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남녀 42화
무료소설 이계남녀: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2,164회 작성일소설 읽기 : 이계남녀 42화
042 땡추 도안(1)
평요를 뒤로한 그들은 다시 말을 달려 보름 뒤 산음(山陰)이 보이는 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평요에서 한 것을 반복하는 것입니까?”
“그렇다. 이곳을 장악하고 있는 사령방(邪靈幇)이 이번 대상이지. 팔호, 자네 이번에는 내당을 한 번 경험해 보겠나?”
강 조장의 말에 고명우는 고개를 저으며 뒤로 물러섰다. 풍귀흑각의 눈길이 자신에게 오자 무혼과 이원풍도 얼굴을 굳히며 물러선다.
“흐흐, 걱정하지 마라. 내당으로 들어가는 역할은 중원에 여러 번 나온 자들의 몫이니까. 이번 임무를 수행하면서 너희들이 내당으로 들어갈 일은 없다.”
강 조장이 고개를 돌리며 앞으로 나가자 옆에 있는 조원들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강 조장을 따라갔다.
“무공을 익히지 않은 자들을 도륙하는 일이라, 언젠가는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그날이 오지 않았으면 좋겠군.”
말을 툭 내뱉고 그들의 뒤를 따라가는 이원풍을 보고 무혼과 고명우도 한 번 서로 마주 본 후 그 뒤를 따라갔다.
강 조장을 따라 산음으로 들어선 그들은 여정을 풀고자 객잔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사령방이 멀리서나마 보이는 곳에 잡아야 할 것이기에 사령방이 있는 쪽으로 다가갔다.
“여기도 평요와 마을 분위기가 비슷하군요.”
고명우의 말처럼 거리에서 보이는 모습과 분위기는 평요에 처음 들어섰을 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무림맹의 주구가 된 자들의 칼날 아래 있는 마을의 모습은 거의 비슷하다.”
뒤에서 들려오는 부조장의 말에 무혼과 고명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때 무혼의 귀에 울리는 작은 병장기의 소리가 들려왔고 곧 무혼뿐만이 아니라 모두가 들을 정도로 소리는 커져갔다.
“무슨 일이지?”
호기심에 이원풍이 중얼거리며 달려가 알아보고자 하였지만, 강 조장은 손을 들어 말렸다.
“쓸데없는 시비에 휘말리지 마라. 임무가 우선이다.”
그의 말을 들은 이원풍은 아쉽다는 듯 눈길을 한 번 던졌을 때 그들은 소리와 함께 앞에서 달려오는 자들을 볼 수 있었다.
“여자? 게다가 승려까지?”
고명우가 입을 열어 이야기한 것과 같이 두 명의 여인들과 한 명의 승려가 많은 무사들에게 쫓기고 있었다.
“모두 말을 뒤로 물려라.”
강 조장은 그들을 피하고자 하였으나 경공으로 몸을 날리던 여인들이 내력이 부친 듯 귀접 9조에게서 10여 장이 떨어진 곳에 뛰어내렸고 그 뒤를 승려가 보호하듯 뛰어내리며 여인들을 노리는 병장기를 쳐냈다.
지쳐 보이는 중년 여인들의 옷자락이 여기저기 찢겨져 드러나 있는 피부의 여러 군데에 상처가 보였다. 그러나 검을 쥔 손은 아직 검자루를 굳게 잡고 있었으며 눈에서는 결의가 보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앞에서 사령방 무사들의 공격을 막고 있는 승려는 고명우와 비슷한 나이로 보였다. 넝마와 같은 법의를 입은 그는 물이 흐르는 듯한 동작으로 수많은 병장기를 일일이 쳐내며 여인들의 앞에 서 있었다.
삽시간에 그들 주위로 많은 사령방의 무사들이 모여들자 무혼의 일행은 말을 몰아 몸을 빼고자 노력하고 있었으나 살기를 흘리고 병장기를 반짝이며 몰려드는 사령방의 무사들에게 말이 겁을 먹어 다루기가 힘들었다.
‘한 사람을 상대로 온갖 더러운 짓을 다 하는군.’
다른 귀접 9조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곳을 피하고자 말을 다독거리고 있는 무혼은 승려와 여인들을 외면하고자 하였으나 눈앞에서 보이는 광경에 절로 욕지기가 나왔다.
사령방의 무사가 던진 얇은 천으로 된 주머니를 승려가 소매로 쳐내자 소매에 부딪힌 주머니가 터지며 하얀 가루가 휘날려 앞의 무사들에게 다시 날아갔다. 그러자 사령방의 무사들이 질겁하며 소매로 입과 코를 가리며 연기를 피하고 있었다.
“산공분인가 보군.”
고명우의 말에 무혼은 고개를 끄덕이며 인상을 찌푸렸다. 시정잡배들도 아니고 저런 얄팍한 수를 쓰는 자들이 한 마을을 호령하는 흑도 문파의 무사들이라는 것을 믿고 싶지 않았다.
“저건 또 뭐야?”
사령방의 무사들에게 들리지 않도록 목소리를 낮춘 이원풍의 말에 고개를 돌려보니 멀리서 또 다른 사령방의 무사가 쇠로 만든 듯한 그물을 들고 오는 것이 보였다.
‘저들이 정녕 흑도의 인물이라 부를 수 있는 자들인가?’
무혼은 마음속에서 고개를 저었다. 눈앞에 보이는 사령방의 무사들은 자신이 숱하게 벤 철겸방의 쓰레기와 같은 자들이다.
그러는 동안 싸움에서 빠져나온 일행이 소란스러운 곳을 피하기 위해 말 머리를 돌렸을 때도 무혼은 그 싸움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 어머? 무혼 경, 이게 무슨 일이죠?
- 아이네스 소저, 앞에서 무림인들끼리 시비가 붙었습니다.
- 무림인들끼리? 지금 내 눈에는 두 숙녀를 노리는 불량배들과 숙녀들을 지키는 대머리 아저씨… 가 아니라 대머리 젊은이밖에 안 보이는데요? 그런데 젊게 보이는데 어찌 저렇게 대머리일 수 있을까? 무혼 경, 그냥 보고 있을 건가요?
- 저와 제 일행은 해야 될 일이 있습니다. 저 하나의 생각으로 전체의 일을 망칠 수는 없습니다.
- 세상에… 난 무혼 경이 기사도가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도 못 해봤어요. 무혼 경, 우리나라의 기사들은 그래도…….
끊임없이 자신에게 불평을 쏟아내는 아이네스의 말은 무혼이 아무리 생각을 해보아도 틀리지 않았다. 자신도 못 본 척하며 지나가기가 이렇게 힘들지 않은가?
만일 임무 중이 아니었다면 이미 승려를 도와 사령방의 무사들을 도륙하고 있을 터였다.
하지만 임무를 수행 중인 자신 마음대로 도와줄 수는 없었다.
‘오늘 아이네스 소저의 말을 무시했으니 나중에 무슨 일이 생길까?’
속으로 한숨과 함께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다시 싸우는 모습을 보는데 주먹을 내지르고 있는 승려와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무혼의 온몸에서 전율이 흐르고 감각이 들끓기 시작한다.
‘고수!’
무혼의 몸을 감싸는 이 느낌은 상대가 상당 수준까지 무공을 쌓은 자라는 것을 느끼게 하였다. 중원에 나와 처음 만나는 자신보다 더 강할지도 모를 자였다. 호기심이 생긴 무혼은 말고삐를 당겨 말의 움직임을 멈춘 채 승려의 움직임을 유심히 보았다.
승려도 무혼의 시선을 느낀 듯 사령방의 무사들과 권을 나누는 와중에도 무혼을 예리한 눈길로 살펴본 후 귀접 9조의 일행들을 훑어보더니 입가에 웃음을 한 번 띄우고 눈을 돌려 여인들을 보호하기 위해 주먹을 뻗고 있었다.
“표두님, 소림사의 승려인 듯합니다. 티를 안 내려고 하지만 간간이 나오는 기세는 소림사의 것이 틀림없습니다.”
나직이 들려오는 사호의 말에 강 조장도 동의를 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빨리 자리를 떠나자는 손짓을 했지만 무혼의 전음 한마디에 움직임을 멈추었다.
[저 승려. 고수입니다. 조금 전 우리를 자세히 훑어보았을 때 우리의 무공 실력과 내력을 가늠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고수로 느껴지지 않는데? 저 쓰레기들을 상대로도 고전하고 있지 않나?]
[살생을 피하고 있기 때문인 듯합니다. 저 많은 자들을 상대로도 단 한 명도 죽이지 않고 있습니다.]
무혼의 설명에 강 조장은 눈길을 돌려 승려의 움직임과 그의 주위를 자세히 보았다. 세밀히 살피는 그의 눈에 보이는 모습은 무혼의 말이 옳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땅에 늘씬하게 뻗은 상태로 미동조차 없는 자들도 있었지만, 얼굴을 보니 죽은 자들은 없었던 것이다.
[승려의 실력이 어느 정도라 생각되나?]
[최소한 저와 비슷하다고 보셔야 합니다. 저보다 고수라면 저도 승려가 어느 정도의 실력인지 정확히 가늠하기가 힘듭니다.]
무혼의 대답에 강 조장은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이번 무술대회에서 우승한 무혼의 실력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도 무혼과 겨루게 된다면 필패할 것이다.
쌍귀선과 화룡마편을 꺾은 무혼은 몇 년 내 풍귀흑각보다 훨씬 높은 서열로 올라갈 것이 확실했고 무혼이 귀접 9조의 최고수라는 것을 누구도 부정할 수 없었다.
[과대평가한 것은 아닌가?]
[아닙니다. 패하지 않을 자신은 있지만 냉정하게 이야기해서 확실히 이길 수 있다고 말을 할 수는 없습니다.]
‘제길.’
일행 중에 무공 수위가 가장 높은 무혼과 비슷한 자라면 귀접 9조의 실력을 모두 간파했을 것이라는 무혼의 말은 틀릴 가능성이 없다고 봐야 한다.
아무리 내력을 갈무리했다고 하지만 상대를 의식해 내력을 가라앉히지 않는 한 그들보다 고수의 눈을 피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승려를 지금 죽여야 하나?’
풍귀흑각은 문제에 대한 해결책으로 이 자리에서 승려를 없앨 생각을 해보았지만, 그것은 자칫하면 다른 문제를 부를 수가 있었다. 사령방을 도와 저 승려를 없애려 할 때 만일 승려가 본 실력을 드러낸다면 그들도 모든 실력을 드러내어야 한다.
마교의 무사들이 가진 특유의 마기를 뿌려대며 상승의 무공을 사령방에게 보인다는 것은 이번 작전의 실패를 의미한다.
‘그렇다면 사령방의 무사들이 승려를 죽일 수 있을까?’
강 조장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지금 당장 하늘이 두 쪽 나는 것보다 힘들 듯했다. 분명 지금은 승려가 수세이고 밀리고는 있다.
하지만 그것은 뒤에 있는 두 여인을 보호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만일 승려가 그녀들을 포기했다면 단신으로 충분히 뿌리치고 빠져나갔을 것이다.
그래서 그가 숲으로 뛰어든다면 그들이나 사령방의 무사들로서는 영영 잡지 못하게 될 게 뻔하다. 그 후 승려가 무림맹으로 돌아가 사령방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다면 표사의 옷을 입은 10명의 흑도 고수들의 이야기도 빠질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무림맹은 사령방을 몰살시킨 우리를 쫓겠지. 휴… 별수 없이 일단 자리를 벗어나도록 도와주고 기회를 봐서 없애야 하나?’
아무리 생각해 봐도 다른 방법이 떠오르지 않자 마음을 정한 풍귀흑각은 조원들에게 전음을 날렸다.
[모두들 승려와 여인들을 도와 일단 이 자리를 벗어난다. 각자 정파의 무공을 하나씩 익히고 있겠지? 이 자리에서는 마교의 무사들이라는 것이 드러나면 안 된다.]
[옙!]
조원들의 전음을 모두 확인한 강 조장은 앞을 보며 입을 열었다.
“이곳의 패자이신 사령방의 분들께서 무림인이라고는 하나 상처 입은 여인들과 승려를 어찌하여 많은 수로 핍박하시오? 게다가 한 지역의 패자답지 않는 얄팍한 술수까지 사용하다니 부끄럽지 않으시오?”
누가 들어도 알 만큼 질책과 비아냥이 담긴 목소리로 내뱉은 강 조장의 말에 사령방의 한 무사가 도를 휘두르며 한걸음 나와 험악한 얼굴로 소리를 쳤다.
“떠돌이 표사 주제에 죽고 싶으냐? 어디서 헛소리야?”
쐐앵!
오호가 말에서 뛰어내리며 말하고 있는 자를 스치고 지나갔다.
“건방지다.”
그러나 사령방의 무사는 오호의 말에 대답할 정신이 없었다. 그가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몸을 내려다보니 입은 옷이 갈라지고 피가 뿜어져 나오는 것이 보였고 말을 하고자 하였지만, 목에서는 공기가 빠지는 소리만 나며 바닥에 힘없이 쓰러진다.
“끄르르륵!”
털썩.
“너, 너희들, 우리가 누군지 아느냐?”
“잘 알지. 자신보다 강한 자를 만났을 때 언제라도 죽을 각오가 되어 있는 무림인이지!”
부조장의 말에 무혼의 일행이 빙그레 웃음을 띠자 멍하게 그 모습을 보던 사령방의 무사 중 한 명이 정신을 차리며 입을 열었다.
“저 자식들도 한패다. 죽여라!”
그 말이 끝나는 동시에 귀접 9조의 무사들은 일제히 말에서 뛰어오르며 사령방 무사들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무혼은 승려와 여인들이 있는 곳을 향해 뛰어들었다.
사령방의 무사들이 병장기를 휘두르며 막는 것을 보고 있는 무혼의 입가에는 미소가 띄워졌고 머릿속에서는 아이네스의 응원 소리가 들렸다.
- 역시! 무혼 경! 전 무혼 경을 믿었어요. 멋져요~. 꺄아.
아이네스는 이야기 속의 한 장면을 직접 보는 듯하자 기쁨에 찬 소리를 질렀다. 멋진 기사들이 기사도와 명예를 위해서 싸우는 모습이 기대되었던 것이다.
비록 무혼의 일행들이 갑옷을 입지 않았고 기사 서약도 하지 않았지만 수많은 사악한 무리로부터 숙녀들을 보호하고 기사도를 지키는 듯한 상황은 그녀로 하여금 소녀의 동경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였다.
며칠 전에 싸웠다던 박진감이 있었다던 사악한 무리들을 응징하는 모습을 보지 못했던 것이 내심 아쉬웠던 아이네스였다.
- 저도 기쁩니다.
아이네스의 이야기에 대답을 한 뒤 검로를 따라 공기를 가르는 소리를 들으며 무혼은 만족스러운 눈빛을 하고 중얼거린다.
“생각보다는 원활하게 다루어지는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