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는 마교대장 4화
무료소설 아빠는 마교대장: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2,122회 작성일소설 읽기 : 아빠는 마교대장 4화
#4화
진소천의 적응력은 탁월했다.
‘전생자’의 생경함과 갑작스레 생긴, 딸의 존재에 혼란스러울 법도 했으나 그는 원래 그랬던 것처럼 모든 것에 순응하는 삶의 태도를 견지했다.
하나 분명.
진소천은 변하고 있었다.
하루 중 반나절은 산장에서 청소하고 밥 짓고, 약재 다듬는 일을 도맡았지만, 새벽이 되면 항상 인적없는 죽림으로 향해 혼자의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한 달이 흐르고.
다시 한 달.
또다시 한 달.
노인의 산장에서 딸, 소윤과 생활한 지 석 달이 되던 날.
‘드디어 역(力) 속성의 구심점을 만들었다.’
진소천은 석 달간 하루도 빠짐없이 매진했던 자연결의 토납을 통해 병약했던 몸을 무재의 체질로 개선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솔직히 말하게. 자네 무림인이지? 처음 자네를 보았을 때 전혀 무공을 익히지 않은 사람일 거라 생각했지만, 지난 석 달간 자네는 신체의 토양 자체를 변화시켰네. 이건 의술적 관점으로 봤을 때 있을 수 없는 일이네. 필시 인위적인 수련을 통해서만 가능하단 말일세. 혹시 마공(魔功) 같은 걸 익히고 있는 겐가?」
노인 역시 진소천의 신체 변화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본래 진소천의 몸이 보통 사람과는 다름을 알고 있었지만, 눈에 띄게 변해가는 그를 보며 평생의 경험을 부정당하는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하나 진소천의 대답은 단출했다.
「언젠가 제 사연을 말씀드릴 날이 오길 바라지만 아마 힘들 겁니다. 확실한 건 지금의 저는 강호의 어떤 이합집산(離合集散)과도 연관이 없다는 겁니다. 고로, 저는 무림인이 아닙니다.」
이후, 노인은 두 번 다시 진소천의 과거를 묻지 않았다.
진소천 또한, 이만한 의술을 지니고도 종남산의 이름 모를 협곡에 틀어박힌 노인의 정체를 묻지 않았으며, 두 사람은 그저 산장의 주인과 머슴으로서 각자의 일에 충실할 뿐이었다.
그렇게….
신의(神醫) 노인과 사냥꾼 진소천. 더불어, 그의 딸 진소윤까지 세 사람의 고즈넉한 시간이 유수처럼 흐르고.
설원으로 뒤덮인 산봉우리가 서서히 녹아갈 무렵 종남산에도 봄이 찾아왔다.
* * *
“하라부지. 하라부지. 윤이랑 놀러 가자. 폭포에 놀러 가자.”
“소윤아. 지치지도 않는 게냐? 온종일 약초를 캐지 않았느냐? 이제 집에서 쉬는 게 어떠냐?”
“시러, 시러! 하라부지랑 놀 거야!!”
‘참….’
나는 평생 ‘귀신이 곡할 노릇이다.’라는 말의 속뜻을 제대로 짚지 못했다.
살면서 크게 놀랄 일이 없었고, 본래 직업이 살수인바, 외려 세인들이 나를 귀신처럼 여겼었다.
하나 지금은 정말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그간 머슴으로 지내며 나는 노(老) 의원의 성정을 유심히 파악했는데, 그는 태생적으로 ‘차가운’ 사람이었다.
물론 차갑다는 것이 냉혈한이라거나, 못돼먹었단 뜻은 아니다.
그는 나와 소윤을 살리기 위해 값비싼 약초를 거리낌 없이 사용했고, 오갈 데 없는 우리 부녀에게 의식주를 제공하는 은인임이 틀림없으니.
하나 노 의원처럼 태생적으로 차가운 사람은 쉽사리 마음의 문을 열지 않는 법이다.
나 역시 그랬고, 내 주군이었던 교주 또한 그런 범주에 속하는 인물이었으니 내가 누구보다 잘 안다.
한데….
“껄껄! 소윤아. 어찌 그리 고집이 센 게냐? 알겠다. 할아비랑 폭포에 다녀오자. 그러잖아도 날씨가 풀려 그쪽에 봄동 나물이 지천으로 피고 있으니 찬 거리도 캐오면 좋겠고.”
노 의원은 변하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해, 내게는 여전히 서릿발처럼 쌀쌀맞은 구석이 있었지만, 소윤에게만큼은 친조부처럼 살갑게 대하고 있었으니.
“응! 조아, 하라부지.”
심지어 더 황당한 것은 소윤이다.
소윤은 말괄량이란 말이 무색할 정도로 천방지축이었다.
핏덩이만 할 때부터 지독하게 고생만 하며 살았기에 나는 소윤이가 조숙하고 의기소침한 아이로 자랄 줄 알았다.
하나 그건 착각이었다.
겨울이 지나고 봄이 되어 소윤도 4살이 되었다.
보통 네 살 아이라 해봤자, 구사할 수 있는 언어는 한정적이고 사고 영역도 좁아서 행동 범위 역시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하나 소윤은 평범한 네 살짜리 아이들과 차원이 달랐다.
우선, 온종일 입을 쉬지 않아 듣는 귀에 딱지가 앉을 지경이었고, 활동력은 혀를 내두를 수준인데, 아장아장 걸어 다니는 게 아니라 경공을 펼치는 무림인인 양 시종일관 뛰고 또 뛰어다니기 일쑤였다.
“아빠! 아빠도 가자! 하라부지랑 포포에 가자!”
“…….”
그제야 왜 자식을 키우는 일이 세상에서 가장 어렵다는 건지 알 것 같았다.
나는 무지했다.
시경까지 경전을 깨치고 마교 무공서고에 산재한 수많은 무공 서적을 탐독했으나 ‘육아’에 만큼은 무지렁이였다.
“소윤아. 할아버지랑 둘이 다녀올래? 아빠는 바빠서….”
“아빠 바빠?”
“응.”
“아빠 바빠? 그럼 나랑 가치 못가?!”
소윤이 호수 같은 눈망울을 빛내며 물어왔다.
사실 오늘부터 체력을 심화적으로 단련하려던 참이지만….
“험험! 뭐 하나? 윤이가 가자면 가야지. 아빠라는 사람이 쯧쯧.”
노 의원의 핀잔까지 이어지니 빠져나갈 방도가 없었다.
“가자, 소윤아.”
어느새 나는 나도 모르게 소윤을 목말 태운 채, 입꼬리를 늘어뜨렸다.
“가자! 아빠야 가자!”
왜일까.
전생(前生)에선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이질감인데.
매번, 매 순간, 당혹스럽고 낯간지러우며 뻘쭘한데.
나는 이 낯설고 생경한 감정과 한적한 나날이 싫지만은 않았다.
* * *
“…….”
다시 두어 달이 흐르고.
산장에서 산 지도 오랜 시간이 지났다.
얼마 전만 해도 소윤의 체내에 남았던 한기는 노 의원의 치료에 완전히 뿌리 뽑혔고 전생자가 되어 무공을 잃은 나는 처음부터 시작한단 마음으로 자연결을 수련해 지금은 육합권과 삼재검법을 몸이 기억할 때까지 연성했다.
그러자 자연스레 한 가지 고심에 빠졌다.
‘언제까지 있어야 되는 건가.’
사실 갈 데도 없다.
본래의 진소천은 친구나 친지도 없는 무연고자여서 당장 머물 곳조차 없었던 것이다.
물론, 나 혼자라면 풍찬노숙하더라도 상관없다.
하나 소윤은 다르지 않나.
소윤에게는 아직 비바람을 막아줄 집과 삼시 세끼 든든한 먹거리가 필요했다.
그러고자 한다면 내겐 돈이 필요했다.
‘돈은 벌어본 적이 없는데….’
난처한 상황이다.
마교에서는 천금이라도 자유롭게 쓸 수 있었건만.
이제는 돈을 벌 방법을 걱정하는 신세가 되다니.
물론 산장에서 더 머물며 방도를 궁리해도 늦진 않을 것이다.
노 의원도 소윤을 귀여워하니 계속 머물길 바라는 눈치였고.
그러나….
언젠간 이곳을 떠나야 한다.
향후 어떤 삶을 살지 확신할 수 없지만.
이제 나는 사냥꾼 진소천이 아닌, 전직 살수였던 진소천으로서 살아갈 최소한의 채비를 해야 할 때였다.
“후….”
문득, 고갤 들어 밤하늘을 바라봤다.
술시(戌時 : 밤 7시-밤 9시) 무렵인 데도 풀벌레가 찌르르 우는 걸 보니, 이제 곧 여름이 다가올 모양이었다.
왠지 오늘따라, 밤하늘의 달과 별이 유난히도 밝게 광휘를 뽐내고 있었다.
“축하하네.”
그때.
언제 병사에서 나온 건지 노 의원이 옆으로 다가와 입을 열었다.
“뭘… 말입니까?”
“자네가 산장에서 머슴살이한 지도 다섯 달이 지났네. 그간 조석(朝夕)으로 밥 짓고, 작약이며 맥문동을 캐다 나른 것도 모자라 약재 창고와 병상 곳곳을 청소하지 않았나. 그쯤 했으면 약값은 치른 셈이네. 이제 우리 사이엔 어떠한 빚도 존재치 않네.”
“…구명의 은혜를 어찌 다섯 달 머슴살이로 갚겠습니까.”
“당초, 나는 구명의 은혜를 갚으라고 한 적이 없네. 그저 약값하고 밥값이나 하란 의미였고. 자넨 이미 충실히 그 몫을 했네.”
노 의원의 말은 다소 의외였다.
사실, 다섯 달 머슴살이한 걸로, 노 의원이 나와 소윤에게 투여한 약값을 대신하는 건 어림도 없는 소리였다.
말은 안 했지만 나는 노 의원이 소윤의 한기를 몰아내기 위해 백년산 하수오를 복용시킨 걸 알고 있다.
백년산 하수오는 뿌리당 최소 은자 100냥은 주어야 구할 수 있는 귀한 약재다.
노 의원은 애초부터 약값을 받을 생각이 없던 것이다.
“어르신….”
“오해는 말게. 그렇다고 떠나란 건 아니니까.”
“그 부분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려던 참입니다만.”
“왜? 떠날 궁리를 하고 있었는가?”
“당장 떠나겠단 건 아닙니다. 조금 더 어르신을 도우면서 은혜 갚을 생각이기도 했고요.”
“은혜는 됐네. 말하지 않았나. 어차피 지금 상태론 자네가 뭔 짓을 해도 다 갚는 건 무리일세. 그냥 평생 고마워하고 마음에 짐처럼 쌓아두게.”
은인이기는 한데.
가끔 느끼지만, 말하는 본새가 참 고약한 영감이다.
“그러죠. 하나, 그렇다고 이곳에 평생 머물 수는 없습니다.”
“왜? 아직 젊으니 속세에 나가 출세라도 할 생각인가? 아니면 재혼이라도 할 생각이거나?”
“출세할 생각도 재혼할 생각도 없습니다. 소윤이 키우는 것만으로도 버겁습니다.”
“클클. 웃자고 한 소리네. 하나 잘 생각하게. 다시 저 어린것을 업고 산기슭 헤매며 사냥꾼으로 살 생각인가? 그건 아이에게 가혹한 처사일세. 하지만 이곳에선 소윤이를 먹이고 입히고 재우는 데 부족함 없네. 게다가 나는 소윤이에게 의술을 가르칠 생각이네.”
“…의술을 말입니까?”
나는 놀란 나머지 눈을 휘둥그레 뜨고 물었다.
노 의원의 의술은 내가 보기에도 경천동지할 수준이었다.
경전에도 인생의 큰 복 중 하나가 좋은 스승을 만나는 것이라 하지 않았나.
소윤이 노 의원에게 의술을 배운다면 그야말로 천운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하네. 윤이는 놀라울 정도로 총명한 아이네. 아마 성년이 되기 전에 명의(名醫)가 될 걸세.”
‘분명 소윤에겐 좋은 일인데….’
하지만.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산장에서의 삶이 불만족스러운 건 아니나, 이곳에서 평생 안빈낙도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말씀 고맙습니다. 진심입니다. 어르신께 의술을 배운다면 소윤이에게 복일 테지요. 하지만, 저는 그럴 수 없을 듯합니다.”
“허허. 그런 대답이 나올 줄 알고 있었네.”
“…….”
“나는 아네. 지금껏 자네가 어떤 삶을 살았든. 앞으로 자네는 세상으로 나가 큰일을 하며 살 것임을.”
“어르신….”
“처음 자네 모습이 생각나는군. 생사를 넘나드는 지독한 고통이 엄습하는 와중에도 약값 치르란 한마디에 도끼를 들고 장작을 패던 모습. 이후 자네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매일 매시간 같은 장소에서 수련을 거듭했지.”
“…….”
“나는 일찍이 자네 같은 집념의 소유자는 본 적이 없네. 처음에는 자네의 가공할 회복력에 경악했지만, 이후엔 그 집념에 감복했지. 그때 알았네. 자네는 나처럼 산중에서 두문불출할 사람이 아니라는 걸.”
“어르신….”
“내일 날이 밝으면 이곳을 떠나게.”
“내, 내일 말입니까?”
“나도 감정이 있는 사람일세. 첩첩산중에 홀로 살다 보니, 소윤이에게 의지하게 되더군. 정이 더 들면 보내기 힘들어질 걸세. 부디 좋은 아빠가 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