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법서생 5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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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083회 작성일소설 읽기 : 마법서생 56화
56화
휘리리링! 콰아아아아!
갑자기 거세진 바람에 사방에 있던 먼지가 회오리를 일으키며 가운데로 몰려드는 것이 아닌가.
그뿐이 아니다.
우당탕탕!
잠깐 넋을 잃은 사이 서가에 꽂혀 있던 책자들마저 회오리에 휘말려든다. 수백 권의 책자들이 서고의 가운데로 뭉친 것은 한순간이었다.
미처 어찌할 사이도 없이 난리가 나버렸다.
실피나가 당황한 듯 어쩔 줄 몰라 소리쳤다.
―어머, 어머! 너무 세게 했나 봐! 이걸 어째, 이걸 어째.
미칠 노릇이다.
“실피나! 뭐 하는 거야!”
진용이 소리쳐도 소용이 없었다. 실피나는 계속 ‘어머, 어머’만 반복해 댔다.
“그만! 멈춰!”
멈추라는 소리가 떨어지고 나서야 실피나가 손짓을 멈추었다.
후두둑…… 털썩, 털썩…….
바람이 멈춘 지하 서고. 허공에 떠 있던 책 떨어지는 소리만 들린다.
거센 바람에 유등잔의 불마저 꺼진 데다, 지하 서고를 가득 메운 뿌연 먼지 때문에 앞이 보이지 않았다.
진용은 숨을 멈추고 제자리에 서서 멍하니 앞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짧은 시동어를 외쳤다.
“광(光)!”
먼지 때문에 희미하긴 했지만 어슴푸레 서고의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맙소사! 난리도 이런 난리가 없다. 태풍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 한가운데 서 있는 것만 같았다.
서로 뒤엉킨 채 수북이 쌓인 책들을 보는 진용의 눈이 거세게 흔들렸다.
아버지의 책들이 찢어지고 구겨져서 뭐가 뭔지도 모르게 뭉쳐 있다.
그나마 아버지가 가장 귀하게 여기던 책과 고대의 자료들은 따로 목함 속에 넣어져 있어 바람에 휘말리지 않았지만, 눈앞에 있는 책들도 결코 아무 데서나 쉽게 볼 수 있는 책들이 아니다.
대체 이게 무슨 난리란 말인가!
“실피나! 먼지를 치우라고 했지 누가 난리를 피우라고 했어?!”
진용은 어이가 없어 질책이 담긴 눈으로 실피나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더 이상 뭐라 하지는 못했다.
―실피나는…… 주인이 시키는 대로 청소를 했는데……. 힝!
커다란 눈에서 금방이라도 눈물이 떨어질 것만 같은 실피나를 보니 그저 한숨만 나올 뿐이다.
‘세상에, 정령이 우네. 뭐 저런 정령이…….’
대신 자기 잘못도 모르고 중얼거리는 세르탄에게 모든 화살을 쏟아 부었다.
‘세르탄! 다시는, 다시는 실피나에게 뭐 시키라고 하지 마! 알았어!’
‘내가 뭘? 만날 나만 뭐라고 해……. 씨이…….’
끄응!
진용은 대책없는 정령에 곧잘 대드는 마계의 말썽꾸러기를 머릿속에 이고 사는 자신이 한심하기만 했다.
그래도 어쩔 건가. 머릿속에서 빼낼 수도 없는 것을.
진용은 억지로 천단심법을 끌어올렸다. 순전히 들끓는 화를 가라앉히기 위해서였다.
얼마나 지났을까. 그렇게나마 마음을 달랜 진용은 다시 수북이 쌓인 책더미를 바라보았다.
보면 볼수록 한숨만 나온다. 하지만 이제는 어쩔 수 없었다. 어차피 벌어진 일.
‘어휴…….’
진용은 서고의 가운데 수북이 쌓인 책더미로 다가갔다. 그리고 다시 유등잔에 불을 붙이고 쪼그리고 앉아 책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엉킨 바람에 구겨지긴 했지만, 찢어진 책자는 많지 않았다.
“휴우, 다행이다.”
안도하며 가슴을 쓸어내린 진용은 옆을 바라보았다.
실피나가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조금 전의 우는 듯했던 모습은 언제 그랬냐는 듯 싹 달아나서 눈곱만큼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저 세상만사 태평한 모습. 얄미워 보일 정도다.
‘그래, 다 내 잘못이다, 내 잘못! 어휴, 정말…….’
진용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책을 정리하다 말고 실피나에게 물었다. 생각해 보니 궁금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실피나, 실피나는 중급 정령이라며?”
끄덕끄덕.
“중급 정령은 말을 못한다는데 실피나는 어떻게 말을 할 수 있지?”
실피나가 머뭇거리더니 마지못한 듯 대답했다.
―혼돈의 열매를 먹은 전 주인이 실피나에게 자기 능력의 일부를 심어놓고 죽었는데, 그 바람에 실피나는 감정이 생겼거든. 그런데 감정이 생기니까 정령의 세계에서 받아주지 않잖아. 치이, 언니들이 자기들보다 힘이 세졌다고 질투하는 걸 거야 아마. 하여튼 그 이후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오랫동안 떠돌아 다녔어, 친구하고. 주인을 만나기 전까지.
진용은 그 말이 뜻하는 바가 뭔지 알 길이 없었다. 그런데 세르탄이 그 말을 듣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호, 혼돈의 열매라고?’
‘세르탄, 그게 뭔데 그리 놀라는 거지?’
‘그건…… 한마디로 말하면 뭐랄까……. 이쪽 세상에서 말하자면 선단(仙丹)? 성약(聖藥)? 아무튼 그런 거야. 인간이 혼돈의 열매를 먹으면 이미 인간이라고 볼 수가 없어. 물론 먹고 나서 살아 있을 수만 있다면. 하지만 마족이나 천족이 먹으면 그야말로 엄청난 공능을 얻을 수 있지. 그러고 보니…… 아깝다, 쩝.’
침을 삼키는 세르탄이 한심하기는 했지만 진용은 굳이 뭐라 하지 않았다. 침 삼킨다고 어디서 혼돈의 열매인가 뭔가가 뚝 떨어질 것도 아니니까.
‘실피나의 전 주인은 살아 있었으니까 실피나에게 자신의 능력을 전해줬을 것 아냐?’
‘그러게. 인간이 그걸 먹으면 미치는 것은 둘째 문제고, 전신이 터져서 죽어버릴 텐데…… 대체 어떤 인간이 그걸 먹고 살아난 거지?’
진용이 다시 실피나에게 물었다.
“전 주인은 누구였어, 실피나?”
―하르비나. 혼돈의 마녀 하르비나가 전 주인이야.
진용은 당연히 그 이름이 뜻하는 바를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세르탄도 그 이름은 처음 들어보는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어쨌든 실피나에 대해서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자 진용은 실피나가 새롭게 보였다. 게다가 감정이 생겼다는 이유 때문에 정령의 세계로 돌아가지도 못하는 실피나가 조금은 불쌍하게 생각되었다.
“들어가 쉬어, 실피나.”
―응, 그럼 나 간다. 열심히 치워, 주인아!
진용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들어가라면 그냥 들어갈 것이지, 일은 자기가 다 저질러 놓고, 뭐? 열심히 치워?
‘케케케…….’
‘세르탄! 지금은 바쁘니 참는다. 조용해!’
뒤통수를 내갈기고 싶은 마음을 꾹 참고, 진용은 근 반 시진에 걸쳐 꼼꼼히 분리한 책자를 본래의 자리에 꽂아 넣었다.
반쯤 집어넣고 다시 한 권의 책을 집어 들었을 때였다.
“응? 이건 뭐지?”
처음 보는 책 한 권이 손에 잡혔다.
겉장과 속장의 색깔이 확연히 차이가 나는 책이었다. 아무래도 많은 부분이 유실되어서 새롭게 제본한 책 같았다.
이상한 점이라면, 제목이 적혀 있어야 할 곳에 이(二)라는 단순한 번호만 매겨져 있다는 것이다.
진용은 이(二) 자가 적힌 책자의 표지를 넘겨보았다. 그러자 아버지의 숨결이 느껴지는 글씨가 한눈에 들어왔다.
“무슨 책인데 다시 제본을 하신 거지?”
의아하면서도 반가웠다. 눈물이 나올 정도로. 하지만 진용은 한 장을 넘기기도 전에 놀란 눈을 크게 떠야만 했다.
“뭐야? 설마 무공서?”
호기심 가득한 마음으로 첫 번째 장을 넘겨보았다.
[이 무서(武書)는 호남의 악록서원에 들렀다가 우연히 얻은 책 중의 하나로, 한(漢)대의 호족 무덤에서 발견되었다고 하니 적어도 한(漢) 이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유추하는 바이다. 앞장이 많이 뜯겨져 있어 이 책의 제목을 알 수 없는 것이 안타깝기 그지없으나, 적혀 있는 글씨의 필체에서 느껴지는 힘만으로도 나는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래도 예사 무인이 남긴 것 같지가 않아, 희미해져서 읽기가 힘든 부분을 보완해 이곳에 남긴다.]
적힌 그대로 제목은 따로 없었다. 그러나 분명 무서였다.
대충 넘겨보자 도해인지 뭔지 몰라도 난해한 선이 복잡하게 그어져 있었다.
진용은 언뜻 뇌리를 스치는 생각에 일단 무제(無題)의 무공서를 한쪽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자신이 분리해 놓은 책들을 더 자세히 살피며 책을 하나씩 서가에 꽂아 넣었다.
그러던 중 마침내 처음에 찾은 책과 비슷한 책 두 권을 더 찾아냈다.
일(一)과 삼(三)이 적힌 책자였다. 역시나 표지에 숫자만 적히고, 상당 부분이 삭아서 떨어져 나가 있었다.
그 이후로 그 책들이 꽂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곳을 살펴봤지만 더 이상은 찾을 수가 없었다. 아마도 아버지가 얻은 책은 모두 세 권인 듯했다.
진용은 일단 책 정리가 끝나자 숫자가 적힌 세 권의 책 중 일 자가 적힌 책부터 펼쳐 보았다.
두 장을 넘기자 책의 본 내용이 시작되었다.
[……벽공(碧公)을 만나 그렇게 헤어졌다. 그러나 아쉬움은 없었다. 비록 공부를 깊이 있게 나눠보지는 못했으나, 나의 배움이 그에 비하여 뒤떨어지지 않음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마 벽공도 그걸 인정했기에 아무런 말 없이 돌아섰을 것이다. 다만 한 가지 미련이 있다면 그가 혈수(血手)의 주인과 손을 나눈 결과에 대해 듣지 못했다는 것이다.
…(중략)…….
믿을 수 없는 소문이 들린다. 북천의 하늘이 누군가에게 쓰러졌다고 한다. 천하에 적수를 찾을 수 없다는 그가 삼십 수를 채 나누지 못하고 쓰러졌다니……. 비록 늙은 나이지만 호승심이 솟구친다. 그를 찾아가 손을 나누어보고 싶다.
…….
더 이상 참을 수가 없다. 모든 것을 자식에게 맡기고 떠나기로 했다. 그를 찾아서…….
…(후략)…….]
첫 번째 책은 단순히 일기 형식으로 쓰여 있었다. 이십여 장이 전부인 책의 중간중간에 아버지가 따로 주석을 달아놓은 글이 보였다.
반가운 마음과 호기심에 끝까지 읽어보았지만 그럼에도 책을 쓴 사람의 이름은 나오지 않았다. 참으로 아쉬운 일이었다.
그러나 아직 두 권이 남아 있으니 실망할 단계는 아니었다.
두 번째 책을 펴 들고 역시 두 장을 넘기자 좀 전에 대충 보았던 것과 비슷한 이해하기 힘든 도해가 보였다.
점과 선으로 이루어진 도해는 마치 어린아이가 낙서를 해놓은 것만 같았다. 그러나 진용은 그것이 결코 어린아이의 낙서가 아니라는 것을 느낌으로 알 수 있었다.
“장법인가?”
선은 두 가지를 나타내고 있는 듯했다.
굵은 선은 투로이고, 가는 선은 기의 흐름인 것 같았다. 그리고 중간에 찍힌 점은 기가 최고조에 도달한 곳으로, 타격점인 듯 보였다.
다시 한 장을 넘겨보았다. 그림이 있는 뒷장에는 구결로 보이는 글이 잔뜩 쓰여 있었다.
그림 하나에 구결 한 장이 아니었다. 어떤 곳은 그림 하나에 석 장, 넉 장의 구결이 적혀 있는 곳도 있었고, 단 몇 줄밖에 없는 곳도 있었다.
일곱 개의 그림, 열두 장의 구결. 그것이 책자의 모든 것이었다.
그나마도 구결은 진용이 알지 못하는 글로 쓰인 데다, 군데군데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훼손된 곳도 보였다. 아쉬운 일이었다.
진용은 세 번째 그림까지만 훑어보고 책을 덮어버렸다. 어느 정도의 가치가 있을지 알 수는 없으나, 무서인 것이 확인된 이상 시간을 두고 자세히 살펴보기 위함이었다.
세 번째 책을 펴든 진용은 조금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아버지가 새롭게 제본하며 남긴 서문에 의하면, 앞서 읽은 책의 저자와 세 번째 책의 저자가 다르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책의 재질은 양피였다. 겨우 다섯 장의 양피.
그러나 아버지는 오히려 이 책에 대해 더 이해하기 어려운 글을 남겨놓았다.
[믿을 수 없는 내용이나 눈이 떨어지지 않으니 참으로 난감한 글이다. 한편으로는 천 년도 더 전의 허황된 이야기에 마음이 흔들리는 내 자신이 우습기만 하다. 하지만 영기가 서린 글씨에 차마 버리지는 못하고 이곳에 남긴다.]
진용은 서문을 넘기고 본 내용을 읽어갔다.
[하늘은 하늘이 아니고, 땅은 땅이 아니다. 그러나 우매한 인간들이 하늘만이 하늘인 줄 알고, 자신들이 딛고 선 땅만이 땅인 줄 아는구나. 에헤라, 세상 밖에 세상이 있음을 내가 말한들 누가 믿을 건가.
…(중략)…….
그저 혼자서 미친 척 세상을 떠돌다 죽으면 그만이련만, 아는 게 죄라고 공연히 삼계(三界)를 알아 쓸데없는 인연을 남겨놨구나. 어찌할꼬, 어찌할꼬. 내 죄를 어찌할꼬.
…(중략)…….
삼대를 이어가기도 전에 우려하던 일이 벌어지는구나. 동생이 형을 죽이고, 조카가 숙부를 죽였다. 신심(神心)에 피가 더해졌으니 이제는 혈신(血神)만이 남았도다.
오! 이 모든 업을 짊어져야 할 나이거늘, 그러할 힘이 없으니 죽음으로서 마지막 방도를 취하노라.
…….
죽음으로서 혈신의 힘을 둘로 갈라놓았다. 다시 합쳐지지 않기만을 바랄 뿐…….
…….
죄 많은 망오(忘吾)가 남기노니……
인연이 닿은 자여! 하늘은 하늘이 아니고, 땅은 땅이 아님을 알아 혈신의 저주를 풀기 바라노라.]
진용은 멍하니 다섯 장의 양피지를 읽고 또 읽어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