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남녀 9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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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2,364회 작성일소설 읽기 : 이계남녀 94화
094 또 다른 세상(3)
무혼이 사라진 날 밤, 감숙의 끝자락에 위치한 서길(西吉)의 초라한 집에 모인 사람들이 있었다.
“드디어 문이 열렸소이다.”
상석에 앉은 자가 기쁜 눈빛으로 주위를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그의 말에 모두들 밤하늘을 보았다. 그곳에는 그들의 기대에 호응하듯 불길한 빛을 내는 별을 반짝이고 있었다.
“드디어 우리 라마혈교가 이 세상에 이름을 떨칠 때가 온 것 같소이다.”
가이오스트 대륙의 로브와 흡사한 모양의 검은 옷을 입고 있는 그들은 중원의 언어가 아닌 서장에서 사용하는 언어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제갈가의 꼬맹이를 납치하는 데 실패하였지만, 어차피 문을 열기 위해서 납치하고자 했던 것이니 문이 열린 이상 그 꼬맹이는 필요가 없게 되었소이다.”
“그럼 다음 단계로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상석에 앉은 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우리가 기다려온 힘의 원천이 이제 열렸으니 대대로 내려온 의식을 갖춰야 할 때가 되었소.”
그곳에 모인 자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중원을 제압하기 위해 수백 년간 기다리며 준비해온 것이 이제야 결말을 보게 된 것이다.
“우리들의 앞길을 알려주는 저 별이 언제 명령을 내릴지 모르니 모든 준비를 다 갖춰야 할 것이오. 그래 지금 중원에서는 정사대전이 일어났소이까?”
“아직 일어나진 않았습니다. 그러나 길지 않은 시간에 흑도와 백도의 무리가 대대적으로 충돌할 듯하니 그때를 노리면 될 듯합니다.”
“흐음. 고수들의 피가 많이 필요하오. 그렇다고 함부로 납치를 시도하면 눈치를 챌 것이나 정사대전 중이라면 이름 있는 무림인들이 사라진다 해도 눈치챌 수 없을 것이오. 잡아 올 자들을 미리 선별해 놓기를 바라오.”
“알겠습니다.”
타원형의 탁자의 상석에 앉아 있는 검은 옷의 사람은 다시 하늘을 보며 중얼거렸다.
“문을 열기 위해 준비한 지 100년이 넘었소. 그리고 그 문이 열리는 때만을 기다려왔는데 이제 내 대가 되어서 열렸으니 이는 하늘이 우리를 위하고 있는 것이오. 우리는 이때를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오.”
그의 눈만큼이나 그 주위의 기운은 음산하게 움직였고 그들이 떠난 자리에는 불안한 적막이 감돌고 있었다.
허억 허억.
무혼이 명계에 온 지 석 달이 되었다. 지금 그는 입가에 연기를 띄우는 명계의 야수를 보고 있었다.
소처럼 생겼으나 초가집만 한 크기에 눈이 6개가 있었고 코에서는 불길이 한 번씩 뿜어져 나왔으며 연기 입가의 침이 흘러 바닥에 부딪히자 보글보글 끓으며 바위에 파고들었다.
소의 침에 맞으면 명계의 존재라 하더라도 몸이 녹아든다고 들었다.
무혼은 명계의 소를 조심하며 혈랑검을 휘둘러 위협하자 소는 이를 가는 소리를 내며 전신에 검은 기류를 피워 올렸고 곧 무혼에게 날듯이 달려왔다.
“하앗!”
무혼은 기합성과 함께 소와 같은 검은 기류를 뿜어내며 화려한 동작으로 혈랑벽력을 시전하며 소의 등을 노렸다.
그곳에는 소의 약점이 있었고 무혼이 약점을 노리는 것을 눈치챈 소는 몸을 비틀며 무혼의 검을 피해 옆으로 몸을 날렸다.
퍼억!
갑자기 소의 한쪽이 터져나가며 검은 피가 흩날리자 소는 떨리는 다리를 지탱하지 못하고 바닥에 뒹굴었다.
집채만 한 소가 옆으로 쓰러지자 소의 덩치에 가려서 보이지 않던 뒤쪽에 천마와 초 노인 그리고 공야 노인의 모습이 보였다.
“이놈아! 아직 네가 이 녀석을 잡기에는 이르다. 명계에는 맹수 아닌 존재가 없으니 사냥은 언제나 적당한 수준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을 잊었느냐?”
“잊지 않았습니다. 우연히 만나게 된 것입니다.”
초 노인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바닥에 쓰러져 다시 일어나고자 안간힘을 쓰고 있는 소를 가리켰다.
“이제 명혼흡정술(冥魂吸精術)을 펼쳐보아라.”
“제가 어찌 그 소로…….”
초 노인의 말을 들은 무혼은 주위의 노인들을 다시 한번 돌아보았다.
그러나 다른 노인들도 웃으며 초 노인의 말에 따르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있다.
“그럼 말학인 공야무혼이 명혼흡정술을 시작하겠습니다.”
노인들은 소에게서 3장의 거리로 물러났고 무혼만이 쓰러져 아등바등 하고 있는 소의 등으로 다가갔다.
“움 오루 카테 오시라 훔…….”
무혼의 주문과 춤이 이루어지며 무혼의 온몸이 검붉고 은은한 빛으로 둘러싸였고 무혼의 손이 소의 등판에 닿자 그곳을 중심으로 주위에서 몰려드는 기운과 소에서 흘러나오는 검은 기운이 회오리를 쳤다.
그리고 소의 온몸에서 검은 기운이 계속 흘러나오며 무혼의 전신으로 감싸 돌았고 공기 중에 있던 검은 기류가 소의 검은 기운과 어우러지며 무혼의 몸으로 파고들었다.
그 모습을 계속 지켜보던 초 노인이 작게 고개를 흔들더니 무혼이 기의 흡수를 끝내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옆으로 다가왔다.
“이 녀석아,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래도?”
초 노인은 무혼이 흡수를 시도했던 소의 옆으로 가더니 무혼을 똑바로 보았다.
“잘 봐라. 이것이 명혼흡정술이란다.”
복잡한 수인을 맺으며 명계의 소와 대기에서 검은 기운을 흡수하는 초 노인을 보며 무혼은 조금 전에 보여준 초 노인의 모습을 다시 되새겼다.
초 노인이 소에게서 기를 흡수해가는 양은 무혼에 비해서 훨씬 많았으며 정밀하고 깔끔했다.
소의 전신에서 검은 줄기가 줄기줄기 뽑혀 나오며 초 노인의 몸으로 거센 물결처럼 흘러가는 것이 보였다.
‘대단하군.’
무혼이 마을에 와서 제일 처음 배운 것이 바로 명혼흡정술이다.
무혼이 읽어보기만 했던 흡정대법을 명계에 맞게 고친 것으로 마을의 노인들이 명혼흡정술을 사용하는 이유는 단 하나다.
바로 명계에는 그들이 먹을 수 있는 음식이라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명계의 염라궁을 거치지 않은 자들이기에 지옥의 외곽에서 명계의 맹수와 아귀들을 상대로 싸우며 그들의 힘을 흡수해야 살아갈 수 있기에 만들어낸 무공이었다.
좋은 점도 있었다. 강력하고 많은 맹수들의 기를 흡수할수록 그들의 능력도 점점 강해지고 있었던 것이다.
내력과 어우러지는 검은 기운은 명계 전역에 퍼져 있는 기운이다. 하지만 대기로부터 흡수하는 것은 그저 유지를 할 수 있을 뿐이었고 맹수와 아귀들에게서 기운을 뽑아내어 같이 흡수해야만 더욱 강력한 힘이 되어 준다.
“하지만 혼아야, 우가의 손자보다 네가 훨씬 잘 흡수를 하고 있구나.”
초 노인의 말대로 이곳에 온 지 1년이 넘어가는 도제보다 무혼이 흡수하는 능력이 앞지르고 있었다.
도제가 갑자기 강한 능력을 지니게 된 것도 이 방법으로 능력을 늘려갔기 때문인데 지금 무혼의 흡수 능력으로는 곧 도제의 능력을 뛰어넘을 것이다.
“자네, 자손을 참 잘 두었군.”
“허허, 감사합니다.”
공야세가의 사조인 공야제현은 자랑스러운 얼굴로 무혼을 보았다.
무공만으로는 살아 있을 적의 공야 노인이 이뤄냈던 경지를 뛰어넘은 무혼을 보며 그는 새삼 감회가 어렸던 것이다.
그의 모습을 보면서 천마도 흐뭇해했다. 그도 무혼의 나이 때에 저만한 성취를 이루지 못했었다. 그런데 무혼은 지금도 끝없이 발전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검을 좀 보아줘도 되겠군.”
천마가 중얼거리듯 이야기하자 옆에 같이 있던 공야 노인과 초 노인은 놀란 듯 천마의 얼굴을 보았다.
살아 있을 때도 말년에 그 누구도 가르치지 않았던 천마였다.
200년의 인생을 살아오면서 마지막 60여 년, 그리고 명계에 와서 이제까지 아무도 가르치고자 하지 않았던 천마가 무혼을 보며 가르칠 마음을 가졌다는 것은 그만큼 무혼이 마음에 들었다고 보아도 될 것이다.
마을로 돌아오는 무혼을 본 도제 우수안은 속이 뒤틀렸다. 무혼의 검에 목이 꿰뚫린 느낌은 아직도 그대로인데 그 애송이가 살아서 명계에 왔다.
일정한 경지를 넘은 자들이 모인 이 마을에서는 도제라 불렸던 그조차도 마을의 누구도 이기지 못하고 있는 신세가 되었지만, 그 성질은 여전하여 원수인 무혼을 보자 머리끝까지 치솟아 오르는 노기에 미쳐버릴 지경인 것이다.
하지만 그를 점점 불안하게 만드는 것은 도제보다 무혼이 빠른 속도로 명계의 생활에 적응해 간다는 점이다.
자신의 몇 배로 마계의 맹수들의 기를 흡수해가는 통에 점점 도제의 능력을 거의 따라잡고 있는 무혼을 보고 있자면 이대로 영영 그에 대한 복수를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럴 수는 없다.’
하지만 무혼의 옆에 항상 세 노인이 같이 다니는 데다가 이 마을은 흑도와 백도의 인물들이 모여서 사이좋게 지내고 있기에 무혼에게 복수를 꾀할 방법이 없는 것이다.
‘어찌 협의 길을 걷는 분들이 저런 흉악한 흑도의 놈들과 이리도 편안히 공존할 수 있을까?’
처음 이 마을을 왔을 때는 흑도의 고수라는 말에 내력을 줄기줄기 뽑으며 덤벼들었었지만 돌아온 것은 무지막지한 응징뿐이었다.
게다가 더욱 미칠 지경이 되어 가는 것은 그와 뜻을 같이해주리라 생각했던 정파의 선배 고수들이 오히려 도제를 보고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모자란 놈으로 취급하는 점이다.
‘특히 할아버님께서 툭하면 손찌검이시니…….’
오늘도 세 노인과 함께 사냥에서 돌아오는 무혼을 보며 속으로 울분만 참고 있는 도제였다.
무혼은 마을을 들어서자마자 느껴지는 시선이 이젠 익숙하여 눈길도 돌리지 않았다. 보나마나 도제일 것이다.
더구나 오늘은 그에게 신경을 쓸 여유도 없었다.
흑도 고금 최고의 고수인 천마가 자신의 무공을 봐주기로 했다는 점에서 그 하나만으로도 이제부터 해야 할 일이 얼마나 많을지, 또 그 시간들이 얼마나 소중한 시간이 될지 몰랐다.
특히 이곳의 무공은 자신의 내력과 명계의 기운을 합치고 명계의 기운을 폭발적으로 사용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었다.
수백 년 동안 무림의 최고수들이 모여 만든 명계의 무공은 펼치는 곳이 명계가 아니라면 사용할 수 없다고 하지만 무공에 담겨 있는 정수는 무혼으로 하여금 새로운 무공의 경지에 발을 들여놓을 수 있게 해줄 것이다.
‘그나저나 세상에서는 이미 정사대전이 일어나지 않았을까?’
초 노인에게 그 가능성을 물었을 때 초 노인은 고개를 저었다. 서장혈전과 정사대전 때 죽은 무인 중 이곳에 온 무인들이 있다는 것이다.
만일 무림에서 두 번째 정사대전이 일어났다면 그 와중에 죽은 절정의 고수가 한 명쯤은 올 터이니 충분히 알 수 있다는 말이다.
“게다가 말이다. 이곳과 인간계는 시간의 흐름이 다르단다.”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흐음.”
초 노인은 자세히 설명을 해주었다.
우선 명계에서의 시간이 훨씬 길다고 했다.
명계에서 1년이 인간계에서의 며칠밖에 안 된다는 것이다. 물론 항상 그런 것은 아니고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대략적으로 그 정도의 시간으로 흐른다고 했다.
“그렇다면 제가 여기서 1~2년이 흐른 뒤에 돌아간다 해도 인간계는 며칠밖에 안 지났다는 말입니까?”
“그렇지. 저승사자가 죽는 자보다 훨씬 적은데도 무리 없이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이유도 바로 그러한 시간 차이 때문이지.”
그 말에 무혼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초 노인의 말대로라면 이제 인간계로만 돌아갈 수 있다면 그다지 큰 문제는 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그때까지 이곳에서 잘 버텨야 한다는 점도 문제였다.
그리고 너무 시간이 흐르게 된다면 무혼은 명계의 존재가 되어 인간계로 돌아갈 수가 없게 된다고 했다.
이 마을에서는 살아서 온 자가 무혼이 처음이지만 들리는 풍문으로는 다른 마을에 살아 있는 사람이 온 곳도 있다고 했다.
“나도 그 말을 들었지.”
천마는 해가 지고 있는 서쪽을 가리키며 설명을 하였다.
“이쪽으로 멀리 가면 천축(=인도)에서 죽은 자들이 모이는 마을이 있다고 한다. 서쪽으로 멀리 사냥을 나갔을 때 천축인의 마을에서 온 자들을 몇 명을 만났는데 그들이 내게 말을 해주더구나. 천축에서 수행을 하다 명계에 넘어온 자들이 있고 능력과 신체에 따라 다르지만,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나면 명계의 존재가 되나 보더군.”
“그들은 어찌하여 살아서 이곳으로 오게 된 것입니까?”
“그들의 고행의 한 방식인 모양이더구나. 더군다나 염라궁에서 부르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일반적인 윤회를 벗어난 존재가 된 것이고 살아 있는 몸으로 이곳으로 와서 수행을 계속한다면 오랜 시간을 살아갈 수 있으니 그동안 그들이 말하는 깨달음을 얻어 열반에 들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모양이더구나.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이상하지만, 그들로서는 당연하게 생각하는 모양이더군.”
“혹시 그들이 인간계로 돌아가는 방법을 알지 않을까요?”
“물어봤었다. 아주 오래전에 물어봤지만, 그들도 그 방법을 알지 못한다고 하더구나. 죽은 자들이 인간계로 되돌아가봤자 모든 기억을 잃은 잡귀가 되어 쫓겨 다닐 뿐이니 가고자 하지 않고 살아 있는 자들은 스스로 원해서 온 것이니 다시 인간계로 갈 생각을 하지 않았나 보더구나. 우리 마을이야 살아서 온 무인이 네가 처음이니 시도조차 해본 적이 없고…….”
고개를 끄덕인 무혼은 속으로 작은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다시 정신을 차리고 천마의 뒤를 쫓아갔다.
이제 곧 천마의 많은 것을 배우게 될 것이다. 지금의 실망을 우선 놔두고 그의 무공을 견식할 생각에 가슴을 두근거리며 길을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