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남녀 32화
무료소설 이계남녀: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2,187회 작성일소설 읽기 : 이계남녀 32화
032 내 안의 그대(2)
사실 무혼의 잘못도 아니기에 화를 더 낼 만한 구실이 없었던 아이네스는 침대에 앉으면서 다시 물어보았다.
‘하나만 물어볼게요. 혹시 몇 해 전 습격을 받을 때 도와주신 적이 있나요?’
앨리가 다치고 자신은 납치되어 죽을 뻔한 그때의 기억은 아직도 머리에 남아 있었다. 그때 자신의 몸을 움직여 위기에서 벗어나게 해준 사람이 혹시 무혼이 아닐까도 했었지만, 꿈속의 사람이라는 생각에 그럴 리가 없다며 머리를 흔든 아이네스였다.
하지만 그도 자신을 보고 있었다면 가능성이 있었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어본 것이다.
‘산 위에서 검은 복장을 하고 아이네스 소저를 위협했던 자들 말입니까?’
‘예, 맞아요.’
‘그때 마음대로 몸을 움직여서 미안합니다. 아이네스 소저가 다치면 저도 무사하지 못할 것 같은 느낌에 무리하여 움직인 것인데 큰 실례가 되었는지요?’
‘역시… 고마웠어요.’
‘아닙니다. 그 외 제가 잘못한 것이…….’
‘저도 무혼 경이 살고 있는 곳에서 실수한 것이 있으니 다른 건 그냥 덮어두기로 해요.’
‘그래도 되겠습니까?’
‘예, 그리고 이렇게 내 눈을 통해 보게 된다면 미리 알려주셨으면 해요. 저도 무혼 경의 눈을 통해 보게 된다면 미리 알려주겠어요.’
‘명심하도록 하겠습니다. 정말 이제까지의 일을 다 그냥 덮어주시겠습니까?’
그 말에 아이네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작은 두 주먹을 꽉 쥐고 대답했다.
‘난 이 나라의 공주예요! 공주의 명예를 걸고 맹세하죠!’
‘알겠습니다. 저 역시 제 검에 걸고 맹세를 하겠습니다.’
아이네스는 이 맹세가 얼마나 후회할 일인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다시 생각해 봐도 저지른 일이 많은 무혼은 내심 안심을 할 때 눈앞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이제 돌아갈 시간인가 봅니다.’
‘어두워지나요?’
하지만 한동안 기다려도 무혼에게서 대답을 듣지 못한 아이네스는 옷을 갈아입고 식사를 하러 아래로 내려갔다.
새벽에 눈을 뜬 무혼은 검을 들고 공터로 나가 검술을 계속 연마하기 시작했고 웃통을 벗은 무혼의 몸에 흐르는 땀이 아침 햇살을 받아 반짝이며 공중을 노닐자 그는 수련을 멈추었다.
땀으로 흠뻑 젖은 몸을 씻으러 냇가로 발걸음을 옮기던 무혼의 머릿속에서 아이네스의 말이 떠올랐다.
“내가 그렇게 지저분한가?”
주위에 있던 친구들과 비교하면 그렇지는 않았다. 하지만 누나나 다른 여자들을 생각해 보면 확실히 남자들보다 깔끔했다.
“그럼… 이것으로 씻으면 되는 건가?”
자신의 주머니에 들어 있던 솔잎과 꽃잎들로 채워진 작은 망(罔)을 쥐고 물속으로 들어갔는데 전보다 상쾌한 느낌이 들어 무혼의 입에서 흥얼거리는 소리가 절로 났다.
물에서 나와 옷을 입은 무혼이 생각에 잠긴 듯한 모습을 보이더니 문득 긴 한숨을 내쉬며 옆에 있는 나무에 머리를 두들기고 주먹으로도 나무를 쳤다.
“후- 이렇게 내 몸으로 돌아올 줄 알았다면 여자들만 들어갈 수 있는 곳도 많던데 들어가 볼걸…….
몸을 단장하라며 여러 군데를 알려주던 엘라드의 권유가 새삼 생각이 나는 무혼이었다.
“꺄아아아악!”
아이네스 공주가 돌아오고 이제는 평온을 되찾은 미라크네 왕궁의 한쪽에 있는 9별궁에서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이네스 공주의 침실 옆에 있던 한 시녀가 옆에 있는 시녀에게 말을 건넸다.
“그 백작 자제님도 업혀 갔니?”
“아니, 그래도 하인들의 부축을 받아서 돌아갔다던데?”
“전의 후작 자제님보다는 낫네. 그런데 우리 공주님 시집갈 수 있을까?”
“글쎄?”
무사히 왕궁으로 돌아온 후 자신의 마법 실력이 부쩍 늘었다는 것을 알게 된 아이네스는 몹시 즐거웠었다.
아직 마나의 부족으로 마나석이나 마법진의 도움 없이는 6클래스의 마법을 펼칠 수 없었지만, 이론적으로 6클래스의 마법 수식을 이해하는 아이네스는 5클래스의 마스터와 6클래스의 유저의 자리에 당당히 올랐다.
하지만 그것이 공주에게 있어 불행의 시작이기도 했다. 처음에는 그 사실을 축하하며 기뻐하던 라에뮤 3세도 전혀 생각지 못한 문제에 그녀의 마법 실력이 고민거리가 되었다.
“오늘의 대화는 화기애애했었어.”
“예…….”
“오늘은 없는 애교까지 다 사용했었다니까.”
“예…….”
“하아… 자기 발로 걸어서 가긴 했대?”
“그렇지 않은 것으로 아옵니다.”
아이네스는 머리를 감싸며 침대에 드러누웠다. 마법을 시전할 때 선명히 떠오르는 길. 그 길 뒤에는 7클래스도 언뜻 보이는 듯했다.
이제 마나만 충분히 다룰 수 있다면 어느 때인가는 7클래스에 도달하는 날이 올 것이라 생각했고 자신이 꿈꾸며 생각했던 장밋빛 인생이 더욱 완벽해졌다고 믿었다.
‘그런데 도둑 길드 마스터라니… 게다가 엘프의 숲을 불태웠었다고?’
“앨리…….”
“예.”
“나, 시집갈 수 있을까?”
“…….”
앨리는 좋은 방법을 생각해 보았지만 찾을 수 없자 답답했다. 이미 귀족들의 사교계에 아이네스에 대한 경악스러운 소문이 무성하다는 것을 알고 있던 그녀는 자신이 모시는 공주에게 안타까운 눈빛을 보내며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소드 익스퍼트들을 후려치고 왕궁의 벽을 뛰어넘을 수 있는 검술 실력을 지닌 도둑 길드의 마스터 그리고 붉은 눈을 하고 붉은 기운을 뿜어내며 엘프의 숲을 불태운 5클래스 마스터 공주님이라는 소문을 어떻게 해야 수습할 수 있을까?’
공주가 5클래스의 마스터 마법사라는 소문과 함께 퍼진 이 소문들은 다소 과장된 면이 없지 않으나 귀족 자제들에게 경악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했다.
공주가 한숨을 내쉬고 있을 때 미라크네 왕국의 다른 곳에도 속으로 한숨을 내쉬는 사람이 또 있었다.
“벌턴 후작, 자네를 보니 예전에 격렬했던 전투가 생각이 나오.”
“영광이옵니다, 전하. 전하의 옆에서 싸웠던 그때의 기억은 아직도 저에게 자랑스러운 추억이옵니다.”
“그때 후작의 모습은 용맹한 사자 바로 그것이었소.”
“황공하옵니다.”
라에뮤 3세는 속으로 심호흡을 하면서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후작의 아들들도 후작의 용맹성을 닮았다는 말을 자주 들었소. 두 아들이 모두 그렇게 용맹하다면서요?”
“송구하오나 그렇지는 않사옵니다, 전하.”
“하하, 그럴 리가. 여러 무투대회에서 그들의 용맹성이 널리 알려진 것으로 아는데 겸손이 지나친 것 같소. 하하.”
벌턴 후작의 등에서는 식은땀이 한줄기 흐르고 있었다. 그는 라에뮤 3세가 아들에 대한 이야기를 왜 꺼내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왕이 맡기고자 하는 공주는 왕국의 최정예 왕실 기사들을 일격에 쓰러뜨리며 유유히 돌아다녔다는 소문이 자자한 아이네스 공주다.
특히 최근에 퍼진 소문에서는 그녀가 시집와서 부부싸움이라도 한다든지 아니면 전처럼 발작을 일으켜 붉은 기운을 퍼뜨리며 검을 휘두르고 5클래스의 마법을 쏘아댄다면 공주의 남편은 절대 살아남지 못할 것이고 공주가 머무는 성은 풍비박산(風飛雹散)이 날 것이라고 했다.
“제 아들들이 어미를 닮았는지 심장이 약하옵니다. 송구스럽사옵니다.”
라에뮤 3세는 눈가를 파르르 떨었다. 벌턴 후작의 얼굴을 보니 자신이 할 말을 눈치챈 것이 틀림없었다.
“벌턴 후작, 나와 그대가 그렇게 소원한 사이였소?”
“그, 그것이 아니오라…….”
“심장이 약한 아들들이 여러 무투대회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고 그대의 영지에서 병사들을 이끄는 기사들이 되었소?”
“그저 운이 좋아서…….”
라에뮤 3세는 후작을 노려보았으나 후작의 얼굴에는 절대로 밀릴 수 없다는 의지가 엿보이고 있다.
‘이 사람 집안에도 들여보내기는 힘들겠군.’
‘당연하지요, 전하. 우리 집안이 망하는 꼴을 보고 싶으십니까? 다른 공주님이었다면 몰라도 아이네스 공주님은 절대로 안 되옵니다.’
눈빛만으로 이야기를 주고받던 라에뮤 3세와 벌턴 후작의 신경전은 왕의 패배로 끝났다.
“허허, 심장이 약하면 어쩔 수 없는 일이지오.”
“송구하옵니다.”
속으로 다시 한숨을 내쉰 라에뮤 3세는 무겁게 입을 열었다.
“심장을 치료하고 있소?”
“이리저리 알아보고는 있사온데 아직 이렇다 할 방법을 찾지 못했사옵니다.”
“그렇소? 갑자기 과인이 좀 피곤하군요. 다음에 이야기를 계속하도록 합시다.
“알겠사옵니다.”
벌턴 후작이 집무실 문밖으로 나가자 왕의 입에서 신음 소리 비슷한 소리가 나왔다.
“빌어먹을… 흠흠.”
주위에 있던 시종들이 놀라는 눈빛으로 보자 잔기침으로 목을 가다듬은 라에뮤 3세는 시종장에게 말을 건넸다.
“소문을 듣지 못했을 귀족은 없을까?”
“…….”
“다른 나라에서도 알게 된 것이 확실한가?”
“그렇사옵니다.”
“공주가 돌아온 지 한 달도 되지 않았다. 그런데 어떻게 이 나라의 모든 귀족들과 다른 나라의 왕실들이 공주에 대한 소문을 알고 있다는 말인가? 소문을 퍼뜨리며 돌아다니는 자라도 있다는 것이냐?”
왕이 굳이 대답을 원해서 물어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는 시종장은 조용히 서 있었다.
라에뮤 3세의 입장도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시집가기에 부족함이 없어 걱정을 하지 않았던 아이네스가 갑자기 혼삿길이 막히게 되자 직접 귀족들과 이야기도 나누어보고 있지만, 소문의 여파가 너무 크다.
게다가 20세에 이미 5클래스 유저가 된 아이네스이기에 나라의 큰 힘이 될 공주를 외국으로 시집을 보낼 수 없다 하여 외국과의 혼담도 거절한 상태였다.
물론 왕의 권한으로 귀족 집안을 골라 시집을 보낼 수 있지만 그렇게 되면 왕실의 권위와 공주의 명예에 문제가 된다. 결국, 천장을 바라보며 왕은 혼잣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어디 귀먹은 귀족 하나 안 나타나나?”
“새로 불어난 소문은 속바지 차림으로 성벽을 넘고 가정집에서 강도질을 하였으며 지방 남작의 바람둥이 아들을 전기로 온몸을 통째로 구워 지금 집에서 기지도 못하게 만들었고 미라쉘든의 한쪽 거리가 공주님의 싸움으로 거의 무너져 내렸다는 것이라고 하옵니다.”
아이네스는 6클래스의 마법 책을 덮고 하늘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며칠 사이에 그 많은 사고를 도대체 어떻게 친 것이지?’
아이네스에 대한 소문은 누가 의도적으로 퍼뜨리는 것인지 그칠 줄을 모르고 계속 커지고 있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있는 아이네스는 그저 황당할 뿐이었다.
“앨리, 난 전격마법은 사용할 줄을 몰라. 그런데 어떻게 내가 전기로 사람을 구웠다는 거야?”
“같이 있던 엘라드라는 사람이 한 행동도 모두 공주님이 하신 것처럼 소문이 돌고 있는 듯하옵니다.”
아이네스는 무혼에게 어떻게 이럴 수가 있었냐며 따지고 싶지만, 공주의 명예를 걸고 한 맹세 때문에 속앓이만 하고 있었다.
그렇게 자포자기한 아이네스와 공주로부터 자신에 대한 소문의 모든 것을 알아 오라는 지시를 받은 아이네스의 시녀장 앨리는 이제 덤덤히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지금 아이네스는 9별궁의 정원에 한 잔의 차와 한 권의 마법 책을 가져다 놓고 앨리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 그리고 그녀도 요즘 9별궁을 지키는 기사들의 눈빛이 변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하아, 전에는 나와 눈빛만 마주쳐도 얼굴을 슬쩍 붉히던 인간들이…….’
이젠 얼굴이 굳어지면서 긴장을 하고 있는 것이 눈에 훤히 보였다.
하지만 앨리가 모아온 소문을 듣고 있으면 기사들이나 자신과 맞선을 본 후 혼자서 걸어가지 못한 귀족 자제들의 심정이 이해 갔다.
소문을 들은 맞선 당사자로서는 아이네스의 마음에 들지 않아야 할 텐데 신분상 앞에서 무례를 범할 수도 없고 말실수를 하여 공주가 기분이 나빠지면 전기에 노릇하게 구워 버릴 테니 얼마나 속으로 긴장을 하고 있었을까?
한 번은 궁금증에 못 이긴 아이네스가 왕궁의 의사에게 몰래 물어보니 극도의 긴장이 풀리면서 다리도 함께 풀린 것이라고 했다.
2시간에 가까이 웃으며 대화를 나누고 공주가 자리를 떠날 때 서서 배웅을 하던 귀족 자제들이 아이네스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는 순간 주저앉았다는 것이다.
그 말을 하는 의사의 다리도 떨리고 있는 것을 보였다.
“하아, 한숨만 늘어나네. 뭐 귀족 자제들이야 그렇다고 친다지만 기사라는 사람들이…….”
공주는 멀지 않은 곳에 경호를 위해 서 있는 두 명의 기사들에게 눈길을 던졌다. 공주의 중얼거리는 소리와 함께 못마땅해하는 얼굴을 본 기사들의 얼굴이 하얗게 변해가는 게 보인다.
“간이 콩알만 하기는, 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