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법서생 5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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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191회 작성일소설 읽기 : 마법서생 55화
55화
세 번째 서(序)
어느 해 여름.
감숙(甘肅)의 오지에 혈풍이 불었다.
사냥을 나온 성주의 아들이 원주민의 독침에 죽었다는 게 이유였다.
피비린내가 인간의 발길을 거부하던 깊숙한 계곡까지 덮어버린 혈풍은 수만 장족(臧族)의 피를 대지에 바치고 나서도 그칠 줄 몰랐다.
피의 계절!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온통 피를 뒤집어쓴 군병(軍兵)들은 겨울이 오기 전까지 원주민들을 추격해 목을 따고 귀를 잘라냈다.
겁간, 약탈, 방화는 기본이었고, 심한 곳은 개새끼 한 마리 남기지 않고 부족 전체가 씨몰살을 당해야만 했다.
모두가 제정신이 아니었다.
광기!
피에 미쳐 버린 것이다.
와중에 한 장수가 납달격산(拉達格山)에서 일천에 달하는 원주민들이 숨어 있는 동굴을 찾아냈다. 그러나 처음부터 장족 말살 작전에 회의를 느끼고 있던 그 장수는, 원주민들을 죽이지 않고 못 본 척 방향을 틀어 산을 내려가 버렸다.
“처음부터 잘못된 일. 더 이상 피를 흘릴 이유가 어디 있겠소? 후우, 나 하나 사죄한다고 무슨 소용이 있겠소마는, 모든 중원인들을 대신해 그대들에게 용서를 빌겠소.”
일 년이 지난 후, 장족 하나가 장안에 있는 그 장수의 집을 찾아왔다.
그는 은혜에 보답키 위한 원주민들의 마음이라며 하나의 상자를 전해주었다. 바로 그들이 숨어 있던 동굴의 지하 수백 장 깊숙한 곳에서 발견한 상자라고 했다.
신성한 기운이 깃들어 있는 듯해서 부족의 보물로 삼으려 했으나, 부족의 제사장이 말하길, 상자 안에 든 물건들의 신기(神氣)로 인해 장수가 되돌아간 것 같으니 그 물건들을 장수에게 가져다주라 했다는 것이다.
장수 이청한은 인의(仁義)의 마음이 전해지기를 바라며, 죽기 직전 원주민들에 대한 이야기와 함께 그 물건을 자식에게 전해주었다.
그러나 그의 자식인 이덕숭은 인의를 얻는 것보다 권력을 얻는 것을 더 바랐다.
낙엽이 붉게 물든 어느 가을 날, 그는 북경에서 한때 동문수학했던 친구를 만나기 위해 길을 떠났다.
이덕숭은 친구를 만나자 넌지시 그 물건들을 보여주며 권력을 얻을 수 있는 정도의 가치가 있는지를 물었다.
친구는 그 물건의 가치를 한 번 알아보겠다며, 물건 중 하나를 가지고 누군가를 만나러 갔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 첫눈이 내리던 날, 그 친구는 물음에 대한 대답으로 차디찬 검을 이덕숭의 목구멍에 집어넣었다.
“보물을 가진 것이 죄가 아니라, 봐서는 안 될 것을 본 것이 죄라네, 친구.”
* * *
삼십 년 만이었다. 장족의 한과 원념이 서리고 희망이 싹튼 납달격산(拉達格山)의 동굴로 한 사람이 들어섰다.
누더기 옷을 입은 그는 좌우를 둘러보더니, 지리를 잘 아는 것처럼 망설이지 않고 동굴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둠은 결코 그의 걸음을 멈추게 하지 못했다. 그는 조금도 머뭇거림이 없이 안으로 안으로 한없이 걸어 들어갔다.
그러다 어느 순간 그가 걸음을 멈추었다.
“이.곳.인.가?”
쇠를 깎는 듯한 그르렁거리는 목소리가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앞에는 수직으로 뚫린 동굴이 악마의 입처럼 입을 쩍 벌리고 있었다.
콰아아아아!
깊이를 알 수 없는 그곳에서 찬바람이 용틀임하며 올라왔다. 뼛골이 시릴 정도로 차가운 바람이었다.
하지만 그는 아무런 표정 변화도 없이 수직 동굴을 응시하더니, 갑자기 악마의 입속을 향해 몸을 날렸다.
―원한다면 끝까지 가주마!
1장. 살아 있는 그림
마지막 말은 거의 협박조다.
순간 두충의 그렁그렁한 눈에 커다랗게 매달려 있던 눈물이 쏙 들어가 버렸다.
배신감에 온몸을 부르르 떤 두충이 벌겋게 충혈된 눈으로 정광을 쏘아보았다.
당연히 기죽을 정광이 아니었다.
“눈깔 안 내려?”
“후우우우.”
진용은 깊은 한숨을 내쉬고 그냥 걸어갔다.
따라오든가, 말든가.
정광을 오른쪽에, 두충을 왼쪽에 거느린(?) 진용이 고가장에 도착하자 뜻밖의 손님이 기다리고 있었다.
“고 형!”
“아니, 하 형이 웬일이십니까?”
하군상이었다. 그는 진용을 보자 마치 십 년 만에 만난 친구를 본 표정으로 벌떡 일어섰다.
“생각보다 일찍 들어오셨군요.”
“예, 한데 무슨 일로 여기까지……?”
“하하! 그야 고 형이 보고 싶어서 왔지요.”
꼭 그런 이유가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진용은 아무것도 묻지 않고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
“일단 안으로 들어가죠.”
“예, 고 형.”
“유모, 저쪽 끝 방을 앞으로 여기 두 형이 쓸 겁니다. 그렇게 아시고 이부자리를 갖다 주세요.”
“예, 도련님.”
유모가 밝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진용이 돌아온 후 유모의 몸은 빠르게 좋아졌다. 더구나 금의위가 되어서 만만치 않은 녹까지 받아오니 그녀는 기뻐서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에구, 이제는 늙어서 도련님의 수발도 제대로 하기 힘든데, 아무래도 참한 시비를 하나 데려와야겠어.’
두충과 정광을 안으로 들어가자 하군상이 심각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바쁘시지 않다면 내일 저희 상방에 와줄 수 있으십니까?”
“무슨 일로……?”
“향 매가 만났으면 합니다.”
“초 소저가요?”
초연향이 하군상을 직접 보냈다는 것은 그만큼 비밀을 요하는 일이라는 말.
어차피 북경을 떠나기 전에 만나보려 했으니 잘된 일이었다.
“아침에 가면 됩니까?”
“예, 고 형. 내일 진시 초쯤 오십시오. 제가 그때쯤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그 시간쯤 가죠.”
무엇 때문에 보자고 하는 걸까? 그러나 이유는 둘째 치고, 진용은 초연향을 생각하자 가슴이 뛰었다.
‘그냥 지금 가서 만나볼까? 아냐, 초 소저가 좋아하지 않을지도 모르는데…….’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십니까?”
하군상이 입술을 비틀며 대답했다.
“보고 싶은데 안 오시니까 화났나 보죠 뭐.”
“예?”
“하하하! 놀라시기는. 그러게 자주 좀 찾아오시지 그랬습니까?”
“나원, 하 형도…….”
“어이구, 이럴 게 아니고 가봐야겠습니다. 빨리 가서 향 매에게 소식을 전해야지요. 낭군님이 내일 오신다고 말입니다.”
“하 형!”
“하하,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진용은 하군상을 떠나보내고도 초연향에 대해 생각하느라 한참 동안 방을 나서지 않았다.
“후, 내가 왜 이러지? 그런데 대체 무엇 때문에 그러는 걸까? 하군상에게 알리지 않았을 정도면 결코 가벼운 이야기는 아닐 것 같은데……. 뭐, 내일 가보면 알겠지.”
진용이 궁금함을 가슴속에 구겨 넣고 있는데 밖에서 옅은 신음 소리가 났다.
“으으으…….”
“응?”
집 안에 있는 사람이라고 해봐야 자신까지 네 명, 그러니 밖에서 나는 신음 소리의 주인을 짐작 못할 그가 아니었다.
‘두 위사가 왜 저러지?’
진용은 방을 나섰다. 그러자 희한한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묘한 자세로 서 있는 두충, 그런 두충의 온몸에선 땀이 비 오듯 쏟아지고 있었는데, 그 옆에선 정광이 엄한 눈길로 두충의 자세를 일일이 수정해 주고 있었다.
진용은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아연한 표정을 지었다.
두충의 자세는 자신이 알고 있는 자세다. 천하의 그 누가 자신만큼 저 자세를 잘 알까, 세르탄을 제외한다면.
‘얼래? 뭐야, 신수백타를 왜 저놈이……?’
아니나 다를까, 세르탄도 두충의 자세를 알아보고 어이 없어 했다.
“지금 뭐 하는 겁니까?”
진용이 묻자 정광이 답했다.
“이 녀석의 무공이 너무 약한 것 같아서 한 수 가르쳐 주고 있는 중이네.”
한 수 가르쳐 준다고?
“그런데 왜 하필 신수백타입니까?”
“고 천호의 무공을 내가 알고 있다고 하니까 가르쳐 달라고 하더군. 그래서 기초만이라도 가르쳐 주려고 했던 것이지.”
그게 아니겠지. 도장님이 꼬셨겠지.
‘내가 고 천호의 무공을 알고 있는데 배워볼 텐가?’ 하면서. 뻔히 보이는 이유 때문에.
진용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만 해요, 두 위사. 그거 잘못 배우면 큰일 납니다. 고통이 너무 심한 데다, 잘못하면 몸이 크게 상할 수도 있어요.”
이를 악문 채 악착같이 자세를 취하고 있던 두충은 반신반의하는 표정으로 비비 꼬았던 자세를 풀었다.
“헥, 헥! 정말입니까, 천호장님?”
“지독한 고통 때문에 정광 도장님도 포기한 무공입니다.”
순간 두충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그럼… 자신도 포기한 무공을 나에게?”
“나는 잘못없다. 네가 가르쳐 달라고 했으니 가르쳐 준 것 뿐이야.”
말이야 틀린 말이 아니다. 그러나 정광이 그 말을 꺼내지 않았다면 자신이 어찌 배우려 했을까.
뭐? 심심한데 고 천호의 동작을 몇 개 배워보라고?
온몸이 쑤셨다. 아무래도 며칠간은 고생을 해야만 할 것 같다.
그제야 어렴풋이, 아니, 확실히 정광이 왜 쉬고 있는 자신에게 와서 진용의 무공에 대해 말했는지 알 수 있었다.
정광은 자신을 고통의 지옥에 빠뜨리고 싶었던 것이다. 순전히 책을 보여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두충은 불길이 이는 눈으로 정광을 노려보고는 힘든 걸음을 옮겨 방으로 향했다.
‘두고 보자, 미친 말코!’
2
정광과 두충의 구시렁거리는 소리도 사라진 야심한 밤, 진용은 아버지의 침상 옆에 서서 앞쪽을 응시했다. 손에는 오행을 뜻하는 다섯 개의 줄 중 토에 해당하는 줄이 잡혀 있었다.
내일이면 기약 없는 길을 떠나야 하기에 지하 서고의 봉쇄를 풀기로 결심한 것이다.
쿠르르르릉!
나직이 울리는 소리, 순간적으로 진용의 눈빛이 잘게 흔들렸다.
지하 서고의 봉인이 풀리자 다섯 단계에 걸쳐 막혀 있던 거대한 석판이 하나둘 열리고 있었다.
정광과 두충에게 미리 말해두었기에 들어오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진용은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방 안 전체를 자신의 기로 감싸 버렸다. 그러고는 내력을 극한으로 끌어올려서 진동조차 짓눌러 버렸다.
그러자 온몸으로 전해지는 미세한 진동음. 반가워하는 지하 서고의 울음소리가 진용의 가슴을 뒤흔들었다.
이 진동을 혼자서 느껴야 한다는 것이 너무도 가슴 아프다.
아버지가 곁에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지난 일을 이야기하며 앞장선 아버지를 따라 지하 서고에 내려가고 싶었는데… 그랬는데… 혼자서 내려가야 하다니…….
구구구구…….
반 각이 지날 즈음 진동이 잦아들더니 봉쇄된 지하 서고가 시커먼 입을 벌렸다.
화악!
손가락에서 튕겨진 불꽃이 유등잔에 떨어지자 불꽃이 피어났다. 십 년이 지났는데도 기름이 마르지 않았나 보다.
바닥에 내려서자 곰팡이 냄새와 은은한 향내가 섞인 시큼한 냄새가 코를 찌른다.
진용은 그 자리에 서서 지하 서고를 천천히 둘러보았다.
머릿속의 세르탄도 감회가 새로운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시르, 이게 얼마만이지?’
‘왜, 고향에 돌아온 것 같아?’
‘응.’
진용은 세르탄의 말에 우울함을 털어내고 서가에 꽂힌 책들을 둘러보았다.
먼지가 수북이 쌓인 책들은 십 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은 곳에 똑같은 모습으로 꽂혀 있었다.
‘실피나를 불러서 먼지 좀 치우라고 해봐.’
‘실피나? 정령이 그런 것도 할 줄 알아?’
‘물론이지!’
자신에 찬 세르탄의 말에 진용은 나직한 목소리로 실피나를 불러냈다.
“실피나.”
그런데 아무런 반응이 없다.
“실피나!”
조금 큰 목소리로 불러봤다.
―불렀… 어?
잠이 덜 깬 목소리로 대답하며 실피나가 기어나왔다.
―주인아, 여긴 어디야? 왜 부른 거야?
“우리 집. 먼지가 너무 많아서 청소 좀 하려고. 바람으로 먼지 좀 모아봐.”
―…….
실피나가 입을 다문 채 그 큰 눈을 멀뚱하니 뜨고서 진용을 바라보았다.
“왜? 할 줄 몰라?”
―할 줄은 아는데…….
“그럼 해봐.”
―실피나는 더러운 것 싫은데…….
정령이라서 그런지 더러운 것은 싫은가 보다. 진용도 그 점은 이해가 갔다.
그런데 세르탄이 말도 안 된다는 듯 코웃음 쳤다.
‘참나! 더러운 것 싫다는 정령은 첨 보네. 도대체 무슨 정령이 저래?’
‘그럼 정령이 더러운 것을 따지지 않는단 말이야?’
‘당연하지. 그런 정령이 어디 있어?’
그 말에 진용은 다시 실피나에게 명령을 내렸다.
“실피나, 일단 먼지라도 치워봐.”
마지못한 듯한 목소리로 실피나가 조그맣게 대답했다.
―알았어, 주인이 시키니까 해야지 뭐.
휘리리리…….
실피나가 가볍게 손을 젓자 잔잔한 바람이 일기 시작했다.
순간 바닥에 있던 먼지들이 실피나의 손짓을 따라 서고의 중앙으로 뭉치기 시작하더니, 순식간에 주먹만 한 먼지 덩어리가 만들어졌다.
‘쓸 만한데? 진작 알았으면 좋았을걸.’
실피나의 새로운 용도(?)에 만족한 진용은 십장생이 새겨져 있는 벽으로 다가갔다.
거북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애잔한 미소를 지은 그는 천천히 왼쪽으로 돌렸다.
드르륵, 기관이 움직이더니 벽에서 석함이 빠져나왔다.
그때였다. 뒤에서 들리는 심상치 않은 소리.
진용은 급히 고개를 돌려보았다.
순간, 눈앞에서 벌어진 광경에 진용의 눈이 홉떠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