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남녀 9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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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2,043회 작성일소설 읽기 : 이계남녀 97화
097 새로운 위험(1)
며칠 뒤 미라크네의 지원기사단은 보무도 당당하게 엘프의 숲을 나서고 있었다.
피해는 있었지만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가벼운 피해였기에 각국의 기사단들도 조금은 밝은 얼굴로 각자의 나라로 돌아가고 있었다.
미라크네의 기사단은 아이네스가 선두에 서고 그 주위에 호위를 맡은 기사들이 포진을 하였다.
그리고 그들의 뒤로 길게 행군의 진형을 취하고 엘프의 숲을 출발한 지 10여 일 뒤 미라크네 왕국으로 돌아왔다.
미라쉘든에 가까워질수록 아이네스가 이끄는 지원기사단을 보며 환호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기사단이 미라쉘든의 정문을 통과하자 이미 길의 양쪽을 빼곡히 채운 미라쉘든의 사람들이 두 손을 흔들며 그들에게 환호성을 지르고 있었다.
“붉은 기류의 성녀님 만세! 아이네스 공주님 만세!”
아이네스의 붉은 기류가 사악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미라크네에 없었다.
만년목을 위협하던 많은 사악한 마물들을 빙계 최고의 마법으로 쓸어버리고 거대한 악의 기운을 정화한 성녀로서 모두들 우러러보고 있었다.
미라쉘든의 가운데에 있는 왕궁의 높은 곳에 마련된 테라스에는 많은 왕족들이 아이네스가 귀환하는 것을 보고 있었다.
“장하구나!”
라에뮤 3세는 지원기사단의 선두에 있는 아이네스를 보고 눈물을 글썽였다.
그도 젊은 날 왕자의 신분으로 많은 전쟁에 참가했었다. 그리고 아이네스처럼 환호를 받았지만, 지금의 아이네스가 받는 환호에 비하면 초라하다 할 수 있었다.
아이네스의 모습에서 눈을 뗄 줄 모르던 라에뮤 3세는 곧 얼굴이 시무룩해졌다.
“대왕마마.”
옆에서 왕비가 불렀지만 라에뮤 3세의 얼굴은 펴지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슬쩍 옆에 같이 서 있는 한 사람을 노려보았다.
라에뮤 3세가 노려보고 있는 자는 빛의 추종자에서 파견 나온 파노밀 백작이었다.
그의 얼굴은 미안함이 가득했고 라에뮤 3세의 눈길을 받자 눈을 내리며 시선을 피했다.
다시 아이네스에게 눈길을 돌린 라에뮤 3세는 비통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게 말이 되오? 저 아이는 전사가 아니오. 이 왕궁에서 곱게 자란 여인이란 말이오.”
“송구하옵니다.”
“엘프의 숲도 모자라 전선에서 저 아이를 보내 달라니. 이건 남자도 못 할 짓이 아니오?”
“…….”
이미 아이네스 공주가 어떤 일들을 해왔는지 알고 있는 파노밀 백작은 그저 침묵을 지킬 뿐이었다.
라에뮤 3세도 안다. 파노밀 백작은 빛의 추종자들에게서 결정된 것을 수행하기 위해 온 것일 뿐이며 그 결정을 바꿀 만한 힘이 없다는 것을.
그러나 속에서 일어나는 울분을 이렇게라도 풀지 않으면 미쳐버릴 것 같았다.
“7클래스의 마법사가 필요할 정도로 전선의 상황이 좋지 않소?”
“그렇습니다. 아이네스 공주님이 이미 두 번의 7클래스의 마법을 구사하셨다는 것이 널리 퍼진 상태라……. 그리고 어둠의 안개는 6클래스의 마법이 전혀 통하지 않습니다. 이대로라면 방어선이 무너져 모든 왕국이 전화에 휩싸이는 것은 시간문제가 될 뿐입니다.”
“흐음.”
침음성을 내었다. 빛의 어떠한 마법도 통하지 않는 검은 안개가 어느새 전선을 좀먹고 있는 것이다.
이미 최전방의 전선이 무너졌다는 보고는 받았다.
최전방에 있는 성 중에 무너지지 않은 유일한 성은 오직 모레스 성뿐이었다.
특히 아이네스 공주가 펼쳐둔 그 진법이 어둠의 안개에 저항하여 시간을 끌어주었기에 적들이 공격하는데 애로점이 많았던 것이다.
하지만 홀로 최전선에 남게 되면 포위를 당해 몰살당할 가능성이 있기에 전략상 성을 포기해야만 했다.
어제 모레스 성의 병력이 철수하여 네스템 성으로 후퇴하기 시작했다는 보고를 받았다.
며칠 내로 모레스 성의 병력은 네스템 성에 합류하여 적들이 빛의 연합국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을 것이다.
“드디어 돌아왔어!”
기분 좋은 듯 잠시 눈을 감았던 아이네스는 한눈에 들어온 왕궁을 보며 감회에 잠겼다.
언제 보아도 그녀의 마음을 포근하게 감싸주는 듯한 미라크네의 왕궁이었다. 자신의 방에서 푹 쉬고 싶은 것이 지금 그녀의 마음이었다.
“아바마마! 어마마마!”
“어서 오너라, 공주야!”
아이네스가 왕궁에 들어서서 말에서 내리자 라에뮤 3세는 체통도 잊은 채 아이네스를 향해 두 팔을 벌리며 뛰어오고 있었다. 그러나 그를 제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이네스가 다시 전선으로 출발해야 하는 것을 이미 알기에 눈가에 글썽이는 눈물을 감추기 위해 고개를 숙이고 있는 노신들이 대부분이었다.
아이네스를 호위할 기사단은 이미 지코네아 성으로 출발했고 그녀는 며칠을 쉰 뒤 텔레포트 마법진으로 빠르게 이동해 갈 것이다.
“오랜 여행으로 몸이 깨끗하지 못하옵니다.”
“그게 무슨 상관이냐. 넌 어떠한 모습이라도 나의 사랑스러운 딸이니라.”
눈가에 비치는 눈물을 보며 아이네스는 그녀의 아버지인 라에뮤 3세의 품에 꼬옥 안겼다.
“먼 길에 피곤할 터인데 가서 푹 쉬도록 하여라.”
“감사하옵니다.”
별궁으로 돌아온 아이네스는 그녀의 전용 목욕탕에 몸을 담근 채 노곤한 몸을 풀었다. 목욕을 마치고 나오니 그녀를 위한 식사가 준비되어 있었고 아이네스는 오랜만에 앨리와 수다를 떨며 식사를 했다.
“아이네스 공주님, 엘라드 경이 왔사옵니다.
“들어오시라고 하라.”
아이네스가 차를 음미하며 창밖을 보고 있을 때 문밖에서 시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이네스의 응접실로 들어온 엘라드는 앨리가 만들어 주는 차를 들고서 아이네스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엘라드? 왜 그렇게 보죠?”
엘라드의 모습을 의아하게 생각하던 아이네스는 저런 엘라드의 모습을 언제인가 본 적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냈다.
‘언제였지?’
차를 마시며 엘라드의 모습을 떠올려보던 아이네스는 그 모습이 어디서 본 것인지 기억이 났다.
바로 엘프의 숲으로 떠날 것을 말하러 왔을 때였다.
“엘라드 솔직히 말해 주세요.”
“저는 항상 솔직해요, 아이네스 공주님.”
“내가 또 어디로 가야 하나요?”
정곡을 찔린 듯 엘라드의 얼굴이 어두워지며 멈추어 있더니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무슨 일이죠?”
“조금 전에 알게 되었는데요. 빛의 추종자에게서 공주님의 아버지이신 라에뮤 3세께 협조를 요청한 모양입니다.”
“빛의 추종자에서요?”
빛의 왕국의 국왕들이 모이는 최고 회의 기구인 빛의 추종자에 협조라는 말을 했다고 해도 거절할 수 있는 왕은 없다.
그것은 대제국의 황제라 해도 그 회의에서 결정된 것을 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말을 온화하게 했을 뿐 명령과 다름없는 통보였던 것이다.
“어떤 연락을 한 것이죠?”
“지금 빛과 어둠의 전선에서 이미 빛의 최전선이 무너졌다고 합니다. 지금 빛의 연합군 측에는 두 번째 전선을 이루는 성들만이 남은 셈입니다.”
그 말에 아이네스는 눈을 크게 떴다. 그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목숨을 걸고 만년목의 검은 기운을 없앤 것이 아닌가?
“어떻게 된 것이죠? 만년목의 검은 기운을 없애면…….”
“무슨 방법을 사용했는지는 몰라도 동맹군의 도시를 감싸고 있던 검은 안개가 급속도로 퍼져나가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검은 안개에 어떠한 빛의 마법도 통하지 않는 모양입니다.”
잠시 목을 축이듯 차를 마시던 엘라드는 마지막 통보를 하듯 이야기를 꺼냈다.
“이제 연합군에서 남은 것은 7클래스의 마법뿐이라고 생각하는 것이겠죠.”
아이네스는 엘라드의 얼굴을 보았다. 하지만 그의 얼굴은 그저 고요할 뿐 다른 것은 알 수 없었다.
“그렇다면 지금 아바마마께서는……?”
“또다시 시달리고 계신 거죠.”
아이네스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생각을 하였다.
어차피 전선이 무너진다면 미라크네 왕국까지 동맹군이 밀려드는 것은 오래 걸리지 않는다.
전선과 미라크네 왕국의 사이에는 겨우 2개의 왕국만이 있을 뿐이다.
지금 전선에서 막지 못한다면 연합군이 다른 방어선을 구축할 때쯤에는 미라크네의 모든 것이 불길 속에 잠기게 된다.
옆에서 이야기를 들은 앨리가 불안한 눈으로 보고 있을 때 아이네스는 찻잔을 다 비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엘라드 이번에도 도와주실 건가요?”
“물론입니다. 최선을 다해 아이네스 공주님을 보호해드리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아이네스는 그대로 9별궁을 나갔다. 그리고 라에뮤 3세의 집무실로 발걸음을 향했다.
이틀이 지난 뒤 아이네스는 그녀의 백마와 그리고 자원을 한 10명의 기사들과 함께 마법진 위에 올랐다.
“공주야, 몸조심해야 한다. 위험한 곳에는 가지 말아야 하고.”
얼굴을 실룩거리며 힘들게 입을 여는 라에뮤 3세를 보며 아이네스는 언제나 그랬듯이 맑게 웃어주었다.
라에뮤 3세는 그녀의 맑은 웃음을 옛날부터 매우 좋아해 주었다.
“걱정 마시옵소서. 저는 언제나처럼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오겠사옵니다.”
마법진의 주위를 둘러싼 사람들에게 인사를 한 아이네스는 마지막으로 마법진 옆에서 대기 중인 스토레무 경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준비되었습니다.”
“텔레포트!”
7명의 마법사를 지휘하고 있던 스토레무 경은 굳은 얼굴로 아이네스를 보며 시동어를 외웠다.
그리고 아이네스가 빛에 휩싸이자 스토레무 경은 참지 못한 듯 외쳤다.
“공주님, 이 늙은이를 위해서라도 무사히 그리고 건강히 돌아오십시오.”
아이네스는 스토레무 경에게 웃음을 보이고 고개를 숙이며 사라졌다.
그녀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라에뮤 3세는 다시 걸음을 옮기더니 가장 가까운 곳에 심겨 있는 나무 앞에 섰다. 그리고서 다시 나무에 발길질을 하며 소리를 질렀다.
“빌어먹을! 도대체 왜 아이네스를 괴롭히는 거야! 차라리 나를 데리고 가서 써먹으라니까!”
한동안 정신없이 발길질을 하는 왕을 말릴 엄두를 내지 못하다가 그가 조금 지친 듯하자 노신들이 왕에게 다가가 진정을 시키고자 했다.
“전하! 아이네스 공주님께옵서는 이때까지와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틀림없이 무사히 돌아오실 것이옵니다. 그러하오니…….”
“그랬으면 좋겠소. 하나 이번에는 몹시 기분이 좋지 않소. 다른 때보다 더욱 강하게…….”
입밖에는 내지 못했지만 라에뮤 3세의 가슴은 불안하게 뛰고 있었다.
이번에 보는 아이네스의 모습이 영영 마지막이 될 듯한 예감이 계속 그를 잡고 있었던 것이다.
“부디 무사히 돌아오너라. 공주야, 이번에 돌아오면 하늘이 무너져도 다시는 보내지 않으마.”
한때 전사로서 전쟁터에서도 맹활약을 했던 왕의 눈가에 어렴풋이 눈물이 고이는 것을 왕비는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녀도 눈길을 돌려 아이네스가 사라진 마법진을 보며 속으로 눈물을 삼켰다.
‘공주야, 무사히 돌아오너라.’
그 느낌이 아이네스에게도 전해진 것일까? 중간 경유지에 도착한 아이네스도 미라크네 왕국이 있는 방향으로 돌아보았다.
“왜 그러시옵니까?”
공주의 옆에 있던 폴레노가 입을 열었고 엘라드도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보자 아이네스는 싱긋 웃고서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은 후 앞을 보았다.
그러나 그녀의 속마음은 다시는 왕궁과 미라쉘든을 볼 수 없을 것 같다는 예감에 잡혔다.
‘설마, 아닐 거야. 무혼 경이 나를 굳게 지켜줄 테니까 걱정할 필요 없어. 힘을 내 아이네스!’
스스로에게 다짐을 하는 그녀는 전선이 있을 먼 하늘을 보았다. 그녀가 바라보는 하늘은 아직은 한낮이었지만 비가 내릴 듯이 어두워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