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법서생 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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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031회 작성일소설 읽기 : 마법서생 2화
2화
추위 때문에 떨린 음성이지만 많이 들어본 목소리다.
‘숙부님 목소리 같은데?’
“뉘시우?”
유모가 되물으며 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유모의 반가워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이고, 종 어르신. 어째 오랜만에 오셨네요?”
‘아! 종 숙부님이다!’
진용은 후다닥 책을 덮고 일어섰다.
“하하하, 유모도 잘 있었소? 진용은?”
“도련님이야 방에 있구만요.”
“허! 이놈이 숙부가 왔는데…….”
진용이 나갈 틈도 없이 방문이 활짝 열렸다.
문 쪽으로 가려던 진용은 어정쩡한 자세로 환하게 웃었다.
문을 연 사람은 단 두 명 있는 아버지의 친구 중 한 분인 종상현이었다.
황궁의 내각학사 직을 맡고 있어서 항상 바쁜 종 숙부가 웬일로 오신 걸까?
이유야 어쨌든 진용은 오랜만에 본 숙부가 반갑기만 했다.
“종 숙부님!”
“어이구! 우리 용아, 책 읽고 있었구나?”
“오랜만에 오셨네요? 그간 집안에 별고없으셨죠? 숙모님 건강은 좀 어떠셔요?”
“어휴! 용아야, 일곱 살짜리가 그렇게 물으면 이 숙부가 뭐라 대답해야 한단 말이냐?”
“에이…… 일곱 살이면 알 것 다 아는 나인데요, 뭐.”
“그러냐? 우리 송아가 너 반만 따라가도……. 아니다, 반의반만 따라가도 걱정이 없으련만……. 쯔쯔쯔, 무슨 계집아이가 막대기 들고 동네 꼬마들만 패고 다니니 원.”
혀를 차던 종상현이 유모를 바라보고 물었다.
“고 형은 지금도 서고에 있소?”
“예, 나리. 제가 가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음, 그래 주시겠소? 아참! 요즘 형편은 어떻소?”
“예? 그야…… 어려워도 나리의 친우 분들 덕분에…….”
“나 원, 도대체 친구라고 하나 있는 사람이 어째……. 쯔쯔쯔.”
방 안에 가득 흐르는 향기는 방의 주인이 유일하게 호사하는 서호용정(西湖龍井)의 다향이었다.
그나마도 황실에 납품되는 것 중 품질이 떨어져서 반품되는 것을 종상현이 가끔씩 구입해 주어 누릴 수 있는 호사였다.
은은한 다향이 방 안에 가득 퍼질 즈음, 차를 한 모금 들이킨 고중헌이 조용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래서, 나더러 그 금판에서 탁본한 고문자(古文字)를 해석해 달라, 그 말인가?”
“그렇다네. 사실 내각학사들 중에서도 고문을 아는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네만, 금판의 글이 워낙 희귀한 것인지라…….”
씁쓸한 웃음을 머금은 종상현의 말에 고중헌은 미간을 찌푸렸다.
“나는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도 제대로 하지 못해서 정신이 없다네.”
“내 어찌 모르겠나? 자네가 몇 년째 집안일에 신경도 쓰지 않고 고문 연구만 하고 있다는걸.”
“잘 아는구만.”
“뭐 어쨌든, 내가 이리 부탁하는 것은 금판이 단 석 장에 불과하기 때문이네. 자네의 실력이라면 오래 걸리지 않을 거라 생각되네만.”
종상현은 고중헌의 이마가 다시 찌푸려지자 재빨리 말을 이었다.
“게다가 이 일은 대학사께서 특별히 내리신 일이네. 그리고…….”
고중헌의 귀에 바짝 입을 갖다 댄 종상현이 나직이 말했다.
“삼왕 전하께서도 매우 관심을 가지고 계시네. 자네에겐 더 없는 기회일세.”
종상현의 말에 고중헌이 쓴웃음을 지었다.
“자네도 원, 내가 관직에 관심이 없다는 것을 잘 알지 않은가?”
“누가 자네를 걱정해서 그러는 건가? 용아는? 용아도 자네처럼 살기를 바라는가?”
“용아는…….”
고중헌의 표정이 흐릿해지자, 종상현이 이때라는 듯 강하게 밀어붙였다.
“자네의 판단이 용아의 앞날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칠지 모르는 것은 아닐 텐데?”
“후우, 그래도 내키지 않네. 용아야 제 앞가림은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고…….”
“거참! 알다가도 모르겠네. 그렇게 관직에 오르고자 젊은 시절 열심이던 자네가 아니던가? 그런 자네가 갑자기 고문(古文)에 빠져서 천하를 떠돌아다니고 혼인조차 늦게 하더니, 이젠 인생마저 걸 줄 누가 알았을까?”
“…….”
‘자네가 모르면 누가 알까? 내 운명을 송두리째 변하게 만든 사연이 바로 자네로부터 시작되었거늘. 그런데도 그에 대해 자세히 말할 수 없으니…….’
“어쨌든, 자네가 내 친구라면 이번 일은 승낙해 주게. 내 굳이 자네에게 관직에 나가란 말은 않겠네. 하나, 먹고살 돈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아마 적지 않은 금전이 하사될 것이니 몇 년간 끼니 걱정 안 해도 될 걸세.”
“허허허, 아직 굶을 정도는…….”
탕! 손바닥으로 다탁을 두드린 종상현이 손가락을 세워 고중헌의 코밑으로 들이밀었다.
“내가 모를 줄 아나? 유모에게 다 물어봤네!”
“그런……가? 음, 정말 그 세 장의 금판탁본만 해석하면 끝나는 거지?”
“물론이네. 해줄 거지?”
‘하는 수 없나?’
사실 종상현에게 그동안 도움을 받은 것을 생각하면, 석 장이 아니라 삼십 장이라도 해줄 수 있었다. 다만 하루하루 시간이 아깝게 느껴져서 거절하려 했던 것일 뿐.
그러나 이토록 원한다면, 친구의 앞날에 도움이 된다면 며칠의 시간 정도는 친구를 위해서 써야 할 듯했다.
“알겠네. 며칠이면 지금 하는 일 중 하나가 마무리되니 그때부터 함세.”
“하하하! 고맙네. 이제야 한시름 덜었군.”
사흘 후, 고중헌은 황궁으로 들어가기 전 진용을 불러 앉혔다.
“용아야, 아버지는 종 숙부의 부탁으로 잠시 황궁에서 지내야 할 것 같구나. 내 생각으로는 사나흘이면 될 것 같은데, 어쩌면 하루 이틀 더 걸릴지도 모르겠다. 그동안 유모 말 잘 듣고 지내야 한다.”
“예, 아버지. 걱정 말고 다녀오세요. 이제 용아도 어린아이가 아닌걸요?”
“녀석, 네가 어린아이가 아니면 누가 어린아이겠느냐?”
“피이, 저두 이제 며칠만 있으면 여덟 살이라구요.”
대찬 진용의 말에 고중헌은 피식 웃었다.
그렇게 고중헌은 진용이 여덟 살이 되기 열흘 전에 고가장을 떠나갔다.
며칠간의 헤어짐만을 생각하며 ‘별일이야 없겠지’하는 마음으로.
3
고중헌이 황궁으로 들어간 지 이틀이 지났다.
진용은 하루 종일 멍하니 창밖만 바라보았다.
책을 읽으려 해도 읽을 수가 없었다. 마당 앞을 나가 봐도 아무런 재미가 없었다.
유모가 가져온 밥도 깨작이다가 수저를 놓기가 일쑤였다. 그러다 보니 유모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생각해 보니 처음이었다.
아버지가 며칠씩 집을 비운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아버지가 지하 서고에 들어가 며칠씩 안 보일 때는 몰랐는데, 막상 집에 없다는 생각이 들자 주위가 텅 빈 것만 같았다.
겨우 이틀이 지났을 뿐인데, 오직 아버지의 얼굴만이 떠오를 뿐이다.
“아버지… 보고 싶어요.”
사흘째 아침이 밝아오자, 진용은 벌떡 일어나 아버지의 방으로 달려갔다.
덜컥! 방문을 열자, 텅 빈 방 안 구석에 쌓인 책만이 진용을 반겼다.
“쳇! 삼 일이나 지났는데 아직도 안 오셨네.”
행여나 잠이 들었을 때 오셨을까 했는데, 역시나 안 오셨다.
힘없이 어깨를 늘어뜨린 진용은 돌아서려다 멈칫하고는, 고개를 돌려서 아버지의 침상 옆을 바라보았다.
벽에 걸린 산수화가 보였다.
‘가만? 분명히 지하 서고에 들어가지 말라는 말씀은 없으셨지? 그럼 들어가 봐도 된다는 말씀 아니겠어?’
유혹이 밀려들었다.
‘까짓 거, 봄에 한 결심을 실행해?’
안 되는데, 아버지에게 혼나는데…….
하지만 혼난다는 생각보다는 유혹의 힘이 훨씬 거셌다.
자신은 아니라 부인을 하지만, 진용은 아직 어린아이임에 분명했던 것이다.
‘에라, 모르겠다!’
산수화를 젖히자 다섯 개의 고리가 보였다, 지하 서고로 들어가는 입구를 여는 열쇠인 오행의 고리가.
막 뛰어다니기 시작하던 세 살 무렵, 단 한 번 아버지와 함께 지하 서고에 들어갔었다. 어찌나 신기하던지 진용은 그날의 일을 잊을 수가 없었다.
고리를 잡아당기는 것도 그때 물어봤었다. 아버지야 세 살짜리가 뭘 알까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진용은 그날의 기억을 되살리며 다섯 개의 고리를 오행의 순서에 따라 잡아당겼다.
금, 목, 수, 화, 토.
드르륵…….
기음이 일더니 침상이 옆으로 비켜났다. 어두컴컴한 지하 서고가 무저에 사는 이무기의 입처럼 입을 쩍 벌리고 진용을 맞이했다.
“헤헤, 좀 무섭긴 하네. 그래도… 남잔데……. 흐으…….”
터벅! 터벅!
발걸음 소리가 지하 계단을 울린다.
진용은 뒤를 슬그머니 돌아다보았다. 꼭 누군가가 뒤에서 옷깃을 잡아당기는 것만 같다. 괜히 다리가 후들거린다.
“쳇! 나는 남자라구! 남자… 남자……. 으……. 남자는 남잔데, 되게 무섭네.”
탁! 탁!
부싯돌을 튕겨 계단 중간쯤에 있는 등잔에 불을 밝혔다.
아버지가 며칠씩 지하서고에서 나오지 않을 때, 유모마저 볼 일이 있어 늦으면 자신이 불을 켜야 했다. 덕분에 불 켜는 기술은 어른 못지않았다.
등잔불은 기름통이 커서 불이 꺼질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었다. 때로는 며칠씩 켜야 할 때도 있으니까.
진용은 눈이 약한 불빛에 익숙해지기를 기다렸다가 나머지 계단을 내려갔다. 그리고 서고의 바닥에 내려서자마자 한쪽에 있는 또 다른 등잔에 불을 옮겨 붙였다.
불꽃이 커져 가며 서서히 어둠이 밀려간다.
가만히 서서 천천히 서고 안을 둘러보았다.
벽면의 서가에는 수많은 고서들이 즐비하게 꽂혀 있었다. 하지만 그의 관심은 일반 고서에 있지 않았다.
아버지가 수년간 몰두하고 있는 그 무엇! 오직 그것에만 관심이 있을 뿐.
지하서고를 둘러보던 진용의 눈이 한군데에서 멎었다.
구석진 곳에 놓인 상자에.
상자는 가로세로 두 자 크기에 높이가 한 자 반 정도 되었다. 얼마나 자주 만졌는지 고리에 손때가 묻어서 반질거렸다.
‘저거다!’
상자에 다가간 진용은 크게 심호흡을 한 번 하고는 상자를 넓은 곳으로 끌어냈다. 생각보다 무겁지는 않았다.
“이게 맞을 거야.”
분명 세 살 때 본 상자였다.
진용은 잠시 망설이다가 상자의 고리를 조심스럽게 잡아당겼다.
덜컹!
뚜껑이 젖혀지는 소리가 제법 크게 났다.
도둑질하다 들킨 사람처럼 가슴이 철렁했다.
“후우, 아버지가 큰 도둑질은 능력이 있어야 하고, 작은 도둑질은 간덩이가 커야 한다고 했는데, 나는 작은 도둑질도 못할 사람인가 보네. 휴우…….”
중얼거리며 놀란 가슴을 가라앉힌 진용은 고개를 내밀고 상자 안을 들여다봤다.
거무튀튀한 지팡이 하나, 몇 권의 책자, 동판, 그리고 묵빛으로 빛나는 자그마한 함이 들어 있었다.
지팡이를 치우고 조심스럽게 책자를 꺼내어 겉장을 바라보았다.
알 수 없는 글자가 잔뜩 쓰여 있었다. 그래도 아버지에게 고대 문자를 적지 않게 배웠다 생각했는데…… 이건 한 글자도 알아볼 수가 없다.
“치이, 처음부터 막히는군.”
책자를 조심스럽게 내려놓고 동판을 들어냈다.
“응? 깨끗하네? 녹도 안 슬고? 동은 녹이 빨리 슨다고 했는데, 그럼 동이 아닌가?”
금도 아니고 동도 아니지만, 일단 진용은 속 편하게 동판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하긴 재질이 무슨 상관일까.
동판은 모두 아홉 장이었다.
각 장마다 그림이 새겨져 있었다.
아니, 그림이 아니라 글자인가? 아주 오래전에 쓰였다는 고대 문자?
“갑골문도 아니고 과두문도 아니고, 뭐지?”
한참을 들여다봤지만 도무지 글자인지, 그림인지 알아볼 수가 없다.
그런 한편으로는 삐뚤거리면서도 어떠한 격식이 느껴졌다.
“어휴, 내가 이렇게 멍청했다니…….”
동판을 내려놓고 자그마한 묵빛 함을 끄집어냈다.
크기에 비해서 제법 묵직했다.
묵함을 내려놓고 자세히 살펴보자 함의 중간에 뾰족한 고리가 튀어나와 있는 것이 보였다.
진용은 고리를 살짝 당겨봤다. 천천히…….
꿈쩍도 않는다.
‘잠겨 있나?’
하지만 아무리 살펴봐도 자물쇠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잠시 바라보던 진용은 고리를 돌려봤다.
‘아! 돌아간다!’
딸깍!
뚜껑이 열렸다. 자신의 생각대로 되자 진용은 흐뭇한 마음으로 뚜껑을 열었다.
“헤헤헤, 내가 누군데…….”
하지만 안을 들여다보던 진용은 자신도 모르게 숨을 삼켜야만 했다.
“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