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독존기 5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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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092회 작성일소설 읽기 : 이계독존기 53화
남궁세가의 가주 취임식 (3)
청풍은 제갈지가 천악을 보고 떠는 것을 보고는 기회다 싶었다.
“제갈 소저, 왜 그러시오?”
“아…니에요.”
제갈지의 대답에도 불구하고 청풍은 여기서 끝을 내지 않았다.
“아니오. 제갈 소저는 갑자기 군 소협을 보고 몸을 떨었소. 내가 보기에 군 소협이 제갈 소저에게 뭔가 위협을 가한 것이 아닌가 싶은데, 내 짐작이 틀렸소? 내가 있으니 편하게 말해 보시오.”
큰일 날 소리였다. 천악의 주위 표정들이 싸늘하게 식어갔다.
제갈지조차 마음이 별로 좋지 못했다. 순간적으로 그녀도 상황파악을 했다. 청풍이 의도적으로 자신을 이용해서 군천악을 도발하려 한다는 것을 말이다.
그녀는 제갈세가의 지낭이었다. 아무리 사내에게 빠져 있다고 하지만 그 정도로 이성이 마비되지는 않았다.
“청풍 공자께선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군요? 제가 아무렇지 않다는데 왜 그런 말을 하죠? 제가 우습게 보이나요?”
찬바람이 부는 제갈지의 말에 청풍은 뒤통수를 심하게 얻어맞은 듯 멍해졌다. 설마 제갈지가 이렇게 나올 줄 몰랐던 것이다.
“아…니, 난 그저 소저를 위해서 한… 말이오.”
“흥! 그런 쓸데없는 말씀은 하지 마세요.”
천악은 제갈지가 제법이라는 생각을 했다. 뭣 모르고 동조했다면 절대 그냥 두지 않았을 텐데 말이다.
천악의 주변을 감싸고 있는 당지독과 금은혜, 남궁태희의 표정은 가히 볼 만했다. 각자의 생각을 모두 들었다면 청풍은 화병으로 미쳐버렸을지도 모른다.
‘저거 생긴 것과 다르게 미친놈이었구먼.’
‘주제를 파악하시지.’
‘저러고도 무당의 용인가?’
그들은 공통적으로 감히 도발할 상대가 없어서 천악을 도발할 생각을 하다니 정말 어처구니없는 배짱이라고 생각했다.
제갈지는 자신의 귀로 전음이 들려왔다.
[그에게 절대 무례하게 굴지 마라. 그는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무서운 사람이다.]
제갈지는 그 전음을 보낸 이가 숙부인 제갈천기라는 것을 알았다.
제갈천기는 신중한 사람이었다. 함부로 사람을 평가하는 인물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그의 전음에는 다급함이 서려 있었다. 제갈지 본인이 모르는 뭔가가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즉시 청풍에게 더 차갑게 대했다.
“청풍 공자, 어서 군 소협에게 사과하세요.”
남궁세가에 오기 전까지만 해도 다정하다 못해 청풍에게 되레 치근거렸던 제갈지가 지금의 차가운 제갈지와 동일인물인지 의심스러운 청풍이었다. 그렇지만 그는 할말이 없었다. 정작 당사자가 아무렇지 않다는데 청풍 자신이 앞서 나간 꼴이 되어버렸으니 말이다. 이런 상황에서 계속 무리하게 도발하게 되면 자신은 못난 사내가 되어버린다.
“군 소협, 제가 잘못 생각했습니다. 그저 제갈 소저가 걱정이 되어서 말한 것이니 너그럽게 용서해 주시오.”
“신경 쓰지 않으니 괜찮습니다.”
천악은 지금 청풍 따위를 생각할 이유가 없었다. 그는 무엇보다 자신의 신경을 건드린 놈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다른 사람들에게 주목받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러나 천악이 아무 말 없이 넘어가는데 그냥 넘어가지 못하는 사람이 있었다.
“야, 너! 무슨 배짱으로 나한테 인사도 안 하는 거냐, 어? 너, 네 스승이 그렇게 가르쳤냐?”
“헛!”
당지독이 그냥 넘어갈 위인이 아니었다.
천수암제 당지독은 태극검성 현도진인과 같은 오천존이었다. 그 실력이 일성이마보다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고 있기는 하지만 엄연히 절대고수이자 연배가 가장 높은 무인이었다. 그런 당지독을 무시하고 천악에게 먼저 말을 건넸으니 청풍의 잘못이었다. 청풍은 오늘 제대로 걸렸다고 볼 수 있었다.
‘왜 상황이 이렇게 되는 거지?’
청풍의 임풍옥수 같은 얼굴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강호에 자신을 알릴 수 있는 기회의 장이었던 이곳에서 지금 그는 궁지에 몰리고 있었다.
그는 억울했다. 어떻게 이렇게 된단 말인가! 천악을 도발하기는 했지만 이 정도로 궁지에 몰릴 일은 아니었다. 그나마 아군이라 생각했던 제갈지마저 냉기를 풀풀 풍기니 구원의 손길을 바라기는 글러버렸다.
청풍은 그 순간 천악의 눈동자를 보았다. 무감정한 눈동자를 보자 자신도 모르게 화가 났다. 자신은 궁지에 몰려 어떤 대답을 해도 위기의 연속인데, 천악은 그저 자리에 서서 연회장에 차려진 음식만을 먹고 있지 않은가. 더군다나 금은혜가 먹여주기까지 하자 치미는 분노를 삭일 수 없었다.
“너 지금 무슨 생각하는 거냐? 내 말이 말 같지 않다는 거냐?”
“아…닙니다. 제가 잠시 천수암제 어르신을 보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런 눈깔 달고 칼 쓰면 엄한 사람 다친다. 알겠냐!”
험한 쌍소리를 하고 있지만 청풍은 감히 뭐라고 하지 못했다. 천수암제에게 걸리면 어떻게 되는지 그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청풍은 어떻게든 위기에서 빠져나가 보려고 제갈천기를 찾았다. 하지만 제갈천기는 어느새 자리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제갈천기는 제갈지에게 전음을 보낸 후 바로 자리에서 벗어난 상태였다. 괴물 같은 천악에게 자신이 청풍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알려주지 않기 위해서 미리 발을 뺀 것이다. 제갈세가답게 눈치 하나는 귀신이었다.
청풍은 실수한 것이다. 천악을 건드리는 것 자체가 청풍에게는 악몽이 될 것이다. 천악의 주변에 있는 사람치고 청풍이 함부로 대할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죄송합니다, 당지독 어르신.”
“내가 현도 그 친구 봐서 참는 줄 알아라. 알겠냐!”
“예, 어르신.”
진땀을 빼던 청풍은 그 자리에 더는 있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연회장 밖으로 나가는 것도 불가능했다. 가주 취임식이 있는 상황에서 먼저 나가는 것은 남궁세가를 모독하는 일이니 말이다. 생애 처음으로 진퇴양난의 상황을 겪게 된 청풍은 천악에게 극도의 적의를 가지게 되었다.
‘이 모든 게 저놈 때문이야!’
* * *
남궁세가의 가주 취임식이 시작되었다.
검왕인 남궁장천이 직접 가주 승계를 위해 창룡검(蒼龍劍)을 들어 모두에게 보여주었다. 남궁혁성이 경건하게 꿇어앉은 상태에서 남궁장천의 창룡검을 두 손으로 받아 들었다.
창룡검은 남궁세가의 가주를 상징하는 검이었다. 대대로 가주가 검을 이어받았으며, 그 검으로 인해 검왕이라는 별호를 물려받게 되었다.
남궁장천이 흐뭇하게 남궁혁성을 바라보았다.
“이로써 네게 무거운 짐을 넘기게 되었구나. 너는 대남궁세가의 가주로서 세가의 번영과 영광을 위해 분골쇄신해야 한다. 알겠느냐?”
“영광스러운 자리에 앉게 되어서 책임이 무겁습니다. 하지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래, 이제 네가 남궁세가의 가주다. 검을 들어 만천하에 알리도록 하거라.”
차앙!
남궁혁성이 창룡검을 빼어서 하늘을 향해 들어올렸다. 찬란한 태양빛이 창룡검의 푸른 검면에 반사가 되어 세가 전체를 비추었다.
푸른 용이 그려진 창룡검 자체가 주는 감동이 있었다. 남궁혁성은 검을 들고 모두에게 자신이 가주가 됐음을 알렸다.
“남궁세가의 영광과 강호 무림의 안녕을 위해 매진할 것을 천하에 알립니다. 남궁세가여, 영원하라!”
“와아아아아!”
짝짝짝! 짝짝짝!
남궁세가의 무인들이 환호를 보내고 연회장에 모인 무인들이 박수를 쳤다, 새로운 남궁세가의 가주가 탄생한 것을 축하하며.
“비무대회의 예선은 내일부터 치를 겁니다. 비무대회는 후기지수들의 실력을 확인하기 위한 장입니다. 모두 최선을 다해 좋은 결과 이루기를 바라겠습니다.”
남궁혁성의 말이 끝나자 취임식 자체는 끝이 났다. 연회장에 모인 무인들 모두 내일 있을 대회를 생각하고 있었다.
* * *
청풍에 대한 제갈지의 생각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처음에는 좋은 배경과 그의 조각 같은 얼굴에 혹했지만 그도 다른 사내들 같은 속물근성이 있었다. 아름다운 여인에게 시선이 가는 것은 사내인 이상 당연하지만 곁에 있는 여인의 소중함도 알고 있어야 했다. 그런 면에서 청풍은 보통의 사내들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
제갈지 자신도 오만하고 보통여인들과 비슷하게 권력욕이 있기는 하지만 아주 멍청하지는 않았다. 순식간에 닭 쫓던 개가 되어버린 그녀는 비참하기까지 했다.
청풍이 그녀를 달래려고 왔지만 한 번 떠난 여인의 마음을 다시 잡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더군다나 제갈지는 지낭이었다. 뻔히 보이는 수작에 그대로 넘어갈 정도로 만만하지 않았다.
제갈지는 숙부인 제갈천기를 찾아갔다. 그가 보낸 전음이 마음에 걸렸다. 무언지 알 수 없지만 제갈천기가 알고 있는 게 있을 것 같았다. 그저 예감이라고 하기에는 꺼림칙한 것이 너무 많았다.
“숙부님, 저예요.”
“들어오너라.”
남궁세가에서 제공한 방으로 들어온 제갈지가 제갈천기를 마주보며 앉았다.
제갈천기의 심각한 표정은 좀처럼 펴지지 않았다. 그는 지금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을 제갈지에게 말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 고민했다. 말을 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제갈세가에서도 알게 되고, 그동안 숨겨왔던 자신의 처지가 처량하게 비쳐질 것이 뻔했다. 제갈천기로서도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무인에게 중요한 것은 무공과 명예였다. 그 어느 것도 버릴 수 없는 소중한 것이었다.
“숙부님, 제게 하실 말씀 없나요?”
“꼭 들어야겠느냐?”
“제가 궁금한 것을 참지 못하는 거 알잖아요.”
머뭇거리는 제갈천기의 모습을 보자 제갈지는 더욱 궁금했다. 도대체 철혈판관검이라고 불리는 제갈 숙부의 표정을 저토록 심각하게 만드는 진실이 무엇인지 말이다. 그 진실에 근접하려는 것은 제갈세가 사람들만이 가진 특성이었다.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생각을 해야 한다. 또한 답을 구하기 위해 막대한 양의 공부가 필요하다. 제갈세가는 오랜 시간 동안 세상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강호에서 신기제갈이라는 칭호도 받지 못했을 것이다.
“그럼 다짐을 해주어야겠다.”
“다짐이요?”
“너만 알고 있어야 한다. 그 누구한테도 말해서는 안 된다. 지킬 수 있느냐?”
제갈지는 잠시 고민했다.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쉽게 생각하고 판단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었다. 신중하게 고민하고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결정을 해야 후회가 없다.
제갈천기는 과연 지금 말하려는 진실을 알고 나서 조카인 제갈지가 어떤 말을 할 것인지 궁금했다. 사실 상식을 가진 사람들이라면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못할 것이다. 그런 면에서 제갈세가의 사람은 상식적이고 교양을 두루 갖춘 무인들이었다. 지적으로 이해 불가능한 일들을 믿는 편한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지는 못했다.
“알았어요. 무슨 일이 있더라도 저만 알고 있겠어요.”
“좋다, 그럼 말해 주마. 사실 네가 믿을지가 의문이기도 하다.”
제갈천기는 그동안 천악과 얽힌 일들을 세세하게 제갈지에게 설명해 나갔다.
제갈지의 표정은 숙부의 말을 듣는 동안 천 번은 더 변하는 듯했다. 입이 떠억 벌어지고 눈은 동그랗게 변했다. 놀람의 연속이 폭풍처럼 이어지고 있었다.
제갈천기는 무림맹에서 조사했던 내용과 사실들을 설명하고 군천악의 성격까지 알려주었다.
“그…럴 수가!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세요?”
“말이 되는지 안 되는지는 상관없다. 그게 현실이라는 것이 중요하지.”
“제갈 숙부가 아닌 다른 사람이 그런 말을 했다면 터무니없는 거짓이라고 하겠지만, 그게 사실이라면 정말 엄청난 사람을 건드린 꼴이 됐네요.”
제갈지는 군천악을 다시 한 번 떠올렸다. 고작 약관의 나이에 상상할 수 없는 기운을 가진 고수 정도로만 알았는데, 실상은 세상을 모두 파괴시킬 수 있는 힘을 가진 마신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가 세상에 나가려 하지 않고 그저 방관한다는 것에 희망이 있었다.
“너는 제갈세가를 위해서라도 그에게 잘해야 한다. 그는 자신을 건드린 자에게 자비를 베푸는 성격이 아니다.”
“알지만 너무 황당하네요.”
“그렇겠지.”
제갈지는 다른 한편으로 그런 자를 제갈세가에서 다스릴 수만 있다면 자신의 가문이 천하제일세가가 되는 것은 시간문제라는 생각을 했다. 그 생각은 제갈지의 마음에서 청풍이 완전히 떠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그녀에게는 무섭지만 새로운 목표가 생겨났다.
“그럼, 남궁세가도 알고 있었다는 소리네요?”
“그렇겠지. 아니, 가장 잘 알고 있을 거다.”
“빙화 그 계집이 왜 천악 오라버니에게 꼬리를 치나 했더니 다 이유가 있었군요.”
제갈천기가 혀를 찼다. 천악을 어느새 ‘오라버니’라고 부르다니, 정말 배짱 하나는 대단했다. 제갈천기가 보기에 제갈지는 천악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다가가려고 하는 그녀의 의지만큼은 높게 사주었다. 견딜 수 없는 두려움을 이겨내고 앞으로 나가는 자는 선구자가 될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새 오라버니라니……. 이것 참, 골치 아프군.’
그날 청풍은 밤새 방에서 분을 삭여야 했다. 남궁세가에 올 때만 해도 이런 결과가 찾아올 줄 몰랐다. 또한 청풍은 자신이 왜 이런 열등감에 시달려야 하는지를 고민했다. 그는 밤새 태극신공(太極神功)을 운기하면서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혔다.
청풍은 사부님이 전에 해주던 말을 떠올렸다.
“청풍아, 너는 사사로운 감정이 너무 많다. 감정을 다스리고 마음의 균형을 이루는 것이 바로 태극신공의 묘용이니라. 한쪽으로 너무 집착하거나 타인에게 감정을 드러내는 것은 무당의 무공을 익히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항상 마음을 침착하게 하고 수양에 힘쓰도록 해라!”
태극검성 현도진인의 평소 성격이 능글맞기는 하지만 사부는 도인이었다. 한평생 도를 수양했고, 그 길에 매진한 수행자였다.
“사부님, 저는 보통 사람입니다. 내 마음을 뽐내고 싶고 자랑하고 싶은 인간이란 말입니다.”
청풍은 오늘 있었던 일들이 모두 자신이 잘못한 결과라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옆에 있던 여인을 이용해서 다른 여인에게 잘 보이려고 한 짓은 치사함의 결정체였다. 누가 보더라도 천악을 시기해서 자신의 좋은 점을 보이려고 한 것밖에 되지 않았다.
그 모든 것을 알지만 청풍은 천악에게 적개심을 가지고 있었다. 감추거나 숨긴다고 마음속에서 흘러나오는 감정의 편린을 다스릴 수 없었다.
청풍은 방으로 들어오기 전에 남궁세가의 비무대회에 참석하는 사람 중에 군천악이 있는지를 확인했다. 그의 실력이 어떤지 몰라도 꼭 예선을 통과해 만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공정하게 자신의 실력으로 천악을 무릎 꿇리고 빙화의 마음을 얻으리라 다짐했다. 제갈지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기는 하지만 남궁태희는 정말 꿈에서나 나올법한 여인이었다.
사내치고 욕심을 가지지 않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더군다나 자신처럼 모든 것의 정점에 선 후기지수라면 소유하고 싶은 것은 당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