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남녀 11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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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2,256회 작성일소설 읽기 : 이계남녀 117화
117 산서에서 만난 그들(2)
꽤나 많은 사람들이 이용했을 법한 객잔은 넓은 식당과 많은 객실이 있었다. 그러나 바닥에 남아 있는 피의 흔적들이 이곳에 사람이 있었다는 것을 알려줄 뿐, 먼지가 쌓이고 있었다.
한쪽을 치우고 제갈운혜와 예소소가 앉은 탁자에 아이네스가 함께하고 그 탁자를 중심으로 자리를 잡은 무사들은 세 사람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이곳으로 오기 전, 무림맹의 임시 본부에 있는 시체들을 보고 왔어요. 바로 이곳에서 수습된 시체들이었죠.”
제갈운혜는 잠시 몸서리를 치는 듯하더니 앞에 놓인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들이켰다.
“시체들은 아주 처참한 모습이었어요. 어떤 시체는 실력 없는 무인들에게 난자당한 듯했고 다른 시체는 산 채로 사지를 뜯긴 듯했어요. 게다가, 사람의 이로 생각되는 것에 목을 물어뜯긴 시체도 있었어요. 저의 조사를 마지막으로 그들을 묻어주긴 했지만, 그들은 죽는 순간까지 눈에 공포가 서려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어요.”
제갈운혜의 말에 예소소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이 되물었다.
“이곳 문파의 무사들이 그런 공격을 하는 자들을 상대로 몰살을 당했다고 보기에는 어려운데요.”
“물론 저도 이해가 가지 않지만, 제 말은 사실이에요. 고수의 솜씨에 당한 상처가 아니었어요. 삼류 외공을 수련한 자들의 공격을 받은 듯한 모습이었죠.”
“문파의 무사들도 비슷한 모습이었나요?”
“그래요.”
두 소녀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아이네스는 계속 주위를 둘러보았다. 객잔 안에 흐르는 마나에는 중원에서 처음 만나는 검은 마기가 계속 흐르고 있었다.
그 모습을 계속 보던 아이네스는 잠시 생각을 정리한 후 입을 열었다.
“혹시 검은 안개를 보신 분이 있나요?”
주위를 보니 모두들 그러한 것은 본 적이 없는 듯했다. 그리고 안개 중에서 검은 안개라는 말 자체를 처음 듣는 듯 궁금한 눈빛으로 아이네스를 본다.
“언니, 검은 안개라니요? 그게 뭐죠?”
“응. 내가 있던 곳에서는 검은 기류로 된 안개가 있었어. 중원에 온 후론 본 적이 없었는데 이 마을 주위에는 그 안개의 흔적이 남아 있어.”
이야기를 듣던 제갈운혜는 그녀가 궁금한 것을 물었다.
“검은 안개가 어떤 작용을 하죠?”
아이네스는 가이오스트 대륙의 검은 안개를 천천히 떠올려보았다.
동맹군이 불러내는 것이 분명한 그 안개 속에서는 그녀의 7클래스 마법조차 제대로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하지만 중원에서는 빛의 힘을 막는 효과가 쓸모없다. 애초에 천신과 마신이 존재하지 않으니 그런 제약 자체가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검은 안개를 불러왔다면 이곳에 맞는 제약을 가진 안개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 순간 아이네스의 머릿속에서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바로 내공이었다. 가이오스트 대륙과는 다르게 중원에서 몹시 발달한 내공 운용이 이곳의 힘의 상징이다.
“내가 있던 곳의 검은 안개는 특정한 힘을 봉쇄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었어요. 혹시 이곳의 검은 안개가 내공을 봉쇄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제갈운혜와 예소소는 그 말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무림인에게 내공이 봉쇄당하게 된다면 그야말로 큰일이었고 무기력해지게 되는 일이기도 하다. 오죽하면 무림인들이 두려워하는 것 중에 산공분이 있겠는가?
특히 힘을 가지고 있던 자가 그 힘을 잃거나 사용하지 못하게 된다면 일반인들보다 훨씬 더욱 무력해질 가능성도 있다.
옆에서 그 이야기를 들은 남궁장천이 화급하게 물어왔다. 내공을 봉쇄당한다는 것은 무공을 수련하는 입장에서는 아주 중요한 문제였다.
“그럼 검은 안개를 마시면 내공이 사라집니까?”
남궁장천이 무엇을 당황하고 있는지 이해를 한 아이네스는 고개를 저었다.
“안개 속에 있을 때 힘을 발휘하지 못하였지만, 안개 밖에서는 본래의 힘을 사용할 수 있다고 알고 있어요.”
그 말을 들은 남궁장천은 내력을 잠시 운용해보았다. 한동안 검을 수평으로 쥐고 힘을 가늠해보던 그는 안도의 한숨과 함께 검을 다시 검집에 밀어 넣었다.
“아이네스 소저의 말대로 산공분의 효과가 있는 것은 아닌가 보군요. 내공 운용에 이상이 없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던 제갈운혜는 아이네스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럼 검은 안개가 짙게 깔려 있다면 내공을 운용하지 못한다는 말인가요?”
“그저 가정일 뿐이에요. 검은 안개가 어떠한 제약을 가한다면 그게 내공이 아닐까 하는 거죠.”
제갈운혜와 예소소는 고개를 끄덕였다. 충분히 있을 수 있는 말이다.
평소에는 내력 운용이 뛰어난 일류고수들이 외공의 고수들보다 막강한 힘을 펼치지만 그들의 내력이 봉쇄당하는 안갯속이라면 외공의 고수들에게 밀리게 되는 것은 쉽게 생각할 수 있다. 물론 외공과 내공이 공존하는 만큼 일류고수들도 외공이 약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무공이 내력을 받침으로 하는 무공인 이상 내력을 사용 못 한다면 무공이 원활히 펼쳐지지 못할 것이고 외공을 전문적으로 수련한 고수들을 상대로 힘겨운 싸움을 할 수밖에 없다.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어느덧 해가 지고 있었고 그들이 머물고 있던 객잔은 이미 깨끗하게 치워졌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객잔 안에 있는 작은 정원으로 나온 제갈운혜는 편안한 자세로 별이 가득한 밤하늘을 보았다. 그리고 언제나 처음 찾게 되는 혈랑성을 보았다.
‘혈랑성.’
지금 그녀에게 잊기 힘든 사람을 꼽으라 한다면 무혼이었다. 마음먹은 일에 거침이 없고 정파의 무사들에게 둘러싸였으면서도 결코 그녀를 인질로 할 것을 생각조차 하지 않던 마교의 젊은 무사가 그녀의 머리를 가득히 메우고 있었다.
무혼을 떠올리며 혈랑성을 조용히 바라보던 그녀의 눈이 점점 커지더니 자리에서 황급히 일어났다.
어제 혈랑성이 멀지 않은 곳을 가리키고 있음을 알고 있었고 그 혈랑성이 산서로 다가오는 것을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지켜보았지만 무혼을 위험에 빠지게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만나고픈 마음을 달래고 있던 그녀였다.
그런데 지금 혈랑성은 바로 그녀가 있는 곳을 가리키고 있었다.
“오늘 공야 소협을 보지 못했는데?”
마교의 조사단을 만났을 때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들 한 명 한 명을 주의 깊게 살펴보았지만 무혼은 없었다.
이들과 헤어져 다른 곳으로 갔을 수도 있었기에 내심 실망한 기색을 감추느라 꽤나 노력을 해야 했었다.
그런데 혈랑성이 다른 곳도 아니고 바로 그녀가 있는 마을을 가리키는 것을 알게 되자 그녀는 객잔의 한쪽을 차지하고 있는 마교의 조사단을 향해 슬쩍 눈길을 돌렸다.
‘공야 소협은 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것일까?’
조사단에 없는 것을 보면 주위의 산속에라도 숨어 있을 수도 있다. 그런데 굳이 숨을 이유를 찾아내지 못한 제갈운혜는 예소소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예 소저, 한 가지 물어볼 말이 있어요.”
조용히 차를 마시고 있던 예소소는 제갈운혜가 옆으로 다가와 말을 건네자 그녀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내가 추성자라는 것은 알 거예요.”
끄덕.
“혈랑성이 지금 이곳을 비추고 있어요. 그런데 혈랑성의 주인은 보이지 않네요. 그 이유를 물어봐도 될까요?”
그 말에 예소소는 조금 난처해졌다.
무혼이 중원에 있다면 당연히 듣게 될 질문이었고 같이 협조하기로 한 이상 감출 일이 아니라면 대답해 주는 것이 당연한 것이지만 문제는 혈랑성의 주인이 바뀌었다는 것에 있다.
그것을 설명하고자 한다면 많은 것을 이야기해야만 한다. 무혼이 사라졌을 때 남궁장천을 비롯해 신룡대의 무사들이 있었다고 하지만 자세한 내막은 그들도 모른다.
“공야 소협은 지금 이곳에 없어요.”
그 말에 제갈운혜의 눈매가 살짝 날카로워졌다. 일부러 추성자임을 밝혔는데도 무혼의 행적을 숨기려는 이유를 알 수 없었던 것이다.
“추성자의 능력은 꽤나 정확한 것이에요. 먼 곳에 있다면 모르겠지만 혈랑성은 바로 이 주위를 가리키고 있어요. 공야 소협을 왜 숨기는 거죠?”
예소소는 그녀의 얼굴을 보면서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어느 정도 선까지 이야기를 해줘야 괜찮을지 판단이 서지 않은 까닭이다.
“붉은색의 혈랑성은 분명 공야 소협의 별이 맞아요. 하지만 지금은 흰색의 혈랑성이죠.”
예소소의 말에 제갈운혜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은 전부터 궁금히 여기고 있던 점이었다.
“흰색의 혈랑성은 아이네스 소저와 함께 다니고 있어요.”
“예?”
“지금으로서는 그 말밖에 해드릴 수가 없어요. 이해해 주시기 바래요.”
제갈운혜는 멍한 눈빛으로 예소소의 맞은편에 앉아 있던 아이네스를 보았다. 그녀의 눈길을 받은 아이네스는 어색한 미소를 띠었고 그 모습을 옆에서 보던 남궁장천은 이해가 간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공야 소협이 아직 돌아오지 못한 것입니까?”
남궁장천은 망인곡에 있었기에 쉽게 이해를 할 수 있었다. 망인곡에 있었던 일을 보고하기는 했지만 문종후와 추청령의 문제가 크게 부각이 되었기에 다른 사실들은 흐지부지되었었다.
“제갈 소저, 잠시 이쪽으로 자리를…….”
남궁장천을 따라 제갈운혜가 자리를 옮기자 예소소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사실 그녀도 무혼과 아이네스가 바뀌면서 계속 혼란을 겪고 있었다. 흰색의 혈랑성으로 바뀌면서부터 천기의 해석을 모두 새로이 해야 했다.
원래 간단한 사주풀이를 할 때만 해도 모든 것에서 영향을 받는다. 태어난 날과 시간 그리고 남과 여의 차이와 그들의 역할 차이에도 달라지는 것이다.
특히 아이네스가 무혼처럼 직접 검을 들고 상대와 겨루는 것이 아닌 이상 그만큼 해석이 달라져야만 했다.
남궁장천의 설명을 들은 제갈운혜는 계속 멍한 눈빛으로 혈랑성을 보았다.
무혼과 같이 여행을 할 때 보던 붉은빛의 혈랑성이 아닌 흰빛의 혈랑성이었지만 그녀의 생각을 뒤흔든 무혼의 모습은 혈랑성 앞에서 웃고 있는 듯했다.
“공야 소협…….”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을 정도의 작은 목소리로 그를 불러보았다.
다른 사람도 아닌 그녀의 친오빠인 제갈두휘의 계략에 말려 다른 세상으로 가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자 한숨밖에 나오지 않은 것이다.
제갈두휘가 무혼의 위치를 물으러 온 날, 매몰차게 그의 요구를 거절하지 못한 그녀 자신에게도 화가 났다.
만일 그녀가 무혼의 행로만 알려주지 않았더라도 무혼이 사라지지도 않았을 것이고 제갈두휘도 어디론가 잠적하지 않았을 것이다.
마음 같아서는 제갈두휘를 만나 많은 것을 물어보고 싶은 그녀였으나 그가 진법을 사용하는지 두휘의 별을 보아도 위치를 알 수가 없었다.
그렇게 하염없이 하늘을 보고 있는 제갈운혜 옆으로 다가오는 사람들이 있었다.
“예 소저? 아이네스 소저?”
두 사람은 운혜를 보고 살짝 웃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와 나란히 앉아 혈랑성 쪽으로 눈길을 돌린다.
“공야 소협과 한동안 같이 여행을 하셨다면서요?”
예소소의 물음에 제갈운혜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옆에서 본 소협의 모습은 어떠했나요?”
제갈운혜는 혈랑성에서 눈길을 떼지 않고서 입을 열었다.
“저에게 놀라운 것을 많이 보여주었죠. 말이 아닌 행동으로요. 흑도의 길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그리고 내가 무엇을 잘못 생각하고 있었는지 그것을 느낄 수 있었죠.”
“공야 소협은 이상한 사람이에요. 사실 그는 좀 독특하죠. 어찌 보면 백도도 흑도도 아닌 자신만의 길을 걷는 사람이에요.”
“그런가요?”
그날 밤 세 여인의 말소리는 밤이 깊어가는지도 모르고 계속되었다.
다음날 합동 조사단은 서로 정보를 나누면서 흔적을 추적해 갔다. 우선 예소소의 의견대로 그곳에서 제갈운혜가 끌려가던 쪽으로 방향을 잡고 흔적을 조사해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