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법서생 12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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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155회 작성일소설 읽기 : 마법서생 120화
120화
초연향은 하군상의 이야기를 듣고 하얗게 얼굴이 굳었다.
완벽하게 비밀로 할 수 없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일찍 들통 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었다.
“주령이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면, 반드시 그렇게 될 것이오. 더 이상 이곳에 있어서는 안 되오. 떠나야 하오, 향 매.”
“옳은 말씀이에요. 하지만 당장은 움직일 수가 없어요. 보나마나 암중에서 저를 지켜보고 있을 테니까요.”
자신도 떠나고 싶다. 당장이라도. 자신이 사라졌다 해서 하주령이 해룡선단에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일도 아니니까.
그냥 갈까? 어차피 구룡상방이 해룡선단을 도와준다는 보장도 없는데.
하지만 그동안 자신만 믿고 움직인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 거지?
도지방(陶紙幇)의 강상두, 육방(肉幇)의 철상두, 포잠상(布蠶商)의 전상두. 모두 자신만 믿고 있는데.
입술을 깨문 초연향이 결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오라버니, 오라버니가 철심방의 진 숙부님을 만나주세요.”
“진 방주님을?”
“그분에게 도움을 청할 생각이에요. 혹시라도 머뭇거리거든, 진 공자의 죽음에 대해 할 말이 있다고 하세요.”
하군상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향 매가 진 형의 죽음에 대해 알고 있단 말이오?”
“자세히는 몰라요. 하지만 그분은 꼭 듣고 싶어 할 거예요.”
“음… 알았소. 마침 내일 석가장에 갈 일이 있으니 시간을 내어서 진 방주님을 만나보리다.”
철심방은 쇠로 된 거라면 무엇이든 만들어 파는 구룡상방의 핵심 세력 중 하나다. 방주인 진호량이 도와주기만 한다면 하주령의 계획에 막대한 타격을 줄 수가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다음 날 미시 초, 하군상은 구룡상방을 나서기도 전에 정문으로 들어서는 한 사람을 보고는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초연향의 거처를 찾지 않을 수 없었다.
“어쩐 일이세요, 아침부터?”
“향 매, 조금 전에 진 방주가 이곳에 왔소.”
“예? 그분이 무슨 일로?”
“그건 모르겠고, 후원으로 가는 것을 보니 주령이를 만나러 가는 듯했소.”
초연향의 얼굴이 납덩이처럼 굳어졌다.
불길한 예감이 뇌리를 짓눌렀다. 지금까지 한 번도 빗나가 본 적이 없는 자신의 예감에 온몸이 떨릴 지경이었다.
“안 되겠어요. 일단 이곳을 나가야겠어요.”
“지금은 안 되오. 분명 감시하는 자들이 있을 것이오. 어두워지거든 나갑시다.”
그날 밤 어두워질 무렵, 시비가 일을 마치고 초연향의 방을 나섰다. 고개를 숙이고 있어 누군지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초연향의 방을 감시하던 자들은 옷만 보고 시비가 누군지 지레 짐작해 버렸다.
“저년이나 달라고 해야겠군. 흐흐흐…….”
“나이는 어려도 가슴이 제법 크던데, 설마 남자 맛을 본 계집은 아니겠지?”
“그럼 오히려 잘 됐지. 계집이 너무 앙탈 부리면 짜증나거든.”
“하긴……. 크크크…….”
그사이 시비는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건물을 돌아가고 있었다.
건물을 돌아간 시비는 여전히 고개를 들지 않고 슬쩍 눈만 돌려 주위를 살펴보았다.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비록 어둠이 짙게 깔려 있지만, 누구든 어둠을 믿고 고개를 내밀었다면 그녀의 눈을 속일 수 없었다.
그녀는 아무도 자신을 쳐다보는 사람이 없다는 확신이 서자 걸음을 재촉해 건너편 건물로 들어갔다. 그리 크지 않은 건물 안에는 잡다한 물품들이 가지런히 쌓여 있었다.
그녀는 물품 중에서 간편한 경장 한 벌을 골라내고는 재빨리 옷을 갈아입고 머리를 묶었다. 반의 반 각도 걸리지 않아 그녀의 모습은 누구도 알아볼 수 없게 바뀌어 버렸다.
완벽한 소년의 모습을 한 그녀가 건물을 나서자 눈을 휘둥그렇게 뜬 하군성이 그녀를 맞이했다.
“험, 가세. 추 아우.”
헛기침으로 입을 연 하군상이 고갯짓을 하자 초연향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예, 혀, 형님.”
하군상은 재미있는지 실실 웃더니, 속삭이듯이 조그맣게 입을 열었다.
“시간이 없소. 진 방주가 이각 전에 나갔는데, 아무래도 주령이 뭔가 수작을 부린 것 같소. 잔뜩 일그러진 얼굴이었소.”
“아마 협박을 했을 거예요. 다시는 우리와 만나지 말라는.”
“음, 서두른다면 만날 수 있을 것이오. 갑시다.”
그가 찡긋 한쪽 눈을 감더니 마저 말을 이었다.
“할 말이 없다는 그에게 겨우 약속을 받아냈소. 비록 일각뿐이지만.”
“그 시간이면 충분해요.”
두 사람은 태연한 걸음걸이로 정문을 향했다.
간혹 하군상을 알아보고 말을 거는 자들이 있었지만, 그렇다고 앞을 막아서지는 않았다.
“공자님, 이 밤중에 어딜 가시는 겁니까?”
“볼일이 내일로 늦춰진 김에 술 한잔하러 가네.”
가끔씩 있는 일인 듯 하군상이 술 한잔하러 간다고 하면 그러려니 할 뿐이었다.
“옆에 분은 누구십니까?”
그러나 정문을 나서려 하자 제법 눈매가 날카로운 자가 초연향을 바라보며 물었다. 수문위사인 조걸이었다.
하군상은 조걸의 코앞에 얼굴을 들이밀어 눈을 가리고는 나직이 입을 열었다.
“추씨 집안의 막내 아들이네. 내가 몰래 데리고 나가서 술 좀 가르치려고 그러는 것이야. 남자라면 모름지기 술 몇 잔 정도는 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나? 그러니 함부로 소문내지 말게나.”
점심 무렵 천진 추가장에서 사람들이 왔다고 했었다. 그때는 자신의 근무 시간이 아닌지라 조걸은 그들의 얼굴을 보지 못했었다. 그는 한쪽에서 고개를 돌리고 서 있는 소년이 아마도 그때 들어온 소공자인가보다 생각했다.
“너무 늦지 않게 돌아오십시오. 잘못하면 저만 치도곤을 당합니다.”
하군상이 씩 웃으며 슬며시 은자 하나를 조걸의 손에 쥐어주었다.
“걱정 말게. 내 두 시진 이내에 돌아오겠네.”
조걸의 입이 귀밑까지 찢어졌다. 손아귀의 감촉으로 봐서 은자의 크기는 족히 반 냥은 됨 직했던 것이다.
자기가 하루에 받는 일당보다도 훨씬 많은 액수였다.
‘우흐흐, 이래서 내가 수문위사를 때려치우지 못한다니까.’
“조심해서 다녀오십시오. 에…… 공자님이 나간 것은 특별히 비밀로 해둡지요.”
“하하, 고맙네. 과연 자네는 화통한 남자야.”
하군상은 조걸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리고는 행여나 마음이 변할까 봐 재빨리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가세, 추 아우. 내 오늘 화끈한 주당의 세계를 가르쳐 주겠네.”
2
하주령이 초연향이 사라졌다는 보고를 받은 것은 하군상과 초연향이 정문을 나선 지 이 각가량 흘렀을 때였다.
“뭐예요? 초연향이 없어졌다고요?”
“시비의 입을 막아 의자에 묶어 놓고는 옷을 바꿔 입고 나간 것 같습니다.”
추밀단의 단주 한우명의 말에 하주령은 발끈해서 소리쳤다.
“그걸 말이라고 해요? 여인 하나를 감시하지 못해서 놓치다니요! 즉시 찾아보세요!”
“이미 수하들을 풀어 찾고 있습니다. 곧 좋은 소식이 있을 것입니다.”
그때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하주령의 눈빛에서 독기가 쏟아졌다.
“군상 오라버니를 찾아보세요. 방에 있는지.”
한우명이 머뭇거리며 답했다.
“수하들이 조금 전에 어떤 어린 공자와 함께 밖으로 나가는 것을 봤다고 합니다.”
“이런!”
더 이상 참지 못한 하주령이 벌떡 일어섰다. 그녀의 독기 서린 눈빛이 빠르게 변화를 일으켰다.
“진 방주는 언제 떠나갔나요?”
“한 시진 전에 떠났습니다.”
“즉시 사람들을 총동원해서 북경 외곽을 봉쇄하고, 성내를 뒤져 군상 오라버니와 초연향을 찾으세요. 초연향이 진 방주와 만나려하는 것 같으니,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을 거예요. 그리고 초연향을 잡는데 방해하려는 사람이 있거든, 그게 누구든지 적으로 간주하세요. 아시겠어요? 관에 사람을 보내놓을 테니 관은 걱정 말고 꼭 찾으세요!”
한우명의 얼굴도 딱딱하게 굳었다. 그녀의 말을 알아들은 까닭이었다. 하군상을 어떻게 하더라도 초연향을 잡아야 한다는 말.
아무리 이복남매라 하지만 지독한 마음 씀씀이였다.
설마 죽여도 된다는 말은 아니겠지?
그때 하주령의 말이 이어졌다.
“혹시 모르니, 사멸당의 양 당주도 움직여야겠어요. 다른 곳에 넘겨주기에는 너무 위험한 계집이에요.”
눈을 부릅뜬 한우명이 움찔 몸을 떨었다.
사멸당. 구룡상방의 척살조. 결국 죽이는 한이 있어도 남에게 넘어가는 꼴은 보지 못하겠다는 말이었다.
3
초연향은 손님도 없는 자그마한 객점에서 우락부락한 인상에 흑염이 사자갈기처럼 뻗은 중년인과 마주 앉아 있었다. 그가 바로 철심방주 진호량이었다.
“주령이는… 우리가 움직인 것을 알고 있었다. 길게 말하고 싶지는 않아. 자칫 방의 일천 가족이 위험해질 수 있거든.”
“소녀도 숙부님이 위험에 처하는 것은 원치 않아요. 하지만 한 가지 꼭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어서 뵙고자 한 거예요.”
“말해보거라. 네 아버지와의 인연을 생각해서라도 들어는 주마.”
초연향은 한 점도 흔들리지 않는 눈으로 진호량을 응시했다.
“진 공자의 죽음에 대해 알고 있는 게 있어요.”
진호량의 안색이 급격히 굳어져갔다.
“네 말이 무슨 뜻인지 알고 하는 말이냐?”
“진 공자는 죽기 전날 밤 누군가를 만났어요.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진 공자가 돌아가셨죠. 저는 진 공자가 누굴 만났는지 알고 있어요.”
“향아, 너……!”
초연향은 붉게 달아오른 진호량의 눈빛에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저의 능력에 대해서는 진 숙부님도 잘 아실 거예요. 그리고 제가 남의 눈을 바라보면서는 거짓말을 못 한다는 것도 말이에요.”
십여 년 전부터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초연향에게는 남의 눈을 보고 거짓과 진실을 가려낼 수 있는 재주가 있는 반면, 남의 눈을 보고 거짓말을 하면 얼굴이 붉어지고 눈이 떨리는 버릇이 있었다.
모두 초정광이 알려준 사실이었다.
“제 눈이 잘못되지 않았다면, 그날 만난 사람은 어떤 식으로든 진 공자의 죽음에 관련되어 있어요.”
“그게 누구냐? 왜 그때 말을 하지 않은 것이지?”
진호량이 으르렁거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초연향은 잠시 숨을 가다듬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날 진 공자는 바로 하 언니를 만났어요. 그래서 말씀을 드리지 못했던 거예요. 확증이 없으니 아무도 믿지 않았을 테니까요.”
진호량의 눈이 부릅떠졌다. 하군상도 멍한 표정으로 초연향을 바라보았다.
그랬다. 당시 어린 초연향의 말을 들어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설령 진호량이라 해도.
“으으음…….”
“향 매, 정말로…… 주령이었소?”
“죄송해요, 오라버니. 먼저 말씀을 드리지 못해서.”
자신의 여동생이 살인 사건의 범인이란 말인가? 그럼 자기는 누구 편을 들어야 하지? 아무리 남들이 뭐라 해도 동생이 아닌가 말이다.
그때다. 문득 하군상의 뇌리 저 깊숙이에서 이런저런 갈등조차 날려 버릴 어떤 기억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갑자기 하군상의 눈에서 싸늘한 한기가 쏟아졌다.
“그러고 보니 오래전에 벌어진 사건들 중 끝까지 해결되지 않고 묻혀버린 사건 하나가 생각나는군.”
“예?”
“오 년 전, 내 어머니의 갑작스런 죽음. 어머니는 주령이와 한바탕 말싸움을 하고 난 다음 날 돌아가셨소. 어머니의 장례식이 있던 날, 나는 뒷마당을 지나다 주령이가 소리 없이 웃는 모습을 봤었소. 조금 서운하게 생각한 적은 있어도, 한 번도 그것이 이상하다 여긴 적이 없었는데…….”
갑작스럽게 침묵이 내려앉았다. 하지만 침묵은 오래가지 못했다.
“방주님, 총방의 추밀단이 북경을 들쑤시고 있다 합니다.”
밖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올 때 보았던 진호량의 수신호위인 듯했다.
“아무래도 나머지 이야기는 나중에 나눠야 할 것 같다.”
“제가 찾아뵙겠습니다, 숙부님.”
“그때는 보다 더 정확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으면 좋겠구나.”
“그럴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하군상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다급히 재촉했다.
“일단 이 자리를 피하고 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