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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계남녀 84화

무료소설 이계남녀: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조회 2,125회 작성일

소설 읽기 : 이계남녀 84화

084 흑과 백(2)

 

 

 

 

 

“사천에서 자랑하는 검남춘(劍南春)이요. 특히 이 집의 술맛은 내가 보장하리다.”

 

창가의 자리에 마주 앉은 무혼과 남궁장천은 술을 들이켰다. 한 차례의 대결로 갈증이 나던 중이라 그런지 알싸한 검남춘의 느낌이 위 속까지 느껴지는 듯했다.

 

한동안 말없이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며 술잔을 비워가던 남궁장천이 무혼의 눈을 살펴보았다.

 

“공야 소협, 정사대전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오.”

 

남궁장천의 질문을 받는 순간 무혼의 머리에 떠오른 것은 공야패의 모습이었다.

 

매년 그가 천마신교로 들어온 날에 음식을 준비하여 뒤뜰에서 밤을 새우는 공야패의 얼굴은 경건했으며 그리워했고 슬퍼 보였다.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의 아버지를 떠올린 무혼은 침중한 목소리로 대답을 하자 남궁장천은 술잔에 담긴 술을 입에 털어 넣고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 전에야 진실을 알았다오. 나도 참 황당하였소.”

 

“…….”

 

“백도로서 부끄러운 짓이었다는 것을 아오. 그러나 많은 흑도의 후손들이 신강에 남아 있어 언젠가는 그들의 땅으로 돌아가리라 생각하오.”

 

“그때는 중원에 피바람이 불겠지요.”

 

무혼의 말에 남궁장천은 고개를 끄덕인 후 다시 술잔을 채웠다.

 

“잘못은 백도가 시작했으니 중원에서 밀려난다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지요.”

 

그 술잔을 다시 입에 털어 넣은 후 빈 술잔을 창밖으로 던진 남궁장천은 무혼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말이오. 그 혈채를 물어야 할 사람들 중에 내 가족과 친인척들 그리고 친인들이 있다오. 게다가 내가 아는 동생이 내게 들려준 말이 있소.”

 

무혼이 술잔을 비우는 것을 보던 남궁장천은 무혼도 술잔을 창밖으로 던지는 것을 보았다.

 

“내게 들려주시겠습니까?”

 

“흑도의 문파들은 신강이 있어 그곳에서 1갑자의 시간 동안 중원으로 돌아올 날을 기약할 수 있지만, 백도의 문파들이 중원에서 밀려난다면 어디로 가야 하겠소?”

 

그의 말을 들으며 무혼은 예소소가 들려주었던 말이 기억났다.

 

 

 

 

 

<지금 천기는 백도의 패퇴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흑도만 남는다면 흑도 또한 패퇴되어 사라질 것입니다. 이미 복수는 막을 수 없지만 흑도와 백도가 공존하는 길이 혈랑성에게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흑도와 백도가 공존하는 길…….”

 

무혼의 중얼거림은 아주 작은 목소리였으나 남궁장천의 귀는 놓치지 않았다. 잠시 멍한 눈으로 보던 남궁장천은 다시 한 병의 술을 시키고 무혼의 이야기를 기다렸다.

 

“난 아직 아무것도 알지 못합니다. 그리고 남궁 소협에게 아무것도 약속할 수 없습니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남궁 소협과 술잔을 나누는 일뿐이죠.”

 

남궁장천은 약간 실망을 한 듯하였으나 다시 입가에 미소를 띠고 무혼에게 술을 권했다.

 

“그러면 어떠하오. 오늘 이렇게 즐거운 것을. 이번 일로 인해서 공야 소협을 두 번째 보는군요. 만일 정사대전이 있기 전이었다면 우리는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었을 거라 생각하오.”

 

그 말에는 무혼도 동감을 표시했다.

 

비록 다른 길을 걸어가도 눈앞의 이 청년은 무혼의 마음에 드는 부분이 많았다.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그쪽에서 혈채를 받아 낼 때, 나 역시 검을 들어야 할 것이오.”

 

남궁장천의 말에 무혼도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자신의 가족이 죽어가는데 담담할 수 있다면 제정신이 아닌 자일 것이다.

 

“그때 만나게 된다면 우리 멋지게 겨루어 봅시다.”

 

남궁장천이 웃으며 든 잔에 무혼도 미소를 띠고 살짝 부딪쳤다.

 

 

 

 

 

멀리서 수염이 하얀 노승과 도안이 그들을 보고 있었다. 무혼과 남궁장천이 조그맣게 보이는 거리였지만 그들은 바로 옆에서 보듯 두 사람의 모습을 살피고 있었다.

 

“저 젊은이가 혈랑성의 주인이더냐?”

 

“그렇습니다.”

 

한참 동안을 말없이 바라보던 노승은 눈길을 하늘로 돌리더니 연신 불호만 외우고 있었다.

 

“도안아!”

 

“예, 사승님.”

 

“네가 그의 도움이 되도록 하여라. 혈랑성과 내가 아직 인연이 없어 만날 수가 없구나.”

 

“제자, 명심하겠습니다.”

 

그를 따스한 눈으로 바라보던 대운 대사가 다시 무혼이 있는 방향으로 눈길을 돌리자 도안도 대운 대사를 따라 눈길을 돌렸다.

 

“저 젊은이에게 우리의 미래가 걸려 있다는 것이 서글프구나. 그러기에 순리에 어긋나는 일을 하면 안 되는 것이었거늘.”

 

도안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추성자인 도안은 무혼이 중원을 나오자 줄곧 따라다녔으나 어떻게 이 문제를 풀어나갈지 알 수 없었다.

 

 

 

 

 

무혼이 밤새워 남궁장천과 술을 마시고 있는 이 시간, 라에뮤 3세의 집무실에는 5명의 엘프들이 라에뮤 3세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미라크네의 왕이시여, 언제쯤 저희의 요청을 들어주시겠습니까? 만년목께서는 하루빨리 아이네스 공주님께서 방문해 주시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라에뮤 3세는 속으로 한숨을 쉬며 그의 눈앞에 서 있는 엘프를 보았다. 엘프 아르빙, 청년의 모습으로 그의 눈앞에 서 있으나 몇십 년이 지나면 장로가 될 존재라고 했다. 모르긴 해도 라에뮤 3세보다 열 배의 세월을 더 살아왔을 것이다.

 

“만년목과 엘프의 숲의 요청을 내 어찌 거절할 수 있겠소. 하지만 아이네스는 모레스 성의 전투에서 돌아온 지 이제 반년도 되지 않았소이다.”

 

라에뮤 3세를 보고 있는 아르빙은 오랜 세월만큼 많은 인간들을 접했기에 그의 속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고 그도 가능하면 인간들의 입장도 충분히 고려해 주고 싶었다.

 

그러나 지금 엘프의 숲의 사정이 좋지를 않았다. 수많은 마물들이 만년목 아래에 모여 만년목을 찢어발기려 하고 만년목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엘프의 숲이 병들어가고 있었다.

 

“얼마나 기다리면 되겠습니까?”

 

“기사들을 보내주는 것은 며칠 내에라도 가능하오. 우선은 그들을 먼저 보내드리리다.”

 

그러나 아르빙은 고개를 저었다. 지금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아이네스 공주이지 미라크네의 기사들이 아니다.

 

“지금 엘프의 숲을 돕기 위해 수많은 기사들과 신관전사들이 엘프의 숲 앞에서 모여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힘으로도 마물들을 물리칠 수는 없었습니다.

 

저도 자세한 것은 알 수 없으나 만년목께서 아이네스 공주님을 요청하는 것을 보아 공주님만이 해결할 수 있을 문제라 생각합니다.”

 

라에뮤 3세는 고민스러운 얼굴을 하고 그의 의자에 몸을 기댔다. 모레스 성, 그리고 내원. 두 번이나 목숨을 건 아이네스에게 또다시 목숨이 걸린 싸움터로 나가 달라고 말할 자신이 없었다.

 

그러나 빛의 연합군의 동맹이자 수많은 엘프들의 대표로 온 그들의 요청을 거절하기도 어려웠다. 게다가 만년목이 아이네스에게 베풀어준 은혜도 있었기에 더욱 그러했다.

 

‘하지만 왜 하필이면 아이네스란 말이오.’

 

“전하.”

 

문밖에 있던 시종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이냐?”

 

“아이네스 공주님께서 오셨사옵니다.”

 

“뭣이?”

 

라에뮤 3세는 혹시나 하는 생각에 엘프들의 얼굴을 보았으나 그들도 아이네스가 올 줄은 생각하지 못한 듯했다. 아르빙은 라에뮤 3세를 보았다.

 

“미라크네의 왕이시여, 그녀를 이곳으로 직접 부르신 것이었습니까?”

 

“아니오, 다른 일로 온 듯하오.”

 

“그렇습니까?”

 

눈앞에 왕이 있는데 그를 무시하고 마음대로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다만 만년목이 찾고 있는 인간의 소녀에 대한 궁금증이 있었기에 아르빙은 한 걸음 물러나며 집무실로 들어서는 아이네스를 훑어보았다.

 

‘다른 자들보다 신성력이 조금 더 많을 뿐이지 않은가?’

 

 

 

 

 

집무실에 들어선 아이네스는 엘프들이 자신을 유심히 보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얼마나 시달리신 걸까?’

 

자세한 이야기를 엘라드를 통해 들으며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그녀를 위해 홀로 고통을 받고 있을 라에뮤 3세였다. 물론 그녀가 엘프의 숲으로 떠난다는 것도 라에뮤 3세에게는 고통이 되겠지만 거절할 수 없는 일이라면 조금이라도 덜어주고 싶었다.

 

“아바마마, 아이네스이옵니다.”

 

“어서 오너라, 아이네스. 여긴 어쩐 일이더냐?”

 

“엘프의 숲으로 갈까 합니다.”

 

“그게 무슨 말이냐?”

 

모레스 성에 참전시켜서 참혹한 경험을 겪게 한 것만으로도 마음이 아팠던 왕은 생각지도 못한 아이네스의 이야기에 놀라며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엘프의 숲이라면 괜찮을 것이옵니다. 모레스 성에도 무사히 돌아왔사옵니다. 이번에도 무사히 다녀올 수 있을 것이옵니다.”

 

“하지만…….”

 

라에뮤 3세는 그를 따스한 눈길로 바라보는 딸을 보며 속으로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아이네스가 엘프들의 요청에 시달릴 그를 생각하며 온 것이리라.

 

‘왜 자꾸 너에게 이런 일이 생기는 것이냐.’

 

그 모습을 옆에서 보고 있던 아르빙은 안타까운 눈으로 아이네스를 보았다. 그녀가 왕족이 아니라면 이러한 요청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엘프의 숲을 떠올리니 그들의 마음을 외면할 수밖에 없는 아르빙이었다.

 

“감사합니다, 공주님. 공주님의 안전은 이 늙은이가 목숨을 걸고 보호해 드리리다.”

 

호의가 느껴지는 목소리에 아이네스는 살짝 무릎을 굽히며 조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감사합니다. 그 말씀을 들으니 훨씬 마음이 놓입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아이네스야, 왕궁으로 돌아올 때까지 기사들에게서 멀리 떨어지면 안 된다.”

 

“명심하겠사옵니다. 그럼 소녀는 길을 떠날 채비를 하겠사옵니다.”

 

라에뮤 3세와 엘프들에게 예를 갖추고 물러나자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엘프들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미라크네의 왕이시여, 공주의 안전은 모든 엘프들이 기필코 지켜드리겠습니다.”

 

“잘 부탁하겠소.”

 

엘프들이 물러나자 의자에 몸을 기댄 라에뮤 3세가 시종장에게 작전관 루오켈 백작을 불러올 것을 명령했다. 그리고 조용히 중얼거렸다.

 

“미라크네를 살펴주시는 스노샤니시여, 부디 제 딸을 보호해주십시오.”

 

 

 

 

 

9별궁으로 돌아온 아이네스가 그녀의 응접실에 도착하자 그녀를 기다리며 차를 마시던 엘라드가 반겼다.

 

“공주님 다녀오셨어요?”

 

“예, 엘라드의 권유대로 엘프의 숲으로 가기로 했어요. 엘라드는 어찌하실 건가요?”

 

“감사합니다, 공주님. 물론 저도 함께 엘프의 숲으로 갈 것이에요.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공주님을 안전하게 모실 터이니 걱정하시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말을 마친 후 9별궁 안에 마련된 그의 숙소로 돌아가는 엘라드를 보고 아이네스도 그녀의 방으로 돌아갔다.

 

‘무혼 경은 날 도와주러 올 수 있을까?’

 

엘라드도 엘프들도 그녀를 지켜주겠다는 약속을 했지만, 그들을 모두 합친 것보다 무혼 한 사람이 그녀에겐 더욱 든든한 존재였다.

 

그러나 쉽게 올 수 없음을 알고 있기에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조금 전에 엘라드와 나눈 대화를 떠올려 보았다.

 

엘라드의 말에 의하면 만년목은 빛의 연합국에 떠돌고 있는 모든 마기를 흡수하여 정화한 뒤 다시 세상으로 되돌리고 있다고 했다. 물론 책에서도 그렇게 설명이 되어 있었기에 새로운 사실을 말한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지금 빛의 연합국에 퍼져 있는 마기들이 너무 많아 그것을 흡수한 만년목이 모두 정화하지 못해 마기들이 만년목을 휘감고 있다.

 

그러자 엘프의 숲이 시들어가기 시작했고, 많은 마물들이 나타나 만년목을 공격하고 있어 엘프와 엘프의 숲에서 멀지 않는 곳에 살고 있는 드워프들이 마물들과 치열한 격전을 벌이는 중이라고 했다.

 

‘만년목이 정제할 수 없을 정도의 마기가 쌓인 이유가 바로 나 때문이며 만년목을 구할 수 있는 사람도 나뿐이라고 했지?’

 

빛의 연합국의 영웅이 되고자 하는 마음은 없었지만 엘라드가 만년목이 무너진다면 빛의 연합국들이 멸망할 것이라고 했다.

 

그 멸망하는 나라 중에 미라크네도 해당된다는 것은 굳이 설명을 듣지 않아도 쉽게 알 수 있었다.

 

“잘할 수 있을까?”

 

 

 

 

 

다음날부터 미라크네의 왕궁은 엘프의 숲을 지원하기 위한 기사단을 편성하기 위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루오켈 후작, 기사들은 많이 자원을 했소? 준비하는 데 이상은 없겠소?”

 

“기사들을 골라야 할 듯합니다.”

 

“그렇게 자원한 기사가 없소? 강제로 보낼 수 있는 곳도 아닌데.”

 

미라크네의 전쟁이 아니었기 때문에 무작정 보낸다면 귀족들과 왕국의 국민들이 많은 반발을 할 것이다. 그래서 자원하는 기사들을 모으기 시작하는 것인데 루오켈 후작의 말에 라에뮤 3세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것을 본 후작은 말을 정정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이 아니오라, 아이네스 공주님께옵서 참전하신다는 소문이 돌면서 수많은 기사들이 자원 신청을 해왔기에 그들을 모두 보낼 수가 없어 골라야 한다는 말이옵니다.”

 

“아이네스가 왜?”

 

“지금 공주님께옵서는 모레스 성의 전쟁과 내원에서의 일로 기사들과 병사들의 신망을 한 몸에 받고 계시옵니다.”

 

루오켈 후작의 설명을 들은 라에뮤 3세는 고개를 끄덕이고서 다시 한번 강조했다.

 

“그건 참 다행한 일이라 생각하오, 후작.”

 

“말씀하시옵소서.”

 

“아이네스 공주의 신변을 잘 부탁하오.”

 

“명심하겠사옵니다, 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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