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남녀 17화
무료소설 이계남녀: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2,108회 작성일소설 읽기 : 이계남녀 17화
017 엘라드(1)
이제 해가 저물고 무혼은 좁은 골목길로 들어가 불량배들이 터를 잡고 있을 만한 곳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한참을 돌아다니다 어느 허름한 골목길을 지나가고 있는데 무혼의 귀에 들리는 소리가 있었다.
“용서해 주시오…….”
“이 망할 영감탱이, 비켜. 이 더러운 꼬마 계집애가 내 옷을 이렇게 망치다니 옷값 대신 끌고 가서 팔아버릴 테다.”
“훌쩍. 죄… 죄송해요.”
어두운 골목에서 호통을 치는 목소리와 애원하는 목소리가 섞여서 들려오고 있었다. 주위를 보니 자주 있는 일인 듯 사람들이 슬쩍 한 번 보고는 못 본 척 지나가고 있다.
‘찾았다.’
무혼이 골목을 기웃거리자 희미한 달빛 아래로 한 노인과 그의 손녀로 생각되는 꼬마 여자아이가 보였다. 그들은 앞에 있는 3명의 건장한 사내들을 보며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고 노인은 여자아이가 끌려가지 않도록 자신의 몸으로 막고 있었다.
‘휘두르는 주먹을 보니 외가무공을 익힌 자들이군. 그런데 어찌 무공이 전혀 없는 사람을 저리도 심하게 괴롭히는 거지? 교두에게서 듣던 것보다 더 쓰레기 같은 놈들인가 보구나.’
무혼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특히 자신의 어머니가 무공이 없기 때문에 무공이 없는 자를 괴롭히는 놈들은 특히 싫었다.
그곳으로 다가서니 모두들 고개를 돌려 무혼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년, 넌 뭐냐?”
다짜고짜 욕부터 입에 담는 사내의 물음에 대답 없이 가까이 가니 무혼의 모습이 달빛 아래 비쳤다. 무혼이 노인의 앞을 막고 나서자 사내들의 눈매가 가늘어진다.
“오호, 반반한 얼굴인데? 네년이 대신 벌을 받겠다는 거냐?”
“네년이라면 갚을 방법이 많겠군. 크크크.”
그들은 무혼의 모습을 훑어보며 음흉한 웃음을 짓기 시작했다. 대답하기가 어색한 무혼이 말없이 롱소드를 둘러싼 천을 풀고서 손잡이를 잡자 사내들은 눈에 이채를 발하며 입을 열었다.
“어디서 주워들은 이야기는 있는 모양이군. 이 정신 나간 여자는 자기가 무슨 이야기 속의 기사인 줄 아나 봐. 크크크.”
“하긴 너무 손쉬워도 재미없지. 역시 반항하는 맛이 있어야 한다고. 흐흐흐…….”
그들은 무혼이 롱소드를 뽑자 자신들도 각자 숏소드를 뽑으며 한마디씩 했다. 평소 길드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검술 솜씨를 가졌다고 자랑하던 그들에게 눈앞의 당돌한 여자는 너무나 가소로운 상대다.
“이봐. 저 고와 보이는 몸에 상처를 입히지 말라고 그냥 적당히 손봐주는 게 좋아.”
한 사내가 그 말을 하며 무혼에게 숏소드를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직선적인 검법에 무혼은 그 검의 궤적을 살핀 후 그의 움직임이 흐트러질 부분에서 검을 튕겼다. 그러자 사내의 자세가 흔들리고 무혼은 망설이지 않고 옆구리로 검을 날렸다.
자신의 눈으로 따라잡기 힘든 쾌검에 정교한 자세로 검을 휘두르자 옆구리가 베어진 사내는 경악의 눈빛을 하며 나뒹굴었다.
“으악!”
“검술이다. 저 여자 검술을 익히고 있어!”
“제길, 조심해!”
무혼의 날카로운 검술을 보았지만, 집에서 얌전히 검을 익혔을 여자보다는 피가 흩날리는 숱한 싸움터를 지나온 자신들이 방심만 하지 않는다면 이기리라 생각하며 사내들은 동시에 무혼의 양쪽에서 검을 휘두르며 덤벼들었다.
무혼은 그들의 검의 궤적을 보고 혈난보로 몸을 놀리며 공격을 피했다.
검은 항상 잘 관리한 듯 그들의 숏소드는 약간의 빛에서 반짝이고 있었지만, 검의 실력과 검의 상태는 비례하는 것은 아니었다.
한 사내의 뒤로 돌아간 무혼은 그의 오른쪽 어깨로 검을 밀어 넣었고 사내는 고통에 앞으로 밀리다 벽에 부딪히며 쓰러졌다.
“끄아아아!”
다시 몸을 돌리며 마지막 남은 사내의 다리를 향해 휘두르자 그는 숏소드로 막으면서 뒤로 물러났다. 무혼은 그의 동작을 놓치지 않고 몸을 날리며 오른쪽 가슴을 찔렀다. 그러자 그자도 오른쪽 가슴을 관통당한 채 뒤로 밀려나며 벽에 부딪혔고 무혼이 검을 뽑자 앞으로 쓰러졌다.
“으으으으.”
순식간에 쓰러진 세 명의 사내는 그들의 상처를 부여잡고 무혼을 질린 눈으로 보고 있었다. 기사라 하더라도 자신들을 이렇게 간단히 쓰러뜨리지 못할 거라 자신했던 그들이기에 그 충격은 더욱 커 보였다.
‘훗! 수백 년간 내려온 혈랑검법을 십수 년간 연마한 이 몸이다. 마구잡이로 배운 검술을 몸에 지닌 너희들과는 격이 달라.’
무혼은 그들을 보면서 씩 웃고는 롱소드를 검집에 넣었다.
“죄송합니다. 다시는 이러지 않겠습니다.”
사내들은 검을 다시 검집에 넣는 그의 행동과 그의 웃음에 내심 안도를 하며 용서를 빌었지만 무혼은 계속 미소를 지으며 그들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무혼의 무자비한 구타가 시작되었다.
‘교두들이 가르쳐 준 것을 실험해 봐야겠군.’
퍼퍽. 콰직. 와지끈.
“끄아아아아아!”
밟을 때는 철저히 밟아야 한다는 가르침에 따라 무혼은 교두들이 가르쳐 준 3대 신공을 펼치기 시작했다.
아픈 데 골라서 때리기. 때린 데 또 때리기, 간간이 깨워가며 때리기를 펼치자 세 명의 사내는 아무 말 없이 온몸에 붉은 기류를 휘날리며 눈까지 붉게 물들이고 인정사정없이 패는 무혼이 너무 무서워졌다.
특히 잠시 기절했을 때 깨우는 무혼의 모습은 그들에게 지옥에서 온 사자처럼 보이고 있다.
그래서 정신없이 한참을 얻어맞고 있던 그들에게 무혼이 던진 한마디는 성녀의 구원의 손길보다 더욱 성스럽게 느껴졌다.
“돈.”
잠시 때리기를 멈춘 무혼이 노려보자 그들은 몸 구석구석에 숨겨두었던 돈을 탈탈 털어서 무혼 앞에 바쳤다. 무혼의 얼굴이 찌푸려지며 그들의 얼굴을 훑고 지나가자 그들은 등줄기에 서늘한 한기를 느끼며 몸을 부르르 떤다.
“그 이사으 어스니다. 제바 요서해 주세오.(그 이상은 없습니다. 제발 용서해 주세요.)”
형체를 알아보기 힘든 얼굴로 간신히 말을 하는 그들을 보던 무혼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자 안도의 한숨을 내쉰 세 명의 사내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절뚝거리며 도망갔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놀라운 모습을 보고 있던 노인은 무혼에게서 붉은 기류가 사라지자 정신을 차리고 인사를 했다.
“고…맙습니다.”
무혼은 그의 뒤에 있는 꼬마 여자아이를 살펴보았다. 다행히 상처는 없어 보이는 그 아이는 색깔이 바랜 통이 넓은 치마를 입고 있었고 이제 12살쯤 되어 보인다.
이목구비는 조금 달랐지만, 얼굴의 느낌이 꼭 둘째 누나인 소영을 생각나게 하고 있었다.
“휴…….”
간혹 얄밉긴 했지만 그래도 미워할 수 없는 소영 누나가 어릴 때 무혼을 위해서 동네 아이들을 혼내주곤 하던 기억이 떠올랐다.
‘이미 잊어버린 지 오래된 기억인데 왜 다시 생각나는 걸까?’
눈앞의 노인과 여자아이를 찬찬히 바라보다 사내들이 내놓은 돈의 반을 여자아이에게 쥐여주었다.
‘내가 미쳤지…….’
여자아이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무혼과 노인을 번갈아 보고 있었고 노인은 떨리는 손으로 아이의 손에 있는 돈을 살짝 만지더니 무혼의 얼굴을 찬찬히 보았다.
“도와주신 것만 해도 고마운데 이런… 어떻게 은혜를 갚아야 할지요…….”
너무 미안해하는 노인을 바라보던 무혼은 그의 옆에 떨어진 상자에서 까무잡잡한 가루와 물대를 발견했다.
“담배?”
“예? 아, 예. 전 담배 장수입니다요.”
무혼이 보니 그것들은 중원의 것과 모양이 달랐지만, 담뱃잎과 담뱃대였다. 담뱃갑과 담뱃대를 하나씩 주워든 무혼은 그냥 머쓱한 웃음을 지어 보이고 뒤돌아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방금 그자들은 도둑 길드원들입니다. 레이디께서는 몸조심을 하셔야 합니다.”
생각지 않았던 목소리에 무혼은 다시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보았다.
달빛이 가려 어두운 건물의 그림자 속에서 한 사람이 걸어 나왔다. 빛 속에 선 그의 목소리와 외모가 남자인지 여자인지 헷갈린다. 만일 여자라면 상당히 아름다운 얼굴이고 남자라면…….
‘기생오라비같이 생긴 얼굴이군. 저자가 이렇게 가까이 오도록 눈치를 채지 못했다니.’
무혼이 자신의 감각을 속이고 다가온 그 사람을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바라보자 그 사람은 손을 휘저으면서 말했다.
“조금 전의 그자들과 아무런 관련이 없으니 그렇게 의심스럽게 보시지 않아도 됩니다. 저의 이름은 엘라드라고 합니다.”
“…….”
“도둑 길드에서는 눈에 잘 띄는 물건을 가진 사람을 놓치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그 검은 보통 사람들도 아는…….”
엘라드라고 스스로를 소개한 사람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있던 무혼은 왕실 기사의 롱소드에 대해서 말을 하자 재빨리 롱소드를 뽑았다.
챙.
엘라드의 심장으로 향하던 롱소드는 그가 들고 있던 우산에서 뽑혀져 나온 검에 가로막혔다.
무혼은 눈살이 찌푸려졌다. 갑자기 내지른 검이었지만 무혼이 최선을 다해 빠르게 날린 검을 그자가 간단하게 막은 것이다.
“이 검은 어떻습니까? 원하신다면 이걸 드리겠습니다.”
그가 들고 있는 검을 보니 서늘한 기운이 서려 있는 것이 보검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방금 본 이자의 실력을 생각하면 그가 검에 대해서 모르고 있으리라는 생각은 할 수 없었다.
“왜죠?”
“아, 좋은 물건은 주인이 될 사람이 있는 법입니다. 당신을 보고 있으니 이 검의 주인으로 어울릴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해맑게 웃고 있는 그의 얼굴을 보니 더욱 성별이 헷갈렸다. 엘라드는 무혼의 검을 살짝 밀어내더니 검을 우산에 넣고 그것을 무혼에게 내밀었다.
“여자?”
“오, 이런. 아닙니다. 난 남자입니다. 나의 티끌 한 점 없는 백옥같은 피부와 수려한 외모 그리고 맑은 목소리에 간혹 착각하시는 사람들도 있지만 전 분명히 남자입니다.”
거울을 꺼내어 자신의 얼굴을 비추어 보면서 자신의 머리카락을 손가락에 둘둘 말고 있는 그의 모습은 느끼함 그 자체였다. 그에게서 눈을 돌린 무혼은 느글거리는 속을 가라앉혀야 했다.
엘라드는 무혼에게 다시 우산을 내밀며 말을 이었다.
“검도 좋지만, 우산 자체도 상당히 특별한 것입니다.”
이곳의 우산을 처음 본 무혼은 그가 내민 우산을 천천히 살펴보았다. 우산의 가느다란 뼈대에 천이 붙어 있는 형태가 아닌 바깥쪽으로 점점 넓어지는 뼈대가 우산의 반을 차지하고 있었고 접으면 두터운 몽둥이처럼 느껴지는 특이한 것이었다.
“아주 특수한 재질로 만들어진 우산입니다. 접은 상태에서는 메이스 대용으로도 사용이 가능합니다. 그리고 검을 한 번 뽑아보세요. 레이디의 마음에 들 것입니다.”
자세히 설명을 하는 엘라드의 눈을 들여다보았지만, 그의 눈동자에서 어떠한 것도 느낄 수가 없자 무혼은 검을 뽑아보았다.
굵은 우산대에서 뽑혀 나온 검은 중원의 장검과 비슷해 보였다. 서늘하고 약간 환한 듯한 기운을 내뿜는 검날에 손을 대어보니 매끄럽게 느껴졌다.
처음 봤을 때의 기묘한 느낌이 손을 타고 전해져 왔지만, 특별히 어떠한 해를 입히거나 거부감을 느끼게 하지는 않았다.
그러한 무혼의 모습을 신기하다는 듯이 유심히 바라보던 엘라드는 검날에 손을 대자 눈을 더욱 크게 뜨며 생각을 한다.
‘내 눈이 잘못되지 않았군. 검날에 손을 대도 아무렇지 않다니.’
“마음에 드시죠?”
무혼이 고개를 끄덕이며 검을 다시 우산에 넣은 후 자신이 가지고 있던 롱소드를 던져주고 입을 열었다.
“고맙소.”
그리고 뒤돌아 걸어갔다.
“아하하. 고마워하실 것까지야. 그런데 어디로 가시는 길이시죠?”
자신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고 무혼이 계속 걸어가자 엘라드는 노인과 여자아이를 흘깃 보더니 무혼이 걸어간 방향으로 따라가기 시작했다.
무혼이 골목을 빠져나와 뒤돌아보자 그는 싱글벙글 웃으며 말을 걸었다.
“혹시 여행하실 생각이 있으신가요? 저도 여행 중인데 레이디처럼 매력적인 여성과 같이 여행을 했으면 더욱 좋겠습니다만?”
그를 바라보던 무혼은 엄지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남자.”
“예. 남자. 예? 말도 안 됩니다. 그 얼굴과 몸매 어디가 남자라는 겁니까? 그건 범죄입니다.”
엘라드는 말도 안 된다는 듯이 황당한 얼굴을 하고서 항의를 했지만 무혼은 엘라드를 집게손가락으로 가리키며 한마디를 던지고 뒤돌아 걸어갔다.
“여자.”
“무슨 말을? 나는 상큼(?)한 남자라고요. 이봐요. 이봐요?”
엘라드의 말을 무시하고서 걸어가고 있는 무혼을 보며 엘라드는 혼자서 중얼거렸다.
“평범한 사람은 아닐 것이라 생각했지만 다른 비밀이 있는 걸까?”
엘라드는 무혼이 준 롱소드를 쓰레기가 모여 있는 곳에 던져버리고 그가 걸어가고 있는 방향으로 황급히 따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