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법서생 17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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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102회 작성일소설 읽기 : 마법서생 173화
173화
* * *
“율천기요.”
“포은상입니다.”
남궁창훈은 자신이 묻고도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진용이 앞에 놓인 찻잔을 달그락거리자 남궁창훈은 헛기침을 하며 그제야 입을 떼었다.
“허, 이거 두 분을 앞에 두고 실수를 한 것 같소. 이해하시구려. 설마 벽월과 북천산인이 오신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소이다.”
“강호에 잘 나오지 않으니 모르는 게 당연한 일이지요.”
포은상이 조용히 말했다. 율천기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여전히 묵묵한 표정으로 차만 마셨고.
진용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두 분께서 잠시 저를 도와주고 계십니다.”
그러자 율천기가 예의 장난기 어린 눈빛을 반짝이더니 불쑥 말했다.
“고 공자의 수하요.”
진용을 곤란하게 하는 것에 은근히 재미 들린 표정이었다.
피식 웃은 진용이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는 역시 전과 똑같은 말을 했다.
“그냥 동료지요.”
남궁창훈이 훈훈한 웃음을 지었다.
“허허허, 솔직히 말해서 고 공자의 능력을 반쯤은 믿지 못하고 있었는데, 이제야 이 남궁 모의 어리석음을 알겠군.”
진용이 찻잔을 내려놓고 탁자 위로 고개를 내밀었다.
“대체 왜들 이러시는 겁니까? 저를 놀리시는 게 그렇게 재미있으십니까?”
그러고는 한 사람 한 사람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남궁창훈이 중후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고 보니, 고 공자도 그리 못생긴 얼굴은 아니었구먼.”
“푸흐흐…….”
보다 못한 석장진이 실없는 웃음을 흘렸다.
항상 심각하기만 했던 남궁창훈이 저런 말을 할 줄은 생각지도 못한 그였다.
얼음장처럼 굳어 있는 표정을 보고 자신이 풀어주려 했지만, 좀처럼 풀리지 않아 답답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런데 고진용이라는 청년을 만난 지 일각도 되지 않았거늘, 그렇게 두껍게 얼었던 얼음이 한순간에 녹아버리는 것이 아닌가.
왠지 기분 좋은 느낌에 웃음이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참 대단한 청년이야. 딸이라도 하나 있으면…….’
율천기와 포은상이 이름을 밝히면서 어색하게 굳어졌던 공기가 순식간에 농담이 오가는 훈훈한 상황으로 바뀌어 버렸다.
그제야 진용은 반쯤 남은 차를 한입에 털어 넣고 남궁창훈에게 물었다.
“일단 탕마단의 계획을 알고 싶습니다. 천제성과 연수할 생각이신지요?”
직접적인 질문에 남궁창훈은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조용히 입을 열었다.
“천제성과는 함께하지 않기로 했네.”
진용의 눈빛이 고요히 가라앉았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것 같습니다만?”
“그들이 사이한 대법을 이용해서 괴물들을 키워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네.”
비밀이었다. 알아낸 지 채 닷새도 되지 않는 비밀.
그런데도 남궁창훈이 그러한 비밀을 밝히는 것은 나름대로 이유가 있어서였다. 확신에 찬 이유 말이다.
“자네도 알지 않을까 싶은데. 그렇지 않은가?”
관운묘에서의 일은 남궁창훈도 보고를 받았을 게 분명한 일. 이제는 그것이 천제성의 소행이라 확신하는 것 같다.
진용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는 모르지만, 그 괴물이 천제성 소유라는 것은 짐작하고 있었습니다.”
남궁창훈이 찌푸린 얼굴로 말했다.
“우연한 기회에 그 괴물을 하나 손에 넣었네. 거의 죽어가던 상황이었다고 하더군. 한데도 그 괴물을 잡기 위해서 일류무사 일곱 명이 죽거나 다쳤다네.”
진용이 무심히 가라앉은 눈으로 바라보자 남궁창훈이 말을 이었다.
“그리고 그 와중에 한 가지 괴이한 사실을 발견했지.”
말을 이어가는 남궁창훈의 이마에 주름이 졌다. 곤혹함이었다.
“사이한 대법으로 만들어진 괴물이 우습게도 가공할 마공에 당한 것 같지 뭔가.”
가공할 마공?
진용의 머리에 어떤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하지만 자신의 생각을 말하지는 않았다.
“어떤 대법인지는 알아내셨습니까?”
“무당의 영진 도장 말로는 오래전에 금지된 마혼대법 같다고 하더군.”
“우습군요. 마도를 치겠다는 천제성이 마도의 금지된 대법으로 괴물을 만들다니.”
“그래서 일단 연수는 보류한 상태네. 다만 적의 적은 친구라는 말도 있듯 천혈교를 제거할 때까지는 적이라 규정짓지 않을 생각이네. 물론 따지는 것도 당분간 미룰 생각이야. 심증은 있어도 확증은 없는 상태니까.”
당연한 말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 아닌가. 천혈교와 천제성을 동시에 상대할 생각이 아니라면.
게다가 삼존맹이 암흑마련과 연관이 있다면 삼존맹까지 상대해야 할 텐데, 그것은 정천무맹이 제아무리 구대문파와 오대세가의 결집이라 해도 자멸로 가는 길이었다.
방법은 단 하나, 일단은 하나하나 정리하는 수밖에 없었다.
“조금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저희는 소수지요. 해서 우리의 목적에 부합된 그들의 중추만 노릴 생각입니다.”
“목적이라……. 자네들의 그 목적이란 것이 궁금하군.”
남궁창훈이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그로선 모르는 것이 당연했다. 그간 정보를 건네주기는 했어도, 왜 진용이 천혈교를 상대하고 있는 것인지 정확한 것은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저 나름대로 유태청을 이용해 보려 했을 뿐.
진용은 여전히 깊게 가라앉은 눈을 가만히 감았다 떴다.
이제 본격적으로 천혈교를 상대할 날이 이틀 앞으로 다가왔다. 더 이상 자신이 황궁 사람이라는 이유로 신경전을 벌일 일은 없을 듯했다.
더구나 천혈교에 가면 생사를 같이해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이 아닌가.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남궁창훈과 석장진에게 만큼은 자신의 신분을 말해주어도 괜찮을 듯싶었다.
진용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아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황궁에서 나왔습니다.”
아는지 남궁창훈의 표정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공식 직함은 금의위 천호이고, 임시로 수천호령사를 맡고 있지요.”
잠깐 남궁창훈의 눈에 의아한 빛이 떠올랐다. 수천호령사라는 지위가 가지는 의미를 생각하는 듯했다.
진용이 보충 설명을 해주었다.
“수천호령사가 나섰다는 것은 황제의 친림(親臨)과도 같지요.”
남궁창훈과 석장진의 눈이 홉떠진 채 굳어졌다.
황제의 친림! 맙소사!
그러든 말든 진용은 담담히 말을 이었다.
“천혈교에 웅크리고 있는 반역도 삼왕을 잡으러 나왔지요. 사실 관군을 몰아 천혈교를 칠 수도 있습니다만, 그것은 천하만민을 위하는 일이 아니라 생각되는 데다, 강호의 일은 강호인으로 해결하는 것이 나을 것 같아서 이런 방법을 행하게 된 것입니다.”
남궁창훈이 굳어진 눈으로 물었다.
“하면 관군은 이번 일에 끼어들지 않는단 말이오?”
어느새 말투도 달라져 있었다. 상대는 황제를 대신하는 수천호령사. 맹주라 해도 함부로 대할 수 없었다.
“그렇습니다. 그리고 제가 천혈교를 치려는 데는 또 한 가지 목적이 있습니다.”
“무엇이오?”
“그곳을 뒤져서, 아버지가 계시는지 확인을 해봐야 합니다.”
“아, 아버지……?”
뜬금없는 말에 남궁창훈이 굳어진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진용이 한숨을 푹 쉬며 말했다.
“후우, 제정신이 아닌 아버지가 집을 나가셨는데…….”
진용의 말이 길게 이어졌다. 시간이 지날수록 남궁창훈과 석장진의 표정이 묘하게 변해갔다. 다른 누구와도 다르지 않았다.
‘킬킬킬, 시르의 순진한 표정에 또 걸려들었군.’
세르탄이 머릿속에서 낄낄거린다.
진용은 상관하지 않고, 아버지가 삼왕과 양 태감에 의해 십 년 동안 밀옥에 갇혀 있다가, 결국 탈출해서 행방이 사라진 것까지, 그리고 그로 인한 자신의 천궁도 유배 생활까지도 모두 이야기했다.
물론 중요한 이야기는 당연히 말하지 않았다.
이야기가 끝나자 방 안에 고요가 맴돌았다.
남궁창훈이나 석장진은 자식들을 둔 아버지다. 홀로 사는 율천기나 포은상과는 반응이 다를 수밖에 없었다.
“그런 일이 있었다니! 저런, 저런…….”
남궁창훈이 안쓰럽다는 듯 진용을 바라보았다.
“정말 대단한 일을 겪었구려.”
석장진도 참지 못하고 나직이 한마디 했다.
“만일 그곳에서도 찾지 못한다면 모든 지위를 버리고 천하를 뒤져서라도 꼭 찾을 겁니다. 후우…… 무사하셔야 할 텐데…….”
진용의 표정이 가라앉을수록 남궁창훈과 석장진의 말투도 나직해졌다.
“걱정 마시구려. 꼭 찾을 수 있을 거외다.”
“그럼, 이토록 노력하고 있으니 하늘도 외면하지 않을 것이오.”
진용은 반드시 그래야 한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조용히 물었다.
“혹시 봉황곡의 화 곡주님 일행이 이곳에 오지 않으셨습니까?”
“봉황곡? 그들은 별원 쪽에 있소만……. 어떻게 아시오?”
“제가 그분들을 이곳으로 가 계시라 했지요.”
한마디로 ‘아주 잘 아는 사이요’ 그 말이었다.
진용은 잠시 말을 끊고는 남궁창훈과 석장진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다음부터는 말 놓으십시오. 왠지 계속 놀림당하는 것 같아서…….”
“음, 그럴… 까?”
“험, 그러지.”
피식, 세 사람의 입가에 웃음이 맺혔다.
진용도, 석장진도, 남궁창훈도.
‘그러고 보니 그분과 웃는 얼굴이 비슷하군.’
진용은 그제야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아참! 남궁환 어르신이 저희와 함께 있습니다. 보고받으셨는지 모르겠군요.”
남궁창훈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환 숙부님이? 조금만 멀리 가도 길을 잃는 분이 여기까지 무슨 일로?”
아직 보고를 받지 못한 것 같았다.
그런데 남궁창훈조차 남궁환의 능력을 모르는가 보다.
진용이 조금은 장난스런 말투로 말했다.
“유 어르신과 함께 연구하실 것이 있다더군요.”
“……?”
2
화예령은 어느 정도 몸을 추슬렀는지 움직임에 큰 지장이 없어 보였다.
진용이 율천기와 포은상조차 남겨두고 찾아가자, 마치 먼 길 떠났던 아들이 돌아오기라도 한 것처럼 반가워했다.
그런 한편으로는 진용이 어떤 이야기를 가지고 왔을까, 조금은 긴장한 듯한 표정이었다.
진용은 더하지도 빼지도 않고 간단하게 유태청의 말을 전했다. 그러고는 은은한 향기가 너울거리는 찻잔을 집어 들었다. 이제 화예령이 대답할 차례였다.
화예령은 한동안 말을 하지 못했다.
근 일각이 지나서야 그녀의 입이 열리고, 두어 마디 대답이 흘러나왔다. 너무 짧아서 모르는 사람이 보았으면 화가 나지 않았나 생각이 들 정도였다.
“알았다고 전해줘요.”
아마 많은 고민을 했을 것이다. 탕마단과 함께 곧바로 천혈교로 향할 것인지, 아니면 유태청의 말대로 시기를 기다려야 할 것인지.
이미 본곡에서 나온 백수십 명의 제자들이 자신을 찾아오고 있을 터. 이대로 물러서서 바라만 보고 있을 수 없다는 마음 또한 강했을 것이다.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것은 화예령의 몫이었다. 누구도 관여할 수 없었다. 유태청도, 진용도.
조금은 야속하게 생각하지 않을까 했는데 그런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강한 여인인가, 아니면 무정한 여인인가.
진용은 별다른 표정을 드러내지 않는 화예령을 바라보고는 몇 마디 덧붙였다.
“어르신도 어쩔 수 없는 아버지시더군요. 곡주님에 대한 말씀을 들으시더니 화를 내셨습니다. 험한 곳에 뭐 하러 나왔냐면서요. 그렇게 화내시는 모습 처음 봤습니다.”
화예령의 어깨가 가늘게 떨렸다.
유태청이 어쩔 수 없는 아버지라면, 화예령은 어쩔 수 없는 딸이었다.
진용은 화예령이 다시 생각에 잠긴 듯하자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편히 쉬십시오. 나중에 뵙겠습니다.”
“…그래요. 내 나가보지는 않겠어요. 다음에 보도록 해요.”
화인화가 진용을 따라 나왔다.
밖으로 나오자 실바람이 두 사람의 얼굴을 간질이며 지나갔다. 따스한 기운을 품고 있어 부드러운 느낌이 드는 바람이었다.
이제 곧 여름인가? 진용은 새삼스러운 느낌에 가슴이 아렸다.
그렇게 말없이 십여 걸음을 걸었다.
몇 개의 바위가 후원의 작은 정원에 멋진 자태를 뽐내며 놓여 있었다. 그중 의자처럼 생긴 바위에 화인화가 기대듯 앉더니 진용에게 물었다.
“정말 그렇게 화내셨어요?”
“예. 표는 안 내셨지만, 걱정이 많이 되시는 것 같았습니다.”
“휴우, 그러게 평소에 연락 좀 하시지……. 할머니를 용서하실 때도 되셨을 텐데…….”
뭔가 사연이 있는 듯했다.
화인화가 답답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전에 옛날 일을 이야기할 때부터 느낀 것이지만, 화인화의 말을 듣다 보면 마치 당장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듣는 듯한 느낌이었다.
지금도 그랬다. 꼭 며칠 전의 일을 이야기하는 것 같지 않은가.
진용은 한 번 물어볼까 하다가 그만두기로 했다. 가족 간의 일은 가족이 풀어야 할 일이니까.
대신 다른 것을 물어봤다.
“어떻게 하실까요? 설마 천혈교로 가시지는 않겠지요?”
화인화가 고개를 반쯤 숙이더니 발끝으로 질경이 꽃대를 툭툭 찼다.
“솔직히 저도 모르겠어요. 어머니는 항상 모든 일을 어머니 뜻대로 해오셨으니까요. 고 공자 생각은 어떻게 하는 게 나을 것 같은가요?”
화인화가 되물었다.
“제 생각을 말씀드리라면, 저는 가시지 않는 편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어르신의 말씀 때문이 아닙니다. 사실 천혈교, 천혈교 하지만 알려진 것이 거의 없습니다. 기껏해야 몇몇 고수의 이름 정도가 다지요. 전에 일도 그렇고, 얼마나 많은 고수들이 웅크리고 있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워낙 철저히 힘을 키워온 터라…….”
“그렇게나 강해요? 설마 천제성과 정천무맹의 수많은 고수들이 감당할 수 없으려구요.”
진용이 화인화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누구나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그렇기에 아니라는 말도 쉽게 내뱉지 못할 것이다. 겁쟁이 소리를 듣기 싫어서라도.
하지만 정확한 사실을 알아야 할 때가 있다. 한 번 실수하면 천추의 한을 남길 수도 있으니까.
“때론 자신감만으로 할 수 없는 일이 있습니다. 용기와 만용은 분명 다른 것이지요. 솔직히 말해서, 그곳이 용담호혈의 사지(死地)라는 게 제 생각입니다. 가면 누구도 생사를 장담할 수 없을 것입니다.”
눈이 마주치자 화인화의 눈빛이 가늘게 떨렸다.
그녀는 깊이를 모르는 심해 바다에 퐁당 빠져 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몽롱한 표정으로 진용의 눈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용담호혈이니 사지니 하는 말들은 하나도 듣지 않은 것 같은 표정이었다.
진용이 머쓱한 표정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때 화인화가 복사꽃 빛깔의 입술을 열었다.
“저… 한 가지 물어봐도 돼요?”
“예, 물어보십시오. 제가 알고 있는 것은 다 말씀드릴 테니까요.”
궁금한 것이 많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화인화의 질문은 진용이 생각한 그런 것이 아니었다. 전혀.
화인화가 머뭇거리며 물었다.
“좋아하는 분 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