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남녀 46화
무료소설 이계남녀: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2,320회 작성일소설 읽기 : 이계남녀 46화
046 별을 쫓는 사람들(1)
산동에는 오악(五嶽)의 하나이자 동쪽에 있어 동악(東嶽)이라고도 불리는 태산(泰山)이 있다. 자고로 태산을 오악 중 최고라 하여 내로라하는 시인, 문장가들이 태산에 올라 시를 읊고 바위에 문장을 새기는 일이 종종 있었다.
태산에서 멀지 않는 곳에 거대한 세가가 자리를 잡고 있다. 수많은 건물들이 태산을 바라보며 줄지어 서 있고, 이미 자정이 넘어 어두운 밤, 희미한 불빛이 새어 나오는 창문이 보인다.
끼이이익.
희미한 불빛을 가진 창문이 열리며 소녀의 모습이 나타났다. 고운 선을 가진 얼굴은 매우 핼쑥했고 가녀린 그녀의 손이 짚고 있는 탁자에는 약사발이 비워져 있는 것이 보인다.
소녀는 다시 손을 머리에 대며 그녀의 머리에 감겨 있는 흰 천을 살짝 만져보았다.
“반년 만에 하늘을 보네.”
파리한 입술에서 곱디고운 목소리가 흘러나왔고 하늘을 보는 그녀의 눈은 부드럽게 빛나고 있다.
하지만 아직 힘겨운지 고개를 오래 들지 못하고 다시 숙이며 벽에 몸을 기댄다.
“아가씨, 이렇게 일어나시면 안 됩니다. 반년 만에 겨우 일어나셨는데요.”
“오늘은 사정을 봐줘. 정원에 나가서 하늘을 보고 싶은데 나를 좀 부축해 주겠어?”
좋은 옷을 입었으나 그녀를 상전으로 모시는 중년의 여인은 못 말린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어릴 때부터 별이 가득한 하늘을 보는 것을 좋아하는 그녀의 마음을 잘 알기 때문이다.
“어험.”
“가주님을 뵙습니다.”
소녀를 부축하며 문을 열자 문 앞의 정원에 서 있는 노년의 사내가 보였고 중년 여인은 무릎을 살짝 굽혔다.
“혜아야, 이 늦은 밤 시간에 바람을 쐬면 몸에 해롭단다.”
“할아버지, 시원한 밤공기가 그리워 나온 것이니 너무 탓하지 말아주세요.”
제갈단경은 그의 손녀를 애처롭게 보았다. 어린 몸에 어울리지 않는 능력을 지닌 탓에 이번에 다녀온 여정에서 알려지지 않은 독에 중독이 되었다. 하지만 그녀의 희생 덕분에 함께 갔던 가문의 사람들과 무림맹의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건졌다고 했다.
‘아버지께서는 이 어린 애들이 어떻게 감당하라고 그러셨는지…….’
이미 세상을 뜨고 없는 그의 아버지인 제갈원기를 속으로 원망을 해보는 제갈단경이다. 그는 당시에 마교를 공격하는 것을 반대했었지만 어린 나이였기에 더 이상 손을 써볼 방도가 없었다.
반년 만에 방을 나서는 그녀의 눈을 보니 더 이상 말릴 수도 없어 손녀인 제갈운혜의 왼쪽으로 다가가 부축해 주었다. 그리고 제갈세가 내에서 가장 별이 잘 보이는 정원 가운데에 있는 정자로 데려갔다.
“내가 혜아의 옆을 지킬 테니 자네는 따뜻한 것을 준비해 오게.”
“알겠습니다, 가주님.”
가주의 말에 중년 여인은 공손히 인사를 하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고 제갈단경은 정자 앞에 마련되어 있는 의자에 편안히 앉은 손녀의 몸 위에 이불을 조심스럽게 덮어주었다. 그리고 그도 옆에 있는 의자에 앉아 별이 가득한 밤하늘을 보았다.
편안히 하늘을 볼 수 있도록 만든 의자에 몸을 맡긴 제갈운혜는 할아버지가 덮어준 이불의 온기를 느끼며 눈을 들어 하늘을 보지만 힘이 없는 눈길로는 하늘에 별이 있다는 것만 구분할 수 있을 뿐이다.
시원한 밤공기가 그녀의 뺨을 살짝 어루만져주자 그녀를 괴롭히는 열기가 약해진다.
“하아.”
그녀는 반년 동안 방안에만 지내다가 오랜만에 나와서 그런지 모든 것이 새롭게 보였다.
유모에게서 찻잔을 받아든 제갈운혜는 점차 눈앞이 또렷해지자 다시 하늘을 보았다. 한동안 꿈꾸는 듯 아쉬운 듯 여러 가지 복잡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그녀가 갑자기 눈을 크게 뜬다.
챙-.
그녀의 손에 있던 찻잔이 미끄러지며 바닥에 떨어져 깨졌고 그 소리에 놀란 제갈단경은 손녀를 살펴보았지만 별다른 것을 찾을 수 없었다.
다만 그녀가 눈을 크게 뜨고 하늘을 주시하자 그도 손녀가 보고 있는 하늘을 보았지만 알아볼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무슨 일이 있는 게냐?”
제갈단경은 손녀의 모습에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읽고 말을 건넸다.
“지금 무림에 무슨 일이 있나요?”
“무림에……?”
제갈단경은 머릿속으로 무림맹에서 알려온 일들을 정리해보았다.
“네가 누워 있는 사이에 몇 개의 흑도문파가 멸문을 당했고 마교에서 소규모 무사들이 중원으로 나왔단다. 일단 파견대를 보내 격퇴를 했는데 또 하나의 마교의 무사들이 하북까지 왔다는 것이 알려져 무림맹에서 추격대를 보냈지. 또 그리고…….”
“알려야 해요.”
“응?”
“그가 중원으로 나왔어요. 하북까지 왔다는 마교도들과 함께 있는 것이 틀림없어요.”
“누구 말이냐?”
제갈운혜는 그녀의 할아버지를 보며 창백한 입술을 열고 말했다.
“혈랑성의 주인이요. 그가 하북 지방에 와 있어요.”
“뭣이라?”
제갈단경은 놀란 얼굴을 하고 일어섰다. 하북 지방이라면 제갈세가에서 북쪽으로 달리면 도착할 수 있는 곳이다.
“하북의 어딘지 알겠느냐?”
“아직 몸이 정상이 아니고 멀어서 여기서는 정확히 알 수가 없어요. 그들에게 조금 더 가까이 가야…….”
그러나 제갈단경은 허락할 수 없었다. 반년 만에 겨우 정원으로 나온 아이가 아닌가?
추성자(追聖者 : 별을 쫓는 자)로 태어나 흐트러져 볼 수 없는 천기를 읽는 그의 손녀는 17세의 어린 나이에 너무 많은 고생을 했고 이번엔 죽을 뻔했다. 이 이상 무리하면 목숨을 잃을지도 모른다.
“네 오라비가 무림맹에 있다. 전서구를 보내어 마교 놈들을 잡으라고 하면 될 것이다.”
제갈운혜는 고개를 저었으나 할아버지의 의지가 깃든 눈을 보자 작은 한숨을 내쉬며 다시 하늘을 보았다.
예측할 수 없는 미래에 대한 열쇠를 쥐고 있는 혈랑성이 중원 깊숙이 와 있는 것이다.
‘드디어 혈랑의 행보가 시작된 것일까? 그는 무엇을 원하는 걸까?’
그녀는 슬픈 눈빛을 띠고 혈랑성을 물끄러미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로부터 10일 후 여유롭게 말을 달려온 귀접 9조는 하북 지방의 적성(赤誠)에 도착했다.
“이제 며칠만 더 달려서 승덕에 도착하면 이번 작전을 마치고 총단으로 돌아갈 수 있다. 가는 길은 느긋할 것이다.”
그 말에 모두들 만면에 웃음을 지었다. 특히 초출인 3명의 얼굴은 밝았다. 조원 중 찰과상을 입은 사람이 있긴 했지만 심한 것이 없었기에 한 명의 전사자도 없이 첫 임무를 성공적으로 해내고 있는 것이다.
“첫 임무임에도 기대 이상으로 잘해주었다. 승덕에서도 지금까지 한 것처럼 수행하면 된다. 과연 기대주들이라 다르군.”
그의 말에 초출인 세 사람이 밝은 얼굴로 웃으니 강 조장도 같이 웃어주었다.
적성에 들어간 그들이 객잔을 찾기 위해 움직이고 있을 때 부조장이 입을 열었다.
“표두님, 저곳에…….”
강 조장이 눈을 돌려 본 것은 벽 한쪽에 그려진 마교의 외당에서 사용하는 춘전이다. 보통 사람들이 보기엔 낙서 같겠지만 무혼도 뜻을 알고 있는 춘전이었다.
급(急)!
무슨 일이 생겼다는 뜻이다. 그리고 쓰인 장소와 그 밑의 표식을 보면 귀접 9조에 알리는 내용임이 틀림없었다.
굳은 얼굴로 춘전을 바라보던 강 조장은 잠시 후 무겁게 입을 열었다.
“일단 객잔을 잡는다.”
객잔에서 표사들을 위한 큰 방을 하나 빌린 후 강 조장은 춘전이 알리는 소식을 듣기 위해 거리로 나갔다.
“무슨 일일까? 새로운 임무가 추가되는 것일까?”
“그럴 수도 있고 아니면 목표가 다른 문파로 바뀔 수도 있지.”
옆에서 육호가 편안한 목소리로 말을 꺼내자 식사를 하고 있는 나머지 사람들도 고개를 끄덕인다.
귀접 9조가 식사를 마치고 방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강 조장이 굳은 얼굴로 들어왔다.
“일정이 취소되었다.”
그의 말에 다른 조원들의 얼굴이 모두 굳어졌다.
“취소라면 임무가 끝났다는 것입니까?”
고명우가 옆에 있는 사호에게 묻자 그는 침울한 목소리로 대답을 했다.
“우리에게 좋지 못한 일이 발생했다는 뜻이다.”
잠시 감고 있던 눈을 뜨며 풍귀흑각 강일중은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흑천과 마천의 작전조가 기다리던 무림맹의 파견대와 충돌해 총단으로 후퇴를 했다고 한다. 그리고 무림맹에서 2번의 살행을 한 우리들을 쫓고 있다.”
강 조장은 눈을 돌려 이번에 초출인 세 사람을 보았다.
“이렇게 되어서 미안하다. 우리가 추격대를 교란할 테니 너희들은 따로 움직여서 어떻게든 총단으로 돌아가라.”
그러자 이원풍이 입을 열었다.
“아닙니다. 우리도 천마신교의 자랑스러운 전사들입니다. 어떠한 상황도 두렵지 않습니다.”
“안 된다. 너희들은 청천의 기대주들이다. 무사히 총단으로 돌아가야만 한다.”
“저희만으로 총단으로 도망칠 때 무사히 돌아갈 가능성이 있습니까?”
고명우가 물어보자 강 조장은 착잡한 눈빛으로 변했다.
“아마도…….”
“저는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저희의 행적을 발견했을 정도면 3명이 따로 움직인다 해도 곧 추격당할 것입니다. 그건 다른 한 분과 같이 움직인다고 해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고명우는 잠시 눈을 감더니 숨을 한 번 크게 쉬고는 단숨에 이야기했다.
“귀접 9조가 미끼가 되어주셨는데도 총단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죽게 된다면 그거야말로 개죽음입니다. 차라리 전 강 조장님 그리고 귀접 9조와 함께 10명이 모두 같이 돌아가며 어떠한 일이 생기더라도 마교의 자랑스러운 무사로 남길 바랍니다.”
그 말에 무혼과 이원풍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슬며시 웃음을 보여주자 강 조장과 다른 조원들도 같이 웃었다.
“좋다. 총단으로 같이 돌아가자. 그 누가 우리를 막는다 해도 그들에게 우리가 마교의 최정예 무사들이라는 것을 보여주자.”
“예!”
다음날, 그들은 총단이 있는 신강을 향해 말을 타고 달리기 시작했다. 그동안 무리하지 않고 왔었기에 충분한 체력이 있었고 무림맹의 추격대에 잡힌다면 무사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최대한 빠른 속도로 달리고 있다.
그리고 8일 뒤 산서와 섬서의 경계지역에 있는 작은 마을을 지날 때 부조장이 속삭이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
“표두, 저들은…….”
강 조장이 고개를 돌려보니 골목에 몇몇 거지들이 보였다. 눈빛에 현기가 있는 것이 나름대로 무공을 가진 자들이 틀림없었다.
“개방이다. 그리고 하오문도들도 조심해야 한다. 하오문이 흑도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었다고 하나 지금은 정파의 세상. 하오문의 여러 분타 중 무림맹의 주구가 된 분타도 많을 것이다.”
고개를 끄덕인 귀접 9조는 산속으로 들어가 영천 표국의 표사 복장으로 갈아입은 후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을 산길을 이용해 계속 서쪽으로 달렸다.
무혼과 그의 동료들이 신강을 향해 한창 달리고 있을 때, 가이오스트 대륙을 동서로 양분하는 빛의 세력과 어둠의 세력의 기나긴 전선 한쪽에 자리 잡은 숲속에는 어두운 밤을 이용해 조심스럽게 걸어가는 자들이 있다. 검은색이 들어간 갑옷을 입은 수많은 동맹군의 병사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흰색과 푸른색이 어우러진 성벽이 보이는 곳에서 멈추었고 기사 한 명이 앞으로 걸어와 입을 연다.
“저곳이 모레스 성이냐?”
“그렇습니다, 군단장님. 다시 생각하시는 것이 어떠십니까? 이 작전은 무모합니다. 게다가 적들이 마법사들에 대해 파악을 한다면……?”
“이미 말해 두었다. 정보대가 최대한 정보를 교란할 것이다. 적의 본국 지원군이 도착하려면 얼마나 기다려야 한다고 했나?”
“빠르면 1달 늦으면 2달입니다.”
“2달이라, 그들이 오면 더 이상 머물지 않는다. 지시한 작전에 문제가 없는지 검토를 하라.”
“알겠습니다.”
검은 갑옷을 입고 있는 사람은 멀리 보이는 모레스 성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저 성이 미라크네 왕국이 수비를 맡고 있는 성인가? 우리들의 공격이 저놈들에게는 날벼락이겠군.”
이틀 뒤, 모레스 성은 생각지 못한 손님들을 맞이하게 되었다.
슈우우우~
쾅! 쾅쾅!
“우아악!”
“적이다. 적들이 쳐들어오고 있다!”
넓은 평지를 주위에 두고 있는 모레스 성의 경비병들은 한쪽에서 새까맣게 몰려오는 동맹군의 병사들을 볼 수 있었다.
“성문을 닫고 응전준비를 하라!”
모레스 성의 경비대장은 고함을 지르고서 뒤의 병사에게 중앙에 보고하라 명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