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림 속의 엑스트라 4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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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294회 작성일소설 읽기 : 무림 속의 엑스트라 46화
46화. 내공심법 (2)
무흔의 확신에도 백단영은 망설임을 떨칠 수 없었다. 그가 그녀에게 나쁜 것을 권할 리는 없지만 그 이유를 묻고 싶었다.
“왜 그렇지?”
“전진선천심공은 익히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릴 거에요. 반면 무애잡아함경은 훨씬 빠를 겁니다. 물론 익히는 사람의 재질에 따라 다르지만요.”
무흔은 백단영 정도의 자질이라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거라 확신했다.
“흐음.”
백단영이 망설이는 이유가 짐작됐다.
그녀는 전진이란 이름에 마음이 쏠리는 것이다. 어디에서 흘러나온 것인지 알 수 없는 무공보다 그래도 한번은 들어본 전진파라는 이름이 붙은 무공이 더 낫지 않을까 하는 고민이다. 유명 문파의 명성에 치이며 생활해온 그녀이기에 당연한 반응이긴 했다. 마지막 선택의 순간.
“난 이걸로 할래.”
백단영은 무흔의 바람을 저버리지 않았다. 이름값에서 벗어나는 결단을 보여줬다.
무흔은 빙그레 미소를 보내고는 다른 책을 하나 더 집어 들었다.
“이건 검법서예요.”
그는 백변연환검법이라 적힌 비급을 그녀에게 건넸다. 책을 뒤적거리던 그녀가 표정을 굳히며 물었다.
“이건 뭐야?”
“저도 정확히는 몰라요. 검신이 얇아 휘는 연검을 이용해서 빠르기를 추구하는 검법 같아요. 이 층에 올라갈 충분한 가치가 있는 비급서죠. 어느 문파의 것인지는 모르지만요.”
백변연환검법은 무흔도 읽어본 책이었다.
당연히 그의 팔목에는 백변연환검법 5/12란 표시가 새겨졌다. 위치도 잔백수라십이검 바로 다음이니 절정 수준에 달하는 무공이다. 다만 그는 이 검법을 사용하기가 쉽지 않았다. 왜냐하면, 묵천신검이 둔탁하고 무게 있는 검이라 이 검법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아가씨에게 잘 맞을 겁니다.”
검법의 유형으로 보아 이 검법을 창시한 사람은 여자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던 차였다.
심법과 검법 비급을 하나씩 손에 든 백단영이 비급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여러모로 생각이 복잡할 터였다. 그토록 고대하던 비급을, 이곳 운경각에서 찾으려고 애쓰던 비급을 무흔이 쉽게 찾아주었으니.
물론 이 비급에 절정 무공이 실렸다고 확신할 수 없으나 온종일 침울했던 그녀의 마음을 풀어주기에 충분했다.
무흔은 씨익 웃으며 말했다.
“가져가셔도 됩니다. 아직 등록되지 않은 책이라 아무도 몰라요.”
이 말의 의미는 상당했다. 그녀가 익히면 이 무공은 그녀의 독문 무공이 될 수도 있다는 의미니까. 또는 백가상단의 비전 무공으로 삼아도 상관없었다.
그녀에게 좋은 무공을 전하기 위해 백가상단에서 무림 명숙에게 많은 돈을 퍼부었던 과거를 생각하면 이 두 비급이 가지는 의미는 매우 컸다.
“고마워.”
떨리는 목소리로 백단영이 말했다.
무흔은 절로 마음이 가벼워졌다. 어째 오늘 백단영에게 점수를 많이 딴 것 같다. 으슥한 밤이니 어쩌면 좋은 분위기를 연출할 수 있을지도? 주인 아가씨와 머슴. 삼류 영화 제목으로 나쁘지 않다.
살짝 몸이 달아오른 무흔은 이리저리 펼쳐 두었던 책을 정리했다.
“밤도 늦었는데 그만 가죠.”
그를 도와주려고 몸을 숙이던 백단영은 바닥에서 이상한 책을 발견했다.
“어? 이건 뭐야?”
무심코 책을 든 그녀가 책장을 넘겼다.
남녀가 뒤엉킨 적나라한 그림이 눈에 확 들어왔다. 낮에 진풍이 가져가려다가 떨어트린 춘화도였다.
“허억!”
무흔은 깜짝 놀라 그녀의 손에서 책을 뺏으려 했다. 하지만 백단영은 그의 손을 피해 책을 쭉 훑었다. 점점 그녀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녀의 시선이 바닥으로 향했다. 춘화도가 한둘이 아니었다. 백단영이 안색이 붉어졌다가 파래졌다가 하얗게 되기를 반복했다.
‘으으, 망했어. 진풍 이 자식 때문에.’
곤란해진 무흔은 그녀의 눈치만 살폈다.
백단영이 싸늘한 표정으로 그에게 책을 돌려줬다.
“무흔도 이런 취향이 있었나 보네.”
“아, 아닙니다. 그거 진풍이…….”
무흔의 변명은 바로 잘렸다.
“남자는 다 그런가? 뭐…… 어차피 내가 신경 쓸 일은 아니니까. 하지만…….”
백단영이 그녀를 싸늘하게 쏘아보았다. 무흔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꼼짝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나를 놓고 이런 상상을 하진 말아 줬으면 좋겠어.”
냉랭한 눈빛을 날리고는 백단영이 성큼성큼 밖으로 나가버렸다.
무흔은 그 자리에서 주저앉았다.
“으으, 분위기 좋았는데…… 지, 진풍 그 자식 때문에…….”
***
다음 날에도 매화곡의 다섯 제자는 어김없이 그를 찾아왔다.
당연히 진풍도 있긴 했다. 다섯 제자의 꽁무니를 따라다니고 있었다. 하지만 다섯 여인은 진풍과 말도 섞지 않았다.
그 광경을 보며 무흔은 한숨을 내쉬었다.
앞으로 백단영과 자신의 사이가 저렇게 될 것 같아 마음이 무거웠다.
어제는 용봉대 위주로 견학을 했고 오늘은 다른 부대 위주로 견학을 하게 됐다. 청룡대와 백호대가 사용하는 연무장 쪽으로 이동했다. 청룡대와 백호대는 무림맹이 자랑하는 핵심 산하 부대다.
이들 중에 청룡대가 이용하는 연무장은 부대원이 외부로 파견을 나가서 텅 비어 있었고, 백호대는 절반이 파견을 나간 상태라 그나마 인적이 있었다.
이처럼 무림맹 내부 구경은 정파인이라면 어렵지 않게 허용되었다. 딱히 비밀은 아니었기에 무흔은 아는 수준까지 간략하게 설명했다.
“이 두 부대의 위명은 중원에서 대단하죠.”
그는 설명을 마치고 옆 동네로 걸음을 옮겼다. 그의 옆으로 은옥상이 붙었다.
“그런데 당신의 이름이 무흔이라 했던가요?”
“네, 그렇습니다.”
지금까지 그에게 주로 말을 건 사람은 산산이었다. 그의 신분이 일반 무인과 다르다 보니 격을 맞추어 은옥상보다는 산산이 상대했었다. 게다가 개인적인 질문도 처음이었다.
무흔은 긴장되는 마음을 억눌렀다.
“어제 말에요.”
은옥상이 입술을 뗐다.
무흔은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눈치챘다.
어제 비무 중에 그가 백단영을 도운 행동을 물어보려는 것이다. 그녀 같은 고수라면 절대 눈치채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무흔은 내심 변명거리를 떠올리며 담담하게 대답했다.
“네, 말씀하세요.”
“당신의 정체는 뭐죠?”
“어제 말씀드렸습니다만. 이곳 운경각의 서고 관리인이죠.”
“백단영과는?”
“어제 진풍이 말씀드렸을 겁니다. 백단영의 서동이라고요.”
한마디로 머슴이란 뜻이었다.
은옥상이 안면을 찌푸렸다.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고개를 갸웃거리기를 한참, 마침내 다시 질문을 던졌다.
“서동? 실력으로 봤을 때 서동이 말이 되나?”
은옥상의 목소리가 한층 싸늘해졌다.
무흔은 간이 덜컥 내려앉았다. 마교 소교주인 은옥상에게 벌써 꼬투리가 잡히면 곤란하다. 앞으로 그가 마교와 부딪힐 일이 한둘이 아니니.
“물론 이곳으로 올 때 호위무사란 직책을 달고 왔지만요.”
무흔이 한 걸음 더 물러섰다. 서동이나 호위무사나 어차피 그게 그거이긴 한데.
은옥상의 눈치를 슬쩍 보고 있을 때 진풍이 끼어들었다.
“푸하하, 호위무사? 산적한테도 겁먹는 놈이 무슨 호위무사?”
방해를 받은 은옥상이 안면을 찌푸리며 진풍을 노려봤다. 그러자 뒤따르던 산산이 진풍의 옆구리를 쿡 쑤셨다.
“어이, 변태! 입 다물어라.”
진풍은 찍소리도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은옥상이 무흔을 노려보며 한마디 했다.
“백단영의 서동이라…… 오늘은 믿어주죠. 허나, 다음에는 더 그럴싸한 대답을 생각해 두기 바라요.”
말을 마친 은옥상이 성큼 걸어 앞서갔다. 그 뒤를 산산을 비롯한 여인들이 우르르 몰려갔다.
뒤에 남은 무흔을 향해 진풍이 낄낄대며 웃었다.
“나만 버림받은 게 아니었어. 이 자식도 똑같군.”
***
연공실 건물 외부 한쪽 구석에 장후성을 비롯한 몇몇 인원이 모였다.
용봉대원 중에 가장 인기가 있는 장후성과 평소 그의 주변에 모이던 친구들이라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오늘 장후성의 안색은 그리 밝지 않았다.
“오늘도 연공실에 있어?”
“내공 수련 중인가 봐.”
장후성의 질문에 남궁이화가 대답했다.
지금 평소와 다른 점이 있다면 바로 백단영이 사라지고 없다는 점이었다.
매화곡 제자들의 방문 이후 백단영은 과거와 달리 장후성 무리를 멀리했다.
밥을 먹을 때는 함께 다녔지만 나머지 시간에는 그녀 혼자 움직였다. 특히 최근 들어 그녀는 연공실에 틀어박힌 시간이 많았다.
연공 수련에 다른 사람이 참견할 수 없기에 모두 받아들였지만 장후성과 남궁이화는 백단영의 심정을 일부 추측할 수 있었다.
“그날 일 때문에 상심이 컸나 보네.”
“이름 없는 매화곡 제자에게 그렇게 수모를 당했으니.”
두 사람이 착잡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남궁이화가 주먹을 불끈 쥐며 분노를 표출했다.
“그래도 그 매화곡 장문 제자라던 여자, 너무 하더라. 대놓고 잘난 척에…… 정말 얼굴을 그어버릴 생각도 있었나 봐.”
“은옥상이라 했었지? 그래도 거기까진…….”
“그날 밥 먹을 때 개소리하던 것을 생각하면…….”
남궁이화는 백단영의 복수를 갚지 못한 것을 분개했다. 한동안 씩씩대던 그녀는 분을 억누르고 다시 시선을 연공실 쪽으로 돌렸다.
“그날 이후 단영이가 연공실에 처박혀있어.”
장후성의 시선도 따라서 연공실로 옮겨졌다. 옆에 있던 구진광에게 비웃음이 떠오른 것은 너무 당연한가.
“무슨 무공을 익히는 거지? 상단에서 배워온 거라고 해봐야 별것 없을 테고. 괜히 힘만 들이는 것 아닌지 모르겠네.”
반은 비웃음을, 반은 염려를 표하는 구진광의 말을 아무도 반박하지 못했다.
그들 모두 이곳의 현실을 잘 알고 있었다. 용봉대는 무공을 가르쳐 주는 곳이 아니라서 백단영처럼 본인의 가전 무공이 없을 때는 아무런 도움을 얻지 못한다는 사실을.
굳은 표정을 짓고 있는 동료들 사이에서 구진광이 피식 웃었다.
“그래도 이곳에 있는 게 꼭 손해만은 아니지. 인맥이 엄청 넓어지니까. 이런 곳 아니면 상단의 딸이 우리 같은 사람과 어떻게 말을 섞겠어?”
남궁이화가 주먹을 꾹 쥐었다가 한숨을 내쉬면서 물러났다.
장후성이 화제를 돌렸다.
“이제 곧 휴가 기간이잖아? 무려 한 달인데 어떻게 할래? 모두 집에 갈 건가?”
용봉대에서는 가장 더운 여름철에 한 달가량의 휴가를 주었다. 일부는 이 기간에 고향을 방문했고 일부는 개인 수련에 매진했다.
“휴가 끝나면 바로 비무 대회가 열리는데 열심히 수련해야지, 가긴 어딜 가냐.”
남궁이화가 뚱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비무 대회는 용봉대원의 공식적인 서열을 매기는 자리다. 이미 서로 간에 어느 정도 수준을 알고 있다고 해도 이를 공식적으로 인정받는 것은 다르다. 특히 1위를 다투는 장후성과 남궁이화 등은 비무 대회에 매진할 생각이었다.
“그래도 자유롭게 보낼 수 있는 시간인데 이곳에 처박혀있기엔 억울하잖아?”
구진광의 하소연에 모두의 표정에 갈등이 일었다. 놀기도 놀지 않기도 어색했다.
그때 모용예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난 오빠랑 화산에 놀러 갈 건데?”
“응? 내가 언제 화산에 간다고 했어?”
“예전에 그러겠다고 약속했잖아?”
갑자기 장후성과 모용예가 티격태격 말다툼을 벌였다.
이를 보던 남궁이화가 손뼉을 딱 쳤다.
“좋은 생각이 났어. 모두 화산파를 방문하자. 가는 길 중간에 백가상단에 들러 상단 구경도 하고. 어떠냐?”
“백가상단에?”
“상단 구경도 재미있지 않겠냐.”
다시 모두의 시선이 백단영이 연공 중인 연공실로 옮겨졌다. 그들 모두는 나쁘지 않은 휴가 계획이라 생각했다. 물론 백단영이 찬성하면 말이다.
한편 이때 백단영은 무흔이 전해준 무애잡아함경을 연공하고 있었다. 이미 잡다한 무공을 익혔던 그녀인지라 생각보다 구결 이해는 어렵지 않았다. 다만 모든 심법이 그러하듯 처음 입문단계의 벽이 꽤 두꺼웠다. 게다가 불가에 기반을 둔 심법이라 그녀가 지금까지 익혔던 심법과 판이했다.
기존에 익혔던 심법이 웬만큼만 되었어도 그녀는 포기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심법은 너무 엉망이었고 깊이가 얕았다. 그녀는 눈물을 머금고 무애잡아함경에 집중했다.
며칠 동안 물불을 가리지 않고 집중한 끝에 그녀는 초기 단계에 진입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며칠이 더 지나 불과 2성 가량의 성취를 이루었을 때 이미 그녀는 기존의 심법과는 판이한 효과를 맛보기 시작했다.
어릴 때부터 돈으로 발라서 먹었던 각종 영약의 기운, 즉 그녀의 체내에 흡수되지 못하고 남아 있던 기운이 무애잡아함경의 영향으로 체내에 녹아들기 시작한 것이다. 자연스럽게 그녀의 내공이 높아졌다.
그녀는 뛸 듯이 기뻤다.
이제부터 수련에 정진하면 다른 사람을 따라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녀는 무흔이 고마웠다. 하지만 이 비급을 얻었던 그 날, 그의 발밑에 떨어져 있었던 춘화도를 떠올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