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남녀 6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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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2,163회 작성일소설 읽기 : 이계남녀 68화
068 복수(2)
베트란의 두 번째 상대는 9군단의 고위 장교인 레아존 백작이었다.
“네놈이 아무리 대단하다고 하지만 나 역시 그렇게 만만치 않을 것이다.”
9군단에서 상위의 검술 실력을 지닌 상대를 보며 베트란은 차가운 눈초리를 한번 주었을 뿐이다.
레아존 백작은 마음을 진정시켰다. 그 역시 검술 하나로 군단의 높은 지위까지 오른 자이다.
아이누켈처럼 쉽게 당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베트란을 노려보았다.
두 사람을 본 결투 심사관이 결투의 시작을 선언하자 두 개의 검이 거세게 부딪쳤다.
베트란보다 20cm가 더 큰 레아존 백작은 그의 키에 어울리는 덩치를 가지고 있었고 다루는 검 역시 바스타드 소드였다.
‘이 녀석의 힘은 나와 거의 비슷하다.’
원래 호레이스는 레아존 백작과의 결투를 마지막으로 하라고 권했었다. 그도 9군단의 맹장인 레아존의 명성을 익히 들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다른 자들이 아이누켈의 결투 이후로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자 복수의 쾌감을 빨리 맛보고 싶었던 베트란이 쉽게 만날 수 있는 레아존에게 결투를 신청했다.
“나에게 결투 신청을 한 것을 후회하게 만들어주지.”
레아존은 이를 모두 드러내며 집요하게 베트란을 쫓기 시작했다.
그러나 베트란 역시 레아존의 빈틈을 노리며 검을 날리는 데 집중하고 있었다.
챙! 챙챙! 촤악!
몇 번의 검이 오고 가면서 레아존의 허벅지에서 핏줄기가 솟아올랐다. 과감하게 달려들던 그의 허점을 놓치지 않고 베트란의 롱소드가 파고들었던 것이다.
“으아아!”
하지만 깊게 찌르지 못했고 흥분한 레아존은 괴력을 내기 시작했다.
바스타드 소드로 베트란의 전신을 노리자 순식간에 베트란의 온몸에 검의 잔상이 생기기 시작했고 베트란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레아존의 검을 주시하며 롱소드로 막아냈다.
‘그래, 이 느낌… 힘이 더 필요해. 더욱 강력한 힘이…….’
레아존의 피가 흩날리는 것을 보며 베트란은 복수를 꿈꾸고 있었고 그런 베트란의 귀에 소곤거리듯 들려오는 소리가 있었다.
‘힘이 필요하나?’
‘응?’
그때 얼굴을 향해 날아오는 바스타드 소드를 쳐내며 베트란은 주위를 살짝 둘러보았으나 그에게 말을 건 사람은 찾을 수 없었다.
‘잘못 들었나?’
‘힘이 필요하나?’
귀에서 울리는 소리는 다시 들려왔고 베트란은 그 목소리를 향해 되물었다.
‘누구냐?’
‘나는 복수의 마신 콜레나루트. 너는 내가 빙의하기에 충분한 조건을 갖추었다. 나의 힘을 사용하겠느냐?’
베트란은 이 목소리가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 있었다. 바로 이 목소리에 응하게 되면 마인이 되는 것이다.
게다가 37마신 중 하나라니, 중급 마족의 힘을 받아들여 마인이 된 자들은 보았지만, 아직 마신의 힘을 받은 자는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었다.
‘다시 물어보겠노라. 나의 힘을 사용하겠느냐?’
레아존이 휘두르는 검을 막아내며 베트란은 잠시 망설였다. 그러나 곧 결정을 했다.
어차피 복수를 시작한 이상, 강력한 힘이 있다면 더욱 화려한 복수가 가능할 것이다.
또한, 어둠의 연맹군에서 마인이 되었다는 것이 결코 불명예스러운 것도 아니었고 오히려 마신의 선택을 받았다면 명예롭게 생각해도 되었다.
‘마신이시여, 제의를 받아들이겠습니다.’
‘좋다, 이제 너는 나의 대리인이 되었으며 나의 힘을 중간계에서 사용할 수 있는 자격이 있음을 인정하노라.’
‘영광입니다, 마신이시여.’
곧 베트란의 온몸에서 검은 기류가 소용돌이치듯이 뿜어져 나오자 갑작스러운 사태에 레아존은 당황하여 물러섰다.
“블랙 블러디?”
아니었다. 베트란의 눈이 온통 붉은색으로 물들어가자 레아존은 그의 상태를 알 수 있었다.
“마인?”
그러나 레아존은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마족의 힘을 일부 끌어다 쓰는 마인의 능력은 보통 레아존이나 베트란의 검술 실력의 수준까지 힘을 끌어올려 준다.
하지만 레아존이나 베트란의 경우에는 굳이 마인의 힘을 불러내지 않아도 본신의 실력이 이미 중급 마족을 매개로 한 마인의 힘과 필적한다.
물론 중급 마족이 직접 인간계로 나온다면 말이 달라지겠지만 마인은 어차피 그들의 힘의 아주 작은 부분밖에 사용할 수 없기에 이미 강력한 검술을 몸에 지니게 되면 마인의 힘이 굳이 필요가 없다.
‘그렇다면 뭔가 특이한 능력이 있는 마족의 힘을 사용하기 위해서?’
레아존은 한층 신중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인의 힘이야 두려울 것이 없었지만 특별한 능력을 지닌 마족의 힘을 사용하는 마인은 꽤나 까다로웠다.
‘그래도 별다를 것은 없다.’
베트란의 허점을 노리며 그를 주시하던 레아존은 곧 자신의 생각을 수정해야 했다. 베트란이 갑자기 빠른 속도로 검을 부딪쳐 왔고 그 검을 막은 레아존이 뒤로 길게 밀려났기 때문이다.
챙!
“뭐, 뭐야?”
그러나 베트란이 입에 웃음을 가득 띤 채 말없이 검을 휘두르자 다시 한번 바스타드 소드에 그의 힘을 모두 쏟아 부딪쳐갔다.
채애애앵!
검을 통해 느껴지는 막대한 힘에 레아존은 멀리 튕겨나야 했다.
7미터 정도 날아가다 바닥에 구른 레아존은 재빠르게 몸을 일으키며 자세를 잡았으나 이미 눈앞으로 다가온 베트란이 그를 차올리자 그대로 몸이 공중에 떠오른 레아존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대체 이 힘은 뭐냐?’
오른팔을 길게 휘둘러 베트란을 그에게서 떨어뜨리고 롱소드를 막고자 하였지만 튕겨 난 것은 바스타드 소드였다.
그리고 등에 길고 뜨거운 느낌이 전해져왔다.
‘안 돼!’
등에 입은 가격으로 땅에 처박힌 레아존이 필사적으로 몸을 피하고자 하였지만 이미 몸을 통제할 수가 없었고 단지 하늘을 향해 몸을 돌렸을 뿐이다.
그리고 그는 눈앞으로 급속히 다가오고 있는 검을 보았다.
“안 돼에에에!”
푸욱!
마지막 비명 소리를 끝으로 롱소드는 그의 머리를 꿰뚫고 지나갔고 거대한 그의 몸에서 튕겨 나온 피가 베트란의 온몸을 적셨다.
“흐흐흐.”
통쾌했다. 그리고 즐거웠다. 그토록 마음에 들던 베르노의 죽음 이후로 느껴보지 못했던 감정들이 베트란의 속에서 마음껏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그래, 이 힘이라면 어떤 적이라도 처치할 수 있다.’
온몸을 나른하게 만들어주는 몽롱한 느낌이 싫지 않았다.
한동안 음산한 웃음을 짓던 베트란이 고개를 들었을 때는 이미 눈에서 붉은색이 사라졌다.
그리고 베트란은 말없이 롱소드를 허리에 차고서 그 자리를 떠나기 시작했다.
계속 피바람을 일으키며 동맹군의 귀족들 사이에 공포로 등장한 베트란은 오늘도 결투의 상대를 베어버리고 돌아가고 있었다.
“베트란 군단장.”
베트란이 고개를 돌려보니 젊은 시절부터 오랫동안 알고 지낸 친구인 로카런 자작이었다.
“오랜만이군. 로카런 정책유관, 잘 지냈나?”
“정말 오랜만이라고 생각하면 좀더 기뻐해 주면 안 되나?”
그의 말에 베트란은 살짝 웃어주었다.
철학자이자 정치가이며 현재 동맹군 정책조사부의 일원이기도 한 로카런은 오래전부터 베트란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었다. 그리고 지금도 베트란과 가장 친한 친구다.
“내 숙소로 가는 게 어떻겠나?”
베트란의 이야기에 로카런은 뒤를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흥미 있는 얼굴로 베트란을 쳐다보았다.
“왜 그러나?”
“자네 많이 변했군.”
그 말에 베트란은 다시 슬쩍 웃어주었다. 복수극을 시작하고 마신의 힘을 받아들이면서부터 스스로 변하고 있다는 것을 확실히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굳이 설명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 베트란이 숙소로 향하자 그의 성격을 알고 있는 로카런도 말없이 그를 따라갔다.
숙소에 도착한 두 사람이 한참 술을 같이 마시고 있는데 베트란은 고개를 들더니 로가런을 보았다.
“그런데 자네가 그냥 날 보기 위해 온 것은 아닐 것이고 무슨 일인가?”
“좋지 않은 생각이 들어서 왔네.”
“무슨 생각인데?”
“만일 이 전쟁에서 우리가 이기면 어떻게 될 것인지 생각해 봤네. 자네는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그러자 베트란은 손에 쥐고 있던 술잔을 입가에 대더니 단숨에 들이켰다.
“글쎄? 마신들께서 신계를 정벌하시고 어둠의 천하가 되는 것이 아닌가?”
그 말에 로카런은 고개를 흔들며 베트란을 보았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나?”
“깊게 생각해 본 적이 없군. 난 군인이야. 그리고 우리가 전쟁에서 이기게 된다면 마신들께서는 신계를 멸망시킬 수 있다고 하셨으니 마신천하가 되는 것이 맞겠지.”
“군부에서는 그렇게 알고 있는 것인가?”
그러자 베트란은 로카런을 보며 슬쩍 웃었다. 그리고 대답을 했다.
“알 수 없지. 사실 군부의 수뇌부들은 광신도들일세. 그들은 마신들께서 전쟁에 대한 명령을 내렸기에 전쟁을 수행하는 것이고 또 전쟁의 승리만 생각하고 있을 뿐 승리의 결과가 무엇인지는 관심이 없는 자들이야.”
그 말에 로카런은 씁쓸한 눈빛으로 베트란을 보았다.
“전쟁 후의 상황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는 말인가?”
“그렇지. 우리는 군인이야. 지휘관들이 독립적으로 행동하는 것 같아도 그것은 적을 공격한다는 명분이 있어야 가능하네.
이번에 내가 독단적으로 군단을 움직였어도 수뇌부나 동맹국들의 왕의 모임인 ‘암흑의 종’에서 흐지부지 처리된 이유는 적인 모레스 성을 공격했기 때문이네.”
“하지만 동맹군이 전쟁에서 승리를 했을 경우 세상이 어찌 될지 안다면 생각 바뀌게 될 것일세.”
“무슨 말인가?”
로카런은 술잔을 탁자에 내려두고 진지한 얼굴로 베트란을 보았다.
“우리가 승리를 한다면 가이오스트 대륙은 멸망하게 되네.”
그 말에 베트란은 로카런의 얼굴을 가만히 보았다.
“왜 그런지 물어봐도 되겠나?”
“이 세상에 신계가 파괴되고 마계만 존재하여 마신천하가 되면 세상의 균형이 유지되지 않아 세상의 모든 것이 무너지게 되는 것이지.”
“흠…….”
“베트란, 이것은 중요한 문제일세. 우리가 전쟁에서 이긴다면…….”
그러나 로카런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어느새 그의 귀를 상처 입히고 벽에 꽂힌 롱소드에 놀라서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베트란의 눈이 붉어져 가는 것을 보았다.
“마인… 자네처럼 냉정한 사람이 어째서……?”
“내가 변했다고 자네가 말했지? 그 말이 맞네. 지금의 난 이 전쟁이 계속되어 계속 피를 볼 수 있길 바라고 있네. 그리고 마신을 거역할 생각이라면 내 손에 죽을 각오를 해야 할 걸세.”
이미 동공마저 붉어져 불타는 듯한 모습을 보여주는 베트란의 눈을 보며 로카런은 온몸을 떨고 있었다.
그는 베트란의 냉정한 판단력을 믿고 찾아온 것이었지만 허사였다는 것을 확실히 깨달았다.
“알겠네. 내가 잘못 찾아온 듯하네.”
옷을 챙겨서 문밖으로 나간 로카런은 방안에서 울려 퍼지는 베트란의 광소를 들을 수 있었다.
예전의 베트란을 떠올리던 그는 고개를 좌우로 저으며 안타깝게 중얼거렸다
“이 친구, 어쩌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