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림 속의 엑스트라 13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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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219회 작성일소설 읽기 : 무림 속의 엑스트라 130화
130화. 백회령 (3)
야밤에 벌어진 사건 때문에 두 상단에는 비상이 걸렸다.
순식간에 네 명의 인질을 납치한 백회령산채가 물러간 다음 백가상단과 동방상단 표두는 서로 얼굴을 맞대고 대책을 수립했다.
“그들은 일반 산적이 아닙니다. 한 방에 호위무사를 해치우더군요. 특히 의정선자와 의정대협이 어디 보통 무림인입니까? 무공이 일류의 끝에 이른 분들입니다. 그런 분들을 눈 깜짝할 새 잡아간 것을 보면…….”
동방상단 증석범 표두가 사색이 되어 상황의 불리함을 호소했다. 가장 믿었던 두 호위무사가 납치되었으니 정신이 하나도 없을 법했다.
가만히 듣고 있던 백가상단의 왕 표두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오늘 상황을 보면 백회령산채에서 노리고 있었다는 느낌이 강하더군요. 혹시 백회령산채와 원한이 있습니까?”
“그, 그게…….”
증 표두가 얼마 전 하남으로 상행을 가다가 백회령산채와 부딪혔던 사건을 이야기했다. 당시 통행료를 내지 않았던 것은 물론 산적들을 쭉 꿇어 앉혀놓고 갖은 갑질을 저질렀다나. 물론 그때의 주역이 바로 의정선자와 의정대협이었다.
“그때 녀석들을 관부로 압송했어야 했는데…….”
증 표두가 후회의 넋두리를 했다. 사실 산적을 뿌리 뽑는 것은 불가능하다. 관부에 압송하더라도 얼마 후 자생한 산적이 설치게 마련이다.
지금까지 여러 산적과 접했던 왕 표두는 이 사건이 어쭙잖은 과시욕으로 빚어진 참상이란 사실을 깨달았다. 상행을 다니는 상단은 녹림과의 관계를 항상 조심해야 한다.
“어제 본 백회령산채의 괴인들은 일개 산적 실력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그들이 녹림 총채에서 파견된 인물이라고 봅니다만.”
왕 표두의 의견에 증 표두의 안색이 더욱 어두워졌다.
“아무래도 그렇겠죠? 의정대협이 그렇게 쉽게 당할 사람이 아니니…….”
두 표두가 머리를 맞대고 있을 때 천막이 걷히고 표사가 급히 들어왔다.
“표두님! 백회령산채에서 요구사항을 전해왔습니다.”
모두의 시선이 집중된 가운데 표사가 들은 바를 그대로 말했다.
“네 사람의 몸값으로 금전 일천 냥을 요구하겠답니다.”
금전 일천 냥이면 대단한 금액이다.
예전에 백단영의 동생 백석하의 몸값이 은전 일천 냥이었다. 금전은 은전 대비 대략 열 배의 가치가 있으므로 네 사람임을 고려하더라도 상당히 비싼 몸값이다.
“후우, 앞이 캄캄하군요.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들 네 괴인의 무공을 생각해보면 무력으로 해결하기 어려울 것 같고, 그렇다고 지금 그만한 돈이 있는 것도 아니고…….”
한숨을 내쉬는 증 표두 앞에서 왕 표두는 남의 일이라고 안도할 수 없었다. 분위기 때문에 말을 멈추었던 표사가 어쩔 수 없이 계속했다.
“요구조건을 들어주지 않으면 인질의 목숨을 장담할 수 없다고 합니다.”
전달사항을 모두 들은 두 표두는 전령을 내보냈다.
“후우, 인질이 무사해야 할 텐데 큰일입니다. 의정대협과 의정선자 두 분에게 산적들이 이를 갈고 있을 게 뻔한데……, 특히 여인의 몸인 의정선자는…….”
의정선자에게 닥칠지도 모를 끔찍한 일을 상상하던 증 표두는 고개만 설레설레 저었다.
“일단 무인들을 모아서 협상단을 꾸려 봅시다. 뭐라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왕 표두의 제안에 탄식만 하던 증 표두도 반색했다. 무엇이든 하지 않는 것보다 하는 것이 낫다.
두 표두가 머리를 맞대고 협상단과 협상 전략을 꾸렸지만 특별한 방안이 나올 리 없었다. 자연히 한숨만 짙어졌다.
두 사람이 의견을 수렴하는 가운데 이를 지켜보던 무흔은 백단영의 의중을 물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요?”
“구해야지.”
“네?”
“지금 잡혀간 그…… 의정선자는 얼마나 고초를 겪고 있겠어? 예전에 그녀에게 혼쭐이 났던 산적들이 분풀이하고 있을 거 아냐? 어쩌면 여자로서 참기 힘든 굴욕을 겪고 있을지도 몰라. 빨리 구해야 해.”
무흔은 예상과 다른 백단영의 말에 입을 꾹 닫았다.
평소 백단영이 정의감에 불타는 사람이란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앞뒤를 고려하지 않을 줄 몰랐다.
“난 흑도와 타협하고 싶지 않아.”
무흔의 반응을 눈치챈 백단영이 단호하게 선언했다.
아마 인질로 잡혔던 동생 사건을 겪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녀의 의견이 틀린 것도 아니고 그녀가 하겠다는데 그가 외면할 수 없는 일이다.
마음을 굳힌 백단영이 동방상단의 증 표두에게 물었다.
“그런데 그 남매 외에 잡혀간 다른 두 사람은 누군가요?”
증 표두가 마지못해 대답했다.
“우리는 두 문파에서 지원을 받았습니다. 의정문과 처…… 천상문이던가? 그럴 겁니다. 한 사람은 의정문하의 남자 제자이고 다른 사람은 천상문의 여자 문하생이랍니다.”
“천상문?”
백단영이 깜짝 놀라 되물었다.
그녀의 반응에 증 표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천상문을 아십니까? 산동성에 있는 작은 문파인데요.”
지금 백단영과 무흔이 찾아가는 문파가 바로 천상문이 아닌가. 지금 이곳에서 이렇게 만나다니 의외의 인연이었다.
백단영이 놀란 것은 당연하고 무흔 역시 뜻밖의 사태에 그녀를 쳐다봤다.
역시나 천상문이란 말에 백단영이 주먹을 슬그머니 쥐었다. 그녀가 결심을 굳혔음이 드러났다.
“제가 인질을 구해보겠습니다.”
백단영의 선언에 두 표두를 비롯한 모두가 회의적인 시각을 나타냈다.
무흔과 백단영의 실력을 제대로 모르는 그들로서는 당연한 우려였다. 특히 백가상단의 왕 표두는 좌불안석이 됐다.
“무리하지 마십시오. 자칫하면 더 어려운 상황에 빠질 수 있습니다. 지금 무인들과 표사를 모두 동원한다고 해도 그 괴인 넷을 처리하기 어렵습니다. 더구나 인질이 잡힌 상황에서는…….”
때로는 백 마디 말보다 행동 하나가 더 확신을 준다.
무흔은 슬그머니 미소를 지으며 손을 휙 내저었다. 그러자 옆에 서 있던 한 표사의 검집에서 저절로 검이 쓱 빠져나왔다.
휘익-
검은 천천히 회의장을 떠돌며 모두를 경악시킨 다음 본래의 위치로 돌아갔다.
“이기어검?”
“허공섭물?”
놀라운 무위에 안색이 변한 사람들이 무흔과 백단영을 향해 눈을 부릅떴다.
물론 이기어검이 아닌 단순한 허공섭물이다. 그렇더라도 허공섭물을 사용한다는 점은 무흔의 무공이 범상치 않음을 대변하기 충분했다.
“어떻습니까?”
“아아!”
곧바로 지금까지 무흔과 백단영에게 뻣뻣했던 동방상단 쪽 사람들의 태도가 눈에 띄게 부드러워졌다.
“정말 고맙습니다. 대협께서 나서주신다면 이미 구출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증 표두가 연신 고개를 조아렸다. 그에게는 무흔이 하늘에서 내려온 구명줄처럼 보였을 것이다.
허락을 얻었다고 생각한 백단영이 무흔에게 속삭였다.
“무흔, 어떻게 할까?”
어차피 무흔의 선택은 없다.
그는 오로지 백단영만 보고 있으니까. 게다가 천상문 제자마저 엮여있으니 그도 어떻게든 도와야 했다.
“여럿이 정면을 치는 것보다 우리 둘이서 인질을 구하러 가는 게 나을 겁니다. 저들 수준을 흑귀와 비슷하다고 본다면 흑귀 넷 정도야…….”
흑귀의 무공은 예전의 무흔과 비슷한 수준에 불과하다. 만혈대를 다녀온 이후의 무흔과 백단영은 혼자라도 흑귀 넷을 충분히 감당할 수 있었다.
대략 머릿속에서 작전을 세운 백단영은 두 표두에게 통보했다.
“저랑 무흔 둘만 백회령산채에 잠입할 겁니다. 다른 분들은 여기에서 대기해 주세요.”
“아가씨! 조, 조심하셔야 합니다.”
당부하는 왕 표두를 향해 백단영이 미소를 보냈다.
“걱정 않으셔도 됩니다. 산채 하나 처리하는 것은 일도 아니니까요.”
백단영은 걱정하는 두 표두를 뒤로 하고 무흔과 함께 고갯길로 나섰다. 하늘에서 내리는 눈이 하얗게 그녀의 머리에 쌓였다. 그녀는 산적 소탕보다 천상문 제자를 만난다는 설렘이 더 컸다.
***
의정대협을 비롯한 네 명의 포로는 산채의 한 오두막에 갇혀 있었다.
갖고 있던 무기 역시 모두 빼앗긴 그들은 손과 발이 줄로 꽁꽁 묶여 꼼짝하기 어려운 상태였다.
의정문 셋에 천상문 한 명인 그들은 불안에 잠겼다. 특히 문수란과 천상문 제자는 여자였기에 더 불안감이 컸다.
산적에게 끌려간 여인들이 어떤 고초를 겪게 되는지 많이 들었었다.
사실 그런 악행이 싫었기에 문수란은 더 가차 없이 산채를 토벌하곤 했었다. 그러던 것이 지금은 그녀 자신이 꼼짝없이 그런 곤경에 빠졌다.
밤에 그녀를 끌고 오던 산적들이 과거의 은원을 입에 올리며 히득거리던 모습이 떠올랐다. 아직은 아무 일도 없다지만 앞으로는 어떻게 될까. 자신이 과연 버틸 수 있을까. 그녀는 떠오르는 걱정을 애써 날려 보냈다.
호랑이에게 잡혀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고 했으니 어떻게든 버텨볼 테지만, 설사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손 치더라도 남들도 그렇게 생각할까. 누가 그녀의 청백을 믿어줄까. 쓸데없는 고민이 마음을 무겁게 했다.
기분 전환을 위해 고개를 들었던 그녀는 함께 묶인 천상문 제자가 떨고 있음을 발견했다.
“천상사화 소속이라 했죠?”
“네, 천상사화 일인인 아교라 해요. 우리는 이제 어떻게 될까요?”
아교는 두려움을 억누르지 못하고 있었다.
“걱정하지 말아요. 어떻게든 살아나갈 수 있을 거예요. 우리를 구하려고 상단에서 교섭을 시도하고 있을 거예요.”
그래도 선배랍시고 문수란은 힘주어 말했으나 정작 그녀의 목소리도 떨리고 있었다.
옆에서 문철남이 그녀를 위로했다.
“오빠만 믿어라. 내가 무슨 수를 쓰더라도 너만은 구할 거다.”
“됐네요. 오빠가 괜히 앞에 나서지만 않았더라도 이런 일은 없었을 거야.”
문수란이 허탈한 목소리로 원망했다.
물론 그녀도 알고 있다. 설사 그들이 앞에 나서지 않았더라도 두 사람에게 악심을 품었던 산적들이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았을 것을.
“그 여우같은 여자 때문에…….”
문수란은 오빠 옆에서 걸리적거리던 여자를 떠올렸다. 백가상단주 딸이라 했던가.
그녀의 원망에 문철남 역시 안면을 붉혔다. 어쨌든 자신이 그녀에게 잘 보이려다 이 사달이 난 것이 분명하기에.
“상단주 딸이면 돈이 많을 테니까 알아서 구해주겠지.”
희망 사항을 투덜거리며 그녀는 다른 두 사람에게 미안함을 표했다. 의정문 제자 하나와 천상문 제자 한 사람. 그들이야말로 정말 운이 없는 사람이 아닌가.
“그런데 우리를 납치한 그 사람들, 평범한 산적이 아닌 것 같죠?”
아교가 눈을 굴리며 물었다. 무공이 약한 그녀는 적삼인을 평가하기 어려웠기에 문수란에게 물어본 것이다.
“그들 괴물 넷은 절대 여기 백회령산채 사람이 아니야. 예전에는 없었거든. 무공도 엄청났어. 감히 우리가 상대하기 힘들 만큼.”
문수란은 제대로 저항도 못 하고 납치된 사실을 떠올렸다. 사실 산적 따위에게 붙잡혔다는 것은 무척 수치스러운 일이어서 그렇게라도 자신을 위안하고 싶었다.
덜컥-
방문이 열리며 수염이 텁수룩한 산적 둘이 들어왔다.
기세등등한 표정으로 방안에 들어온 산적 둘은 결박한 포로를 발견하고 호탕한 웃음을 터트렸다.
“크크, 이게 누구신가! 기세등등하던 그 암호랑이 아니신가!”
문수란은 상대를 알아보고는 흙빛으로 변했다.
얼마 전 이곳을 제압했을 때 꿇어 앉혀놓고 신나게 팼던 놈이었다. 벌벌 기는 놈을 인간 이하라고 발로 밟고 온갖 수모를 가했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의 복수를 하러 온 놈들이란 생각에 잠시 머릿속이 하얗게 탈색되었으나 마음을 굳게 다독였다.
그렇다고 그때의 행동을 후회할 생각은 없었다. 어떤 상황이 닥치더라도 저런 자들과 타협할 생각은 없으니까.
그녀는 묶인 손발을 확인하며 이를 악물었다.
역시나 산적 둘이 그녀의 앞으로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