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림 속의 엑스트라 9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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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256회 작성일소설 읽기 : 무림 속의 엑스트라 98화
98화. 천상신모 (1)
구진광은 백단영의 눈동자에서 공포를 보았다.
겁탈당할 위기에 처한 여인의 당연한 표정이지만 어딘지 모르게 이상했다. 그녀의 눈동자 초점은 그의 얼굴에 맺혀있지 않았다. 그의 뒤쪽 먼 곳이었다.
이상함을 느낀 구진광은 뒤를 돌아봤다.
“허억!”
그는 기겁해서 뒤로 엉덩방아를 찧었다.
백단영의 시선이 머문, 어두컴컴한 그곳에는 흑의를 입은 한 남자가 빈정거리는 표정으로 그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구진광이 자신을 발견한 것을 알아챈 남자가 천천히 앞으로 다가왔다.
“큭큭, 계속하지, 뭘 놀래냐?”
희미한 불에 비친 남자는 바로 마교 소교주인 사마극이었다.
사마극이 묘한 자세로 누워있는 백단영과 엉거주춤한 상태로 물러선 구진광을 훑어보며 웃음을 터트렸다.
“큭큭, 서로 간의 정이 애틋하다 못해 아주 깊은가 본데? 이런 상황에서도 주체하지 못하는 것을 보면. 하기야 이 세상의 마지막을 운우지락으로 마감하는 것도 나쁘지 않지.”
구진광은 겁에 질려 입을 열지 못했다. 반면 백단영은 수치심 때문에 입술을 깨물었다.
사마극의 뒤로 그를 보필하던 세 사람이 나타났다. 사마극과 세 마교인이 내려다보는 장면은 백단영을 극도의 공포에 휩싸이게 했다.
사마극이 빈정거리며 두 사람을 가리켰다.
“너희는 누구냐?”
구진광이 더듬거리며 간신히 대답했다.
“나, 나는 구진광이요. 고, 곤륜파 소속이요.”
“흐음, 곤륜의 구진광이라…….”
특별한 녀석이 아니라 판단한 듯 사마극의 시선이 천천히 백단영에게 옮겨졌다.
“아직도 누워있는 네년은?”
백단영은 매서운 눈초리로 상대를 쏘아봤다. 그녀의 눈빛을 본 사마극이 빈정대는 표정을 지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가시가 있군. 네년의 이름은?”
“백단영.”
“흐음, 백단영?”
사마극은 어디에선가 들어봤다는 느낌을 받았다.
어디였더라? 앞서 상대했던 그녀의 무공은 별 것 없어 자신이 굳이 기억할 수준이 아니었다.
기억을 더듬던 그는 예전에 은옥상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용봉대에서 장후성이나 남궁이화보다 더 주목할 상대를 발견했다고. 백단영과 무흔이라고 했던가.
조금 전에 보았던 백단영의 무공은 그가, 아니 은옥상이 관심을 둘 그런 수준이 아니었다.
“그런데 무엇 때문이었을까…….”
중얼거리던 사마극은 천천히 백단영을 훑었다. 예쁘긴 했다. 아니, 어둠 속에서도 빛이 날 만큼 지나치게 아름답긴 하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다. 모용예나 남궁이화도 이만한 미모는 된다. 그런데도 은옥상이 백단영을 주목했다면…….
“내가 누구인 줄 아느냐?”
백단영은 대답하지 않았다.
사마극이 피식 웃으며 스스로 대답했다.
“난 사마극이다. 마교의 소교주이지. 그리고 내 뒤의 셋은…… 마극삼비라 한다. 나, 사마극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비밀스러운 세 사람이란 뜻이지. 난 이들을 풍(風), 우(雨), 뇌(雷)라 부르고 있다만.”
어차피 백단영에게 저들의 이름은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빨리 이곳을 벗어나는 것이 급선무다. 문제는 아직도 마혈을 풀지 못해 꼼짝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사마극이 다시 한 걸음 앞으로 내디디며 백단영 앞에서 몸을 낮추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자세를 바꾸지 않는 백단영을 보고 사마극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나를 유혹하는 거냐?”
“네놈 얼굴이나 보고 말해.”
백단영이 분노한 눈빛으로 거침없이 쏟아냈다. 사마극이 한 방 먹은 표정으로 실소를 터트렸다.
“허허…….”
다시 백단영을 쓱 훑어보던 사마극은 그제야 백단영이 마혈이 제압된 상태란 사실을 눈치챘다.
“마혈이 점해졌군. 저놈이 그랬나?”
가벼운 지풍이 마혈을 풀었다. 그제야 백단영은 간신히 몸을 일으키며 주저앉은 채 뒤로 물러났다. 등 뒤로 동굴의 벽이 닿았다.
사마극의 시선은 구진광으로 옮겨갔다.
“넌 정파란 놈이 이런 짓을 해? 오호라, 크게 될 놈인데?”
빈정거리는 말을 내뱉으며 사마극이 구진광에게 다가갔다. 구진광이 사색이 되어 몸을 사시나무처럼 떨었다.
“사, 살려주시오. 뭐, 뭐든지 다 할 테니.”
사마극의 입가에 가소롭다는 미소가 머금어졌다.
“난 그런 놈을 살려두는 성미가 아니라서 말이지…….”
구진광을 향해 손을 쓰려던 사마극이 문득 바닥에 떨어진 옥패를 발견했다.
화들짝 놀란 사마극이 옥패를 들고 상세히 살폈다. 점차 그의 얼굴에 감격의 흥분이 일었다.
“마, 마화령!”
이어서 사마극 뒤쪽에 서 있던 마극삼비도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사마극 옆에 모여들었다.
“정말입니까?”
“오오…… 마화령이?”
사마극과 마극삼비가 마화령에 정신이 팔려있는 것을 본 백단영은 지금이 이들의 손에서 벗어날 마지막 기회임을 깨달았다.
그녀는 지도에서 보았던 다른 통로를 떠올렸다.
뒤쪽 바위벽에 돌출 장치가 보였다.
스르릉-
벽 쪽 구석진 부분이 열리는 순간 백단영은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그녀가 뛰어내리자마자 재차 기관이 작동되며 입구가 닫혔다. 그녀는 자신이 들어온 입구를 향해 장력을 퍼부었다.
쾅!
기관장치가 부서지며 내려오는 문이 완전히 막혔다.
백단영은 어둠 속에서 주위를 둘러봤다.
슈슉-
사방에서 화살이 비 오듯 쏟아졌다. 기관이 발동한 모양이었다.
그녀는 연검을 휘둘러 화살을 처리하며 앞으로 발을 내디뎠다. 사마극과 마극삼비가 그녀를 쫓을지도 모르기에 빨리 어디로든 도망쳐야 했다.
콰직-
발에 각종 독충이 밟혀 터져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백단영은 절로 몸이 움츠러들었다.
그녀가 십여 장을 달려 나갔을 때 뒤쪽에서 따라오는 인기척이 있었다.
허탈함에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벌써 여기까지 추격한 것일까.
백단영은 입술을 질끈 깨물고 연검을 힘주어 잡았다. 가만히 앉아 처분만 기다릴 수는 없는 법. 죽을 때는 죽더라도 넷 중 하나라도 베고 죽으리라고 결심을 굳히고 그녀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어?”
허나 그도 잠시였다.
어둠 속에서 다가오는 그림자를 발견한 그녀는 겁에 질려 다시 도망치려고 몸을 돌렸다.
이런 백단영의 뒤에서 접근한 사람은 바로 무흔이었다. 그는 백단영에게 급히 가기 위해 지름길을 선택했고 바로 이 통로로 들어왔다.
무흔은 자신의 앞에 있는 사람이 백단영임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어둠 속이라 해도 그녀를 못 알아볼 그가 아니었다.
백단영이 혼자인 것을 확인한 무흔은 순간 선택의 기로에 놓였다. 무극서생으로 만날 것인가, 아니면 무흔으로 만날 것인가.
무흔은 급히 죽립을 벗어던지면서 만변귀공을 풀었다. 동시에 돌아서는 백단영을 향해 소리쳤다.
“아가씨!”
죽을 각오를 하고 돌아서던 백단영은 뜻밖의 목소리에 깜짝 놀랐다.
“무흔?”
지하미로에서 절대 만날 수 없을 사람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아가씨, 괜찮아요?”
무흔이 급히 그녀를 진정시켰다.
“아아!”
백단영의 입술에서 안도의 신음이 새어 나왔다.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이 그녀의 마음을 편하게 했다. 날카롭게 고조되었던 긴장감이 눈 녹듯 사라졌다. 백단영은 울음이 나올 것만 같았다.
그녀가 대답하려는 순간 위에서 사마극의 외침이 들렸다.
“백단영! 쥐새끼처럼 도망치다니! 그 아랫길은 막다른 길이다. 넌 영원히 빠져나올 수 없을 것이다.”
차가운 사마극의 음성과 함께 동굴 주위가 지진을 만난 듯 흔들렸다.
쿠르르르-
통로의 천장이 붕괴되며 거대한 바위 더미가 내려앉았다.
무흔과 백단영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무너지는 동굴을 바라봤다.
한동안 흔들리던 주변이 다시 고요를 되찾았다.
무흔이 온 길과 백단영이 내려왔던 언저리가 완전히 붕괴되어 있었다. 집채만 한 바위가 앞을 가로막은 모습은 그들을 질리게 했다. 동굴이 이렇게 무너져서 막힐 수도 있는 법인가.
“이, 이런…….”
망연자실한 상태로 바위를 바라보는 백단영을 무흔은 착잡한 마음으로 바라봤다.
그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이렇게 흘러가는 것이 맞긴 하는데 과연 예전 소설에서도 이랬었나? 이곳 지하미로에서 백단영은 기연을 얻어야 한다. 지금까지의 진행은 틀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때는 이렇게 통로가 막히지 않았었던 것 같은데…….
한숨을 내쉬며 백단영이 무너진 흙더미 앞에서 주저앉았다. 무흔은 그녀를 위로하기도 힘들어 물끄러미 그녀의 뒷모습만 바라봤다.
한참 시간이 지난 뒤에야 백단영은 무흔을 돌아봤다.
“이제 어떡하지?”
“길을 찾아봐야죠.”
“사마극이 길은 없다잖아.”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사마극이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는 보장도 없잖아요.”
힘내라는 무흔의 주장에 백단영도 어쩔 수 없다는 듯 그에게로 돌아섰다.
“이쪽은 어려울 것 같으니 동굴 안쪽으로 더 들어가 보자.”
백단영이 앞장서고 무흔이 뒤를 따랐다.
동굴을 걸어가는 동안 갑자기 암기가 날아오거나 독충들이 떼거리로 몰려왔다. 그때마다 백단영이 무흔을 감싸며 막아줬다.
“조심해, 여기에 독충들이 너무 많아. 난 독망지주의 독단을 먹어서 괜찮지만 너는 아니잖아.”
무흔은 자신도 독단을 먹었다고 말해주고 싶었으나 꾹 참아야 했다.
동굴은 깊지 않았다. 이십여 장을 내려가고 나자 막다른 넓은 공간에 도착했다. 이곳도 지금까지의 다른 장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나마 독충의 침범이 없는 반듯한 바위가 있어 쉴 수 있었다. 두 사람은 바위에 걸터앉아 주변을 둘러봤다.
하얗게 백골로 변한 시신 한 구가 동굴의 막다른 구석을 점유하고 있었다.
“여기에도 백 년 전에 사람들이 들어왔었나 보네.”
백단영이 낙심한 목소리로 백골을 살폈다. 동굴에 들어온 후 백골을 워낙 많이 보다 보니 무덤덤했다.
문득 그녀는 백골 사이에 덮인 낡은 책자를 발견했다.
“어? 저게 뭐지?”
백단영은 손을 뻗어 뼛조각 사이에서 책자를 꺼냈다.
무흔은 그녀의 행동에 가슴이 뛰었다. 드디어 백단영에게 사부의 연이 닿는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천상비연검법?”
백단영이 무심결에 표지를 읽다가 화들짝 놀랐다. 무림사에 지식이 해박한 그녀는 단번에 이 비급이 누구의 것인지 알아냈다.
그녀는 흥분해서 무흔에게 소리쳤다.
“이것은 천상신모(天上神母)의 독문 무공이잖아!”
천상신모는 약 백 년 전 무림을 누비던 절대 기인이었다. 당시 중원 최강이라 불렸던 사대고수의 일인.
주로 연검을 사용했던 그녀는 당시 정사를 통틀어 네 명의 절대 강자로 무림 역사상 최강의 여고수란 평가마저 받았다. 하지만 그녀 역시 정마대전을 피할 수 없었다. 천상신모는 정마대전이 벌어진 이곳 만혈대에서 숨진 것으로 알려졌다.
전율에 휩싸인 그녀가 책을 넘기는 순간 책 속에서 양피지 한 장이 떨어졌다. 오래되고 낡아 곧 부서질 듯한 양피지를 다시 주워든 백단영이 천천히 내용을 읽었다.
「나는 천상신모라 한다. 천상문에서 무공을 익힌 나는 십 대 중반에 문중에서 최강고수로 등극했다. 나이 스물이 되기 전에 강호로 뛰어들었고 정파 무림의 중추로 활동했다. 이후 나는 거칠 것이 없었다. 강호의 사파와 마도는 나의 이름만 듣고도 벌벌 떨었다. 나이 서른을 넘어선 이후부터는 사실상 적수를 찾지 못했다. 물론 이것이 나의 무공이 최강임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내가 미처 겨루어보지 못한 몇몇 강자들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들이 나를 능가하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실로 광오한 말이었다.
무흔은 양피지에 정신을 빼앗긴 백단영에게 조용히 물었다.
“천상문은 어떤 문파죠?”
“산동성 쪽의 문파로 기억해. 사실 그리 이름 있는 문파는 아니었어. 백 년쯤 전 천상신모가 등장했을 때 잠시 유명세를 떨쳤으나 딱 그때뿐이었어. 천상신모가 사라진 이후 문파도 소리 소문 없이 사라졌으니까. 지금은 남아 있는지도 모르는…….”
의외였다. 천상신모가 최강의 여고수로 기억될 정도라면 천상문 역시 대단한 문파여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 이름조차 기억 못 할 그런 문파였다니.
이것은 두 가지로 해석될 수 있었다. 천상문의 무공이 너무 심오하여 천상신모를 제외한 제자들이 제대로 이어받지 못했거나, 아니면 무공이 변변찮은데 천상신모가 너무 뛰어났거나.
어쨌든 시대의 영웅이자 자부심이 가득한 천상신모가 남긴 비급이라면 충분히 익힐 가치가 있을 것이다.
눈빛을 반짝이며 흥분된 표정으로 백단영이 서찰의 후반부를 읽어 내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