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법서생 11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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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191회 작성일소설 읽기 : 마법서생 110화
110화
“낙일객(落日客) 석장진?”
비류명은 놀람이 역력한 눈으로 석장진을 바라보았다.
석장진의 눈매가 가늘게 좁혀졌다.
“조용히 온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음이니…….”
그때 열린 문 사이로 비류명의 목소리가 들리자 서문조양도 급히 밖으로 나섰다. 그는 낙일객이라는 별호를 듣고 해연히 놀란 눈으로 석장진을 바라보았다.
“정녕 낙일객 석장진 대협이시란 말이오?”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정광과 사도굉이 있던 문도, 운아영이 있던 문도 동시에 열렸다.
석장진의 이마에 밭고랑 같은 주름살이 한꺼번에 십여 개나 만들어졌다.
‘조용히 방문하려 했는데, 이거야 원.’
하지만 그는 몰랐다. 열린 문은 모두 진용 일행의 방문뿐이란 것을. 제갈민의 배려로 화정관의 구석에는 그들만 있다는 것을.
“정말 그군.”
사도굉이 석장진을 알아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정광이 석장진의 위아래를 훑어보았다.
“저 사람, 유명한 사람이오?”
“형주평야에서 잔혼삼마를 일 검에 석양고혼으로 만든 사람이지.”
“사도 선배보다 강하오?”
“조금.”
“그럼 나보다는?”
“조금.”
“그래요? 언제 한 번 붙어봐야겠군.”
“죽고 싶으면 맘대로 하게. 낙일객의 검은 인정사정이 없으니까.”
석장진은 두 사람의 말을 듣다 보니 어이가 없었다. 자신이 이곳에 온 목적조차 잊을 지경이었다.
그런데 한 사람의 안면이 익다. 언젠가 한 번 스치듯 보았던 사람.
“월조옹 사도 선배?”
“어? 나를 아나? 나를 만나러 왔나?”
그제야 자신이 무엇 하러 이곳에 왔는지 생각났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한숨으로 가라앉힌 석장진은 신형을 돌렸다.
“후우, 다음에 와야겠군.”
그때였다.
“안으로 들어오게나.”
석장진은 잠시 머뭇거리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섯 사람의 눈이 자신을 향하고 있었다. 다행히 그들 외에 다른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어차피 여기까지 온 마당에 다시 돌아가기도 그런 상황.
“험, 그럼 들어가겠습니다.”
우르르…….
당연히, 모두 따라 들어가려 했다. 언제나 그랬으니까. 녹초가 되어서 세상모르게 자고 있는 두충만 빼고.
심지어 비류명과 서문조양까지 얼떨결에 정광의 뒤를 따라 들어가려 했다.
하지만 진용의 이어진 말이 그들의 진입을 막았다.
“가서들 쉬세요. 조용히 이야기 나누실 게 있어서 오셨나 봅니다.”
진용의 말을 거역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조금 실망한 표정을 짓기는 했지만.
우르르…….
다시 모두 몰려 나갔다.
어이가 없는지 석장진은 멍한 표정으로 방문을 바라보았다.
모두 방을 나가기는 했지만 다른 방의 방문이 여닫히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아무도 자신들의 방에 들어가지 않았다는 말. 아마도 방문 밖에 모두 모여서 귀를 기울이고 있을 듯했다.
이래서야 무슨 비밀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겠는가.
“걱정 마세요. 그들은 우리의 이야기를 들을 수 없을 겁니다.”
석장진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서 탁자가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이 앉아 있었다.
노인과 젊은 청년.
노인은 십절검존 유태청이었다. 삼십수 년 전에 보았던 그 모습보다 주름이 더 많아지고, 검은 머리가 흰 머리가 되었지만 석장진은 잊을 수가 없었다.
북풍의 눈보라 속에서 한 자루 검으로 혈궁신마를 베던 그 모습. 어찌 잊으랴!
“유 노사를 뵈오이다.”
“오랜만에 보는구먼. 이제는 진정한 산이 되었군. 허허허.”
석장진의 얼굴에 가벼운 홍조가 서렸다.
삼십여 년 전의 어느 날, 남궁창훈과 함께 혈궁을 치던 탕마단에 있을 당시였다. 그는 우연한 기회에 유태청이 혈궁신마를 눕히는 모습을 발치에서 볼 수 있었다.
순간 뇌리가 하얗게 비는 충격이 그의 전신을 꿰뚫었다.
부끄러웠다. 같잖은 실력으로 우쭐하고 다녔던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스물두 살 젊은 석장진은 유태청 앞에서 소리쳤었다.
“하늘에는 선배님이 계시니 저는 산이라도 될 겁니다!”
“부끄럽습니다.”
“부끄럽긴, 천하를 짊어진 사람이 못하는 말이 없군. 허허허허. 그래 무슨 일로 오셨는가?”
유태청의 기분 좋은 웃음소리를 들으며 석장진은 정색을 했다. 그리고 진용을 바라보았다.
‘고가장의 주인이라 했던가?’
정확한 것은 알려져 있지 않았다. 다만 들어온 정보에 의하면 유태청조차 가볍게 대하지 않는다 했다.
하지만 과연 자신과 유태청의 밀담을 들어도 좋은 사람인지에 대해선 자신할 수가 없었다.
그의 마음을 눈치 챘는지 유태청이 말했다.
“고가장의 장주네. 그는 자네와 나의 이야기를 들을 자격이 충분히 있네.”
석장진의 눈이 커졌다. 유태청이 저리 인정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문득 조금 전에 한 진용의 말이 뇌리를 스쳤다.
“그들은 우리의 이야기를 들을 수 없을 겁니다.”
‘혹시?’
그는 의구심을 가지고 방문 쪽으로 슬쩍 기운을 흘려보내 봤다.
흘러가던 기운이 무언가에 가로막혀 더 이상 나아가지 않는다. 둥근 원형막과 같은 정체를 알 수 없는 는 무엇이 자신의 기운을 막는다.
놀란 그는 유태청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고요한 표정이다.
‘유 노사가 아니다.’
그럼 누구?
방 안에서 자신과 유태청을 제외하면 한 사람뿐이다.
그의 놀란 눈이 진용을 향했다. 진기로 일정 지역을 고립시켜 음파를 차단하는 정도는 자신도 할 수 있다. 문제는 그가 자신도 모르게 그 일을 했다는 것.
“미처 기인을 몰라봤던 것 같군.”
“남들이 모르는 약간의 잔재주가 있을 뿐입니다.”
과연 그럴까? 낙일객의 감각을 속인 것이 잔재주라고?
“일단 자네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군.”
어색한 상황이 계속되자 유태청이 입을 열었다.
석장진도 더 이상 쓸데없는 시간을 허비하고 싶지 않았다. 진용에 대한 조사는 나중에 해도 될 일.
“맹주께서 유 노사를 뵙고자하십니다.”
“맹주가?”
“요즘 골머리 아픈 일이 좀 있습니다. 그래서…….”
석장진이 말을 흐렸다. 그럼에도 유태청의 미간에 가늘게 주름이 잡혔다.
“천혈교의 일 때문인가?”
“죄송합니다. 워낙 신중을 기해야 할 일이라서 이곳에서 다 말씀드리기는…….”
“구파가 볶아대는가 보군.”
유태청의 말에 석장진의 입가로 스치듯 씁쓸한 웃음이 비쳤다.
“맹주를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강호에 흘릴 피를 줄이기 위해서라도…….”
삼십여 년 전 그날, 석장진이 물었다.
“왜 선배님께선 그와 일 대 일로 싸움을 벌인 겁니까?”
그러자 유태청이 답했다.
“다수로 그를 죽였다면 혈궁은 승복을 하지 않고 끝까지 저항했을 것이다.”
“피를 덜 흘리기 위해서다, 그런 말씀이십니까?”
“그것도 하나의 이유지. 그러나 보다 큰 이유는 내 검을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때의 일이 생각나는지 유태청의 입가에 희미한 웃음이 걸렸다.
“자네는 말솜씨도 많이 는 것 같군.”
“별 말씀을…….”
“좋네. 일단 만나보는 것은 상관없겠지. 언제 만났으면 싶은가?”
석장진이 안도의 숨을 몰아쉬며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유 노사. 날짜는 추후 전하겠습니다.”
유태청이 조용히 웃으며 말했다.
“굳이 직접 여기까지 올 필요는 없네. 부관주인 제갈민이란 아이에게 전하게나.”
“제갈민? 아! 정무관을 만들었다는 제갈가의 그 아이 말입니까?”
“그 아이 덕분에 편하게 지내고 있네. 믿을 만한 아이야.”
유태청이 그렇다면 그런 것이다.
석장진은 고개를 끄덕이고 일어섰다. 그리고 깊숙이 허리를 숙이고 방을 나섰다.
방문을 열자 사람들이 후다닥 물러섰다.
그들은 뚱한 표정으로 방 안과 석장진을 번갈아 보았다. 상황을 깨달은 정광이 볼멘소리를 내뱉었다.
“잉? 끝났나? 쳇, 들어가자고. 쩨쩨하게 말도 못 듣게 하다니…….”
석장진이 방을 나가고 사람들이 각자의 방으로 들어가자 화령관이 다시 조용해졌다. 그제야 유태청이 입을 떼었다.
“자네 말대로인 것 같군. 어떻게 알았나?”
“맹주의 오른팔이 저희를 찾아올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유 노선배님이 목적이 아니라면 말입니다.”
“구파 때문인 것은……?”
“훗, 노선배님이 그러셨잖습니까? 맹주와 원로들 간에 불화가 있다고요.”
“흠, 내가 그랬던가? 한데 왜 나더러 승낙하라고 했나?”
“힘이 한쪽으로 몰리면 부조화가 생기잖습니까. 조금 도와주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았거든요.”
그래도 의문이 있다는 듯 유태청이 눈을 가늘게 떴다.
“꼭 그것만은 아니지 싶은데……?”
진용이 빙그레 웃었다.
“손발이 좀 필요해서요.”
유태청이 아연한 표정으로 웃음을 흘렸다.
“헐헐헐……. 맹주나 원로들이 들으면 복장 터질 말이구먼.”
“뭐,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면 되는 거 아니겠습니까?”
이제는 유태청도 태연히 말하는 진용이 괴물처럼 보였다.
그러고 보니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그런데 왜 자네의 능력을 그에게 보여준 것인가?”
나서지 않으려 해놓고 음파 차단을 직접한 이유가 뭘까?
유태청이 궁금한 아이처럼 눈을 빛내며 쳐다보자 진용의 입가에 웃음이 짙어졌다.
“그는 저를 대단하게 생각하지 않겠지만, 조금 전의 일도 잊지는 않을 겁니다. 잊어서도 안 되고요. 제가 속이 좁은지 몰라도, 무시당하면서까지 남을 돕고 싶지는 않거든요?”
4
다음 날 임진태를 찾아갔다. 정천무맹에 들어가면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는 일, 그간의 사정을 공손각에게 전하기 위해서였다.
또한 아버지의 행방에 대한 정보가 들어왔는지도 알아보고, 초연향에게 서신 한 통을 더 보내기 위함이기도 했다.
진용이 볼일을 다 보고 막 임진태의 가게를 나설 즈음이었다. 다섯 필의 말이 요란한 말발굽 소리와 함께 정천무맹의 외곽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하! 이랴!”
두두두두!
말 등에는 청년 셋과 아름다운 두 여인이 타고 있었다. 특히 두 여인의 아름다움은 지나가는 사람들이 모두 탄성을 지르며 주시할 정도였다.
그들은 대로에 들어서자 속도를 늦추고, 마치 그러한 상황을 즐기기라도 하는 사람들처럼 느긋하니 말을 몰았다.
그런데 뭐가 그리도 마음에 안 드는지, 두 여인 중 백색 경장에 백옥잠을 꽂은 여인이 살짝 아미를 찡그리며 말했다.
“이곳은 본래 이렇게 어수선한 가요?”
“하하하! 그건 여 매가 잘 몰라서 그런 것이오. 이곳은 외곽이어서 삼류문파의 무사들이 어슬렁거리는 것이오. 안으로 가면 진짜 정천무맹의 위용을 볼 수 있을 겁니다.”
“남궁 형은 전에 와본 것처럼 말하는구려. 누가 들으면 이곳에서 살았던 사람으로 알겠소.”
“하하, 제갈 형도 원. 꼭 봐야만 아오? 하도 들어서 딱지가 앉을 지경인데.”
“호호호호. 수 오라버니야 워낙 철저하셔서 본 것만 믿는 분이시잖아요.”
“아! 내가 깜박했구려.”
“소소야, 너 너무 그러는 거 아니다. 아무리 남궁 형이 좋다고 해도 오라비를 그렇게 깎아 내리다니.”
“오라버니!”
하하하! 호호호호!
맑은 웃음을 울리며 말을 모는 다섯 사람은 남궁가의 형제인 남궁현과 남궁도, 제갈가의 남매인 제갈수와 제갈소소, 그리고 비록 오대세가에는 끼지 못하지만 그 못지않게 세력이 큰 목은산장의 은성여였다.
다섯 필의 말은 거침없이 대로를 일직선으로 나아갔다.
비록 천천히 몬다고 해도 말의 걸음은 사람보다 빨랐다.
그들이 외곽의 빈촌을 지나 제법 번듯한 집들이 들어선 중심부에 다다랐을 때였다.
그들 앞에 한 사람이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느긋이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말이 다가오는지도 모르는 듯 태평한 걸음걸이였다.
뒷모습만 봐서는 알 수 없지만, 입고 있는 옷이 허름한 청의인데다 등에 아무런 장식도 없는 폭이 좁은 칼 한 자루를 멘 것이 그저 그런 삼류무사처럼 보였다.
남궁도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비켜주겠소?”
그제야 청의인이 어깨를 펴고 고개를 돌렸다.
생각보다 키가 크고 덩치도 좋은 자였다. 게다가 나이도 그보다는 서너 살 많아 보였다. 그런데 둥글둥글 인상 좋은 청의인의 얼굴에 ‘왜?’라는 의문이 담겨 있었다.
“대로 한가운데를 걷다 다치는 수가 있소. 이곳은 말이 많이 다니는 곳이오.”
딴에는 생각해 주는 듯한 말투였다. 그러나 속마음은 절대 그 뜻이 아니었다.
조심하지 않으면 죽어. 한쪽으로 꺼져!
청의인은 물끄러미 남궁도를 바라보더니, 태연히 돌아서서 조금 옆으로 비켜 걸어갔다.
충분히 비켜갈 수 있는 넓이였다. 하지만 남궁도는 그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감히 자신들의 앞을 막고도 머리 한 번 수그리지 않다니.
“내 말이 말 같잖다는 거요?”
그때 옆에서 아름다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남궁 공자, 그냥 가요.”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아름다운 목소리, 은성여였다. 그녀를 마음에 두고 있는 남궁도로선 그녀의 말을 듣지 않을 수 없었다.
“험, 알겠습니다. 은 낭자가 그리 말씀하시는데…….”
남궁도의 기운을 눈치 채고 어찌할까 고민하고 있던 청의인도 의외라는 듯 고개를 돌려 여인을 바라보았다.
‘얼굴만 예쁜 줄 알았더니, 마음 씀씀이도 쓸 만하군.’
기분이 조금 풀린 청의인은 한 걸음 더 옆으로 비켜섰다.
다섯 필의 말이 옆을 지나갔다. 그때 청의인이 자신을 바라보는 것을 안 은성여가 다시 싸늘한 어투로 말했다.
“삼류무사하고 다퉈봐야 손만 더러워지는데, 뭐 하러 다퉈요?”
청의인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여인은 자신을 위해서 말한 것이 아니었다. 한마디로 더러운 것을 왜 만지냐는 뜻이다.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온다.
‘강호는 확실히 재미있는 곳이야.’
그는 한 가지를 깨우쳤다. 자신이 살던 곳에서는 절대 배울 수 없는 진리를.
아름다운 것과 마음씨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는 진리를 깨우친 기분으로 한 소리 했다.
“얼굴만 예쁜 여자였군.”
그런데 옆에서 구경하던 누군가가 들릴 듯 말 듯 중얼거린다.
“눈이 삐었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