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법서생 4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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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123회 작성일소설 읽기 : 마법서생 43화
43화
눈을 감은 채 가만히 서서 일각이 지났다.
들리는 것이라곤 정광의 침 넘어가는 소리와 책장 넘어가는 소리뿐이다.
그때 밖에서 육두강이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더 있을 건가?”
아쉬움이 남지만 어차피 오늘 하루로 끝날 일이 아니다.
진용은 소녀경에 몰두해 있는 정광을 쳐다보았다.
피식, 웃음이 절로 나온다.
“침 떨어지겠습니다.”
“응? 지금 가려고?”
“예, 내일 다시 와볼 생각입니다. 아무래도 제가 뭔가를 놓치고 있는 것 같거든요.”
“그럼…… 가지 뭐.”
정광은 아쉬움이 남는 눈으로 책자를 만지작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진용이 물었다.
“그렇게 재미있습니까?”
힐끔 책이 쌓여 있는 곳을 바라본 정광이 말했다.
“모든 이치란 것이 결국은 다 같은 것 아닌가? 하늘[天]이 있고 땅[地]이 있으니 사람[人]도 있는 법이지. 남녀 간의 일도 마찬가지야. 도를 벗어나지만 않는다면…….”
제법 말하는 정광의 표정이 그럴싸해 보인다. 비록 눈은 아직 소녀경의 겉표지에서 떨어지지 않고 있지만.
진용은 그런 정광을 비웃지 않았다. 아니, 비웃을 정신이 없었다.
‘설마……?’
진용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소나무 위에 새 몇 마리가 그려져 있는 조잡한 시서화가 보인다. 그리고 조악한 필체의 글자도.
[하루에 한 번, 머리 위에 손을 얹은 채 새 한 마리를 보고, 두 마리를 보니, 세 마리도 보였다. 새를 보고 얻고, 산을 보고 얻었다. 그 건너에 무엇이 있는지.]
꼭 장난처럼 써놓은 글이었다. 아이가 쓴 것처럼. 조잡한 그림에 어울릴 정도로.
그러나 진용은 그 조악한 글을 보고 오래전의 추억이 떠올랐다. 얼마 되지도 않는 아버지와의 추억이.
여섯 살이 되던 해 이른 봄날이었을 것이다. 왜 아버지는 이런 글자를 공부하느냐는 진용의 물음에 아버지가 웃으며 말했었다.
“용아야, 배움이란 끝이 없는 거란다. 이 아비가 공부하고 있는 고대 문자도 마찬가지란다. 언뜻 보면 그저 새가 걸어간 발자국 같고, 어린아이가 아무렇게나 긁적여 놓은 것 같지만, 그 건너에는 그 사람의 마음이 담겨 있단다. 하나를 알고 둘을 알다 보면 그 건너에 있는 무엇인가가 보이게 되지.”
진용이 시서화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자 정광이 멀뚱한 눈으로 진용에게 말했다.
“안 갈 건가?”
진용은 정광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이번에는 반대편의 회벽을 바라보았다. 순간 진용의 두 눈이 반짝였다.
[언결(言決)]
회벽에 누가 장난을 한 것처럼 긁히듯이 쓰인 글자 중 두 글자. 그러나 분명 글자는 두 자지만, 결코 두 자라고만 할 수도 없다.
‘파자(破字)다!’
파자가 아닌 것 같은 파자다. 뒤에 결자는 삼수변[三水邊]을 생략해서 쓸 수가 있다.
그렇다면 언결은, 언결이 아닌…… 그냥 결(訣) 자다.
‘그렇다면 혹시……?’
순간 무엇을 생각했는지 진용의 두 눈이 짙은 의혹으로 물들었다.
4
“흑수회의 아이들이 그자의 집을 찾았습니다, 당주!”
길근양은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힘차게 말했다.
“그래? 어디야?”
“북문 밖 고가장이 그자의 집이라고 합니다.”
“좋았어! 애들 모아!”
위당조가 주먹을 불끈 쥐고 말하자 비향초는 왠지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
“저…… 당주님. 애들은 성에 있는데요.”
순간적으로 위당조의 안색이 살짝 붉어졌다.
관과 팽가를 격동시킬까 봐 수하들을 대동하지 않았다. 다시 말해 북경에 들어온 사람은 자신과 눈앞의 두 사람이 전부였다.
“빌어먹을!”
그렇다고 여기서 물러날 수는 없었다.
“그럼 너희 둘이 하나를 맡아. 내가 하나를 맡을 테니까.”
비향초의 불안감이 점점 더 커졌다.
“우리가 그자들을 상대할 수 있을까요? 공연히 시키지도 않은 일을 했다고 성주님께…….”
그러다 결국 한 대 얻어맞고 말았다.
퍽!
“건방진 놈! 내가 바로 광마수 위당조야! 잔소리 말고 따라와!”
길근양도 불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비향초가 얻어맞는 것을 보고 감히 토를 달 수가 없었다.
“따라오십시오, 당주!”
5
황궁을 나오자마자 육두강과 헤어진 진용은 술 한잔하고 가자는 정광의 말을 무시한 채 집으로 향했다.
북문을 나서자 내성과 천양지차의 성 밖 풍경이 두 사람을 맞이했다.
휘이이잉!
어둠이 깔린 길거리에는 찬바람에 날리는 낙엽만이 뒹굴고 있을 뿐 지나다니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
“한잔하고 들어가면 오죽 좋아? 에잉, 자린고비 같으니라구.”
내성에서부터 시작된 정광의 투정은 북문을 나서서도 여전히 계속되었다.
사실 수중에 돈이라도 있으면 혼자서라도 주루를 찾아갔을 정광이었다. 요는 수중에 돈이 없다는 게 문제였다.
“북경에 가면 온갖 술이 다 있다고 해서 잔뜩 기대를 했었는데……. 좌우간 사람을 잘 만나야 한다니까. 하, 기분도 그런데 어디 내 기분 풀어줄 놈 하나 없나?”
북경이라고 해서 흑도가 없는 것은 아니다. 낮에는 황제가 다스리고, 밤에는 흑도의 건달들이 다스린다고 할 정도로 북경의 밤은 유명했다.
다만 다른 곳과 다르게 그들은 철저한 흑도의 율법으로 스스로를 단속했다.
-내성에서는 살인을 하지 않는다. 특히 관인은 죽이지 않는다.
-흑도끼리의 싸움도 외성으로 나가서 한다. 어기는 자는 공적으로 처단한다.
사실 종상현의 죽음이 의아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어쨌든 흑도 놈들이 설치는 밤이 된 이상 어슬렁거리는 놈이라도 하나 나타나야 하는데, 날이 추워져서 그런지 건달은커녕 비틀거리는 취객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정광의 투덜거림을 하늘도 알아들었나 보다. 고가장으로 꺾어지는 골목길에 접어들었을 때다.
“어이, 잠깐 나 좀 보지.”
누군가가 골목길 안쪽, 고가장의 대문 앞에서 걸어오며 두 사람을 불렀다.
정광은 눈을 빛내며, 달빛조차 가려져 시커먼 어둠만이 존재하는 골목길에서 걸어나오는 세 사람을 주시했다.
제법 무게를 잡으며 팔짱을 낀 중년인을 중심으로 검과 도를 등에 멘 두 장한이 양편에 서 있었다. 그들은 천천히 걸어오면서도 굳은 얼굴로 진용과 정광을 노려보았다.
‘음? 단순한 건달들은 아닌 것 같은데?’
특히 가운데, 한쪽 볼에 커다란 점이 있는 중년인에게서 흘러나오는 기세는 정광이 보기에도 만만치 않았다.
골목길을 그 하나가 가로막는다 해도 바람조차 빠져나가지 못할 것 같은 기세.
그런 기세를 지닌 자가 단순한 건달일 리가 없었다. 그리고 그는 당연히 건달이 아니었다.
“우리를 불렀소?”
정광이 물었다. 그러자 가운데 서 있던 위당조가 눈을 빛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 도사 놈이 도추문을 신발로 개 패듯 팼다는 그 미친놈이군.’
정광은 왠지 위당조의 눈빛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꼭 미친놈 보는 눈빛이 아닌가.
“불렀으면 무엇 때문에 불렀는지 말을 해야 하지 않겠소?”
그래도 도사의 체면을 생각해서 얌전히 다시 물어봤다. 그러자 위당조가 팔짱을 풀며 대답했다.
“말코가 내 친구를 때렸다고 해서 찾아왔지.”
“말코? 왔지?”
눈빛만 마음에 안 드는 것이 아니라 말투도 마음에 안 든다. 하지만 정광은 오히려 그 점 때문에 기분이 좋아졌다.
‘오냐! 너 잘 만났다.’
“나한테 맞은 놈이라면 최근에 딱 한 놈, 입이 귀밑에 걸려 있던 놈뿐인데. 점박이 도우, 그대가 그 미친놈의 친구라고?”
순간, 위당조의 눈에서 새파란 눈빛이 쏟아졌다.
“저, 저, 점.박.이? 이, 이…….”
자신이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말 중에 하나가 바로 그 말이다. 성주조차 그걸 알기에 절대 자신에게 점박이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
그런데…… 저 호랑말코 같은 도사 놈이 감히!
“거시기도 못할 말코 도사 놈이 감히, 뭐라?”
후웅! 위당조가 쌍권을 떨치자 그의 전신에서 강맹한 기운이 사방으로 휘몰아쳤다.
하지만 노한 사람은 그만이 아니었다.
“뭐, 뭐야? 내가 거시기도 못한다고? 네놈이 어떻게 알아? 내가 거시기를 할 수 있는지 못하는지! 이 점박이가 어디서!”
정광의 몸에서도 부드러우면서도 끈적끈적한 기운이 뿜어졌다.
일시지간, 두 사람에게서 상반된 기운이 강하게 쏟아지며 맞부딪쳤다. 순간!
휘이이잉!
마주 선 두 사람 사이에서 강력한 회오리바람이 일어나고, 회오리바람에 휘말린 낙엽이 솟구치며 두 사람의 시야를 가로막았다.
그 기회를 놓칠 두 사람이 아니었다.
위당조는 보이지 않을 정도의 빠른 속도로 손을 가슴속에 집어넣고, 정광은 발을 내뻗음과 동시에 우수를 내밀었다.
“점박이, 이놈!”
“말코, 죽어라!”
쾅!
굉음이 일고, 어둠 속에서 두 사람이 번개처럼 붙었다 떨어졌다.
그런 위당조의 손에는 어느새 시커먼 장갑이 끼어져 있었다. 그리고 정광의 손에는 뭉툭한 쇠신발이 들려 있었다.
“드런 놈!”
위당조가 잔뜩 인상을 쓴 채 쇠신발을 바라보자 정광이 손에 들린 쇠신발을 흔들며 냉랭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게 내 무기야. 불만이면 네놈도 신발을 들어, 점박이.”
또다시 점박이다.
“에라이, 씨앙! 너 죽고 나 살자, 말코 놈아!”
위당조는 참지 못하고 다시 달려들었다.
“그래! 바로 그거야, 점박이!”
정광은 신이 났다. 황궁에서 이곳까지 오면서 생긴 불만이 땀구멍을 통해 모조리 빠져나가는 것만 같았다.
쾅! 콰광!
그러나 위당조도 만만치 않았다.
조금은 성급하고, 고지식하고, 엉뚱해서 그렇지 그의 무공만큼은 백마성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강했다. 설광도 도추문에 비해 한 수 위라 할 정도의 고수가 바로 광마수 위당조인 것이다.
하지만 그런 위당조도, 이십 년간 미쳤다는 소리를 들으며 절벽의 고대 문자를 해독해 나름대로 기연을 얻은 정광을 어찌하지는 못했다.
그 원인은 오직 하나, 정광의 경공신법인 풍혼 때문이었다.
“이, 이 날파리 같은 놈! 뒤져! 뒈져! 좀 맞아봐라, 똥파리 같은 놈아!”
위당조의 고함이 이어지며 순식간에 십여 초가 흘렀다.
그리고 어느 순간 정광의 왼손에 나머지 쇠신발이 마저 들리더니, 그때부터 두 사람의 격전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점박아! 이제부터야! 자신있으면 어디 한번 막아봐!”
한편, 비향초와 길근양은 두 사람이 싸움이 격해지자 슬며시 처음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는 진용에게로 다가갔다.
“비가야, 저놈을 잡자.”
“저 서생 놈도 제법 한다고 했던 것 같던데…….”
“제까짓 게 해봤자지.”
“하긴……. 좋아. 저 도사가 눈치 채기 전에 잡자.”
둘은 짧게 전음을 나누고 마주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보고 진용은 뒷짐 진 손을 슬며시 풀었다. 그러자 세르탄이 어이가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시르, 저놈들이 너를 잡으려고 하나 본데? 미친놈들, 눈은 두었다가 배고플 때 구워 먹으려고 끼워놨나?’
다가오는 두 사람을 보고 있던 진용은 세르탄의 말투에 피식 실소를 흘려냈다.
정광이 가끔씩 던지는 농지거리 같은 말투에 관심을 가지더니, 이제는 제법 웃기지도 않은 말을 곧잘 한다.
‘세르탄.’
‘왜?’
‘요즘 들은 말 중에 제일 멋진 말이었어.’
‘우헤헤헤. 정말?’
‘그냥 해본 소리야, 하도 어이가 없어서.’
‘…….’
진용이 피식 실소를 흘리자 비향초는 멈칫, 걸음을 일시 멈추었다.
자신도 모르게 등줄기를 타고 오르는 으슬으슬한 불안감이 느껴진다.
옆을 바라보았다. 길근양은 자신이 느낀 것을 느끼지 못했는지 여전히 서생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쓰벌, 어째 불안한데, 뭐 때문에 그런지를 모르겠네.’
그때였다. 서생이 자신을 쳐다본다.
거리는 이 장, 눈이 마주쳤다. 그제야 비향초는 자신이 왜 이렇게 불안함을 느껴야 했는지 그 이유를 조금이나마 알 수 있었다.
서생의 눈이 웃고 있었다. 한쪽에서는 고수들 간의 살벌한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데도 그는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있었다.
두려움이 없는 자! 강한 자다!
당시 작전에 참가했던 친구, 장문수가 한 말이 뇌리에 스친다.
“내가 잘못 봤는지 모르겠지만, 도 선배의 손목을 부순 사람은 도사가 아니고 어린 서생이었네.”
그때는 잘못 보았으려니 하고 흘려들었다, 믿기가 힘들었으니까.
어린 서생이 설광도 도추문의 손목을 부쉈다는 게 말이 돼?
‘아냐, 어쩌면 그가 잘못 본 것이 아닐지도 몰라.’
비향초가 다급히 소리쳤다.
“길가야! 물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