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남녀 8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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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2,180회 작성일소설 읽기 : 이계남녀 81화
081 아이네스의 검(2)
“징그러워…….”
새로운 괴물을 보는 아이네스의 솔직한 심정이 입을 통해서 흘러나왔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몸을 쉬지 않고 움직이며 액체 괴물의 손에서 벗어나 머리를 반으로 갈랐다.
“꺄아악!”
누군가 지르는 비명 소리와 함께 상체를 앞으로 숙이며 보폭이 큰 걸음으로 달리는 아이네스의 등 쪽의 옷이 찢어지고 그 사이로 바람이 서늘하게 불어왔지만 아이네스는 그 사실에 신경을 쓰지 못했다.
아이네스의 머리가 판단하기 전에 몸이 이미 움직이며 검을 휘둘러 계속 공격해 오는 진흙 괴물의 팔을 후려쳤다.
깡!
그러나 검이 진흙 괴물의 반쯤 파고들다가 쇳소리를 내며 튕겨 나오자 아이네스는 다시 몸을 날려 괴물의 공격을 피해야 했다.
그것을 본 엘세타는 만면에 웃음을 흘렸다.
“호호호, 네가 아무리 날뛰어도 마법으로 보충한 힘과 속도로는 테마누오 족속을 당하지 못할 것이다. 어디 나를 분노하게 한 대가를 치러봐라.”
물론 엘세타의 목소리가 아이네스의 귀에 들릴 리가 없지만 아이네스는 알 수 없는 서늘함에 살짝 몸을 떨어야 했다.
‘마법만으로는 무리일까?’
무혼의 걸음과 무혼의 동작이 머리에 있고 몸도 따라준다. 하지만 무혼이 보여 주는 눈부신 검술 능력에는 비교할 수도 없었다.
‘무혼 경의 오분의 일, 아니 십 분의 일만이라도 발휘가 된다면…….’
아이네스는 자신의 아랫배에서 느껴지는 내력이 원망스러워졌다. 무혼의 의지에 활발하게 반응하는 내력이 조금만 뒷받침이 된다면 어렵기는 해도 눈앞의 괴물들을 상대로 제대로 된 대결을 펼칠 수 있을 것이다.
그녀는 서서히 걸음을 옮기며 혈난보의 방위를 밟기 시작했고 쾌랑단천의 초식을 기억에서 되살리며 서서히 자세를 취했다.
‘스트랭스 마법과 헤이스트 마법이 유지되고 있는 이때 어떻게 해서든 해결해야 해.’
무서워 떨고 있는 것은 이런 상황에서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이미 싫증 나도록 경험했다. 그리고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었다.
다시 한번 검을 세차게 뿌리며 눈앞을 막고 있는 물의 괴물에게 달려갔다. 자신에게 뻗어오는 공격을 방위를 잡고 몸을 돌려 피하고 그 뒤에 보이는 다른 물의 괴물에게 힘차게 검을 휘둘렀다.
쾌랑단천!
혈랑검법 중 단(斷)의 능력이 가장 뛰어난 이 초식은 아이네스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고 물의 괴물을 반으로 갈랐다.
황급히 그 자리를 피하는 아이네스의 눈에 흐물거리며 검은 물로 변해 가는 괴물을 확인할 수 있었고 그녀를 위협하는 공격들에서 혈난보의 풍귀혈영(風鬼血影)의 보법을 따라 달리며 간신히 피해냈다.
헉, 헉.
진흙 괴물의 공격 때문에 멀어진 왕비 일행으로 더욱 가까이 가기 위해서는 두 마리의 진흙 괴물을 더 따돌려야 한다.
눈으로 슬쩍 돌려보니 기사들과 병사들이 보호하고 있지만, 병사들로 상대할 수 있는 괴물들이 아니었고 기사들은 대부분 극심한 부상으로 진흙 괴물 한 마리조차 감당하기 힘들 것이다.
“어째서 아무도 달려오지 않는 것이지?”
왕궁의 구석이라고 하나 이미 큰 소리도 여러 번 울려 퍼졌으니 경비를 서는 기사들이 달려올 시간도 지난 듯했다. 그러나 지금으로서는 멀게만 느껴지는 성벽의 모퉁이에서 나타나는 기사는 없었다.
‘혹시 마법?’
비록 불완전하다고 하나 6클래스의 마법사인 자신의 감각을 속이는 마법이 있다고 생각되지 않지만, 마법으로 숨기고 있지 않다면 납득하기 어려운 현실이다.
‘그렇다면 저 괴물들도 마법사가?’
그렇게 생각하니 상황이 맞아간다. 문득 엘세타의 모습이 머리에서 떠오른 아이네스는 눈앞에 있다면 주저하지 않고 일검을 날리고 싶었다.
아이네스는 어느새 메마른 입술을 혀로 적시고 침을 한번 삼킨 뒤 오른쪽 발을 살며시 방향을 바꾸며 다시 보법의 방위를 밟을 준비를 했다.
‘마법을 유지하는 마나가 얼마 남지 않았어.’
아무리 6클래스 마법의 이론을 이해하고 시전한 마법이 3클래스의 마법이라고 하지만 그녀의 몸에 마나가 무한정 있는 것은 아니다.
냉혈공으로 빠르게 마나를 모을 수 있을 뿐이지 운기를 하지 않는다면 얼마 지나지 않아 마나가 고갈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순식간에 이 괴물들에게 찢겨 죽을 것이다.
잠시 비참히 죽는 자신의 모습을 떠올렸던 아이네스는 무혼의 보호 속에서 안전한 곳으로 옮겨가 마음껏 울고 싶었고 편안하게 쉬고 싶었다. 그러나 곧 살짝 고개를 흔들었다.
‘지금 핑계를 대며 투정을 부릴 때가 아니야.’
이곳에서 벗어나면 유치한 투정도 부릴 수 있을 것이다. 단, 그러기 위해서는 이곳에서 벗어나야 한다.
입술을 살짝 깨물며 괴물들의 틈을 노리던 아이네스의 눈에 진흙 괴물이 갑자기 왕비 쪽으로 몸을 돌리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절망 속에 가느다란 희망의 눈빛으로 아이네스를 보던 기사들과 병사들의 얼굴색이 변하며 검을 부여잡는 것도 보였다.
‘이대로라면 모두 죽는다.’
그녀의 삶에 사랑, 우정, 미움, 기쁨, 슬픔 등 많은 감정을 주었던 사람들이 이제 다시 볼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 아이네스는 자신의 심장 소리가 점점 크게 들려왔다. 눈앞의 괴물들은 겁이 나지만 이미 몸은 앞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멈춰-.”
앞을 막는 진흙 괴물의 몸에 검을 찌르자 얼마 들어가지 못하고 멈춘다.
그러나 아이네스의 검에 배어 있는 신성력 때문인지 진흙 괴물은 잠시 움찔하더니 그녀를 세차게 뿌리치듯 팔을 휘둘렀다.
검을 세워 그 팔을 막고 그 힘의 반동으로 위치를 바꾼 아이네스는 보법을 밟으며 왕비 일행 쪽으로 다가서는 괴물을 쫓지만, 눈앞의 거리가 한없이 멀어 보였다.
이미 가까이 다가간 괴물을 보며 아이네스는 심장의 박동이 더욱 크게 느껴졌다. 그녀의 눈에는 얼굴을 굳힌 채 괴물에게 검을 질러보려고 하는 기사들의 모습이 보였다.
‘저들은 버티지 못할 거야.’
아이네스는 어떡해서든 막고 싶었다.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기는 싫었다. 모레스 성에서 죽어가던 이름 모를 기사들과 병사들의 모습도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럴 순 없어.’
힘겹게 달리는 아이네스의 입술 사이로 신음과 같은 소리가 울려 퍼졌다.
“안 돼!”
그 순간 아이네스는 괴물의 모습이 순식간에 다가오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녀의 빠른 속도에 놀란 듯 황급히 몸을 돌리며 팔을 찔러오는 괴물의 손톱들이 보인다.
하지만 아이네스의 몸은 익숙한 느낌으로 괴물의 팔을 피하며 오른팔을 사선으로 휘둘러 괴물의 몸을 두 조각으로 내었다.
그리고 연속 동작으로 다시 괴물들이 모인 곳을 향해 검을 겨눈 아이네스의 머릿속에서는 의문이 솟아올랐다.
‘어떻게 된 것이지?’
이미 반 조각이 난 진흙 괴물은 허물어지고 있었고 그녀는 검과 온몸에서 흰색의 기류가 은은히 흐르는 것이 보였다.
중원에서 운기를 할 때 피어오르던 흰색의 기류와 같았다. 그제야 아이네스는 몸의 변화를 알아차렸다.
‘내력이 움직였다?’
그토록 노력해도 움직이지 않던 아이네스의 내력의 작은 한줄기가 아이네스의 혈도를 돌며 검을 휘감고 신성력과 합해서 은은히 빛나고 있었다.
무혼의 의지에 따르는 내력에 비해서는 아주 작은 부분이었지만 그 작은 내력이 일으킨 변화는 막강했다.
아직 숨을 거칠게 내쉬는 아이네스의 입가에는 살짝 웃음이 맺혔다. 이제 가느다란 희망이 보인 것이다.
“내력이 약간만 더 내 의지를 따라준다면 없애버릴 수도 있겠는데…….”
떨리는 몸을 진정시키고 그녀의 의지를 따르는 내력을 돌리며 다시 한 걸음을 내딛는 아이네스의 눈에 그녀를 휘감는 흰 기류 사이로 붉은 기류가 흩날리는 것이 보였다.
- 아이네스 소저?
‘하아.’
무혼이 왔다. 그토록 기다리던 그가 온 것이다. 이번에도 심장의 마나의 유동을 느끼고 온 것이리라. 그가 왔다는 것만으로도 아이네스의 눈가에 이슬이 살짝 맺히기 시작했다. 그리고 더 이상 눈앞의 괴물들이 무섭지 않았다. 무혼이 그녀와 함께하는 한 세상의 어느 곳보다도 더 안전하게 느껴진다. 그녀의 입술 사이로 웃음이 나왔다.
- 무혼 경.
- 예, 아이네스 소저.
- 왜 이제야 온 것이에요!
- 미, 미안합니다.
- 무혼 경.
- 옛!
- 와줘서 고마워요.
무혼은 아이네스의 긴장이 풀려가는 것을 느껴졌다. 아마 자신을 믿기 때문일 것이다. 자신의 존재가 그녀에게 든든하게 느껴진다고 생각을 하자 마음속에 가득했다.
하지만 눈앞의 괴물들을 바라보는 무혼의 눈에서는 서늘한 빛이 어려 있었다. 풀어져 가는 아이네스의 긴장이 얼마나 큰 것이었는지 느껴지는 만큼 그녀를 위협했던 대상에 대한 무혼의 분노가 커져갔다.
“인간도 아닌 것들이…….”
이미 아이네스의 심장을 감싸고 있던 마나의 링이 가느다랗게 간신히 붙어 있는 듯했다. 아마도 그가 도착하기 전에 힘겹게 싸웠기 때문일 것이다.
무혼이 온몸에 내력을 이끌자 아이네스가 끌어냈던 한줄기 내력과는 비교할 수 없는 내력이 온몸을 휩쓸고 다녔다.
처음으로 내력을 운용해 봤던 아이네스는 비로소 그가 얼마나 강대한 힘을 뿜어낼 수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무혼의 의지로 온몸을 휩쓸어가는 내력은 황홀한 느낌까지 안겨준다. 극심한 긴장이 풀려서 그럴 것이라고 생각을 하지만 아이네스는 그 느낌을 즐기고 있었다.
무혼이 붉은 마기를 휘날리며 혈랑의 거센 기운을 뿜어내자 괴물들의 움직임이 눈에 띄게 조심스러워졌다. 그들 앞에 있는 적의 존재감이 확연히 달라졌으며 온몸을 짓누르는 듯한 느낌에 빈틈을 노리고 있었다.
크아아아!
한 괴물이 참지 못한다는 듯 무혼에게 돌진해 왔다. 무혼은 오른발로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걸음을 내디디고 온몸을 움직이며 검으로 길게 베어갔다.
그러자 괴물의 몸이 두 갈래로 갈라졌으나 괴물의 손이 아이네스의 어깨를 잡는 데 성공했다.
‘훗, 웃기는군.’
몸을 파고들고자 하는 거품을 보며 무혼은 짧게 기합성을 내었다.
“합!”
무혼의 몸을 중심으로 작은 파동이 튕기듯 발산되었고 아이네스의 몸을 위협하던 거품은 무혼의 반탄강기의 파동과 같이 튕기며 산산이 부서져 사라졌다.
머리를 묶고 있던 머리핀이 사라져 은발의 긴 머리가 붉은 기류와 함께 일렁였고 붉은 빛깔을 띤 은색이 햇빛에 반짝였고 옷의 선을 따라 은은한 붉은색이 은은하게 빛나며 아이네스의 주위를 감싸고 있자 한 병사의 입에서 작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붉은 기류의 성녀.”
언제부터인가 승리의 상징이 되기도 했던 아이네스의 붉은 기류가 눈앞에서 펼쳐지자 기사들과 병사들은 그녀의 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모레스 성의 전쟁에 참전했던 자들은 두 번째로 보는 광경이었고 내전궁을 지키던 자들은 소문으로 알고 있었지만, 지금처럼 신비로운 풍경은 본 적이 없었다.
“아이네스…….”
파레시아는 아이네스의 모습을 말을 잇지 못했다. 몇 년 사이에 그녀의 친구는 그녀가 알고 있는 어떠한 기사보다도 더 용감했고 더 강했다. 그리고 당당했다.
화르르르.
무혼이 밀어 넣은 내력을 충분히 머금은 백색의 신검은 불길에 휩싸인 듯 붉은 기운을 일렁였고 혈운난풍의 보법으로 괴물들에게 다가선 무혼의 손속에는 거침이 없었다.
진흙 괴물이 손톱을 길게 늘이며 등을 노렸으나 매끈한 곡선을 따라 달리고 있는 무혼의 손에서 펼쳐진 낭아무비의 초식이 살기에 찬 이빨을 드러내며 적을 갈기갈기 찢어놓았다.
신검의 신성력과 무혼의 검기가 어우러지며 괴물이 되살아나지 못하게 태웠고 그것을 본 괴물들은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곱게 보내줄 생각이 없었던 무혼은 풍귀혈영의 방위를 밟으며 빠르게 다가섰다.
카아아아.
눈앞에 보이는 무혼을 향해 괴물이 팔을 휘둘렀으나 괴물이 잡을 수 있었던 것은 무혼의 잔상이었다.
오른발을 축으로 몸을 돌린 무혼은 그를 노리던 괴물의 팔을 베어내고 그의 상체를 사선으로 길게 베어 두 조각으로 만든 후 가장 가까이 있는 괴물에게 시선을 돌렸다.
“네놈들에게 말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지는 모르겠다만 아무도 살아서 돌아가지 못할 거라는 것을 알아두어라.”
괴물들이 그의 말을 알아들을 리가 없었으나 무혼의 눈에 보이는 살기는 그가 무엇을 말하는지 알 수 있으리라.
“크아아아아!”
한 괴물의 괴성이 구슬프게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