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림 속의 엑스트라 9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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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309회 작성일소설 읽기 : 무림 속의 엑스트라 92화
92화. 신화문 해후 (3)
갑자기 튀어나온 벽해결을 보며 시시의 표정이 얼음장이 됐다.
“누, 누구냐?”
시시는 신화문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벽해결을 전혀 몰랐다. 반면 북악신군은 제자를 알아보고 소리 질렀다.
“해, 해결아!”
“사부님! 제가 이 발칙한 년을 처단하겠습니다.”
벽해결이 기세 좋게 검을 뽑았다.
시시는 금방 이 남자가 누구인지 알아챈 듯했다.
경악한 표정으로 뒤로 물러서던 그녀는 벽해결 뒤쪽에서 무흔마저 등장하는 것을 보고는 온몸이 얼어붙었다. 예전에 그날 신화곡을 뒤흔들었던 낯선 사나이와 외양이 똑같았다. 죽립을 쓴 모습을 보니 확실했다.
“으으으으…….”
신음을 터트리며 그녀는 도망칠 기회를 엿봤다.
분노를 폭발하며 다가오는 벽해결이 혼자서 감하기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눈치챈 그녀는 황급히 동굴 밖으로 나가고자 몸을 날렸다.
“헉!”
어느새 무흔이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천상추혼보를 펼치는 무흔의 몸놀림은 실로 놀라웠다.
앞길이 막힌 것을 확인한 시시가 다른 탈출구를 찾으려고 몸을 돌리는 순간 무지막지한 검격이 그녀에게 날아왔다.
“으윽!”
시시가 날카로운 검격을 어깨에 맞고 그대로 주저앉았다. 이어서 재차 검이 날아와 그녀의 가슴을 꿰뚫었다.
시시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쓰러졌다.
“사부님을 박해한 죗값이다.”
벽해결이 싸늘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어서 그는 곧바로 사부인 북악신군에게 달려갔다.
“사부님!”
“해결이냐!”
두 사람이 서로 얼싸안고 눈물을 흘렸다.
무흔은 한쪽 옆에 서서 두 사람의 해후를 지켜봤다.
그 모습을 보며 그는 자신도 사부가 있었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는 사부를 둘 수 없는 운명이다.
한참 안부를 주고받던 벽해결이 검으로 북악신군을 묶은 사슬을 내리쳤다. 사슬이 잘리며 속박이 풀렸다. 자유의 몸이 된 것이다.
“사부님 어서 내려갑시다.”
벽해결이 북악신군을 끌었다. 오랜 세월 묶여 있었던 북악신군은 사실상 제대로 걷지 못했다.
벽해결이 등을 내밀었다.
“사부님, 얼른 업히세요. 제가 모시고 가겠습니다.”
제자의 등을 한참 바라보던 북악신군이 갑자기 무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소협, 내 소원을 들어주어서 정말 고맙네.”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얼른 가시지요.”
“소협, 잠시만 나가 있겠나? 내 긴히 제자에게 할 말이 있어서라네.”
무흔은 두 사람을 위해 동굴 밖으로 자리를 피해주었다.
벽해결과 단둘이 남게 되자 북악신군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해결아, 나는 이곳을 벗어나지 않겠다.”
“무슨 말씀이세요? 낮이 되면 저들이 또 사부님을 협박할 겁니다.”
“알고 있다. 저들은 나를 이용해서 이 지역의 문파를 결집시키고 마교를 도우려 하고 있다.”
“그렇다면 빨리…….”
다급한 표정을 짓는 벽해결을 보며 북악신군은 고개를 저었다.
“난 그동안 어떻게 하면 신화문을 다시 되돌릴 것인가만 고민했다. 신화문이 예전처럼 다시 무림맹의 일원으로 정파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기를 바랐다. 하지만…… 이제는 너무 늦었다.”
벽해결은 사부의 표정에서 심상치 않은 결단을 읽었다. 그는 아무 말도 못 하고 사부의 말을 듣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사문의 죄인이다. 아들을 잘못 두었고 차기 문주를 잘못 두었다. 지금 신화문은 협의와 정의를 저버리는 패악을 저지르고 있다. 나는 죽음으로도 절대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었다…….”
북악신군의 목소리가 떨렸다. 참담한 감정이 목소리에서 절절히 묻어났다.
벽해결은 사부가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한다는 것을 직감했다.
“안됩니다. 사부님.”
“사마외도의 편에 서는 문파는 차라리 없어지는 것이 이 세상을 위해 더 낫다. 난 마지막으로 너를 본 것만으로도 여한이 없다.”
“사부님께서는 아직 할 일이 많으십니다.”
“이미 무공이 폐지된 내가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느냐. 앞으로의 세상은 너희들의 세상인 것을. 너도 지금부터는 신화문에 매달리지 말고 네 갈 길을 가기 바란다. 복수에 연연하지 말고.”
“으흑, 그럴 수 없습니다.”
벽해결은 사부의 뜻을 깨닫고 목놓아 통곡했다.
북악신군은 자신에게 매달려 흐느끼는 벽해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한동안 오열이 계속됐다.
벽해결이 눈물을 훔치고 다시 머리를 들었을 때 북악신군이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해결아, 신화문에는 미련을 버려라. 이미 되돌릴 수 없으니. 대신에 신화문 비전 절기를 너에게 남겨주마. 어디에 있는지 이미 들었겠지? 그 무공으로 너의 앞길을 빛내기를 바란다.”
“으흐흐흑. 사부님 반드시 사셔야 합니다.”
“나는…… 내 아들이 나를 죽이는 패륜을 저지르게 하고 싶지 않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북악신군은 아들을 염려하고 있었다.
아들이 아닌 다른 제자를 차기 문주로 내세운 아버지는, 앙심을 품고 아버지를 동굴에 가두고 사문을 망친 그 못난 아들을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하는 것이다.
“그래도 목숨만은 절대…….”
“괜찮아, 나는 살 만큼 살았느니라.”
북악신군이 조심스럽게 품에 안긴 제자를 떼어놓았다.
멍한 표정으로 눈물을 흘리는 벽해결을 내버려 두고 북악신군이 걸음을 내디뎠다. 그의 몸이 불안하게 휘청거렸다.
쓰러진 시시 앞까지 간신히 걸어간 북악신군은 시시의 몸에 박힌 벽해결의 검을 빼 들었다.
“사부님! 안돼요!”
허나 북악신군은 목놓아 소리치는 벽해결을 무시하고 비장한 표정으로 검을 들었다.
잠시 인생을 회고하듯 검을 바라보던 북악신군이 눈을 감고 검으로 힘껏 자신의 가슴을 찔렀다.
붉은 피가 뿜어져 나와 옷자락을 적셨다.
천천히 북악신군의 몸이 아래로 무너졌다.
“사부님!”
벽해결이 북악신군을 끌어안고 흐느꼈다. 두 사람의 몸이 피범벅이 됐다. 마치 저승까지 배웅하려는 듯 시간이 흘러도 벽해결은 사부를 품에서 놓지 않았다. 적막한 동굴에는 흐느낌만이 자욱하게 깔렸다.
***
무흔은 동굴 입구에 주저앉아 눈을 감고 있었다.
내부에서 들려오는 소리만으로도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사문을 그릇된 길로 가게 한 죄인으로서, 그리고 아들을 잘 못 키운 아비로서 홀로 그 모든 죄를 짊어지고 떠나는 북악신군의 마지막에 절로 가슴이 착잡했다.
“후……, 어쩔 수 없는 건가.”
그는 중간에 동굴 안으로 들어가려는 본능을 억누르느라 무척 고생했다. 북악신군을 살려야 한다는 생각과 사문의 일에 끼어들 수 없다는 생각이 서로 충돌을 일으켰다.
이제 내부에서 간간이 들려오는 울음소리가 모든 것이 끝났음을 의미했다.
그의 마음 역시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앞으로 신화문은 어떻게 될까. 마음 같아서는 당장 내려가서 신화문주이자 북악신군의 아들인 주왕호를 죽여버리고 싶지만……. 그것은 북악신군이 원하던 그림이 아닐 것이다.
“으음, 하지만…….”
그는 주먹을 꾹 움켜쥐었다.
무흔은 죽립을 제대로 고쳐 쓰고 묵천신검을 꽉 잡았다.
만변귀공을 일으키자 그의 몸과 얼굴이 변했다. 키가 쭉 늘어나고 몸은 호리호리해졌으며 얼굴은 중년인으로 바뀌었다.
바로 무극서생의 모습이다.
“지금 이곳에 마교의 혈우마도가 와 있다고 했지?”
이런 사태의 원인을 제공한 마교만은 단죄할 생각이었다.
특히 마교의 고수를 살해하는 것은 백단영의 안전과도 직결되는 문제이니까. 혈우마도가 마교에서 차지하는 서열은 모르겠으나 지리라는 생각은 애초에 없었다.
무흔은 계곡 아래로 비조처럼 날아갔다.
깊은 밤이 지나간 새벽녘이라 신화문 경내는 고요했다.
무흔은 커다란 전각 지붕에 매달려 내부를 살폈다.
신화문 사람인지 아니면 외부에서 출정식에 참여하고자 온 사람인지 알 수 없으나 여러 사람이 나란히 누워 잠을 자고 있었다.
“이런 식이면 찾기가 쉽지 않겠어.”
무흔은 고개를 흔들며 방법을 구했다. 역시 가장 좋은 방법은 신화문에 물어보는 것이다.
예전에 왔었던 관계로 손님들이 머무는 전각과 문도가 머무는 전각을 대충 구별할 수 있었다. 특히 신화문의 중심인 문주가 머무는 전각에 가까운 곳이라면 신화문 사람일 수밖에 없다.
무흔이 전각 주변을 어슬렁거리면서 적당한 먹잇감을 찾을 때였다.
갑자기 전각 문이 삐걱 열리며 20대 여인이 밖으로 나왔다. 기지개를 켜면서 주방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자니 일하는 아낙네가 분명했다.
무흔은 여인이 주방으로 들어가는 순간 몸을 확 낚아챘다. 비명을 지르려는 여인의 입을 막고 윽박질렀다.
“조용히 하라. 조용하면 목숨은 무사할 것이다.”
무흔의 기세에 겁이 질린 여인이 격하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무흔의 나지막한 질문이 이어졌다.
“혈우마도는 어디 있느냐?”
여인이 고개를 갸웃했다. 어째 잘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시시의 이야기대로라면 이곳에 와 있는 것이 확실했다. 무흔은 다시 질문했다.
“외부인으로 거대한 도를 사용하는 인물을 봤나?”
도를 사용하는 자가 한둘이 아니겠지만 이렇게밖에 물을 수 없었다. 무흔이 한 차례 더 멱살을 부여잡자 겁에 질려 벌벌 떨던 여인이 가까스로 대답했다.
“자, 잘은 모르는데 저쪽 전각에 문주님이 극진히 대접하는 인물이 도를 쓰고 있어요.”
무흔은 여인이 가리킨 뒤쪽의 전각을 슬쩍 살피고는 가볍게 수혈을 찍었다. 여인이 풀썩 쓰러지며 잠에 빠졌다.
무흔은 해당 전각으로 접근해서 창을 들여다보았다.
다른 곳과 달리 이 전각에는 오직 한 사람만 자고 있었다.
적색 마의를 입은 거한이었다. 몸집이 집채만 한 것이 그가 지금까지 보았던 인물 가운데 가장 컸다. 특이한 점도 있었다. 그의 옆에는 커다란 이빨이 날을 채운 무시무시한 거치도가 놓여 있었다.
“저놈이 맞군.”
무흔이 상대를 확인하는 순간 놀랍게도 거한이 눈을 번쩍 떴다.
다음 순간 순식간에 거치도를 든 거한이 창살을 뚫고 밖으로 튀어나왔다. 저렇게 거대한 몸에서 어떻게 저런 순발력이 발휘되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와장창-
창이 깨지는 요란한 소음과 함께 거한이 무흔의 앞에 내려섰다.
“혈우마도?”
무흔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상대의 정체를 확인했다.
거한이 가소롭다는 비웃음을 머금으며 무흔을 향해 소리쳤다.
“흐흐, 그렇다. 네놈은 누구냐?”
혈우마도는 이미 무흔을 적으로 간주한 모양이었다. 그는 거치도를 무혼에게 겨누고 기를 발산하여 압박을 시작했다.
뭉클-
마기가 녀석의 몸에서 수증기처럼 피어올랐다.
무흔은 혈우마도의 기세로 대략적인 무공 수준을 추측했다.
최근에 만났던 잔혼객 수준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훨씬 떨어졌다. 오히려 독두이마와 비슷한 느낌이랄까.
“큭큭, 나쁘지 않군.”
무흔도 검을 뺐다. 검에서 느껴지는 기운이 나쁘지 않다.
싸우자고 검을 드는 무흔의 모습이 의외인 듯 혈우마도가 빈정거렸다.
“감히 내가 누구인지 알고도 덤비겠다는 거냐? 죽을 무덤을 파는구나.”
“서열 삼십 위에도 끼지 못하는 녀석이 말이 많군.”
무흔의 빈정거림에 혈우마도가 화들짝 놀랐다.
“네, 네놈이 어떻게?”
무흔은 상대가 놀랄 틈을 주지 않았다. 선공이 유리하다. 벼락처럼 혈우마도를 향해 일검을 그었다.
콰앙-
혈우마도가 엉겁결에 피한 자리에 무흔의 검격이 찍혔다. 검을 맞은 전각이 진동을 일으키며 일부분이 와르르 무너졌다.
사실 지금 무흔의 실력이라면 굳이 기습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이곳이 적지이기 때문에 상대를 빨리 처리할수록 유리하다는 판단을 내린 그는 두 번째 공격을 바로 이었다.
무흔의 손에서 잔백수라십이검이 펼쳐지고 혈우마도의 거치도가 공세를 막으려고 허공을 갈랐다.
쩡- 쩡-
무흔은 손으로 묵직하게 전해지는 충격파로 상대의 능력을 가늠했다. 역시나 힘이 장사인 특이한 놈이었다.
부웅-
반격을 가하는 거치도의 위력은 대단했다. 커다란 도와 거대한 체구답지 않게 쾌속무비했다. 한방 걸리면 뼈도 추리기 힘들 빠르면서도 강력한 일격이었다.
스스슥-
그때 추혼천상보를 펼친 무흔의 신형이 유령처럼 사라졌다. 동시에 거치도가 전각을 때려 부수면서 건물을 뒤흔들었다.
“쥐새끼 같은 자식이!”
분노를 표하는 혈우마도의 뒤쪽에 다시 나타난 무흔은 묵천신검으로 상대를 공격했다. 무상벽라검법을 연달아 펼치며 혈우마도의 등을 난자하려는 의도였다.
쩌정-
혈우마도의 도는 의외로 빨랐다. 눈 깜짝할 새 묵천신검을 막으면서 위험에서 벗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