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남녀 73화
무료소설 이계남녀: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2,148회 작성일소설 읽기 : 이계남녀 73화
073 운명과 만남(3)
한 시진이 지났을 때 식사를 마친 무혼은 중손면인과 중손수연 그리고 예소소와 함께 정원으로 나가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한동안 말없이 조용히 차만 마시고 있던 적막을 깨며 예소소가 먼저 입을 열었다.
“혈랑성의 주인을 뵙게 되어 기쁩니다.”
“대단할 것도 없는 사람을 환대해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공야 소협.”
“예, 소저. 말씀하십시오.”
“소녀는 감추어진 천기를 다른 사람보다 조금 더 볼 수 있을 뿐입니다. 공야 소협의 미래를 모두 볼 수 있는 능력이 되지 않아 아쉬울 뿐입니다.”
“아닙니다. 예 소저께서는 이 사람을 위해 노력해 주신 것만으로도 감사드립니다.”
예소소는 차를 한 모금 마시며 생각을 정리했다. 오랫동안 전해 주기를 기다리며 숱하게 생각을 정리했지만, 여전히 긴장되고 있었다.
“지금 천기는 백도의 패퇴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흑도만 남는다면 흑도 또한 패퇴 되어 사라질 것입니다. 이미 복수는 막을 수 없지만 흑도와 백도가 공존하는 길이 혈랑성에게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무혼은 가만히 숨을 내쉬었다. 흑도와 백도를 합한다면 수십만이 넘는 무림인들이 있다. 지금 눈앞의 소녀는 자신에게 그들의 운명이 달려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아직은 그러실 것입니다. 아니 앞으로도 계속 알지 못하실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잊지 않으셔야 할 것은 공야 소협이 걸어가시는 길에 중원의 흑도와 백도의 미래가 걸려 있다는 것입니다.”
“…….”
중손세가의 사람들과 중원을 나서면서 이제까지 생각하지 못한 새로운 사실들에 무혼은 곰곰이 생각을 해보았다.
자신이 특별한 존재이고 싶긴 했지만, 아직 특별한 존재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예소소는 생각에 잠긴 무혼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조용히 기다렸다. 그녀의 역할은 알고 있으나 그 길을 걷게 될 무혼의 앞에 어떠한 위험이 있을지는 그녀도 모른다.
그러나 수많은 사람들의 운명을 어깨에 진 사내의 길이 평탄할 리는 없다. 그것을 알면서도 혈랑성의 주인을 그 길로 떠나보내야 한다는 것이 예소소의 가슴을 아프게 하고 있었다.
차를 다시 한 모금 마신 예소소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며칠 뒤 공야 소협께서는 홀로 길을 떠나셔야 합니다. 어렵고 힘든 길이 되시겠지만, 결코 미룰 수 없는 길이며 꼭 걸으셔야 할 길입니다.”
“그 길 위에 무엇이 있을까요?”
“흑도와 백도가 공존할 방법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도와줄 사람들을 만나실 겁니다. 그리고 훗날 공야 소협께서 이끌 흑도의 신성들이 각성할 시기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 시기에 백도의 신성들도 각성할 것입니다.”
이야기를 들은 무혼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그 길이 제가 가야 할 길이라면 가도록 하겠습니다.”
“부디 몸조심하세요.”
3일이 지난 뒤 장원의 문 앞에는 중손세가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고 예소소는 길을 떠날 준비를 마친 무혼을 보고 한 방향을 손으로 가리켰다.
“이제 가셔야 할 시간입니다. 이 방향으로 가시다 보면 자연히 신강으로 돌아가실 때를 알게 되실 것입니다.”
무혼은 예소소를 보았다. 단순한 무공의 실력이라면 천마연무관의 많은 수련생들이 예소소를 능가할 것이다.
하지만 그들도 지금 예소소가 보여 주는 눈을 가지긴 힘들 것이다. 강한 의지가 담긴 눈을 보며 무혼은 그녀의 진심을 느낄 수 있었다.
“예소저가 알려주신 것을 잊지 않겠습니다.”
무혼은 살짝 웃어 보이고서 등을 돌려 걸어가기 시작했다.
점점 무혼의 모습이 작아지자 중손면인은 예소소의 옆으로 다가와 입을 열었다.
“정말 공야 소협을 이렇게 보내도 되겠느냐?”
“그러해야 한다고 천기는 말하고 있습니다.”
최대한 감정을 배제한 목소리로 대답했지만 예소소는 무혼의 등에서 눈길을 떼지 못했다.
죽음이 가득한 길. 혼자가 아닌 흑도, 더 나아가 백도까지 살릴 수 있는 길을 눈앞의 청년이 홀로 등에 메고 가는 것이다.
할 수 있다면 그녀는 무혼과 같이 길을 가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 무혼이 걷고 있는 길에는 그녀의 운명이 없었고 그 누구도 같이 갈 수 있는 이가 없었다.
“아…….”
그녀도 모르게 흘러나오는 목소리에 흠칫 놀랐다. 그와 흑도를 위해서 냉정하게 판단해야 할 그녀가 감상에 빠졌다는 것은 안 될 말이었다.
그러나 그의 뒷모습을 보고 있는 예소소의 눈은 살짝 떨렸고 그녀의 심장은 박동이 느껴질 정도로 강하게 뛰고 있었다.
우아아아아-.
“기습이다!”
“으아아악!”
공야무혼이 예소소가 가리킨 방향으로 길을 걷기 시작한 날, 하늘의 달이 구름에 가려 흐려졌을 때 제갈세가에서 비명 소리와 함께 불길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세가의 위기를 알아챈 제갈세가의 가주인 제갈단경은 그의 애병인 군자검을 쥐고 황급히 마당을 뛰쳐나갔다.
“라마승?”
제갈세가의 무사들과 격전을 벌이고 있는 자들은 황색 가사를 입은 라마승들이었다.
1갑자의 세월 동안 중원을 침범하지 못했던 그들이 서장에서 머나먼 산동성까지 들어와 제갈세가를 공격한다는 것에 의문을 품었지만 우선 적들을 막아야 했다.
쉬이잉!
그의 사혈을 노리며 빠르게 다가오는 석장을 피하고 뒷짐을 쥔 모습으로 제갈세가의 가전보법인 와룡미종보(瓦雲未宗步)를 펼치며 라마승을 향해 미끄러지듯 다가갔다.
공격에 실패했음을 깨달은 라마승이 합장을 하며 몸을 뒤로 물려 피하고자 하였으나 가주의 오른손에 이끌린 군자검이 그의 목을 꿰뚫었다.
“크아아악!”
가주는 멈추지 않고 다시 살짝 허리를 굽힌 뒤 흐르는 물처럼 옆으로 이동하자 서장 라마교의 금나수의 수법인 옥강불영수(玉剛佛影手)로 가주의 목을 노리던 다른 라마승의 손가락이 지나갔다.
써겅!
“으악!”
군자검은 라마승의 팔목을 가르며 지나갔고 고통에 찬 표정으로 각법을 펼치며 제갈단경의 머리를 공격하던 라마승의 목이 갈라졌다.
짧은 시간에 두 명의 라마승을 쓰러뜨린 제갈단경은 목소리에 내력을 싣고 외쳤다.
“당황하지 마라. 모두들 와룡파천검진(渦龍破天劍陣)을 펼쳐 적들을 몰아내라.”
교주가 라마승들과 일전을 벌이는 동안 세가의 여러 곳에서 쏟아져 나온 제갈세가의 노신들과 가주의 직속부대가 난입을 하면서 라마승들이 한쪽으로 몰렸고 제갈세가의 무사들은 검진을 펼치기 시작했다.
가사의 한쪽을 짙은 갈색으로 물들인 라마승이 그들의 모습을 보다 제갈세가의 별채 쪽으로 눈을 돌리며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빌어먹을, 대체 병에 걸린 계집애 하나 잡아 오는 데 시간이 왜 이리 많이 걸리는 거야?”
이제 검진을 발동시키며 천천히 다가서고 있는 제갈세가의 제자들에게 눈을 돌리며 그는 라마승들에게 조용히 전음을 날렸다.
[천천히 후퇴하면서 시간을 끌어라. 그리고 신호를 보내면 최대한 신속히 이곳에서 빠져나가도록 한다.]
같은 시간 제갈세가의 별채에 있던 제갈운혜는 온몸을 휘감는 불안한 느낌을 감출 수가 없었다.
제갈세가의 본당 앞에서 가늘게 들려오는 병장기의 소리는 세가를 공격해 온 자들이 있음을 알려왔다.
본당에서 비교적 뒤편에 위치한 별채라 아직 습격을 받고 있지 않지만 한적한 곳이라 기습을 받게 된다면 위험해질 것이다.
좋지 않은 느낌에 제갈운혜가 힘겹게 문을 열고 나오자 눈앞에 그녀를 향해 달려오는 유모와 제갈세가의 무사들이 보였다.
‘다행이야.’
그들의 모습에 마음을 놓은 제갈운혜가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펑!
순간 그녀를 향해 날아오는 물체가 있음을 감지한 제갈운혜는 몸을 날렸으나 이미 작은 주머니는 그녀의 옆에 터지며 하얀 가루를 피워 올렸다.
‘독분!’
급히 숨을 멈추었으나 이미 흡입을 하였는지 머리가 어지러워지며 속이 메스꺼워졌다.
챙! 챙! 채채챙!
고개를 들어보니 석장을 쥔 라마승들과 달려오던 제갈세가의 무사들이 접전을 벌이고 있는 것이 보인다. 제갈운혜는 곧 정신을 잃었다.
잠시 후 라마승들이 썰물이 되어 빠지듯 제갈세가를 빠져나갔다. 완강히 저항하던 그들이 그렇게 순식간에 빠질 것을 생각하지 못했던 제갈단경은 분노를 억누르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저자들의 정체가 뭔가?”
가주의 목소리에 한 제자가 라마승의 시체를 살펴보고서 대답을 했다.
“라마혈교의 승려입니다.”
서장에는 가장 큰 세력을 형성하고 있는 소뢰음사와 대뢰음사가 있다.
소뢰음사의 한줄기로 그들의 명령을 받고 움직이는 라마혈교가 있는데 손속이 악랄하고 기이한 술법을 가지고 있으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했다.
‘라마혈교에서 무엇을 노리고 이곳을 침범한 것인가?’
그들의 목적이 달성되었기에 물러났을 것이다.
‘실수였다. 마교의 움직임에 모든 신경을 집중하다 이렇게 허를 찔리다니…….’
그때 뒤에서 다급히 경공으로 달려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가주님 큰일 났습니다.”
그가 고개를 돌려보니 내당을 지키는 무사였다. 그런데 옷이 엉망으로 찢겨 있었으며 입가에서는 한줄기 선혈이 흐르는 것이 보였다.
“무슨 일이냐?”
“운혜 아가씨가 납치되셨습니다.”
“무엇이?”
제갈단경은 입을 쩍 벌리며 놀랬다. 안전한 곳에서 머물렀던 그녀가 어떻게 납치가 되었단 말인가?
“그게 무슨 소리냐? 자세히 말해 보아라.”
“라마승들이 공격이 시작된 직후 운혜 아가씨를 모셔오고자 다른 사람들과 함께 별채로 달렸습니다. 그런데 그곳에 라마승들이 나타나 일부는 저희를 막고 일부는 운혜 아가씨를 납치해 갔습니다.”
그 말에 가주는 눈썹을 꿈틀거렸다.
“그놈들의 목적이 혜아였다는 말이냐? 즉시 무림맹에 전서구를 띄워 혜아가 납치되었다는 것을 알리고 도움을 요청하라. 그리고 상휘는 있느냐?”
그러자 제갈 세가의 한 무사가 가주 앞으로 뛰어나오며 허리를 숙였다.
“소손 제갈상휘, 여기 있습니다.”
“혜아의 옷에 만리향이 뿌려져 있다. 너는 설청묘(雪靑猫)를 데리고 세가의 제자들과 함께 그들을 추격하라.”
설청묘는 눈처럼 부드럽고 파란색의 털을 가진 고양이다. 사람의 말을 잘 알아듣는 영물로 제갈세가에서 사용하는 만리향의 냄새에 민감하여 추적 및 추격에 많이 동원되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제갈상휘가 다른 제자들과 함께 설청묘가 있는 후원으로 몸을 날리자 제갈단경은 라마승들이 물러난 하늘을 보며 두 손을 부르르 떨었다.
“혜아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제갈세가의 이름을 걸고 네놈들을 결코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으응.”
제갈운혜가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는 아침의 해가 떠오르기 시작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낯선 곳이었고 주위에는 라마승만이 보였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그러자 황색의 가사를 입은 라마승이 씨익하고 웃더니 음산하게 입을 열었다.
“나의 사승께서 서장으로 네년을 초대했다. 영광으로 생각하고 도망칠 생각은 버리는 것이 좋을 것이다. 네가 마신 독분은 우리 라마교 비전의 독이라 중원에서는 해독할 수 없는 것이니 도망친다면 네년의 목숨은 오래가지 못할 것이다.”
그러면서 품속에서 자그마한 약병을 꺼내어 조그만 알약을 꺼냈다.
“이 약은 네년의 몸속에 있는 독의 발작을 줄여주는 역할을 한다. 이 약을 하루에 한 알씩 먹지 않으면 독이 곧 온몸에 퍼져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그 말을 마친 라마승은 작은 알약을 하나 꺼내어 제갈운혜에게 건네주었다.
제갈운혜는 말없이 약을 받으며 라마승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흉폭해 보이는 얼굴에 눈 속에서 간교함이 느껴진다. 그리고 그의 눈빛에서 그녀가 서장으로 간다면 다시는 중원 땅을 밟지 못할 것을 알 수 있었다.
‘방법을 찾아 탈출해야 해.’
라마승들은 두 사람이 멜 수 있는 널찍한 판자에 제갈운혜를 태우고 경공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그녀가 오래전에 얻은 독과 라마혈교의 독이 제갈운혜로 하여금 무공을 사용하기 어렵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제갈운혜는 라마승에게 끌려가며 주위를 자세히 살폈다. 그녀의 머리에서는 수많은 계책이 떠올랐으나 어떠한 계책도 지금 사용할 수 없었다.
‘무슨 방법이 있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