌이 그의 기세 안에서 가느다랗게 전해오고 있음을 깨달았다.
분명 그의 감각을 휘어잡고 있는 최후의 마인이 틀림없다. 그런데 그 마인이 가까이 올수록 익숙한 느낌이 점점 커져간다.
‘누구지?’
무혼이 가만히 쳐다보고 있는 사이에 무혼에게서 오십여 미터 떨어진 곳까지 걸어 온 베트란은 두 손을 들어 올려 투구를 벗은 후 옆으로 내던진다.
그 모습을 무혼이 물끄러미 바라보자 베트란은 투구에 눌렸던 머리카락을 손으로 살짝 털고 입을 열었다.
“아. 왠지 투구가 귀찮아서 던진 것이다. 어차피 싸울 거라면 서로 얼굴 보면서 싸우는 게 싸울 맛이 나지 않겠나?”
물론 무혼이 본 이유는 투구 때문이 아니다. 그의 얼굴을 보고 누구인지 기억났기 때문이었다. 강력한 힘을 지닌 어둠의 기사, 그리고 아이네스를 노리던 기사들의 대장.
무혼이 보기에 다른 중급 마인들과 달리 정상적인 의지를 지니고 있는 듯했다. 하지만 그 몸에서 풍겨 나오는 기운은 어떠한 중급 마인에게서도 느껴보지 못한 거대한 것이었다.
무혼이 계속 말없이 바라보자 베트란은 무혼의 몸과 그의 몸을 다시 한번 살펴보았다. 그러고 보니 무혼의 몸에 갑옷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무혼이 갑옷을 입고 다닐 리가 없었다. 지금 그가 입고 있는 것은 활동하기 편한 검은색의 옷 위에 검은색의 질 좋고 두꺼운 가죽으로 만든 덧옷을 하나 입고 있을 뿐이었다.
“갑옷 때문에 그러나? 특별한 능력이 있는 것은 아니니 신경 쓰지 않아도 되네. 약간의 방어 마법이 있긴 하지만 당신의 힘 앞에서는 얇은 옷과 다를 바가 없는 갑옷이다. 그저 내가 갑옷에 너무 익숙해진 터라 입지 않으면 허전해서 걸친 것이지.”
“오랜만이군.”
만난 후 처음 들려오는 무혼의 목소리에 베트란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오랜만? 난 황토인을 본 게 오늘 당신이 처음이다. 그런데 어떻게 오랜만이라는 말이 나오지?”
“전에 만났을 때보다 말이 훨씬 많아졌군.”
그러나 베트란은 눈빛을 가라앉히며 무혼을 주시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을 보니 날 알긴 하나 보군. 마인이 된 뒤 성격이 조금 변했는지 말이 많아지더군. 그런데 우리가 어디서 만났었지?”
“설명하기가 조금 복잡하군. 하지만 확실히 설명해 줄 방법이 있지.”
무혼은 말을 마치며 검을 쥔 오른손을 앞으로 편안히 내밀고 왼손을 뒤로 돌려 서서히 자세를 갖추었다.
“그 방법이 무엇인지 아직 듣지 못했는데?”
베트란도 허리에 찬 롱소드를 뽑고 오른손은 앞쪽으로 편안하게, 비어 있는 왼손은 펼쳐서 가슴 높이로 들어 올리며 서서히 자세를 갖추었다.
“검을 든 자가 상대를 알아보는 방법이 무엇이겠나?”
“아하, 그렇군.”
두 사람은 말없이 서로를 노려본다. 서로의 빈틈을 찾고자 걸을 필요도 없다.
오십여 미터의 거리는 그들에게 있어서 상대를 바로 앞에 맞닥뜨리는 것과 다름이 없었으니 한순간의 틈이 보이는 순간 격돌이 시작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