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남녀 7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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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2,173회 작성일소설 읽기 : 이계남녀 79화
079 무인(4)
테엥 텡텡.
검날에 잘린 실이 금속성의 소리를 내며 사라졌을 때 무혼은 움막 안에서 살기가 솟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천근추의 수법으로 급히 내려선 무혼은 바닥에 착지하자 곧바로 옆으로 몸을 달리며 혈랑검을 휘둘렀다.
챙!
기다리고 있던 음암단창은 첫 공격에 실패하자 두 개의 검은 단창으로 무혼의 사혈을 노리며 접근해 왔다. 그러나 이미 기세를 감추지 않은 무혼이 오른쪽의 창을 다리로 걷어내며 그 공간으로 몸을 내민 후 혈랑검을 질렀다.
채챙!
황급히 몸을 돌린 음암단창의 가슴을 살짝 벤 혈랑검을 다시 당긴 무혼은 몸을 낮추며 음암단창의 다리를 쓸어갔다.
그러나 이미 암림의 여러 곳에서 인기척이 느껴지고 있었다. 그것을 느낀 복사유는 무혼을 향해 비웃듯이 웃었다.
“네놈이 내 목을 가져갈 만한 실력이 될지 몰라도 이 숲에서 살아나갈 실력은 되지 못할 것이다.”
“난 너의 목만 가져갈 수 있으면 된다.”
복면 사이로 보이는 무혼의 눈이 침착함을 잃지 않고 차가운 목소리로 대답을 하자 복사유는 얼굴을 굳혔다.
‘제길, 밀단패를 회수해 가야 하는 것이 아닌가? 이자는 그저 나를 격살하기 위해 온 것인가?’
몇 번의 손속으로 무혼의 무공실력이 그를 앞지른다는 것을 깨달은 음암단창은 무혼을 흔들기 위해 말을 꺼냈으나 무혼이 담담하자 오히려 그가 평정심을 잃었다.
“죽어라!”
그의 절기인 건곤쌍창의 수법으로 무혼의 팔과 다리를 동시에 노리며 질러오자 두 개의 단창을 혈랑초출의 검로로 걷어낸 무혼은 혈랑검으로 허벅지를 길게 베는 데 성공했다.
“크악!”
이어지는 낭아무비가 혈랑의 이를 세우며 그의 오른팔을 뜯어내었다.
절망적이라는 것을 알게 된 음암단창은 움막 밖으로 뛰쳐나가고자 하였으나 심장을 꿰뚫고 들어오는 무혼의 검에 피를 토하며 앞으로 쓰러졌다.
- 무혼 경.
- 서두르겠습니다.
벌써 사람들의 웅성대는 소리가 멀지 않은 곳까지 들려오자 무혼은 빠르게 음암단창의 몸을 조사하고 집안의 물품들을 쓸어 보았다. 그러나 밀단패가 눈에 보이지 않았다.
- 왜 보이지 않지? 분명 몸에 지니고 있거나 움막 안에 있을 거라 했는데…….
- 무혼 경, 저곳을 부수어 보세요.
무혼이 방안을 다시 둘러볼 때 아이네스의 눈에 띄는 것이 있었다.
무심코 보기엔 차이가 없어 보였지만 바닥에 깔린 이불의 중앙 부분은 분명 새로 손을 본 것이다. 잠시 그곳을 쓰다듬던 무혼은 손바닥에 내력을 모아 벽을 쳤다.
- 공간이 있어요.
약간 부서진 벽 사이에 보이는 작은 공간은 간단하게 만든 듯하였지만 작은 물품을 몇 개 두기엔 충분해 보였고 다시 한번 무혼이 손바닥으로 치자 입구를 막고 있던 판자가 박살이 났다.
- 찾았군요.
그 속에는 무혼이 찾던 밀단패와 몇 가지의 편지가 놓여 있었다.
무혼은 밀단패와 그 속에 있던 모든 편지까지 모두 품속에 넣고 움막의 중앙에 자리를 잡았다.
곧 아이네스의 주문과 함께 방의 공기를 회오리치기 시작했다. 대응 마법진이 있기에 더욱 주문이 짧아져 잠시 후 아이네스가 외친 시동어와 함께 완성한 마법은 밝은 빛을 뿜어내었고 그 속에서 무혼은 사라졌다.
같은 시간, 아이네스가 그려둔 대응 마법진 위로 빛과 함께 한 줄기 바람이 불어왔다. 빛이 사라지자 그 속에서 몸을 드러낸 무혼은 처음 겪어보는 텔레포트에 대해 그의 소감을 밝혔다.
- 대단하군요!
그의 감탄사에 아이네스는 웃으며 의기양양하게 대답을 했다.
- 그럼요. 텔레포트의 마법이 된다면 어떠한 위험에서도…….
- 두 사람!
무혼의 외침에 아이네스는 입을 다물었고 무혼은 앞에서 느껴진 기척을 피해 달렸다.
- 무혼 경! 마법진을…….
‘아차’
가이오스트의 문명이다. 마법진을 이곳에 남겨두고 간다면 어떤 자가 악용할지도 모르고 훗날 무혼이 다시 텔레포트 마법을 사용할 때 방해를 받게 될 수도 있었다.
앞쪽으로 달리던 무혼은 방향을 바꿔 인기척이 움직이는 곳으로 몸을 날렸다. 그러자 수풀 사이에서 반월 모양의 환이 무혼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쌍월비환!’
암림에 머물고 있다던 형제가 생각이 났다. 반월 모양의 환을 독문병기로 삼은 두 사람은 언제나 거울처럼 움직이며 합격술을 펼친다고 했다.
아니나 다를까 무혼을 중심으로 똑같은 거리의 뒤에서도 같은 반월의 환이 무혼의 등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오늘의 순찰이 이자들이었나 보군.’
암림의 무사들이 순번을 정해 암림 안팎의 안전을 맡고 있음을 알고 있다. 그렇다면 이미 암림에 연락이 갔을 것이다.
‘재빨리 처리하고 물러나야 한다.’
운이 없었다는 생각은 고개를 흔들어 떨쳐버리고 혈랑검으로 경계를 하며 상대가 있을 만한 곳을 노려보았다.
다시 무혼을 중심으로 펼쳐진 두 개의 환은 무혼의 짧은 검격에 튕겨 나갔고 환이 돌아간 곳으로 무혼이 파고들었으나 쌍월비환을 발견할 수 없었다.
‘나를 중심으로 움직인다는 것은 알겠는데…….’
무혼이 기척을 지워가며 서서히 움직일 때 아이네스는 무혼의 남은 마나를 점검해 보았다.
- 무혼 경?
- 예.
- 지금의 마나면 미러 이미지를 펼칠 수 있어요.
그 말에 무혼은 잠시 생각을 해 보았다. 무혼 혼자서도 충분히 이길 자신은 있었지만, 꽤나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 사이에 암림에서 달려오고 있을 고수들이 도착한다면 무혼은 끝없이 싸우게 된다.
- 부탁하겠습니다.
“미러 이미지.”
아이네스가 시동어를 나직이 내뱉자 무혼의 주위에 5명의 이미지가 나타났고 두 방향으로 나누어져 달렸다.
무혼은 두 개의 이미지와 함께 달리며 주위의 자신의 모든 감각을 열자 갑자기 늘어난 무혼에게 당황하는 그들이 느껴졌다.
무혼의 감각에 걸린 이상 문제될 것이 없었다. 기척이 발견된 쪽으로 몸을 날린 무혼은 반월의 환을 들고 있는 자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자가 무혼과 두 개의 이미지를 보자 곧 그의 양손에 들린 두 개의 반월이 달빛에 반사된 은색의 서늘한 빛을 뿌리며 날아들었다.
깽!
무혼은 혈랑검으로 자신의 앞으로 다가온 반월을 바닥에 내리꽂으며 그의 앞으로 다가섰고 주인에게 이끌려온 혈랑검이 긴 상흔을 남기자 반월의 주인은 짧은 외마디의 비명 소리와 함께 꼬꾸라졌다.
“끄악!”
- 무혼 경! 반대쪽으로 달려간 미러 이미지가 벌써 두 개나 사라졌어요.
- 어디인지 아십니까?
- 예, 이미지가 사라지기 전까지는 느낄 수 있어요.
왼손이 미러 이미지가 있는 곳을 가리키자 무혼은 그곳을 향해 혈난보를 펼쳤고 앞에서 사람의 기척이 느껴지자 높은 나뭇가지 위로 올라선 무혼은 자신과 똑같이 생긴 이미지가 반월에 의해 목이 베어지는 것을 봐야 했다.
‘어쩐지 좋은 기분은 아니군.’
무혼이 하나 남은 미러 이미지와 같이 바닥에 내려서자 조금 전에 목숨을 잃은 자와 얼굴의 윤곽이 닮은 사내가 두 개의 반월 환을 들고 무혼과 이미지를 노려보았다.
“대체 이건 무슨 사술이냐?”
그러나 무혼이 말없이 검을 뽑으며 공격해 들어오자 그는 반월을 날리지 않고 몸을 틀며 이미지를 공격해 갔다.
공격을 받은 이미지는 흐릿해지며 사라질 때 무혼의 검이 사내의 등을 가르며 지나갔다.
“제길!”
등의 상처에서 피가 흘러내리는 쌍월비환은 황급히 몸을 띄웠으나 혈랑검이 다시 한번 배를 가르자 뒤로 밀려나며 나무에 부딪혔다.
“크크크, 정말 재수 없군. 나타난 다섯 놈 중 앞에 잡은 네놈이 가짜인데 마지막 다섯 번째가 실체였다니, 아무래도 오늘이 악운의 날인 모양이다.”
무혼은 그자를 내려다보았다. 이미 살 의지를 잃은 듯한 그의 눈이 복면을 쓴 무혼의 얼굴만 노려보고 있었다.
“동생은 먼저 죽었나?”
끄덕.
“쿨럭! 네놈 이름이 뭐냐? 내가 어떤 놈에게 뒈졌는지 알긴 해야 할 거 아니냐! 쿨럭……!”
이제 피가 속에서 올라오는지 기침 속에 피가 섞여 튀어나왔다. 그러나 쌍월비환은 개의치 않고 무혼의 얼굴만 보며 대답을 기다렸다.
“세상에서 날 혈랑환검이라 부릅니다.”
“오오, 도제를 이겼다는 자가 너냐?”
“그렇소.”
“큭큭, 개죽음은 아니군. 동생에게 자랑해도 되겠어. 후우, 이제 나를 쉬게 해주겠나? 많이 아프군.”
고개를 끄덕이고 일격에 그의 생을 마감시켜준 무혼은 마법진이 있는 곳으로 되돌아가며 하늘을 보았다.
“오늘 별이 유난히 밝은 것 같군.”
마법진을 깨끗이 없앤 무혼은 다른 자들이 쫓아오기 전에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드디어 별의 주인들이 깨어나기 시작했습니다.”
흐려진 천기였으나 제갈운혜는 많은 수의 별들이 밝아졌음은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그녀의 옆에서 함께 하늘을 보던 제갈단경은 불안한 얼굴을 하고서 눈을 찌푸린다. 그가 수십 년간 익혀온 지식으로도 어찌할 수 없는 운명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다.
“그래, 혜아야! 그를 보니 어떻더냐?”
“제가 흑도의 사람들에 대해서 너무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제 얼굴에 병색이 사라지고 아직은 좀 야윈 듯한 얼굴이었으나 건강한 혈색으로 돌아온 제갈운혜는 하늘에서 눈을 떼지 않고 있었다.
“세상은 왜 백도와 흑도를 나누었을까요?”
“글쎄다…….”
다시 하늘을 보던 제갈단경의 머릿속에 제갈두휘의 모습이 떠올랐다. 요즘 그의 시선을 피하고 어떤 생각에 골몰하고 있는 손자의 모습이 옆에서 지켜보는 제갈단경의 마음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제갈단경의 눈에 가끔 비친 그의 눈빛은 강렬한 뭔가를 담고 있어 그로 인해 주위의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휘아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꼬.’
며칠 후 무림맹을 비밀리 찾아온 사람들이 불도 켜지 않은 지하의 밀실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혈랑성의 주인이 중원으로 나와 있다면서요?”
“그렇습니다. 현재 본 방의 제자들이 그의 행적을 쫓고 있다오.”
머리가 허연 거지가 입을 여니 어둠 속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 외는 아무런 조치도 않고 있소?”
“어찌했으면 좋겠소이까?”
그러자 밀실 안의 사람들은 모두 침묵에 빠져 있었다. 지난날 정사대전에 참가하여 흑도에게 검을 겨누었으나 그 후 일갑자의 시간 동안 자책에 시달리며 살아온 그들이었다.
“이번에도 천기를 거스른다면 다음에는 어떠한 일이 생길지 모르오.”
“이 이상 더 큰일이 생길 수도 있을까요?”
“일갑자 전에 이러한 일이 생길 것이라 생각이나 했었소? 선대에서 결정한 일이긴 하나 명을 따른 우리 역시 그 책임에서 벗어나지 못하오.”
그러자 밀실은 다시 조용해졌다. 평생을 걸쳐 무공만을 익혀온 사람들이었지만 그들도 지금의 상황을 더 악화시킨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알기에 섣불리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한동안의 침묵을 깨고 한 사람이 입을 열었다.
“그래, 제갈세가에서는 뭐라고 하시오?”
“제갈세가의 가주는 때가 될 때까지 문파와 제자들을 좀 더 다듬고 일어날 일에 대비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소.”
“허어,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 : 사람이 제 할 일을 다 하고 그 결과는 하늘에 맡겨라)인가.”
“그럼 지금 중원에 나온 혈랑환검은 그냥 놔두자는 말이오?”
“그렇소이다.”
“어째서? 저번에 그가 중원으로 나왔을 때는 그토록 잡고자 하더니 이제 와서…….”
“신성들이 각성할 시기라 더 이상 손을 쓸 수 없다 하였습니다.”
“신성들의 각성이 벌써 일어났소이까?”
이제껏 역사에 없던 일이었다. 천기가 인위적으로 많은 젊은이들로 하여금 무공에 대한 각성을 불러일으키는 이상한 일이 지금 중원에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이럴 때 혈랑성의 움직임을 방해한다면 어떠한 일이 생길지 모른다더군요.”
“으음.”
표정들이 무거웠다. 그들의 선대가 시작했고 그들이 참여해 만들어 놓은 이 상황을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어린 무인들이 풀어가야 한다는 것에 마음이 갑갑했던 것이다.
“그저 바라볼 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단 말이오?”
그러자 그때까지 조용히 앉아 있던 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만일 전면전이 된다면…….”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었으나 그는 천장을 볼 뿐 누구에게도 눈길을 돌리지 않았다.
“우리는 모두 죽음을 각오하고 그 애들을 지켜내야 할 것이오. 그러나 그 애들의 대리전이 된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들에게 사죄를 하는 일밖에 없을 듯하오.”
“후우.”
한 사람이 한숨을 토해놓자 모두들 허탈한 표정으로 눈앞의 탁자를 내려다보았다. 그들은 아무런 결론도 내리지 못하는 스스로의 모습이 한심하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