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남녀 8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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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2,022회 작성일소설 읽기 : 이계남녀 82화
082 아이네스의 검(3)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엘세타는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조금만 더 몰아붙이면 끝장낼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아이네스에게서 붉은 기류가 흘러나오며 강렬한 기운이 느껴졌었다.
그리고 그녀가 아이네스를 볼 때마다 느끼던 묘한 이질감의 정체도 점차 확연히 떠오르고 있었다.
“저 여자, 대체 뭐지?”
무혼에 의해서 난도질당하고 있는 괴물들을 보면서 엘세타는 고개를 흔들고 다시 보았지만, 그녀의 눈에 보이는 모습은 변하지 않았다.
“그리고 저 남자는 또 뭐냐고?”
엘세타의 눈에 아이네스와 함께 움직이는 한 남자의 환영이 보였다. 그것도 가이오스트 대륙에는 이미 없다는 황토인의 남자는 어둡고 사이한 기운을 뿌려대며 그녀가 소환한 두 종류의 괴물을 상대로 막강한 검술을 펼치고 있다.
엘세타가 가이오스트 대륙을 다니며 봤던 어떠한 기사보다도 강력한 자였다.
무혼은 눈앞에 널브러져 있는 괴물들을 보았다. 이곳의 소드 익스퍼트 초급의 기사들과 거의 비슷한 실력을 가진 괴물들이었지만 이미 절정고수의 끝자락에 있는 무혼의 상대는 아니었다.
그리고 무혼은 천천히 눈을 돌렸다. 눈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분명히 느껴지는 존재감이 무혼으로 하여금 걸음을 옮기게 했던 것이다.
‘마법으로 숨긴 것일까?’
하지만 지치고 심장의 마나 고리가 약해진 아이네스에게 더 이상의 무리를 주고 싶지 않았다. 본신만큼은 아니지만, 이 대륙의 어떤 기사와 싸워도 이길 수 있을 만큼 내력이 남아 있으니 그것으로 해결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이번에 놓치면 다시 아이네스를 공격할지 몰랐다. 자신이 있을 때 아이네스에게 위협이 될 것은 없애버리는 것이 좋았다.
결코 경시할 수 없는 상대의 기세를 느끼며 멈추지 않고 걸어가고 있는 무혼의 감각에 새로운 존재가 느껴지고 있었다.
‘이 느낌은…….’
무혼도 익히 알고 있는 느낌이다. 그래서 앞을 경계하며 뒤를 보니 존재는 느껴졌으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마치 거대한 진식에 있는 것 같은데?’
미세하게 비틀린 주위의 기운이 무혼의 경계심을 자극하는데 곧 폭발음이 일어났다.
콰콰콰콰콰쾅!
연속적으로 일어나는 폭발에 주위의 기운이 갑자기 바뀌고 있었다. 눈으로 보기엔 변한 것이 없지만 어떠한 힘에 갇혀 있었다는 것을 무혼은 확신할 수 있었다.
“엘라드.”
오랜만에 가까이서 보는 모습이었다.
“아이네스 공주님, 오랜만이에요. 다치신 곳은 없나요?”
손가락으로 머리를 말며 입을 여는 엘라드의 모습은 무혼의 기억 속에 있던 모습과 동일했다. 그가 아는 엘라드라면 뒤에서 급습을 받을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될 듯했다.
고개를 끄덕인 무혼은 다시 정면을 보았다. 무혼이 바라본 곳에는 아직도 어떠한 존재도 나타나지 않은 상태였다.
그러나 무혼이 검에 내력을 밀어 넣자 옆에서 엘라드가 황급히 막아서며 무혼에게 슬쩍 웃었다.
“아이네스 공주님, 저에게 맡겨주세요.”
잠시 엘라드의 얼굴을 보던 무혼은 고개를 끄덕이고서 뒤로 물러났다.
그러자 엘라드는 무혼에게 등을 보이도록 몸을 돌리더니 앞을 향해 소리쳤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당장 모습을 드러내세요. 엘세타.”
‘엘세타?’
그러자 아무도 없던 나무 위에 당당한 체구를 가진 한 사람이 갑자기 나타났다. 무혼은 상대를 유심히 보다가 가슴에서 멈추었다.
‘여자?’
다시 얼굴로 눈을 돌린 무혼은 눈을 살짝 찌푸린다. 옷 밖으로 드러나는 팔과 떡 벌어진 어깨를 보면 이곳의 무술을 상당 수준까지 익힌 여전사로 보이지만 그래도 여자이니, 상대하기가 껄끄러웠다.
하지만 여전사가 노리는 상대가 아이네스라는 것을 떠올린 무혼은 다시 검을 쥔 손에 힘을 주고 내력을 밀어 넣었다.
“엘라드…….”
당당한 체구에 어울리지 않게 울먹이는 듯한 얼굴을 하자 무혼은 내심 당황했다. 아이네스를 생각하면 당장이라도 검을 휘둘러야 할 텐데 기회를 잡기가 어려운 것이다.
“엘라드, 저 여자를 아는 듯한데, 왜 나를 노리는 것입니까?”
무혼의 물음을 듣고 엘라드가 다시 엘세타에게 고개를 돌렸을 때, 엘세타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남자인 너한테 볼일이 있는 것이 아니야. 너 말고 여자에게 볼일이 있단 말이야.”
“엘세타 그게 무슨 말이죠? 공주님이 어딜 봐서 남자라는 말이죠?”
그러나 무혼은 더 이상 망설이지 않았다. 상대가 자신의 존재를 안다면 아이네스에게 더욱 위협적이었다. 무혼의 머릿속에서 엘세타가 여자라는 생각은 지워버렸다.
순식간에 그녀가 있는 나무 위로 뛰어올라 검을 크게 휘둘렀다. 그러자 엘세타가 비웃음을 머금고 그녀의 손에 있던 작은 지팡이로 무혼의 검을 막아갔다.
‘혈향구회!’
검로가 바뀐 무혼의 검에서 만들어진 붉은 검기가 반원형으로 변하며 엘세타의 사혈들을 향해 매섭게 날아갔다. 그것을 본 엘세타는 몸을 돌리며 성벽들을 타고 넘더니 밖으로 뛰어나갔다.
‘놓치지 않는다. 혈랑벽력!’
즉시 월야잠행을 펼쳐 그림자처럼 뒤를 따라 붙은 무혼은 다시 검로를 바꿔 검을 강렬하게 찔러갔다.
문득 이상한 느낌에 뒤를 돌아본 엘세타는 무혼이 펼친 검에 담긴 힘을 깨닫고는 경악에 찬 얼굴을 하며 급히 막아갔다. 하지만 힘에 밀린 듯 숲 쪽으로 튕긴 엘세타는 억울하다는 듯한 눈빛으로 무혼을 보았다.
“제길, 네가 든 검이 신검만 아니었다면 막을 필요도 없었는데…….”
그렇게 말하는 엘세타는 신검을 노려보더니 엘라드를 향해 고개를 팩 돌렸다.
“엘라드 당신 정말… 나빠요!”
그러더니 다시 숲속으로 뛰어갔다. 반격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무혼은 황당한 표정으로 다시 엘라드를 보았고, 무안한 듯 얼굴을 긁적이던 엘라드는 성벽 뒤에서 갑자기 많은 사람들의 소리가 들려오자 숲을 향해 달렸다.
- 아이네스 소저, 일단 그 여자에 대해서 결말을 내어야 다시 위협을 안 받을 것 같습니다.
- 예, 제 생각에도 그래요. 저로 하여금 가족들이 또 위험에 빠지게 할 순 없어요. 부탁드려요. 무혼 경.
고개를 끄덕인 무혼은 귀조비보(鬼鳥飛步)를 펼쳐 빠르게 쫓아갔다.
아직 가늘게 느껴지는 기운을 쫓아 한창을 달리니 앞에 서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기습을 잠시 생각을 하던 무혼은 그녀가 엘라드와 아는 사이임을 머리에 떠올렸다. 만일 엘라드가 그녀를 돕고자 한다면 오히려 아이네스가 위험해질 수도 있었다. 기습을 포기한 무혼은 약 30여 미터가 떨어진 곳에 착지했다.
엘라드는 무혼이 온 것을 보더니 고개를 끄덕인 후, 엘세타에게 다시 고개를 돌렸다.
“엘세타, 오늘 일은 저도 납득이 가지 않는군요. 대체 왜 그랬죠?”
“내가 묻고 싶은 말이에요 엘라드, 저 몸속에 웅크리고 있는 여자에게 아끼는 신검까지 선물하다니 무슨 생각이에요?”
그 말을 듣자, 엘라드는 고개를 한번 갸웃하더니 무혼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저 속에서 웅크리다니요?”
그의 말에 오히려 엘세타가 얼굴을 찡그리더니 엘라드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왜, 왜 그래요? 엘세타.”
“엘라드, 그 정도로 힘이 약해졌어요?”
그 말에 무혼은 살짝 놀라는 눈빛을 띄웠다. 그가 아는 엘라드의 능력도 대단한 것이다. 그런데 그 능력이 약해졌다면 본래 얼마나 강했었다는 것인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교주보다도 훨씬 강했던 것인가?’
직접 검을 맞대어 본 상대 중에 가장 강했던 교주를 떠올린 무혼은 그들의 대화에 더욱 집중했다.
“아무래도 꽤 오래되어서인지…….”
그러자 얕게 한숨을 내쉰 엘세타는 무혼을 보면서 입을 열었다.
“저 여자의 몸에는 지금 두 사람의 영혼이 있어요. 저 모습의 여자와 황토인의 남자.”
“예?”
엘세타의 말에 놀란 듯 눈을 크게 뜬 엘라드는 무혼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게 사실인가요?”
무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손을 들어 엘라드를 가리키며 한마디를 건넸다.
“여자.”
그리고 다시 자신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남자.”
처음 만났을 때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던 엘라드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입을 벌렸고 무혼이 살짝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오랜만입니다. 엘라드.”
“그럼 저와 같이 여행을 하신 분이?”
“저입니다.”
그 말에 엘라드는 환히 웃었다. 그동안 풀지 못한 숙제를 풀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던 엘라드는 정말 반갑다는 듯이 웃음을 띠었다.
“그랬군요, 하하! 이름을 물어봐도 될까요?”
“무혼입니다.”
“무혼?”
무혼이 고개를 끄덕이자, 엘라드도 고개를 끄덕이며 한 손을 내밀었다.
“오랜만입니다, 무혼 씨. 그래서인지 그 후에 만난 공주님의 몸에서 느껴지는 느낌이 다른 사람을 보는 듯했습니다. 제 느낌이 옳은 거였네요.”
그러자 다시 대답하는 말이 있었다.
“미안해요, 엘라드. 고의로 숨기려던 것은 아니었어요. 단지 믿어줄 것 같지가 않아서 이야기를 못 했어요.”
“지금 대답하신 분은 진짜 아이네스 공주님이신가요?”
“예.”
엘라드는 속으로 기뻤다. 점점 그가 구하고 있는 해답에 가까워져 간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뒤에서 들려오는 말은 그의 얼굴을 굳게 만들었다.
“그런데 그 여자의 몸을 통해서 어둠의 기운들이 밀려오고 있어요.”
그 말에 무혼과 아이네스 그리고 엘라드가 엘세타에게 눈길을 돌렸다. 그러나 엘세타는 개의치 않고 아이네스를 노려보았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녀의 몸에서 흘러나오고 있는 어둠의 기운이 가이오스트 대륙에 운명을 바꾸게 될 거예요. 지금 대륙은 많은 곳에서 나타나는 마물들도 바로 그 영향 때문이라고요.”
“이분은 누구입니까? 왜 아이네스 소저를 위협하는 것입니까?”
엘라드가 난처한 얼굴을 하고 머뭇거리는 사이에 무혼도 엘세타를 노려보자 냉랭한 기운이 그들 사이를 감쌌다.
“두 분은 적이 아니에요.”
엘라드는 상황을 수습하고자 두 사람 사이를 막아섰다.
“엘세타는 제가 오래전부터 아는 사람이에요. 저에게 이야기할 시간을 좀 주세요.”
무혼이 고개를 끄덕이자 엘라드는 뒤돌아서며 엘세타를 바라보았다.
“엘세타, 내가 돌아가기를 바라지 않나요?”
“그럴 리가 없잖아요.”
“그런데 왜 아이네스 공주님을 공격한 것이죠?”
엘라드가 진지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자 엘세타는 당황한 얼굴에 입술을 삐죽거리더니 그의 눈치를 보며 퉁명스럽게 대답을 했다.
“엘라드가 저 여자만 쫓아다니니까…….”
엘라드는 한숨을 푹 내쉬더니 이제까지의 일에 대해서 간단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의 말이 끝나자 엘세타는 잠시 말을 잊었다.
단순한 오해였다니, 게다가 엘라드가 오랫동안 방황하고 있는 이유의 대답을 줄지도 모를 존재였다니……. 그녀는 갑자기 민망해졌다.
“흥! 그러게 누가 오해받을 행동을 하래요? 이제 그 아가씨에게 볼일이 없으니 난 이만 가겠어요!”
그러더니 빠른 속도로 사라졌다. 그 모습에 무혼은 황당해 엘라드를 보니 그는 곤란하다는 듯 머리카락을 다시 꼬고 있었다.
“오해하고 난리 친 것이 미안하고 쑥스러워서 도망간 것입니다. 성격이 조금 급하고 행동이 조금 거칠어도 마음은 순수하니 이해해 주세요.”
“엘라드, 그 말을 믿어도 되겠습니까?”
“아직 자세히 밝히기는 곤란하지만요. 엘세타는 이곳을 기준으로 했을 때 열다섯 살과 비슷해요. 아직 어려서 그런 것이니 제가 잘 타이르겠어요.”
엘라드의 말에 무혼과 아이네스는 얼이 빠질 수밖에 없었다. 그 덩치와 외모의 어디를 봐서 열다섯 살의 소녀라 생각할 것인가?
한동안 말을 잃었던 아이네스는 정신을 차리고 엘라드에게 물어보았다.
“저를 다시 공격하지 않을까요?”
“그런 일은 없을 것이에요.”
아이네스가 의심에 찬 눈빛을 지우지 않자 엘라드는 난감한 표정으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장담할 수 있습니다. 앞으로 아이네스 공주님을 위협하거나 공격하는 일이 없을 거라 보증을 하겠어요. 그리고 사과하는 의미에서 제가 아이네스 공주님의 옆에서 항상 도와드리겠어요.”
그 말에 아이네스와 무혼이 조용히 엘라드를 보자 그는 약간의 말을 덧붙였다.
“엘세타의 말대로 검은 기운이 공주님을 통해서 흘러들어온다면 아이네스 공주님에게 제가 필요할 거예요.”
“하나만 물어볼게요.”
엘라드가 고개를 끄덕이자 아이네스는 문득 떠오른 생각을 물어보았다.
“혹시 마수나 마물들이 저를 노리는 것과 관련이 있나요?”
“공주님은 그것들에게 최고의 먹이로 인식될 것입니다.”
아이네스는 엘라드의 말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대륙의 여러 곳에서 나타나고 있는 마물들이 무혼과 자신의 영혼 교류로 인한 것이라면 혼자의 힘으로 헤쳐나가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녀는 가족들을 마물들의 손에 잃고 싶지 않았다. 엘라드의 말대로 그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은 아이네스는 조용히 무혼에게 말을 건넸다.
- 무혼 경, 엘라드라는 사람을 확실히 믿을 수 있을까요?
- 예, 아이네스 소저. 전 제 느낌을 믿습니다.
무혼의 대답을 들은 아이네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엘라드에게 다가가 예를 취했다.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엘라드.”
“믿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이네스 공주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