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법서생 3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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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066회 작성일소설 읽기 : 마법서생 31화
31화
“십 개월 전 천화상단에서 매파가 왔었어요.”
“매파?”
“작년, 단주이신 육 조부님의 육십 회 생신 때 본단을 찾았던 탁 공자를 제가 안내한 적이 있어요. 교주 일대를 구경하고 싶다고 해서. 한데 그때 그가 절 눈여겨봤나 봐요. 그가…… 저를 데려가고 싶다고 하더군요.”
탁인효 정도라면 사실 누구라도 거부할 수 없는 혼처라 할 수 있다, 그런 일에 대해 잘 모르는 진용조차 인정해야 할 정도로.
진용은 묻고 싶었다. 당신은 가고 싶었소?
“하지만 아버지가 단호히 거부하셨어요. 그런데도 그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 사람을 보내오고 있어요. 그래도 이렇게까지 할 사람은 아니라 생각했는데…….”
왜 거부했을까? 해룡상단이 구룡상방에 속해 있어서? 권력을 가진 자들은 서로 간의 혈연으로 서로를 묶는다 들었는데, 그도 아닌가?
진용은 찻물을 한 모금 목울대로 넘기고는 허공 너머로 초연향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는 사람을 좋아할 자격이 없는 사람이군요.”
초연향은 아픔이 가득한 눈을 옆으로 돌렸다.
산사 지붕의 골을 타고 빗물이 폭포수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 빗물로도 그녀의 아픔은 씻겨지지가 않았다.
‘문제는… 그렇게 단순한 일이 아니라는 거예요. 차라리 그리되었다면 이리 가슴이 아프지는 않았을 거예요.’
그녀는 자신이 왜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그래도 이야기를 털어놓으니 털어놓은 만큼 마음의 짐이 가벼워진 것 같았다.
다음 날 아침이 되어서야 비가 멈췄다.
진용과 초연향을 태운 마차는 날이 밝자마자 정림사를 출발했다.
그리고 이틀, 다행히 태산의 입구인 태안에 도착할 때까지 영풍보의 공격은 더 이상 없었다.
긴장한 마음을 늦추지 않은 채 주위를 경계하던 유량은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보다 편안해진 표정으로 마차를 향해 물었다.
“태안에 다 왔습니다. 초 낭자, 바로 태산에 오르실 겁니까?”
초연향이 약간 지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니에요. 오늘은 여기서 쉬고 내일 아침 일찍 올라가도록 해요.”
“알겠소이다.”
* * *
“초연향이 왔다. 지금 태안에 있다는군.”
“오호! 그래요? 그럼 탁 오라버니는 어디에 있는가요?”
“인효도 태안 근처에 왔다는 연락을 받았다.”
여인의 눈매가 싸늘하게 굳어졌다.
“그럼 오라버니도 태안으로 가셔야겠군요.”
“물론 가야지. 그건 그렇고, 향 매가 얼마나 예뻐졌는지 궁금하군.”
“흥! 오라버니나 탁 오라버니의 마음속에는 언제나 초연향뿐이군요.”
여인의 싸늘한 말에 백의를 멋들어지게 차려입은 청년이 어색한 웃음을 터뜨렸다.
“하! 하! 하! 그럴 리가 있겠느냐? 내가 초연향의 마음을 차지해야 너의 일이 잘 풀릴 테니 그러는 것뿐이다.”
“잘하셔야 할 거예요. 본가에서도 기대를 걸고 있는 일이니까요. 그리고… 이번 일로 오라버니를 어떻게 대할 것인지 결정할 것이니 실망시키지 마세요.”
백의청년의 이마에 한 방울의 땀이 맺혔다.
“걱정 마라. 내 어떻게 하든 인효의 마음속에서 초연향에 대한 미련을 지워 버릴 테니까. 아니면 초연향의 머릿속에서 인효의 그림자를 지워 버리든가.”
“꼭 그러길 바라겠어요. 오라버니를 위해서라도…….”
순간 백의청년의 얼굴에 왠지 모를 자조의 쓴웃음이 스쳐 지나갔다.
‘글쎄, 나보다는 너를 위해서겠지. 나야 잘되면 좋고 잘못돼도 손해 볼 건 없으니까. 그저 아무것도 모르고 있을 향 매에게 미안할 뿐…….’
3
“오랜만이오.”
진용은 식사를 마치고 찻잔을 들려다 옆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울림이 깊고 낭랑한 음성. 자신감이 넘치다 못해 오만하게까지 느껴진다.
‘누구지?’
언뜻 초연향의 눈빛이 잘게 떨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게다가 짙은 그늘이 진 표정. 아는 사람인가?
그때 초연향이 천천히 일어서서 목소리의 주인을 바라보고는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눈빛에 일던 떨림은 가라앉아 있었다.
“오랜만이에요, 탁 공자. 일 년 만인가요?”
“그렇소. 일 년이오. 그 일 년간 내 마음은 새까맣게 타버렸소.”
진용은 초연향의 말에서 그가 바로 탁인효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저자가 직접 오다니, 성질 한번 급하군.’
스물대여섯의 나이로 보였다.
훤칠한 키에 딱 벌어진 어깨, 잘생겼다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의 얼굴에 틀어박힌 횃불처럼 타오르는 두 눈. 헌헌미장부라는 말에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초정명이 무엇 때문에 혼사를 거절했는지 의아한 마음이 일 정도다.
하지만 진용은 그에게서 다른 것을 보았다.
‘제법 강한 무공을 소유한 자다. 일개 상단의 소주인이 저런 내력을 지니고 있다니, 놀라운 일이군. 영풍삼위보다 훨씬 강할 것 같은데?’
그때 그가 말했다.
“영풍보와의 일은 정말 미안하오. 그들이 내 뜻을 곡해하는 바람에 일이 이상하게 진행되었던 것 같소. 정중히 모셔오라 했는데, 너무 의욕이 지나쳐서 그만…….”
탁인효가 먼저 그 이야기를 꺼내자 초연향은 어색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신안의 소유자. 그렇기에 그녀는 그의 말이 진심이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차라리 거짓이라면 말하기가 더 편할 텐데…….
“사람이 죽을 뻔했어요.”
“다행히 한 사람도 죽지 않았으니 그들에게도 입을 다물라 했소. 절대 그 일에 대해 따지지도 말고 입을 열지도 말라고 말이오. 그리고 해룡선단에 사죄의 뜻을 전하라 했소.”
그래서 영풍보가 더 이상 손을 쓰지 않았던 건가?
진용은 그의 말에서 그의 성격을 짐작할 수 있었다.
‘꽤나 독선적인 자군.’
진용의 눈길을 의식했는지 탁인효가 진용을 돌아보았다.
“귀하가 바로 그 서생인가 보군.”
서생 차림을 한 자는 혼자뿐이니 영품삼위나 무사들에게 말을 들었다면 못 알아본다는 것이 이상한 일이다.
진용이 무심한 눈으로 탁인효를 쳐다보았다.
“좋아하는 사람을 힘으로 차지하려는 자치고 끝이 좋은 사람은 보지 못했지요.”
탁인효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마공을 익힌 자 역시 마찬가지외다.”
진용의 무심한 얼굴에 차가운 웃음이 맺혔다.
“보지도 않고서 그런 결정을 내리다니, 너무 성급한 판단이라 생각지 않습니까?”
두 사람의 눈빛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귀하게 키운 것이 독선조차 키운 것인가?’
‘도대체 이자는 뭔가? 아무리 봐도 일개 서생으로밖에 보이지 않거늘. 이자가 정녕 한순간에 영풍삼위 중 둘을 회복불능으로 만들었단 말인가? 나라 해도 쉬운 일이 아닌데…….’
때마침 유량이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탁 공자, 별일 없다면 우리는 가서 쉬고 싶소만. 오던 길에 심한 일을 당했더니 너무 피곤해서 말이오.”
탁인효의 굵은 검미가 꿈틀거렸다. 그러나 쉬고 싶다는 사람을 쉬지 말라 할 수도 없는 일.
“향 매, 피곤할 테니 가서 쉬시구려. 내일 아침 다시 찾아오겠소.”
초연향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일 오시지 않으셔도 돼요. 저희는 아침 일찍 바로 태산에 오를 것이니까요.”
“어쨌든…… 내일 보겠소.”
탁인효가 굳은 표정으로 막 돌아서려 할 때다. 객잔 입구의 주렴이 걷히며 누군가의 목소리가 커다랗게 들려왔다.
“여! 이게 누구신가? 탁 형이 아니오?”
태산에서 내려온 구룡상방의 셋째, 하군상의 목소리였다.
잠시 후 별실의 커다란 탁자를 중심으로 다섯 명이 둘러앉았다.
진용과 초연향, 유량, 탁인효, 그리고 탁인효에 조금도 뒤지지 않는 귀공자풍의 하군상까지.
초연향은 들어가 쉬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찾아온 자는 구룡상단을 지배하고 있는 하씨세가의 네 남매 중 셋째. 초연향에겐 그의 뜻을 거부할 힘이 없었다.
“하하하하! 이렇게 향 매를 보게 되다니, 내 태산에서 내려오길 잘했구려.”
호탕하게 웃으며 초연향을 느끼한 눈으로 바라보는 하군상을 향해 탁인효가 이마를 찌푸린 채 말했다.
“령 매를 혼자 놔두고 이렇게 산을 내려와도 괜찮겠소?”
“그 아이가 뭐 어린아이요? 게다가 십영(十影)이 그 아이 곁을 한시도 떠나지 않고 지키는데 무슨 걱정이오?”
하군상의 말에 진용이 나직이 말문을 열었다.
“십영이라는 사람들이 그렇게 강한 사람들입니까?”
하군상은 자신의 말에 꼬리를 다는 진용을 찌푸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초연향이 대동하고 왔다는 서생이었다. 만일 초연향이 그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면 자신은 저자를 진짜 서생으로 보았을 것이다.
‘흠, 저 별 볼일 없어 보이는 서생이 호위무사라고? 웃기는군. 해룡선단에 사람이 그리도 없나?’
아직 영풍보와의 일을 모르는 그로선 그리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자신있게 대답했다.
“물론 강하지. 하나하나가 일류 중에 일류들이니까.”
“이상하군요.”
“뭐가 말인가?”
“하 낭자의 안전이 걱정되어서 호위무사를 청했다 들었는데, 하 공자의 말대로라면 굳이 호위무사가 더 필요없을 것 같은데요.”
하군상의 눈매가 칼날처럼 굳어졌다.
“물론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 하지만 사람 일은 아무도 모르는 일 아니겠는가?”
“하긴, 앞으로 벌어질 일은 아무도 모르겠지요. 지키는 사람이 아무리 많아도 당할 상황이 되면 당할 수밖에 없을 텐데…….”
“흥! 걱정 말게. 십영을 뚫고 내 동생을 어찌할 수 있는 자는 강호에서 몇 되지 않으니까. 자네들을 청한 것은 만일의 경우를 생각해서일 뿐이야.”
“걱정은 안 합니다만, 해룡선단이 해왕방과의 싸움으로 힘이 많이 약해져 있는데,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사람을 내달라고 하니 그게 좀…….”
진용의 느긋한 대꾸에 하군상의 눈에서 싸늘한 불꽃이 쏟아졌다.
“꽤나 건방진 호위무사군.”
진용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무슨 소리냐는 듯.
“호위할 대상과 주변 상황을 미리 알아놓는 것은 호위무사가 당연히 할 일. 안 그렇습니까, 초 소저?”
초연향은 진용이 자신을 쳐다보며 묻자 웃지도 못하고 어색한 표정으로 하군상을 바라보았다.
“고 공자의 말에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저분도 단지 하 언니를 제대로 호위하기 위해 하나라도 더 알고 싶어 저러는 거니까요.”
하군상은 한 번 더 진용을 노려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음…… 하긴 내가 호위무사와 말싸움할 이유가 뭐 있겠소? 더구나 향 매가 말리니 내 참겠소이다.”
속에서 부글거리는 화를 억지로 삭인 하군상이 탁인효를 바라보았다.
“탁 형은 무슨 일로 여기까지 오셨소? 요즘 영호 소저와 깨 쏟아지게 잘 지내신다고 하던데.”
진용의 비비 꼬는 말대꾸에 한껏 기분이 좋아져 있던 탁인효가 와락 이마를 찌푸렸다.
“그게 무슨 말이오? 내가 언제 영호 소저와…….”
“하하하하! 남자끼리 뭘 그러시오. 아! 그러고 보니 향 매가 있으니 말하기가 어려우신가 보구려. 내 실수를 했소이다.”
“하 형! 대체 지금 무슨 말을 하는…….”
탁인효가 인상을 굳힌 채 차갑게 말하자, 하군상이 재빨리 탁인효의 말을 잘랐다.
“허! 얼마 전 천화상단에서 들어온 소식이었는데……. 이거 내가 잘못 들었나 보구려. 난 또 영호 소저와 탁 형의 혼사를 다음 달에 올린다 하기에 사실인 줄로만 알았소. 저번에 두 분이 같이 여행을 하던 중에 정이 들었다는 말도 있고 해서 말이오.”
탕!
탁인효가 탁자를 내려쳤다.
“말씀이 지나치구려! 영호 낭자는 단순히 여행을 하던 중에 만났을 뿐이오. 비록 그 이후에 영호세가와 본가 간에 혼담이 오가기는 했지만 그건 나의 뜻이 아니외다.”
하군상이 눈을 빛내며 말했다.
“그러니까 그런 일이 있기는 있었군요.”
탁인효의 눈에서 불꽃이 일었다.
“하 형, 지금 시비를 걸겠다는 거요?”
“그럴 리가? 그리 생각하셨다면 죄송하구려. 나는 단지 탁 형의 혼사를 축하해 주려 했을 뿐이오.”
손까지 휘저으며 변명하는 하군상의 얼굴을 짓이기고 싶은 탁인효였다.
왜 하필 이런 자리에서 영호교와의 혼사에 대한 이야기를 한단 말인가. 초연향이 동석해 있는 자리거늘.
그렇지 않아도 그 일로 인해 부친과 설전을 벌이고 나온 판인데.
하지만 이곳은 산동, 구룡상방의 영역. 탁인효는 화를 억누르고 이를 갈며 말했다.
“다시는 그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으면 좋겠소.”
“하하! 그러지요. 좌우간 미안하게 되었소. 나는 다만 이 년 전, 공손 소저와의 혼담이 오갈 때던가요? 탁 형이 다른 여자를 쫓아다니는 바람에 그 혼사가 깨졌다는 말을 듣고 이번에는 꼭 이루어졌으면 하는 마음이었는데…….”
그때였다. 미처 하군상의 말이 끝나기도 전 탁인효가 벌떡 일어섰다.
“하군상! 닥치지 못해?”
“허, 거참, 성질은. 그러니 공손 소저와의 혼사도 깨지고 또 영호 소저와도…….”
“하.군.상!”
와장창!
벌떡 일어선 탁인효는 찻물이 초연향을 덮치는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하군상을 향해 주먹을 뻗었다.
하지만 하군상도 순순히 당할 생각은 없었다.
“어쭈? 말로 안 되니 주먹인가? 좋아, 오랜만에 한 번 해보자 이거지?”
진용은 재빨리 초연향을 데리고 밖으로 빠져나갔다.
안에서 둘이 싸우다 어디가 부러지든 말든. 심하면 죽을지도 모르지만 말리고 싶은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눈곱만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