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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계독존기 22화

무료소설 이계독존기: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조회 1,043회 작성일

소설 읽기 : 이계독존기 22화

예기치 않은 기연(奇緣) (2)

 

 

“당연한 소리 하지 마세요. 지금 그럴 시간이 없단 말이에요!”

 

“응?”

 

금은혜는 남궁태희의 상태가 악화되지 않는 것을 보고 놀라고 있었다. 천악이 이상한 진을 그리고 이상한 언어를 말하기는 했지만 그것만으로 위험했던 순간이 조절되고 있는 것에 놀란 것이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또 술법을 쓴 거예요?”

 

“시간을 조금 번 거다. 아직 그녀는 위험하다.”

 

해결을 한 것이 아니라 시간을 잠시 번 것에 불과한 임시방편이었다.

 

천악은 음한지력이나 빙극지력을 생성해 낼 수 있는 것을 생각해 보았다.

 

야수권의 위력은 내공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었다. 또한 천악도 양의 기운을 가지고 있었다. 내공으로 그녀에게 도움을 주는 것도 어려웠다. 처음부터 환골탈태를 시키려고 했다면 천악이 할 수 있겠지만 검황의 내단을 먹은 후 변화가 일어나는 시점에서 잘못 건드렸다간 바로 몸이 터져버릴 수 있는 극악의 상황이라 어려운 것이다.

 

‘빙극지력이라면 가능할지도 모르겠군.’

 

천악은 빙계 마법을 생각해 냈다.

 

검황의 내단과 맞먹는 빙계 마법은 있겠지만 내단 정도로 조그맣게 만들려면 쉽지 않았다. 천악이 1미터 정도의 공간에 마법진을 설치하였다.

 

-블리자드(눈의 폭풍)!

 

휘이이잉! 휘이잉!

 

극빙의 차가운 냉기가 공간의 마법진 안에 휘몰아쳤다. 추운 기운이 밖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천악이 기의 장막을 펼쳤다. 그리고 그 안으로 다시 마법을 펼쳤다. 바로 아이스 볼 마법이었다.

 

작은 얼음덩어리가 눈의 냉기와 만나자 점점 덩어리가 커지기 시작했다. 얼음덩어리에 얼음알갱이가 붙어서 점점 부풀어 오른 것을 천악이 손으로 잡았다.

 

잡은 손에 힘을 가했다. 손에 기의 장막을 쳐서 얼음덩어리를 조였다. 힘으로 압력을 가해 얼음덩어리를 더욱 작게 만들었다. 천악이 주는 힘의 압력은 금강석도 으스러뜨릴 정도로 대단했다. 금세 얼음덩어리가 압력을 받고 작아졌다.

 

천악의 일은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니었다. 반복해서 마법을 펼치고 기공과 악력으로 얼음덩어리를 작게 응축했다.

 

천악에게 마력은 넘쳐났다. 보통의 마법사가 이 정도의 마력을 계속 사용하면 아무리 저 서클이라고 해도 금세 녹초가 되어 마력이 바닥이 날 것이다. 하지만 천악은 드래곤의 마력을 고스란히 간직한 괴물이었다. 그에게 불가능은 없었다.

 

우드드드드득!

 

수차례 반복을 하고 나서 천악은 마법을 모두 거두었다. 마법을 거두자 천악의 손 안에 작고 새하얀 얼음 덩어리가 극한의 빙한기(氷寒氣)를 뿜어내었다. 그 기운은 일반 사람이 버틸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차가운 냉기에 한번 닿았다가는 금세 얼어서 부서져 버릴 것이다.

 

“저, 저…럴 수가!”

 

천악이 행한 일은 이제껏 금은혜가 생각한 것을 초월하고 있었다. 눈앞에서 보고 나서도 믿지 못할 일이 일어난 것이다.

 

“빙정을 만들다니…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을……!”

 

빙정(氷晶)은 아무렇게나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극한의 심처 중에서도 가장 차가운 기운이 뭉쳐져 오랜 시간 동안 압력과 냉기를 받아야만 비로소 형성되었다. 또한 빙공을 익힌 자에게는 천고의 보물이자 무가지보(無價之寶)였기에 눈에 불 켜고 찾는 보물이 바로 빙정이었다.

 

빙정의 가치를 생각하면 저렇게 쉽게 뚝딱 만들어져서는 안 되었다. 만약 이 사실이 세상에 알려진다면 천악을 잡으려고 많은 무인들이 설쳐댈 것이다.

 

그렇게 되면 세상이 어떻게 되겠는가. 천악이 그런 무인들을 향해 넙죽 ‘나 잡아가쇼.’ 하는 인물인가. 보이는 족족 다 죽여서 거대한 혈류(血流)가 흐르게 만들어버릴 것이다. 세상이 망하더라도 눈 하나 깜빡 안 하는 천악이라면 그렇게 하고도 남았다.

 

금은혜는 다짐했다. 이 사실을 무덤까지 가지고 가겠다고 말이다.

 

“이 정도면 되겠군.”

 

천악이 만족스러운 듯 미소를 지었다.

 

금은혜는 놀라면서도 머리를 빠르게 회전시켰다.

 

‘저 괴물은 도대체 못 하는 게 뭐야? 아니지, 저 술법을 우리 상회에 사용한다면……?’

 

번쩍하는 섬광이 그녀의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그녀는 자신의 생각이 현실화된다면 대륙의 상회 유통망을 획기적으로 바꿀 수 있으리라 확신했다. 아직 실행할 단계는 아니라고 해도 충분히 고려해 봄직한 일이었다. 그녀는 기분이 좋아졌다. 이제는 어떻게 해서든지 천악의 맘에 드는 것이 중요했다.

 

천악은 조심스럽게 남궁태희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작은 충격에도 쉽사리 주화입마를 당할 수 있는 위기였다. 조심하는 게 당연했다.

 

천악이 그녀의 꽉 다문 입을 손가락으로 턱을 잡고 벌렸다. 다물어진 입을 벌리고 압축된 빙정을 그녀의 입으로 집어넣었다.

 

‘이제 마법진을 해제해야겠군.’

 

마법진을 해제하자 남궁태희의 근육들이 심하게 요동을 쳤다. 그렇지만 양강지력이 더 이상 뻗어나가지는 못했다.

 

천악이 주입한 빙정의 기운이 검황의 내단에 반응하여 서로의 기운을 상쇄시키듯이 남궁태희의 몸 밖으로 뿜어내었다.

 

“으응?”

 

남궁태희의 의식이 다시 회복되었다. 극심한 양강지력에 정신을 잃었었던 남궁태희가 빙정의 기운으로 다시 정신을 차린 것이다.

 

[운기조식을 하시오. 입 안으로 빙정의 기운이 느껴질 것이오. 이제부터는 남궁 소저의 몫이오.]

 

남궁태희는 두 가지 상극의 기운 때문에 천악의 전음에 대답을 하지는 못했다. 대신에 창궁무애심법을 극성으로 운기했다. 지금은 대답보다 운기조식이 먼저였다. 이대로 죽기에는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이 너무 아까웠다.

 

지금 그녀의 몸 안에 들어온 빙정과 검황의 내단이라면 분명히 엄청난 내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그녀 인생에 두 번 오기 힘든 최고의 기회였다.

 

인생을 살아오면서 기연이 하루에 연달아 두 번이나 일어나다니, 그녀의 운이 보통이 아닌 듯했다.

 

천악은 더 이상 그녀의 일에 간섭하지 않기로 했다. 이 정도면 허락 없이 소풍을 데리고 온 데에 대한 책임을 다 완수한 것이었다.

 

남궁태희가 이대로 기운을 이기지 못하면 죽을 수도 있지만 이겨낸다면 그녀는 최강의 내공과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부터 그녀는 혼자 해야 한다. 남에게 너무 의지하는 것도 좋은 습관은 아니니까 말이다.

 

남궁태희는 기연을 놓치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처음부터 다시 정신을 집중해서 창궁무애심법의 구결을 생각하였다.

 

 

 

푸르른 하늘의 기운을 모아 몸 안에 담는다. 하늘의 기운을 몸 안에 담을 수 있는가!

 

그것은 구분이 필요하지 않다. 인간의 몸은 하늘의 그릇에 속한 것일 뿐이니, 그저 마음을 편안히 하고 하늘과 교감을 이루어 그 끝없는 기운을 느끼도록 하라!

 

그 느낌을 안다면 능히 무극(無極)을 관통할 수 있을 것이다.

 

 

 

남궁태희의 몸이 가부좌를 튼 상태에서 한 자 정도 공중으로 떠올랐다. 공중으로 뜬 상태에 있는 남궁태희의 눈은 아직 감겨 있었다.

 

폭풍 같은 기운이 그녀 주위로 뿜어져 나와 회오리를 형성했다. 부공삼매지경(浮空三昧之境)에 들어 몰입을 한 것이다.

 

우드드득!

 

남궁태희의 몸이 내공에 적응하기 위해 서서히 변화를 일으켰다. 뼈가 어그러지는 듯한 소리가 들리면서 몸을 둘러싸고 있는 옷들이 속절없이 녹아서 사라지기 시작했다. 순백의 여인에게서 뿜어지는 빛은 여신의 강림(降臨)이라 느끼게 할 정도로 황홀하고 아름다웠다.

 

그녀는 옷이 사라진 줄도 모르고 계속 운기를 하였다. 옷이 사라진 그녀는 아직도 거추장스러운 것이 있는지 피부가 점점 부풀어 오르면서 사막의 건조한 땅처럼 갈라지기를 반복했다. 갈라진 피부 사이로 태초에 그녀가 태어났을 때의 피부처럼 더 맑은 피부가 생성이 되었다.

 

쩌저저저적! 파앗!

 

마침내 피부가 완전히 탈피를 하듯이 벗겨져 내리더니 푸르스름한 기운이 밖으로 분출이 되고 그녀의 머리 위로 세 송이의 푸른 꽃이 형성되었다. 그것은 바로 무공의 경지 중 화경의 초입에 이를 수 있다는 삼화취정(三化聚頂)의 단계에 들었다는 소리였다.

 

삼화취정이란 정(精), 기(氣), 신(神), 이 세 가지의 기운을 밖으로 표출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호흡을 할 때 가장 기초적인 단계에 나오는 것이지만, 이 세 가지는 각기 떨어져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단계로 이루어지는 근원적인 원리를 의미했다. 무인들이 익히 알고 배워왔지만 요원(遙遠)하게 여긴 삼화취정의 단계에 든 남궁태희였다.

 

그러나 만약 남궁태희가 검황의 동굴에 들어오기 전에 천악의 가르침과 깨달음을 얻지 못했다면 화경에 드는 기연을 얻지 못했을 수도 있었다. 그때는 내공이 부족했을 뿐이지만 지금은 충만했고, 기운을 포용할 깨달음을 이룬 것이다.

 

남궁태희는 서서히 기운을 갈무리하며 눈을 떴다.

 

“하아, 개운하다!”

 

몸 안에 내공이 흐르는 길인 혈맥과 경락에 막힘이 없었다. 이제까지 느껴보지 못한 개운한 기분이 그녀의 기분을 상쾌하게 만들었다.

 

만족한 웃음을 보이던 그녀가 갑자기 웃음을 멈췄다.

 

“까앗!”

 

자신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있음을 이제야 인지한 것이다.

 

만약 아무도 없었다면 그나마 부끄럽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 금은혜만 있었다면 참거나 입으로 비명을 지를 정도로 소리를 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문제는 천악이 자신을 보고 있다는 것에 있었다.

 

천악은 남궁태희의 몸을 직시하고 있었다. 고개를 돌릴 생각도 하지 않았다.

 

“눈 돌려욧!”

 

천악을 향해 시끄럽게 소리친 남궁태희가 가슴을 가리면서 따가운 눈총을 보냈다. 순수한 여인의 몸을 보면서도 고개조차 돌리지 않는 천악의 뻔뻔한 행위를 질타한 것이다.

 

“돌려야 하나?”

 

“당연하죠. 빨리 돌려요!”

 

이번에는 금은혜가 다가서더니 천악을 돌려세웠다. 같은 여인의 벗은 몸을 천악이 본다는 것 자체가 못마땅한 금은혜였다.

 

그녀로서는 당연한 행동이었다. 아름답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남궁태희가 더 아름다워졌으니 말이다. 금은혜는 위기감을 절실히 느꼈다.

 

“그럼 이제 나가지. 너무 오래 동굴에 있었던 것 같다.”

 

남궁태희가 운공에 들인 시간은 두 시진이 넘었다. 상당히 오랫동안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던 천악이 지루해 하는 것이 당연했다.

 

천악이 나가려고 하자 남궁태희가 잠시 불렀다.

 

“저기……!”

 

남궁태희는 아무것도 입지 않은 상태였다. 옷이 있어야 나갈 수 있는 것 아닌가.

 

여름이라서 금은혜의 옷도 가벼운 경장이었다. 같은 여자이기에 옷을 빌려줄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남은 사람은 천악뿐이었는데, 천악이 자신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그냥 나가려고 하자 그를 부를 수밖에 없었다. 아쉬운 것은 남궁태희 자신이었으니까.

 

입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저, 저기……!”

 

천악이 돌아서며 고개를 돌리려고 하자 다시 남궁태희가 돌리지 말라고 하였다.

 

“왜 부르는 겁니까?”

 

“저, 상의 좀 벗어주시겠어요?”

 

그녀는 차마 더는 말하기 힘들었다.

 

천악이 말없이 상의를 벗어 금은혜에게 주고는 뒤돌아보지 않고 바로 동굴 밖으로 나갔다. 왠지 모르게 남궁태희에 대해 더 냉랭해진 천악이었다.

 

* * *

 

천악이 물 밖으로 나오자 어둠이 세상을 완전히 검게 만들었다. 동굴에서 상당히 오랜 시간 동안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마차 주변으로 등불이 아직 밝혀져 있었고, 그 옆으로 진삼이 장작불을 지펴놓고 있었다. 진삼은 기다리다 지쳤는지 잠들어 있었다. 그는 하인이기에 마차에 들어가서 잘 수가 없었다.

 

천악이 나온 후 뒤따라 금은혜와 남궁태희가 물속에서 나왔다. 그녀들은 재빨리 마차 안으로 들어갔다. 마차 안에서 옷을 말리고 만약을 위해 천악이 준비한 옷을 입었다.

 

“크음!”

 

“장주님, 나오셨군요. 죄송합니다. 제가 그만 잠시 잠이 들었습니다.”

 

진삼은 주인을 기다리려고 했는데 피곤하고 졸려서 그만 잠이 들어버렸다.

 

“괜찮다. 더 자도 된다.”

 

천악은 짐삼을 나무랄 이유가 없었다. 사람인 이상 잠을 자는 것을 가지고 뭐라고 하는 것이 더 이상했다.

 

끼이익!

 

남궁태희가 옷을 입고 밖으로 나왔다. 그녀에게 천악의 옷은 꽤 큰 편이라 옷이 헐렁하게 늘어져 있는 상태였다. 그럼에도 그녀는 아름다웠다.

 

미인의 조건은 피부가 깨끗하고 순백의 색깔을 가지며, 입술은 붉고 작아야 한다. 또 손과 발이 앙증맞을 정도로 가늘고 작아야 남자들이 보호본능을 일으킨다.

 

남궁태희가 나타나자 어두웠던 세상이 잠시 환하게 빛이 나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장작불의 붉은빛이 그녀의 얼굴에 반사가 되어 홍조를 띤 것처럼 보였다.

 

천악은 남궁태희를 싸늘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남궁태희는 천악의 무표정한 표정과 싸늘하게 가라앉는 분위기에 압도되면서 알 수 없는 감정이 솟아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여태껏 사내에 대해서 심각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사내는 그저 자신을 바라보며 욕정을 느끼는 더러운 족속, 또는 실력도 없으면서 설쳐대는 놈들 정도로밖에 보지 않았다.

 

그런데 천악은 달랐다. 그녀가 생각하는 모든 남성의 공통점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았다. 도저히 인간이라고 생각하기 힘든 능력과 자신을 돌처럼 보는 냉정한 심성을 가진 인물이 천악이었다.

 

색다른 감정이었다.

 

천악은 그녀에게 두 번이나 기연을 선사하였다. 무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무공 실력의 상승이었다. 그 기회를 제공한 천악은 그녀에게 천금을 주어도 바꿀 수 없는 은인이었다. 하지만 천악의 냉정한 시선을 보자 고맙다는 말이 쏙 들어가 버려 말이 나오지 않았다. 좀 전까지 도움을 줬으면서 왜 이런 싸늘한 시선을 보내는지 알 수 없었다.

 

“왜 화를 내고 있지요? 제가 그렇게 잘못했나요?”

 

굳건히 닫혔던 천악의 입이 열렸다.

 

“저는 오늘 소저에게 세 번이나 실망했습니다. 스스로 무인이라면 절제하며 자제할 수 있어야 했는데 소저는 욕망을 이기지 못하고 위험을 자초했습니다. 또한 스스로 무인이라고 생각하면서 부끄러움을 느끼다니 그게 말이 됩니까? 마지막으로 나는 이것에 가장 화가 납니다. 소저 스스로 조상님의 무덤이라고 했습니다. 그럼 조상님을 위해서 부서진 먼지라도 모아서 무덤을 만들어놓고 난 다음에 내단을 먹든지 했어야 합니다. 아닙니까!”

 

울컥!

 

그녀는 고개를 들 수조차 없었다. 천악의 말이 그녀의 심장을 바늘로 찌르는 것처럼 아프게 짓눌렀다. 구구절절 틀린 말이 하나도 없었다. 부끄러움과 수치심이 그녀의 전신을 휘몰아쳤다. 화경의 경지를 밟은 무인이었지만 그녀의 행동은 부끄럽기 짝이 없었다.

 

한참을 그녀는 그렇게 고개를 숙이고 몸을 떨었다.

 

남궁태희가 다시 천악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생애에 다시 겪을 수 없는 정신적 성장을 하는 계기가 되었다. 오늘 천악이 한 말을 다시는 잊지 못할 것이다.

 

“은인의 말씀 고이 간직하겠습니다.”

 

처억!

 

남궁태희는 주먹과 손바닥이 닿는 소리를 내며 정중하고 엄숙하게 포권을 취하며 극도의 존경과 경외심을 나타내었다.

 

천악이 그제야 싸늘한 기운을 풀었다. 진정으로 인정했다면 그녀는 스스로 성장할 정도의 자격을 갖춘 것이다. 그녀를 계속 나무라는 것도 보기 좋지 않았다.

 

“깨달았다면 됐습니다.”

 

“은인께서는 이제 말을 낮추세요.”

 

그녀는 천악이 말을 낮추기를 원했다. 천악은 충분히 그럴 자격이 있는 존재였다.

 

천악은 그녀의 눈을 보고 그녀의 진심을 읽었다. 그럼 거기에 응대해 주는 것이 좋았다. 그리고 이제까지 나이도 어린 여인에게 말을 높인 것에 조금은 불만이 있었다.

 

“그럼 그러지.”

 

“저도 오라버니라고 불러도 되나요?”

 

“흠, 맘대로 해라.”

 

발그레!

 

불빛에 반사된 것인지 그녀의 얼굴이 저절로 붉어진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짙은 홍조가 그녀의 얼굴을 맴돌았다.

 

천악은 이 시대의 여인이 오라버니라고 부르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알지만 크게 마음에 두고 있지 않는 듯했다.

 

부글부글!

 

금은혜는 마차에서 늦게 나온 것을 후회했다. 그 전까지의 대화는 알 수 없지만 천악이 남궁태희에게 말을 놓는 것과 남궁태희가 천악에게 오라버니라고 부르겠다는 말을 들었다.

 

그녀는 순전히 자신의 이익을 위해 천악에게 접근했다고 생각했지만 다른 여인이 천악에게 다가오자 알 수 없는 분노가 치미는 것을 느꼈다. 생각보다 그 분노는 강했다.

 

여인의 질투심은 사내들이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위험하고 처절했다. 하지만 그녀는 침착하게 자신의 이 감정을 가라앉혔다. 천악의 성정을 조금이나마 아는 금은혜는 자신의 이런 감정이 위험할 수 있다는 것을 직감했기 때문이었다.

 

“다 깼으니까 식사나 하자.”

 

밤에 먹으면 살이 찐다는 말이 있지만 천악을 비롯해 금은혜와 남궁태희는 배가 고팠다. 계획에 없던 동굴 탐험을 하고, 또 여러 가지 일을 겪었으니 배가 고프지 않다면 더 이상했다.

 

밤에 불을 지펴놓고 먹고 싶은 것을 먹는 것도 운치가 있었다. 밤은 그렇게 잔잔하게 사라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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