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남녀 31화
무료소설 이계남녀: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2,270회 작성일소설 읽기 : 이계남녀 31화
031 내 안의 그대(1)
“여기가 화도환의 마을이지… 실제로는 처음 와 보는군.”
무혼은 주위를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마을의 작은 객잔 옆에는 검게 그을린 자국이 있었고 그 옆에는 객잔에서 내놓은 탁자와 의자들이 보였다.
불에 탄 자국을 슬며시 외면한 채 바깥 탁자에 자리를 잡고 앉아 차를 마시기 시작했다.
“오호, 이놈이 다시 이곳을 왔어.”
차를 마시며 한 식경 정도가 지나자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혼은 싱긋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옆에 둔 나무 지팡이를 쥐고 일어섰다.
뒤돌아보니 기다리던 화도환 패거리였고 무혼은 느긋한 걸음으로 그들의 앞에 서 있었다.
“기다리고 있었다. 내 사지를 어떻게 한다고? 과연 그럴 실력이 있는지 궁금해서 왔다.”
화도환은 자신의 앞에 서 있는 무혼을 유심히 보았다. 검도 아니고 나무 지팡이를 쥐고 있는 것이 검을 뽑을 가치도 없다는 뜻으로 느껴졌다.
“이, 이놈…….”
“잠깐! 네놈은 탈혼흑림으로 떨어졌을 텐데? 어떻게 나왔지?”
소원산은 궁금하다는 듯 물어보았지만 무혼은 피식 한 번 웃어주고서는 대답을 했다.
“걸어서 나왔지. 날 보면 분시(分屍)할 것처럼 이야기하더니 막상 날 보니 다들 굳었나?”
“젠장, 검도 아닌 지팡이로 우리를 상대하겠다니. 오늘 저놈을 다시는 기지도 못하게 만들어 버리자.”
화도환 패거리 8명이 일제히 자신의 병기를 뽑아 들고서 무혼을 향해 쇄도해 가자 무혼은 자신의 손에 있는 지팡이를 쥐고 방위를 밟으며 달려갔다.
‘응? 느낌이…….’
20여 년 동안 휘둘렀던 검로(劒路)였지만 지금 가는 길은 어딘가 다르게 느껴졌다.
‘이것이 아니야. 내가 갈 검로는… 이것이다.’
미세한 차이지만 이제까지 휘둘러오던 검로가 아닌 자신의 눈앞에 보이는 검로를 따라 무혼이 지팡이를 휘두르자 화도환 패거리들은 알 수 없는 압박감을 느껴야 했다.
탱!
무혼의 지팡이는 강천패가 휘두르는 귀두도의 옆면을 세차게 치고 옆차기로 그의 등을 찬 뒤 소원산의 청겸(靑鎌 : 푸른 낫)을 피해 어깨를 두들기자 두 사람은 바닥을 굴렀다.
“하하하, 맞은 뒤에 나려타곤(懶驢打滾)을 펼치는 것이냐?”
하지만 바닥에 쓰러져 있는 강천패는 자신의 오른팔을 흔드는 거센 진동에 귀두도를 놓치지 않기 위해 온 힘을 다하느라 대답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다.
무혼이 눈앞에 보이는 검로를 따라 계속 발걸음을 옮기며 지팡이를 휘둘러 가자, 화도환의 패거리들은 그의 일 초를 막지 못하고 바닥에 구르기 시작했다.
“으으윽, 빌어먹을…….”
화도환은 정신없이 뒤로 물러서고 있었다. 며칠 전에 제대로 된 무공을 펼치지 못하고 도망만 다녔던 무혼과 너무 다르다.
지금의 무혼이 펼치는 무위는 화도환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드는데 충분했고 무혼이 차가운 눈으로 화도환을 노려보자 그의 몸이 떨리고 있다.
화도환은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이미 그의 친구들은 바닥에 널브러져 간간이 신음 소리만 내고 있고 무혼이 화도환과의 거리를 좁혀갔다.
주춤주춤 뒷걸음질을 치던 화도환은 무혼이 속도를 높여 지팡이를 날려 오자 입술을 깨물며 판관필로 부딪쳐갔지만, 다음 순간 그는 판관필이 산산이 부서져 흩날리는 모습을 보게 되었고 하늘과 땅이 뒤집히며 땅이 그의 얼굴로 다가오는 것을 멍하게 보고 있다.
“끄악.”
“다음에 또 한 번 그따위 소릴 한다면 그때는 기지도 못하게 만들어주겠다.”
바닥에 쓰러진 화도환과 그의 친구들을 뒤로 한 채 무혼은 발걸음을 옮겨 자신의 마을 쪽으로 향했다.
며칠이나 말도 없이 집을 나왔으니 집에서는 걱정하리라는 마음이 걸음을 재촉한다.
그날 저녁 무혼이 집으로 돌아오자 무혼의 어머니까지 뛰어나오셨다.
“혼아야, 그동안 어디를 갔었느냐?”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어보는 공야패에게 무혼은 할 말이 없었다. 서역에서 여자의 몸으로 여행을 했었다는 말을 어떻게 한단 말인가?
하지만 심각해 보이는 무혼의 모습을 본 공야패는 입을 다물고 더 이상 묻지 않았다.
“후… 내 방이 역시 좋군. 그런데 내가 본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 많은 혼돈 속에서 떠오른 하나의 길…….”
방으로 돌아온 무혼은 자신에게 있었던 일들을 생각해 보았다. 고통마저 잊게 해준 그 길. 그리고 화도환 패거리와 대결을 할 때 보였던 검로.
침상에 누워 곰곰이 생각을 하던 무혼은 자신의 검을 쥐고 집 뒤의 공터로 걸어왔다.
혈랑검을 뽑고서 자세를 잡은 뒤 검을 휘두르자니 모든 것이 새롭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어쩐지 지금 검을 휘두르면 후회하게 될 듯했다.
다시 검을 검집에 넣은 무혼은 서서 눈을 감고 생각을 해보았다. 끝도 없이 계속될 것 같은 검로가 눈앞에 펼쳐졌고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할지도 보이기 시작했다.
“혈랑검무(血狼劍舞)!”
이제까지 수만 번 되뇌며 펼쳐왔지만 공야패는 무혼의 검무에 항상 고개를 저었었다. 혈랑검법이 일정 수준의 경지에 도달하게 된다면 자연스럽게 구사할 수 있다는 혈랑검무가 눈앞에 떠오르자 무혼은 입을 열어 천천히 읊으며 검을 뽑기 시작했다.
“혼탁한 세상을 바라보던 혈랑의 발걸음이 시작되고,
굳센 혈랑의 이가 세상을 향해 드러난다.
성난 혈랑이 벼락을 뿜으며,
날카로운 발톱으로 거짓된 하늘을 깨트리자
혈랑의 친우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어
그 하늘의 모든 것을 호쾌하게 끊어내니
피의 향기는 코끝에 아홉 번을 맴돌다 가는구나.
눈을 들어 타오르는 태양을 바라본 후
혈랑은 하늘로 돌아가더라.
혈랑초출(血狼初出)
낭아무비(狼牙武備)
혈랑벽력(血狼霹靂)
낭조파천(狼爪破天)
군랑만소(?狼萬?)
쾌랑단천(快狼斷天)
혈향구회(血香九回)
낭안관일(狼眼貫日)
혈랑귀천(血狼歸天)”
혈랑검법 9초식으로 이루어진 검무를 마치고 천천히 검집에 검을 넣으며 무혼은 미소를 지었다.
“기억이 나는 순간부터 외우고 있었지만, 이제야 그 뜻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구나.”
무혼은 자신의 손에 있는 혈랑검을 다시 보았다.
혈랑성검 공야좌성. 자신의 선조이자 혈랑검법의 창시자인 그가 남긴 두 자루의 혈랑검 중 한 자루이다. 그리고 무혼은 그가 왜 이 검을 혈랑검으로 남겼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분은 네가 혈랑검법을 위해 태어났음을 아셨구나. 혈랑검법 속에서 너는 가장 빛나 보인다.”
혈랑검을 쓰다듬으며 마음을 가라앉힌 무혼은 자신의 방으로 돌아와 침상에 누웠다. 오늘 자신이 따라간 검로를 계속 떠올리던 무혼은 중원으로 돌아온 첫날 밤을 맞이했다.
“이게 뭐야? 피부가 다 상했네.”
무혼의 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제는 어색하지 않은 아이네스의 목소리를 들으며 슬쩍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그의 눈앞이 밝아오자 앞에는 아이네스의 얼굴이 보였다.
‘엉?’
하지만 자세히 보니 전신거울에 비친 아이네스의 모습이었다.
“대체 왜 이렇게 안 씻는 거야? 아~ 속상해!”
아이네스는 자신의 모습이 엉망이고 몸에서 냄새까지 나자 어젯밤에 도착한 여관에 목욕물을 준비시켰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에 부딪히게 되었다.
고급 여관이라 하녀들이 있지만, 자신의 몸을 함부로 맡길 수가 없는 공주의 신분상 어쩔 수 없이 아이네스가 스스로 씻을 수밖에 없었다.
평소 시녀들의 시중을 받으며 편안하게 목욕을 했던 아이네스는 혼자 씻는 것이 익숙하지 않아 꽤 애먹었다.
“대체 며칠이나 안 씻으면 이런 몰골이 되는 걸까?”
늦잠을 자고 조금 전에 일어나 샤워를 하고 온 공주는 자신의 얼굴과 팔을 매만지며 불평을 쏟아내고 있다.
‘흐음, 안 씻을 수도 있는 것이지. 그런 것을 가지고 뭘…….’
“응? 꺄악! 누구세요?”
‘누가 들어왔나?’
무혼은 순간 긴장을 했다. 지금 보이는 곳은 여관의 고급 객실인 듯한데 이곳을 뚫고 들어올 무단침입자가 있다면 공주의 실력으로 피하기 힘들 것이다.
“당신, 누구냐고요!”
무혼이 보니 공주가 방안을 이리저리 두리번거리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지만, 눈앞에 보이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고 보니 난 다른 사람 말을 못 들었는데?’
공주가 들었다면 자신도 들어야 하는데 자신의 귀에는 다른 사람 말이 안 들려오자 이상하게 생각을 했다.
“나도 당신 말고는 다른 사람 말은 안 들린다고요. 누구냐니까?”
‘어라?’
그러고 보니 자신이 생각하는 말에 아이네스가 대답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아이네스 소저, 제 말이 들립니까?’
“들리니까 묻잖아요!”
‘아, 놀라시지는 마십시오. 저는 공야무혼이라는 사람으로서 결코 나쁘거나…….’
“무혼? 설마… 그 무혼 경?”
쿵쿵쿵!
“아이네스, 무슨 일이니?”
문 뒤에서 들리는 소리는 제노드의 목소리였다.
“오라버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방에서 비명 소리가 들렸었는데?”
“벌레가 갑자기 날아와 놀라서 지른 거예요. 고마워요, 오라버니~.”
갑자기 애교에 가득 찬 아이네스의 목소리를 들은 제노드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식사 준비가 다 되어 있으니 내려와서 식사를 하는 게 어떠냐?”
“곧 내려갈게요.”
문 앞에서 발소리가 나면서 기척이 멀어져 간 것을 확인한 아이네스는 작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언제부터 보고 있었죠?”
‘조금 전 피부가 상했다는 말을 할 때부터 보기 시작했습니다.’
그 말은 들은 아이네스는 살짝 안심을 했다. 조금 전에 일어나서 샤워를 했는데 다행히도 그건 안 본 모양이었다.
‘그러면 내가 이때까지 무혼 경의 눈을 통해 중원을 봤듯이 무혼 경도 이제 내 눈을 통해서 이 세계를 보게 되는 건가?’
그녀의 생각을 들은 무혼도 놀라면서 입을 연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혹시 이때까지 꿈을 통해서 내 생활을 보고 있었습니까?’
‘어머, 내 생각이 들려요? 아, 아니 그걸 어떻게 알았죠?’
‘나 역시 수년 동안 아이네스 소저의 눈을 통해서 왕궁 생활을 보고 있었기에…….’
그 말을 들은 아이네스는 정신이 멍해졌다. 그리고 조금 전에 무혼이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 생각났다. 하지만 오늘 자신의 이름을 부른 사람은 방금 온 제노드 왕자밖에 없다.
‘언제부터 보기 시작한 거죠?’
‘그게 10살이 될 무렵부터입니다… 혹시 아이네스 소저도 그렇습니까?’
‘예에…….’
아이네스는 더 이상 생각하기가 싫어졌다. 자신이 그 무렵부터 이 남자를 쭉 보아오면서 보게 된 많은 풍경이 머리에 스치고 지나갔다. 그리고 이 남자가 봤을 것들이 많이 떠올랐다.
‘이게 뭐야…….’
무혼도 나름대로 고민에 빠져 있었다. 가끔이라지만 자신이 봤듯이 아이네스도 낮에 자신이 한 모든 것을 봤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시 물어보았다.
‘혹시, 며칠 사이에 제 몸으로 움직인 일이 있습니까?’
‘예, 무혼 경도 그런가요? 그럼 엘프의 숲까지 오게 된 것은 무혼 경이 하신 거예요?’
‘그렇습니다. 혹시 불편하게 되셨다면 미안합니다.’
다시 두 사람은 잠시 침묵에 휩싸였다. 아이네스는 곰곰이 생각을 하니 화가 나기 시작했다.
물론 무혼이 잘못한 게 아니라는 것은 알지만 화가 나는 것은 화가 나는 것이다.
‘다른 것은 다 그렇다고 쳐요. 그건 묻지 않겠어요. 대체 왜 제대로 씻지 않는 거예요?’
‘예, 예?’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요? 당신 몸에 갔을 때도 몸에서 나는 냄새 때문에 고생을 했는데, 내 몸으로 돌아와서도 또 고생을 했다고요. 아무리 남자라지만 제대로 씻고 다니세요!’
‘아, 아. 미, 미안합니다.’
‘당신 옷에 당신의 누나가 준 씻는 도구가 있어요. 이제부터 매일 깨끗이 씻도록 하세요!’
‘알겠습니다. 꼭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