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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계남녀 54화

무료소설 이계남녀: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조회 2,257회 작성일

소설 읽기 : 이계남녀 54화

054 모레스 성(1)

 

 

 

 

 

며칠 후 공주의 응접실로 라에뮤 3세가 왕비와 함께 찾아왔다.

 

“어서 오시옵소서, 아바마마.”

 

“그, 그래 잘 지내고 있느냐?”

 

“아바마마의 배려 속에서 평온한 날들을 보내고 있사옵니다.”

 

아이네스에게 미소를 지어 보인 라에뮤 3세는 자신의 앞에 놓인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이유 모를 갈증이 났기 때문이다.

 

그 모습을 옆에서 보고 있는 왕비는 슬픈 표정이었다.

 

“공주야, 할 말이 있는데…….”

 

“예, 아바마마.”

 

“모레스 성의 이야기를 들었지?”

 

“그렇사옵니다.”

 

라에뮤 3세는 눈을 살짝 내리깔며 어렵게 아이네스의 참전과 그 이유를 설명했다. 그리고 이야기를 마치고 몸을 뒤로 기대며 눈을 감았다.

 

그의 얼굴을 보던 아이네스는 참전하기로 마음먹었다.

 

라에뮤 3세의 얼굴과 모습에서 이 말을 하기 위해 얼마나 마음고생을 했는지 짐작할 수 있었고 그가 다른 방법이 없기에 자신에게 어렵게 이야기를 꺼낸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자신이 어릴 때 많이 돌봐주던 고모가 성안에서 목숨을 위협받고 있다고 했다.

 

언제나 당당하고 현명한 왕이었지만 아이네스의 일에 대해서는 팔불출이라는 소리도 감수하며 아버지의 사랑이 무엇인지 보여주던 라에뮤 3세가 며칠 만에 늙은 얼굴이 되어 침울하게 이야기를 꺼낸 것이다. 그리고 혼자서 올 자신이 없자 왕비까지 함께 왔다.

 

‘나는 할 수 있어!’

 

5년 전의 산에서의 전투와 무혼의 눈을 통해 살행도 지켜본 자신이다. 시체들을 봐도 버틸 수 있으리라 믿고서 자신을 얼굴을 보지 못하고 눈을 감고 있는 라에뮤 3세를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어느새 아바마마도 흰머리가 가득하시구나.’

 

처음으로 자신의 아버지가 곧 육십 세를 바라보는 나이라는 것이 느껴졌다. 아이네스는 왕에게 다가가 손을 잡으며 밝은 미소 속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바마마의 말씀을 따르겠사옵니다.”

 

아이네스의 손길을 느낀 라에뮤 3세는 천천히 눈을 뜨더니 힘없이 이야기를 했다.

 

“미안하구나. 이 애비에게 힘이 더 있었다면…….”

 

아이네스는 고개를 저으며 이야기를 했다.

 

“아바마마는 이 나라의 굳건한 기둥이시옵니다. 그리고 수십 년 동안 튼튼히 이 나라를 지켜오셨으며 그 덕분에 평안한 미라크네가 되었사옵니다. 이제 저도 왕족으로서 의무를 하고 싶사옵니다. 아바마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듯하옵니다. 많은 기사들의 보호 속에서 가게 될 것이온데 안전할 것이라 믿사옵니다.”

 

그 말에 라에뮤 3세는 희미한 웃음을 지었다. 그 역시 젊은 날 전쟁터에서 많은 경험을 했다. 그렇기에 결코 안전하다고 말할 수 없었다.

 

사실 난전이 되면 안전한 곳이란 기대하기 어렵다. 그나마 마법사를 보호하고자 기사들이 노력을 하나 해마다 죽어가는 마법사들의 숫자는 결코 적지 않은 것이다.

 

“그렇게 말해 주니 고맙구나.”

 

라에뮤 3세는 고개를 끄덕이고 아이네스의 볼을 토닥여주었다.

 

부드러운 얼굴 그리고 전쟁의 참혹함을 절대로 알 수 없을 그녀의 눈동자를 들여다보며 손을 따뜻하게 잡아준 후 몸을 돌려 말없이 나왔다.

 

“전하께서는 여러 날을 그 고민으로 밤을 새우셨단다. 나 역시 공주를 전쟁터에 보낸다는 것이 싫지만 전하께서도 어쩔 수 없으신 모양이더구나.”

 

잔잔한 목소리로 아이네스에게 말을 건네는 왕비를 보며 아이네스는 그냥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왕비의 눈가에 살짝 어린 이슬이 빛에 반사되어 빛났기 때문이다.

 

왕궁의 정원 한쪽에서 거친 발길질로 나무를 걷어차고 있는 라에뮤 3세가 보였다.

 

“젠장! 빌어먹을! 아들도 아니고 저 가녀린 딸을 전쟁터로 보내야 하다니! 으아아아!”

 

왕인 것이 이때만큼 싫은 적이 없는 라에뮤 3세였다. 그리고 발걸음을 돌려 작전실로 찾아갔다.

 

“루오켈 후작! 지원군을 편성하시오. 그리고…….”

 

루오켈 후작의 팔을 잡은 라에뮤 3세는 눈에 냉기가 어리면서 날카롭게 이야기했다.

 

“아이네스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절대 가만있지 않겠소. 그 아이의 보호를 유념해서 작전을 구상하기 바라오.”

 

처음 겪는 왕의 서슬 퍼런 눈빛과 목소리를 들은 루오켈 후작은 얼굴을 굳히며 고개만 끄덕였다. 그리고 라에뮤 3세는 거칠게 몸을 돌리며 작전실을 나갔다.

 

 

 

 

 

그로부터 5일 뒤 무혼의 일행이 개방과 하오문의 눈을 피해 조심스럽게 달렸을 때 앞을 막는 사람을 만났다.

 

“멈추십시오.”

 

“무명 스님!”

 

넝마 같은 승복을 입고 합장을 하고 있는 사람은 분명 도안이었다. 다시 만나 반가운 얼굴이 될 수도 있겠지만 도안이 소림의 무승이라는 것을 모두 알고 있다. 지금은 무림맹에 쫓기고 있는 그들로서는 자연스럽게 얼굴이 굳어갔다.

 

그러나 도안의 얼굴은 평온해 보인다.

 

‘도통 저 중의 머릿속에는 뭐가 들었는지 짐작을 할 수가 없다니까?’

 

강 조장은 얼굴을 돌려 무혼을 보았다. 전에 도안과 뜻이 통했고 도안과 겨룰 수 있는 사람도 무혼밖에 없었다.

 

풍귀흑각의 눈길을 받자 무혼은 말에서 내려 앞으로 걸어가 합장을 했다.

 

“스님, 왜 우리를 막으시는 겁니까?”

 

무혼이 도안의 눈을 살피니 눈빛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눈을 살피는 그의 모습에 무혼도 긴장을 하며 그의 눈을 마주 보고 있으니 갑자기 합장을 하고 고개를 숙였다.

 

한참 동안 말이 없는 그를 다들 말없이 바라보며 각자 병장기에 손을 댔으나 다시 얼굴을 든 도안은 무혼 일행에게 천천히 입을 열었다.

 

“시주들은 이쪽으로 가셔서는 안 됩니다.”

 

“어째서입니까?”

 

“이 길을 통과한다면 시주들은 신강에 무사히 돌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무혼은 도안이 막고 있는 길의 뒤를 바라보았다. 어떠한 기세도 느낌도 나타나지 않고 있다.

 

“이미 무림맹에서는 시주들이 이 길을 통과하는 것을 알고 있으며 시주들을 잡기 위해 무림맹과 정파의 고수들이 백은(白銀)에 모였습니다. 게다가 도제를 쓰러뜨렸다는 말에 천하의 고수들도 모여들고 있지요.”

 

다들 그의 말에 얼굴이 굳어지고 있었다. 아래는 사천당문, 아미파, 청성파가 있는 사천이고 앞에는 정파의 고수들이 가득히 모였다니 무슨 방법으로 이곳을 돌파하여 총단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강 조장은 그동안 임무를 받고 나오면서 알게 된 길을 더듬어 보았다. 하지만 개방과 하오문의 눈을 피해갈 수 있는 길은 드물었다. 다른 사람들도 다들 나름대로 길을 생각해 보는지 모두들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러나 도안의 다음 말에 모두들 생각에서 벗어났다.

 

“시주님들은 사천의 땅으로 들어가셔서 구채구, 아패, 석집을 거쳐 청해의 감덕, 도난, 격이목을 통해 가십시오. 비록 무림맹의 첩지를 받았을 것이나 이 지역의 작은 문파들은 도제를 꺾은 시주들과 부딪치기를 원치 않을 것입니다. 청해에서 곤륜파의 시선만 조심하신다면 무사히 신강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무혼은 도안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자신과 만난 날, 서로의 뜻을 교환할 때의 그 눈빛 그대로였다. 자연스럽게 무혼의 얼굴에서 미소가 떠올랐다.

 

“감사합니다, 스님.”

 

“그리고 중손세가의 분들도 무사히 모셔다드렸으니 안심하셔도 될 듯합니다.”

 

무혼은 다시 합장을 하며 허리를 숙였다. 이제는 떨리지 않는 그의 눈에서 새로 엿보이는 일렁거림의 의미를 알고 있는 무혼으로서는 손속을 나눠보고 싶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었다.

 

“고맙소. 다음에 보면 내 거하게 술과 안주를 대접하겠소.”

 

강 조장의 말에 빙그레 미소를 지은 도안은 무혼을 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공야 시주와는 또 만나게 될 듯합니다. 가시는 길이 순조롭기를 바랍니다. 아미타불…….”

 

합장을 한 무혼은 걸음을 되돌려 자신의 말에 올랐다. 그리고 아쉬운 듯 입을 열었다.

 

“다음에 보게 될 날을 기다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귀접 9조는 강 조장의 인도에 따라 도안이 알려준 길로 달려갔다. 뒤에 홀로 서서 그들의 모습을 보던 도안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한숨을 쉰다.

 

“내가 잘하는 짓일까? 허나 막는다 해도 나아질 것이 없으니 우선은 혈랑성을 지켜보기만 해야 하는 것인가?”

 

한동안 움직이지 않던 그는 주먹을 부르르 떨더니 온몸에서 기세가 쏟아지며 황금빛의 빛을 발했다.

 

“혈랑의 무위가 더욱 높아졌음이 느껴져 호승심을 참기가 힘들구나.”

 

그는 다시 합장을 하고서 나지막이 불호를 외웠다.

 

“아미타불.”

 

 

 

 

 

보름 전 모레스 성을 돕기 위해 출발한 미라크네 왕국의 지원군은 동맹의 세력과 맞붙어 있는 전선에 가까이 가고 있었다. 아폴라이아 왕국과 리누오스 왕국에서 온 지원군과 합세한 모레스 성의 지원군은 긴 줄을 만들며 진군을 하고 있었다.

 

많은 기병들이 보이는 곳에 아이네스의 얼굴도 보였다. 다른 전투마법사들과 같은 복장을 하고 로브를 두른 아이네스는 멀리서 알아보기가 힘들었다.

 

물론 아이네스에게 마차여행이 더욱 익숙한 것이었으나 마차로 이동을 하게 되면 습격이 있을 때, 우선적인 목표가 된다. 그리고 아이네스 주위에 있는 기병들은 기사들이 기병의 복장을 하고 호위를 하고 있는 것이다.

 

아이네스가 6클래스의 마법사이며 공주이기에 호위들이 에워싸고 있는 것도 있지만 라에뮤 3세의 기세에 눌린 루오켈 후작이 신경을 써서 많은 기사들을 그녀의 호위로 정했다는 것이 더 큰 이유였다.

 

지금 아이네스는 주위를 정신없이 두리번거리고 있다. 어차피 앞에서 가고 있는 기사가 그녀의 말을 인도하고 있으니 아이네스는 말안장에 앉아 있기만 해도 되었다.

 

그녀는 요즘 새로운 풍경을 참 많이 보고 있다고 생각을 했다.

 

“중원에서도 정신없이 달리고 있고 여기서도 하염없이 가고만 있네…….”

 

풍경을 감상하고 있는 아이네스의 머릿속에서 반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 아이네스 소저, 여행을 가는 것인가요?

 

- 와아! 무혼 경. 가이오스트 대륙에 온 것이 오랜만이죠?

 

- 요즘 머나먼 거리를 무리하게 달리고 있어서인지 가이오스트에 오는 것이 드물군요.

 

- 마음대로 되는 것은 아니니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죠. 전 지금 전쟁터로 가고 있어요.

 

- 전쟁터?

 

- 우리나라가 지키고 있는 성에 적들이 쳐들어왔어요.

 

무혼은 곰곰이 생각을 해보았다. 아이네스가 이 세계에서 강력한 능력을 지닌 마법사라는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동시에 공주이기도 하다.

 

아무리 무혼이 무림인이고 왕실에 대해 관심이 없다고 해도 공주가 전쟁터로 나간다는 것은 상상이 되지 않았다.

 

- 아이네스 소저가 왜 전쟁터로 가는 겁니까?

 

- 내가 6클래스의 마법사이기 때문이죠.

 

- 그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아이네스는 그간 사정을 말해 주었다. 그리고 한마디 덧붙였다.

 

- 무혼 경?

 

- 예?

 

- 위험해지면 도와주실 거죠?

 

- 제가 찾아올 수 있다면 언제라도 아이네스 소저를 도와드리겠습니다. 그런데 전쟁터에 가신다면서도 목소리가 밝으시군요.

 

- 무혼 경을 보면서 전쟁에 대한 두려움이 많이 사라졌어요.

 

아이네스는 무혼의 눈을 통해 중원의 많은 풍경도 볼 수 있었지만, 원치 않은 것도 많이 보게 되었다.

 

얼마 전 무혼에게 두 여인을 구하라고 한 적이 있었다. 무혼이 자신이 가장 경멸하는 자들과 같은 모습이 되는 싫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말에 무혼이 따라줬을 때, 사령방이라는 곳에 소속된 자들과의 격돌에서 생각지도 못한 참혹한 장면을 많이 보게 되었다. 피를 뿜고 쓰러지는 사람들, 팔다리가 날아다니는 모습, 그리고 바닥에 흥건히 고이는 피의 작은 웅덩이.

 

아이네스는 처음에는 그 모습에 익숙하지 못하여 헛구역질도 했었지만, 그녀의 생각과 현실이 얼마나 다른 것인지 인정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제 곧 도착할 곳은 전쟁터이다.

 

정신력이 중요한 마법사로서 그런 끔찍한 모습을 처음 봤다면 흐트러진 정신으로 제대로 된 마법을 구사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을 하니 오히려 사령방과의 싸움을 본 것이 잘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눈을 돌릴 수도, 감을 수도 없는 상황에서 자연스럽게 익숙해졌으니 전쟁터에서도 침착할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도제를 베었을 때 그 모습을 아이네스는 담담히 받아들일 수 있었다. 비록 온몸으로 느끼는 또 다른 분위기를 느끼진 못했지만 지금 가진 마음가짐이라면 큰 문제는 아닐 것 같았다.

 

게다가 믿음직스러운 무혼의 대답에 한결 마음이 가벼워진 아이네스는 멀리 보이는 연보라색의 성을 바라보았다. 저 성을 지나게 되면 이제 국경 지역으로 들어서게 된다.

 

‘잘 해낼 수 있겠지?’

 

언제나 새로운 곳은 두려움의 대상이기도 하다. 아이네스는 라에뮤 3세와 왕비, 그리고 그녀의 가족을 떠올리며 다시 한번 마음을 굳건히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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