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법서생 5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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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174회 작성일소설 읽기 : 마법서생 58화
58화
밝아진 표정으로 걷던 하군상은 정문이 보이지 않는 곳에 당도하자 머리를 긁으며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고 형. 고 형의 신분을 밝혀서.”
“그럴 이유가 있으니 밝힌 것 아니겠습니까?”
“그게… 뭐랄까, 저도 형님에게 자랑을 하고 싶었거든요. 금의위의 백호장과 친구라고 말이죠.”
진용은 빙그레 웃었다.
그도 들어서 안다. 하군상이 서자라는 이유로 형이나 동생들에게 많은 괄시를 받아온 사실을. 그렇기에 하군상의 심정을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정광은 하군상의 말에 불만이 많았다.
“이놈은 그냥 위사고, 내가 백호다. 그리고 고 공자는 백호가 아니라 천호장이다, 하가야. 똑바로 알고 말해!”
기분 좋게 걸음을 옮기던 하군상은 눈을 크게 뜨고 걸음을 멈췄다.
“예? 천호장요?”
백호와 천호는 천양지차의 신분이다. 황궁을 상대로 거래를 하는 구룡상방이기에 하군상도 그 차이를 잘 알고 있었다.
천호장이라면, 아버지라 해도 허리를 굽히며 받아들여야 하는 손님인 것이다.
놀람도 잠시, 하군상은 허리를 절도 있게 숙이며 입을 열었다.
“괜히 주령이 보면 귀찮아질 수 있으니까 들어가시죠. 고, 천.호.장.님!”
결국 초연향의 거처까지 가는 동안 뒤로 젖혀진 하군상의 어깨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
오죽하면 정광이 후회했을까.
“썩을 놈, 꼭 지가 천호장인 것처럼 굴고 있네.”
두충이 그런 정광의 뒤통수를 노려보았다.
‘씨발, 꼭 위사라고 밝혀야 속이 시원한가? 누가 밴댕이 소갈머리 같은 말코 아니랄까 봐…….’
전각의 이층 창문을 가린 휘장 사이에서 여인의 눈이 반짝였다. 멀리서 옥신각신하며 건물을 돌아가는 사람들이 보였다.
‘그가 무슨 일로 온 거지? 흠, 금의위에 몸을 담았다고 들었는데…….’
하주령이었다. 그녀의 눈에 언뜻 묘한 빛이 떠오르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사라졌다.
2
찻잔을 앞에 놓은 채 마주 앉은 지 일다경.
오랜만에 보는 그녀가 하얀 손가락으로 찻잔 가를 만지작거리며 머뭇거리고 있다.
너무도 하얗고 윤이 나서 마치 백옥을 깎아 만든 것 같기만 한 손가락. 문득 만져 보고 싶다는 생각이 마음 한구석에서 주인의 허락도 받지 않고 슬며시 기지개를 켠다.
그의 마음을 느꼈는지 어느 순간 움직임을 멈춘 손가락이 찻잔의 아래쪽으로 미끄러져서 숨어버렸다.
진용은 얼굴이 살짝 달아오르는 것만 같아서 자신도 모르게 숨을 깊게 들이켰다.
언뜻, 마주 앉은 초연향의 몸에서 싱그럽고도 은은한 풀꽃 향기가 나는 것만 같이 느껴졌다. 앞에 놓인 찻잔 속의 다향보다 더 은은한 그런 향기가…….
궁금함이 일었다. 이 싱그러운 풀꽃 향기는 다향일까, 아니면 저 여인에게서 나는 향기일까? 그것도 아니면 두 가지가 합쳐져서 나는 걸까?
‘가까이서 맡아보면 알 수 있을 것 같은데……. 쩝.’
그의 엉큼한 상념은 나직하면서도 맑은 음성에 의해 깨어졌다.
“오랜만이에요.”
초연향의 목소리에 진용은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바쁘게 지내다 보니 벌써 이렇게 되었군요.”
“그러게요.”
그 후로 잠시 말이 끊겼다. 하지만 두 사람의 눈은 여전히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한참 만에야 초연향이 다시 말문을 열었다.
“금의위가 되셨다고 들었는데, 생활은 황궁에서 주로 하시나 보죠?”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그리고 어제부로 황궁을 나왔습니다.”
“예?”
“임무를 맡았거든요. 아마 강호에 뛰어들어야 할 것 같습니다.”
순간적으로 초연향의 눈이 반짝였다. 그 눈빛을 놓치지 않은 진용이 담담히 말했다.
“저에게 하실 말씀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뭐든 말씀해 보세요.”
입술을 지그시 깨문 초연향은 진용을 불러놓고도 그동안 망설였던 말을 조심스럽게 꺼냈다.
“강호로 나가신다면 잘되었는지도 모르겠네요. 실은 한 가지 알아봐 달라고 할 것이 있어서 고 공자를 찾은 거예요.”
“강호와 관련된 일입니까?”
“예, 그리고 매우 위험할지도 모를 일이구요.”
그 말에 진용이 가벼운 웃음을 지었다.
“위험은 이미 임무를 맡으면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지요. 거기에 조금의 위험이 더해진다고 해서 문제될 것은 없습니다. 일단 말씀을 해보세요. 판단은 그 후에 해도 되니까요.”
까짓것 뭐든 말만 해요! 그런 투다.
자신에 찬 진용의 말에 초연향은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았다.
“그럼 말씀드릴게요. 혹시… 천혈교라는 강호의 문파에 대해서 들어보셨나요?”
천혈교?
순간, 진용의 표정이 굳어졌다.
삼왕과 관계가 있다는 강호 문파의 이름이 천혈교라 하지 않았던가. 자신이 강호에 나가면 가장 관심을 가져야 할 곳!
“천혈교라는 이름을 초 소저는 어디서 들으셨습니까?”
“들은 것이 아니라 봤어요.”
들은 것이 아니라 봤다?
“우연히 두 사람이 나누는 이야기를 봤어요. 그리고 그 문제 때문에 고 공자를 뵙자고 한 거예요.”
이야기를 들은 게 아니라, 봤다?
문득 뇌리를 스치는 생각.
“혹시 입 모양을 보고 안 겁니까?”
초연향이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진용의 생각대로였다. 초연향은 자신의 신안으로 누군가가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보고 그 입 모양만으로 이야기를 알아들은 것이다.
아마 그조차도 남들은 보이지도 않는 거리에서 봤을 것이 자명했다. 경악할 일이었다.
“그 두 사람이 누굽니까? 그리고 그들이 나누었다는 이야기가 대체 뭐기에 초 소저가 그리도 염려를 하시는 겁니까?”
“그들은 바로 대공자와 하 언니예요.”
하군석과 하주령. 구룡상방의 쌍두마차. 그 두 사람이 대체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기에…….
“그분들은 천혈교라는 문파와 비밀 거래를 하기로 결심한 것 같아요.”
일순간 진용은 깊게 침잠된 눈을 내리깔고 초연향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이틀 전에 정체불명의 강호인 두 명이 이곳을 방문한 후에 결정된 일이에요.”
“그게 무슨 문제될 거라도 있습니까? 다른 상방이나 상단들도 사마외도와 관계를 가진 곳이 많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백마성과 만금전장의 관계만 해도 그렇고…….”
“물론 그건 고 공자의 말씀이 옳아요. 문제는 강호에 알려지지도 않은 곳과의 거래 금액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크다는 것이죠. 그것은 그만큼 천혈교라는 문파의 규모가 크거나, 아니면 천혈교가 하려는 일의 규모가 그만큼 크다고 밖에 볼 수 없어요. 그것도 일차 거래가 그 정도이니 그 다음은 얼마나 될지…….”
“대체 얼마나 되기에……?”
초연향이 입술을 잘근 깨물며 말했다.
“십만 냥이에요.”
십만 냥? 큰돈이긴 하지만 구룡상방의 재력을 생각하면 그리 염려할 정도는 아닌데?
진용이 의아해하자 초연향이 말을 이었다.
“황금으로 십만 냥을 그들에게 대주기로 했다고 하더군요.”
황금 십만 냥? 그럼 은자로 이백만 냥이다!
더구나 그것이 일차 투자 금액이라고?
눈을 크게 뜬 진용의 입에서 절로 침음성이 흘러나왔다.
“으음, 괴이한 일이군요. 그렇게 엄청난 금액을 투자하고 잘못되었을 경우 그 파장이 만만치 않을 텐데 말입니다.”
“제가 염려하는 것도 그 때문이에요. 일이 잘되면 천만금을 벌 수 있겠지만, 일이 잘못되었을 경우 그 파장은 상방 전체에 미칠 수밖에 없어요. 그리되면…… 해룡선단의 어려움 정도는 이들에게 관심거리도 되지 못하고 뒤로 젖혀질 게 뻔하거든요.”
당연히 그럴 것이다. 자신들이 어려워지면 남의 어려움은 쳐다보지도 않을 것이다. 그리되면 해룡선단은 무너질 수밖에 없다.
초연향이 걱정하는 것은 바로 그 점이었다.
“제가 뭘 해주면 되겠습니까?”
초연향이 눈을 들어 진용을 바라보았다.
“천혈교라는 곳이 그 정도 투자를 할 가치가 있는 곳인지 정확히 알고 싶어요. 죄송해요, 이런 부탁을 드려서…….”
말은 단순히 그리했지만, 그녀는 천혈교에 대해서 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싶을 것이다. 그것만이 자신의 불안을 달랠 수 있을 테니까.
진용은 물끄러미 초연향을 바라보고는 나직이 입을 열었다.
“초 소저는 절 얼마나 알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초연향의 눈망울이 잘게 떨렸다.
고진용이라는 이름 외에 자신이 이 사람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무얼까?
무공이 강하다는 것. 북경에 살며 어릴 때 헤어진 아버지를 찾으려 한다는 것. 최근에 금의위가 되었다는 것.
그뿐이다. 자신이 아는 고진용은 모두 본인이 말해준 것뿐이다.
그리고 보다 중요한 사실은 자신과 이 사람은 아무런 관계도 아니라는 것이다.
기껏해야 자신과 함께 교주에서 북경까지 여행하고, 하군상을 통해 두어 번의 소식을 전한 정도가 전부다.
그런데도 자신은 해룡선단의 어려움을 해소하기 위해 부탁을 하고 있다.
생각해 보니 참 뻔뻔하다. 이 사람이 자신과 무슨 관계라고.
하지만…… 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다. 유량마저 교주로 돌아간 지금, 그나마 이 사람이 아니면 부탁할 사람조차 없으니까.
솔직히 매달리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하고…….
“정말 죄송해요.”
떨리는 눈으로 진용을 바라보던 그녀는 결국 고개를 숙였다.
고개를 숙인 그녀를 향해 진용이 말했다.
“우선 한 가지, 저는 강합니다. 그리고 더 강해질 것입니다.”
그럴 것이다. 이제 겨우 스물에 들어서는 나이에 그토록 강하니 충분히 그럴 수 있을 것이다.
초연향은 숙인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은 충분히 그럴 거예요.’
진용이 말했다.
“그러니 천혈교는 투자할 가치가 없는 곳입니다.”
뜬금없는 말에 초연향은 숙였던 고개를 들고 이해할 수 없다는 눈빛으로 진용을 응시했다.
진용이 무심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얼마 전에 알았습니다만, 천혈교가 삼왕과 깊은 관련이 있는 곳이라 하더군요. 아버지를 이용하고 잡아 가둔 삼왕과 말이죠. 그러니 천혈교는 제가 철저히 무너뜨릴 것입니다. 무슨 수를 쓰던!”
강하게 말을 맺은 그는 놀란 표정의 초연향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가느다란 미소를 베어 물었다.
“원래 고씨가 한 고집 합니다. 그러니 믿어도 됩니다. 천혈교는 상대를 잘못 만난 겁니다. 아시겠죠?”
초연향은 자신도 모르게 풀썩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믿어요. 예, 천혈교는 상대를 잘못 만났으니 무너질 거예요.”
“흠, 바로 그겁니다. 그럼 결론은 났군요.”
“풋!”
초연향은 눈가에 맺힌 이슬을 털어낼 사이도 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시원했다. 뭔지 몰라도 진용의 말을 듣는 순간 모든 것이 다 잘될 것만 같았다.
‘그래, 미리 걱정할 필요는 없어. 아직은 시간이 있으니까. 고마워요.’
초연향은 결심을 굳힌 듯 밝아진 표정으로 말했다.
“그럼 이제는 천혈교에 대한 투자를 어떻게 막느냐, 하는 문제만 남았군요.”
“초 소저가 나선다면 초 소저의 입장만 곤란해질 겁니다.”
“그 정도는 감수해야죠. 다행인 점은 저 말고도 그 일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 적지 않다는 거예요. 그 사람들이 나선다면 적어도 시간은 끌 수 있을 거예요.”
“시간은 늦출 수 있어도, 투자는 이루어진다고 봐야겠군요.”
“예, 아마도…….”
“최악의 경우, 해룡선단이 무사할 수 있는 가능성은 얼마나 됩니까?”
“지금 상황에선 솔직히 힘들어요. 해왕방이 워낙 거세게 세를 키우는 바람에…….”
“그럼 해왕방이 더 문제라는 말 아닙니까? 그러니까 해왕방만 없다면 어려움도 해결된다는 말 아닌가요?”
“결론은 그래요. 그런데 또 꼭 그렇게 생각할 수만도 없어요.”
“무슨……?”
진용이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자 초연향은 해왕방에 대해 알려지지 않은 사실 하나를 진용에게 털어놓았다.
“언제부턴지 해왕방의 뒤를 일양회가 봐주고 있어요. 저희들도 최근에 와서야 안 사실이에요. 그 바람에 조부님이나 아버지가 더 고민하고 있는 거죠.”
“일양회(日陽會)?”
진용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초연향은 진용이 일양회라는 이름 때문에 놀란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의 생각은 반만 옳았다.
“삼존맹의 세 기둥 중 하나인 일양회가 해왕방의 뒤에 있다는 겁니까?”
“그래요. 해왕방과의 싸움이 더 어려워진 것도 그 때문이에요. 저들은 우리를 칠 수 있지만 우리는 저들을 견제하는 선에서 그쳐야 하거든요. 그래서 구룡상방도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하고 미적거리는 것이구요.”
진용의 입가에 냉소가 피어났다.
“흠, 이거 참. 이것도 인연이라고 해야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