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남녀 12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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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2,361회 작성일소설 읽기 : 이계남녀 128화
128 망인곡과 미타모할 성(4)
“피해라!”
투돌 장로의 명령이 떨어지자 성벽 위에서 안개를 노려보던 엘프들이 일제히 성벽 뒤로 몸을 숨겼다.
콰콰콰콰쾅!
무혼의 검에 응축된 기운이 안개에 물든 대지에 부딪히자 강력한 폭음과 함께 거센 바람이 성벽을 넘어 몸을 숨기고 있는 자들의 머리 위를 지나 성안으로 몰아쳤다.
먼지가 가라앉자 몸을 일으킨 투돌은 앞에 펼쳐진 광경에 만족한 웃음을 띠었다.
아직 많은 수의 하급 마인들이 남아 있었지만 검은 안개는 이미 성벽 주위에 보이지 않았다. 검게 물든 대지만이 이곳에 검은 안개가 있었음을 나타내었지만 검은 안개는 저 멀리에 있었다.
“전원 공격!”
그의 공격 명령이 떨어지자 성벽 뒤의 병사들과 엘프들은 일제히 몸을 일으키며 활을 당겼고 성문이 열리며 드워프 전사들을 선두로 기사들과 병사들이 몰려나왔다.
그들은 본 하급 마인들은 주위에 검은 안개가 없어졌다는 것을 이미 인지하지 못하는 듯했다. 죽음에 대한 공포와 피 냄새를 맡을 수 있다는 기대감에 번들거리는 눈으로 온갖 괴성을 지르며 그들을 노리고 달려들었다.
쏴아아악!
퍼억!
긴 자루의 도끼가 전광석화와 같이 한 명의 마인을 반으로 가르며 땅에 내리꽂혔다. 그 도끼의 자루를 쥐고 있던 투돌 장로는 입가에 웃음을 띠고 다시 도끼를 들어 올렸다.
“오냐! 한 번 놀아보자. 내 도끼가 네놈들의 피맛을 원하는구나!”
누구보다도 앞에 서서 덤벼드는 하급마족을 제일 먼저 반으로 갈라버린 투돌 장로는 긴 수염을 휘날리며 마족들을 향해 뛰어들었고 그의 뒤를 쫓아 드워프 전사들도 도끼를 휘두르며 일제히 뛰어들었다.
그들의 뒤로 기사들과 병사들이 방패를 앞세우고 마인들을 분산시키기 시작했고 성벽 위에서 날아온 화살이 마인을 고슴도치처럼 만들며 힘을 빼고 마법들이 마인들의 팔을 불태웠다.
서걱!
날카로운 금속이 살을 가르는 소리가 들리자 무혼의 검에 목이 잘린 하급 마인이 몸을 땅에 누였다.
주위를 둘러보니 큰 방패로 몸을 가린 병사들이 마인들을 밀고 있었으며 그 사이로 기사들이 마인의 사지를 가르고 있었다.
일천 대 수만의 싸움은 이미 결말이 보이는 듯했다. 검은 안개 속에서 기사들과 병사들의 공포로 군림하던 마인들은 힘을 채워주던 검은 안개가 없자 쉴 새 없는 공격 속에 기진맥진하는 모습을 보이다 하나씩 쓰러져갔다.
그 모습을 멀리서 보던 베트란은 앉아 있던 의자에서 일어났다. 더 이상 볼 것이 없음을 확신했기에 몸을 돌리는 그의 발걸음에는 조금도 주저함이 없었다.
“저들은 어찌할까요?”
처절한 죽임을 당하고 있는 하급 마인들 쪽으로 잠시 눈길을 보낸 중급 마인이 묻자 베트란은 계속 걸으며 대답했다.
“안개가 부족하지 않은가? 그냥 가도록 하지.”
“알겠습니다.”
싸움이 끝난 후 병사들이 전장을 정리하는 것을 보며 무혼은 성문의 안쪽으로 걸어왔다. 그를 기다리고 있던 카세팜 후작은 무혼의 등을 살짝 두들겨주었다.
“수고했네.”
그의 가식 없는 태도에 무혼은 살짝 웃어주었다.
“저 안개가 다시 성벽까지 다가오기에는 얼마나 걸릴까요?”
카세팜 후작은 그가 이끌던 성이 처음 습격을 받은 이후 연합군의 지휘관 중에서 누구보다도 검은 안개를 가장 잘 알고 있는 지휘관이 되었다.
이제까지의 경험을 살려 곰곰이 생각을 해보던 그는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입을 열었다.
“흠, 글쎄? 한 달이 될 수도 있고, 두 달이 될 수도 있고 적어도 10일 이상 걸리지 않겠나?”
“예…….”
안개 없이 공격을 한다면 많은 기사들과 마법사들을 상대해야 하기에 적들이 검은 안개 없이 공격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유일하게 검은 안개를 다룰 수 있는 무혼을 노리고 중급 마인들이 승부를 걸어올 것이다.
그것을 알고 있는 연합군의 기사들과 병사들은 숨을 돌리며 한동안의 휴식이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언제까지가 될지는 모르지만, 무언의 휴전기를 가진 것이다.
하지만 마냥 쉴 수도 없었다. 합의되지 않은 휴전이었기에 다시 싸울 준비를 해야 했고 그들은 다음의 싸움이 가장 치열하리라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 병사들을 둘러보던 카세팜 후작은 다시 무혼에게 시선을 돌렸다.
“뭔가 할 말이 있는 듯한데?”
“미라크네의 왕궁에 가볼까 합니다.”
카세팜 후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면에서는 가장 큰 손실을 입은 미라크네 왕국이다.
어느 사람의 목숨이 귀중하지 않을까, 라고 말하겠지만 아이네스 공주는 미라크네의 국왕이 애지중지하던 공주였고, 미라크네 왕국의 역사에서도 7클래스를 개척한 아주 특별한 존재다.
그렇기에 그들은 무혼을 만나고 그를 통해서 아이네스를 만날 자격이 있었다.
“그렇게 하게나.”
카세팜 후작은 빠르게 조치를 취해주었다. 미라크네 왕궁에 연락을 보냈고 무혼이 텔레포트를 통해서 빠르게 미라크네 왕궁에 도착할 수 있도록 신경을 써주었다.
물론 검은 안개가 다시 밀려올 것을 대비하여 언제라도 곧장 돌아올 수 있도록 텔레포트 마법진에 마법사를 항상 대기시켜 두었다.
그러한 조치가 끝나고 무혼은 카세팜 후작의 환송을 받으며 미라크네의 기사 다섯 명과 함께 텔레포트를 했다.
몇 번의 텔레포트를 거치자 무혼의 눈앞에 본 적이 있는 풍경이 있다. 아이네스의 눈을 통해 본 미라크네의 왕궁이었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왔구나.’
왕궁을 돌아보던 무혼은 2년 전의 기억을 떠올렸다. 갑작스럽게 몸이 바뀌어 당황하던 그는 기사들을 쓰러뜨리며 왕궁의 담을 넘어 도망을 갔었다. 지금 그가 서 있는 곳이 그때 월담을 하던 곳에서 멀지 않은 곳이다.
아직 아이네스가 그를 찾아오지 않았기에 라에뮤 3세는 무혼의 요청대로 아이네스가 사용하던 9별궁을 사용하도록 허락하여 주었다.
“어서 오세요. 저는 9별궁 동관의 시녀장 앨리입니다.”
9별궁으로 가니 어쩐지 힘이 없어 보이는 아이네스의 시녀장인 앨리가 무혼을 맞이했다. 연락을 받고 아이네스의 많은 물품을 다른 곳으로 옮긴 듯 9별궁의 동관은 무혼의 기억에 있는 모습이 아니었다.
단지 간간이 눈에 익은 그림과 장식이 과거 아이네스가 이용했던 곳이었다는 것을 증명해 주고 있다.
“고맙습니다, 앨리.”
무혼의 식사를 가져다준 앨리는 그의 인사에 작은 미소를 띠고 살짝 고개를 숙이며 답례를 하였지만, 그녀의 눈에서는 눈물이 살짝 비친다.
그것을 일부러 외면한 무혼은 밤이 깊어지자 침대에 몸을 눕혔다. 침대도 아이네스가 사용하던 것이 아닌 나무 냄새가 물씬 풍기는 새 침대였다.
“그대로 두었었다면 아이네스 소저가 더 좋아했을 텐데.”
창밖으로 보이는 별들을 헤아리던 무혼은 눈을 스르르 감았다.
그렇게 사흘이 지난 뒤 오후가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아이네스가 찾아왔다.
- 무혼 경.
- 어서 오십시오, 아이네스 소저.
9별궁의 베란다에서 차를 기다리고 있던 무혼은 아이네스의 소리를 듣자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 요즘은 느긋한가 봐요? 피, 이곳에서는 여인들이 고생하고 있는데~.
- 아, 아하하…….
괜히 심술이 난 아이네스는 좀 더 무혼에게 잔소리를 하려다 무혼을 통해 보이는 풍경이 몹시 눈에 익다는 것을 느꼈다.
- 무혼 경? 지금 어디에 있는 것이죠? 설마?
- 맞습니다. 이곳은 미라크네 왕궁의 9별궁입니다.
아이네스는 잠시 말을 잊었다. 이곳에서 머문 지가 까마득한 옛날과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사실 만년목의 마기를 풀기 위해 엘프의 숲을 다녀온 후 며칠 쉬지도 못하고 바로 전선으로 날아가야 했다.
그렇기에 9별궁에서 마음 편히 쉬어본 것이 오래된 것이다.
- 주위를! 주위를 한 번 돌아봐 주세요.
무혼은 아이네스의 요청에 따라서 몸을 천천히 한 바퀴 돌렸다. 다시 베란다 쪽으로 몸을 돌렸을 때 문을 살짝 두들기는 소리가 들렸다.
“앨리입니다. 무혼 경, 차를 가지고 왔습니다.”
“들어오세요.”
무혼은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아무래도 아이네스가 울고 있는 듯했다.
앨리도 무혼을 통해 아이네스를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간혹 앨리가 무혼의 눈치를 살피는 이유가 아이네스를 만나고 싶기 때문이리라.
“앨리, 전하께 만나 뵙고 싶다고 전해주세요.”
“알겠습니다. 무혼 경, 무슨 용건이라고…….”
으레 하는 질문을 던지던 앨리는 순간 눈치를 챘는지 무혼의 얼굴을 뻔히 쳐다보았다.
“서, 설마?”
무혼은 빙긋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공주님이 오셨나요?”
“아이네스 소저, 이야기하세요.”
무혼의 말이 끝나자마자 여성스러운 어투의 말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앨리, 오랜만이야. 그러고 보니 앨리와 같이 시간을 보낸 것이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기억하기도 힘드네.”
“공주님!”
동그랗게 뜬 앨리의 눈가에 한 방울의 눈물이 떨어지더니 그것을 신호로 끊임없는 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앨리, 미안하지만 우선 아바마마께 연락을 드릴 수 있겠어?”
“네, 네 잠시만 기다리시옵소서.”
앨리가 황급히 문을 열고 나간 뒤 30분이 지났을 때 무혼은 라에뮤 3세의 응접실에 서 있었다.
기본적인 경호 외에는 더 부르지 않은 듯 다섯 명의 경비병만 보이는 그곳에는 라에뮤 3세, 왕비, 제노드 왕자, 이스헤나 공주가 앉아 있었고 무혼의 뒤에는 앨리가 서 있었다.
잠시간의 침묵이 흐르고 라에뮤 3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가 들은 대로라면 아이네스와의 시간이 무한정 있는 것이 아니다. 언제 돌아갈지 모르는데 이렇게 시간을 보낼 수는 없었다.
“황토인 무혼 경, 처음 보오.”
라에뮤 3세의 말에 무혼은 가이오스트의 예법에 따라 허리를 숙이고 왼발을 앞으로 내밀며 오른손으로 대각선으로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인사를 했다.
“스노샤니의 축복을 받는 미라크네의 전하께 무혼이 인사를 올리옵니다.”
“딱딱한 격식은 거두도록 합시다. 공주가 지금 와 있는 것이오?”
무혼이 고개를 끄덕였다. 라에뮤 3세의 눈가에 습기가 차기 시작했을 때 라에뮤 3세의 맞은편에 앉은 무혼의 입술이 파르르 떨리며 작은 음성이 새어 나왔다.
“아바마마…, 어마마마…, 노드 오라버니…, 헤나…….”
한 사람 한 사람, 애칭을 섞어 부른 아이네스도 무혼의 눈을 통해 눈물이 한 방울 떨어지고 있었다.
“잘 지내셨사옵니까?”
“오, 오냐. 공주는 그곳에서 어려운 것은 없느냐?”
“네, 모두가 친절히 잘 대해주고 있사옵니다.”
갑자기 부드러워진 분위기 속에서 아이네스와 그녀의 가족들은 그녀가 돌아갈 때까지 끊임없이 이야기를 나누었고, 그녀가 돌아갔을 때 늙은 왕과 왕비의 얼굴은 눈물로 가득히 젖어 있었다.
“무혼 경, 앞으로도 종종 방문해 주겠소?”
“물론이옵니다. 허락하여 주신다면 자주 찾아뵙겠사옵니다.”
“그대의 방문은 언제라도 허락될 것이오. 그리고 무혼 경…….”
“예. 말씀하시옵소서, 전하.”
“그대가 공주를 많이 지켜주었다는 것을 잘 들었소. 부디 앞으로도 계속 공주를 지켜주기를 바라오.”
“결코, 실망시켜 드리지 않겠사옵니다.”
“후우, 결국 나의 예감이 맞았는가?”
슬픈 듯 응접실의 한쪽으로 보던 라에뮤 3세를 두고 응접실을 나온 무혼은 그의 모습에서 아버지인 공야패의 모습을 계속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 어머니.’
무혼이 아이네스를 다시 찾아간 것은 그로부터 5일이 지나 무혼이 이미 미타모할 성으로 돌아간 지 3일이 지났을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