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림 속의 엑스트라 4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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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322회 작성일소설 읽기 : 무림 속의 엑스트라 41화
41화. 매화곡의 방문 (1)
만박노사가 그를 손님맞이용 탁자로 안내했다.
그에 무흔이 자리에 앉자 만박노사가 손수 찻잔을 가져왔다.
“차를 들 텐가?”
“저는 괜찮습니다만.”
“이거 마시면 머리가 맑아진다네.”
“아, 네. 그렇다면 맛만 보겠습니다.”
그의 즉각적인 태도 변화에 만박노사가 웃으며 차를 따라줬다. 흔히 보는 따뜻한 차가 아니고 식은 차인 모양이다. 김이 전혀 나지 않았다.
“마셔보게.”
만박노사가 자신의 잔에도 차를 따른 후 천천히 마셨다.
무흔은 조심스럽게 맛을 음미했다.
그리고 한 모금 넘어가는 순간 그는 깜짝 놀랐다. 차 맛이 서늘했다. 더 차가웠다면 훨씬 맛이 있었을 것 같긴 한데 이곳에서 거기까지 바랄 수는 없는 노릇. 아무튼 실온보다 더 차갑게 느껴지는 차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놀라웠다.
차를 마시면서 만박노사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운경각에서 서적 분류하는 일을 해보겠나?”
처음 듣는 내용이라 무흔은 살짝 당황했다. 서고 관리인을 시킬 줄 알았더니 완전히 다른 일이었다.
“그게 무슨 일입니까? 제가 할 수 있을까요?”
“제갈수의 의견에 따르면 자네가 무공 비급을 꽤 많이 봤다고 하던데. 맞나?”
“그렇습니다만.”
“운경각 지하에 가본 적 있나?”
응? 운경각에 지하층도 있었던가? 그가 가본 곳은 일 층과 이 층이 전부였다. 삼 층은 허락이 떨어지지 않아 못 가봤고.
무흔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보이자 만박노사가 설명했다.
“아마 모를 거야. 운경각에 있는 서적이 외부 문파에서 기증받거나 문 닫은 문파의 유물이란 사실은 알고 있지?”
“예, 그렇게 들었습니다.”
“그렇게 들어온 서적이 제일 먼저 가는 곳이 바로 지하라네.”
외부에서 들어온 책은 분류가 되기 전에 먼저 지하실에 쌓아둔다. 문제는 그 양이 상당하다는 점이다. 그 책 가운데 절반은 사실상 쓸모가 없어서 버릴 것들이고 나머지 일반 서적은 일 층에 보관된다. 그 가운데 무공 비급은 따로 분류해서 이류나 삼류는 일 층, 일류는 이 층, 그 이상의 가치를 지닌 것은 삼 층 서고에 보관하는 것이다.
실제로 쓸만한 무공 비급이 발견되는 경우란 매우 드물다. 그래서 이 분류작업을 대부분 싫어한다. 햇빛이 비치지 않는 지하에서 온종일 책을 뒤적거리는 것은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할 그런 작업인 셈이다.
무재가 뛰어난 기재라면 무공연마에 집중하지 절대 쓸모없는 서적 분류를 하지 않는다. 자연스럽게 용봉대에는 이 일을 맡을 자가 없다. 그렇다면 일반 무사는? 사정이 사실상 다르지 않다.
“그 분류작업에 최적인 사람이 바로 자네라고 들었네.”
만박노사의 말에 무흔은 살짝 안색을 찌푸렸다.
어째 재미없는 일에 엮이는 것 같았다. 그래도 그는 궁극적으로 노리는 바가 있다.
“혹시 그 일을 하면 저도 삼 층 서고에 올라가 볼 수 있습니까?”
“삼 층? 그건 안되네.”
단칼에 돌아온 반대에 무흔은 침울해졌다.
“그래도 삼 층에 들어갈 책 수준을 알아야 분류작업을 할 것 아닙니까?”
그나마 사리에 맞았던지 만박노사가 미소를 지었다.
“삼 층에 들어가고 싶은가 보군?”
무흔은 찔끔 몸을 움츠렸다.
이 늙은이가 무척 눈치가 빠르다. 혹시나 허용해줄까 하는 마음에 기대하고 있자니 단번에 실망스러운 답이 돌아왔다.
“삼 층은 들어갈 수 없네. 그곳은 특별한 곳이거든.”
“에이, 그래도 책을 분류하다 보면 삼 층으로 보내야 할 것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 것은 나에게 가져오면 되네.”
무흔은 내심 실망했다.
눈앞의 만박노사는 인상도 좋고 인자한 노인처럼 보이는데 어째 규정을 빡빡하게 적용했다. 조금도 밀리지 않을 느낌이다.
붙어서 사정해봐야 성과가 없으리란 느낌이 팍 왔다.
굳이 귀찮은 일을 맡을 이유가 있다면 오로지 삼 층 출입이었는데, 이것이 불가능하다면 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찜찜한 표정으로 머뭇거리고 있자니 만박노사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모두가 말로는 귀찮은 작업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그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없어서 그런 거야. 해보면 꽤 재미있을 걸세.”
은근한 권유가 들어왔다.
무흔은 어쩔 수 없이 수락했다.
“그러면 한번 해보겠습니다. 다만 언제든 제가 하기 싫으면 그만둘 겁니다.”
“그렇게 하게. 과연 그만둘 생각이 날지 모르겠다만…….”
만박노사가 뜻 모를 미소를 지었다.
이 노인이 무림맹 책사다 보니 한마디 한마디가 가볍지 않다. 따지고 보면 무림맹 핵심인사와 줄을 댔다는 것만으로도 환영할 일이다.
무흔의 내심을 알아챈 듯 만박노사가 말했다.
“오늘부터 운경각에서 근무하도록 하게.”
“그럼 예속 부대는 이제 안 하는 겁니까?”
“하고 싶으면 해도 좋아.”
어쨌든 자유라는 사실이 마음에 들었다.
***
운경각에는 지하 서고가 있었다.
예전에는 관심이 없어서 아예 아래로 내려갈 생각을 하지 않았는데, 지하를 찾아보니 일 층 서고 구석진 곳에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이 보였다.
벌써 이곳에 연락이 간 것인지 서고 관리인은 그가 아래로 내려가는 것을 말리지 않았다.
무흔은 호기심을 가득 품고 계단을 내려갔다. 지하이다 보니 불이 필요했다. 벽에 붙은 관솔에 불을 붙였다.
“흐음, 귀신이 나올까 무섭네.”
생각해보니 좋은 방법은 아니다. 비록 운경각 전체는 석조건물이라 화재로 인한 소실을 막았다고 하지만 내부에는 불에 약한 물건이 대부분이니까.
하지만 별 수는 없기에 관솔불을 벗 삼아 내부를 둘러봤다. 지하 특유의 습한 느낌이 몰려왔다. 곰팡이도 있으려나? 별로 기분이 좋은 공간은 아니었다.
“역시 담당이 없는 이유가 있었어.”
모두가 기피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흐아, 여기 쓰레기장이냐?”
넓은 지하 창고에는 온갖 물건이 쌓여 있었다.
절반은 책이었고 나머지 절반은 각종 무기를 비롯한 장신구, 노리개 등 별것이 다 있었다. 문파가 몰락하고 그곳에 버려진 쓸만한 것을 몽땅 챙겨오다 보니 이런 상황이 아닐까 짐작됐다.
일보다 훨씬 급한 것은 일할 환경 마련이다.
환경이 이 모양이니 아무도 안 하려 하지.
습기와 곰팡이를 제거하기 위해서는 일단 관솔불을 켜서 온도를 높이고, 숯과 소금으로 습기를 제거해야 한다. 이럴 때 현대의 과학지식이 좋긴 하다. 무흔은 서고 관리인의 도움을 받아 작업 환경을 바꿨다.
준비가 끝난 후 그는 산더미처럼 쌓인 책을 먼저 뒤졌다.
첫 번째 손에 잡힌 책. 딱 보니 삼재검법의 책이다.
휘리릭-
옆으로 팍 던지고. 그 옆의 책을 봤다.
휘리릭-
또 던지고. 그 옆을 보니 이것도 이미 일 층에 널려 있는 삼류 무공 비급이다.
무흔의 안색이 살짝 일그러졌다.
“흐음, 역시 시간 낭비였나?”
계속 책을 뒤졌다.
시중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사서삼경도 있었고 전래야담집이나 심지어 춘화도까지 곳곳에서 발견됐다.
이곳에서 쓸만한 책을 골라서 위층에 보관하는 일이 바로 그가 담당한 일이건만 어째 모두 쓰레기장으로 가야 할 것 같다. 그는 서옹과 만박노사를 떠올렸다. 그들이 특별한 의미를 두고 이 일을 시키지는 않았겠지만 그렇다고 설마 고생시키려고 여기에 배치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일단 해보고.”
그는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책을 분류하기 시작했다.
***
해가 떨어지고 하늘에 노을이 자욱하게 깔리는 산야.
커다란 노송 한그루가 깊은 산 계곡의 거대한 바위틈 사이로 아름드리 자태를 빛냈다. 보랏빛으로 물들어 가는 하늘을 바라보는 한 청년이 노송 가지 위에 앉아 있었다.
청년이 앉은 나뭇가지는 전혀 하중이 걸리지 않은 듯 조금도 휘지 않았다. 산들바람이 불자 가볍게 흔들리는 가지를 보면 청년은 바람보다 가벼운 듯했다.
청년이 입은 옷은 화려한 흑의 무복. 검은색은 특이한 것이어서 가장 일반적인 색상이기도 했지만 가장 존귀한 색이기도 했다. 청년을 감싼 흑의는 그의 기품을 한껏 올려주었다. 누가 보더라도 이 청년이 존귀한 집안의 자제이거나 아니면 일국의 왕야 급으로 보일 정도였다.
그보다 더 놀라운 것은 청년의 주위로 퍼져나가는 무형의 기운. 초강고수 만이 풍기는 기운이 그의 주변에 어려 있었다.
흑의 청년은 나무 아래를 내려다봤다.
노송 옆에서 위를 올려다보고 있는 노인이 보였다.
나이를 추측할 수 없을 정도로 늙은 사람이다. 저 노인은 청년이 어릴 때부터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곁을 돌봐주던 마심노야란 인물이다.
“그래서 실패한 것 같습니다.”
“실패했다라…….”
흑의 청년이 감정 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여차하면 전후 사정을 보다 명확하게 알아볼 수도 있습니다만…….”
마심노야가 그의 의견을 묻고 있었다. 물론 이런 일에서 청년의 결정은 항상 같았다.
“귀찮은데 그냥 내버려 두어라.”
“알겠습니다.”
마심노야가 꾸벅 절을 하고는 아래로 내려갔다.
다시 흑의 청년은 나뭇가지에 등을 기대고 멀리 하늘을 바라보았다.
청년의 이름은 사마극. 마교의 첫 번째 소교주라는 엄청난 신분을 지닌 자였다. 소문에 따르면 지닌 바의 무공은 이미 측량 불가. 모두가 차기 마교 교주로 생각하고 있는 그런 인물이었다.
사마극은 나뭇가지에서 솔잎을 한 움큼 뜯어낸 다음 입에 넣고 질근질근 씹기 시작했다.
최근 들어 그를 묘하게 자극하는 두 사건이 있었다. 바로 적황쌍마와 풍운쌍마의 죽음이다. 이들은 모두 마교의 절대 고수로서 그렇게 쉽게 죽을 인물이 절대 아니었다.
그들의 죽음에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그에게 전해질 물건이 사라졌고 모두 무림맹 용봉대와 어떤 식으로든 얽혀 있다는 점이다.
“그들이 기재가 맞긴 하지만……”
그는 팔곡산에서 만났던 용봉대의 정예를 떠올렸다.
그곳에는 소림과 무당, 화산을 비롯하여 오대세가의 자제들이 있었다. 무림맹에서 심혈을 기울여 양성한 인재라 하여 호기심에 직접 찾아가서 그 실력을 확인했었다.
화산의 장후성, 소림의 현공, 남궁세가의 남궁이화……. 그나마 기억에 남는 인물들이긴 하지만…….
“그래도 적황쌍마나 풍운쌍마를 대적할 정도는 아니었단 말이지.”
기습이거나 다수였다면 전혀 불가능할 수준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호락호락하게 당할 쌍마가 아니었다.
푸-
입속에서 짓이긴 솔잎을 허공으로 탁 뱉어낸 사마극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 예상보다 훨씬 뛰어나거나 다른 인물이 개입했다는 것이겠지.”
사마극은 나른한 표정을 지으며 가슴을 쭉 폈다. 그렇다고 호기심을 자극하진 않았다. 그런 수준으로는 그가 염려할 수준에 한참 떨어져 있으니까.
하지만 아깝긴 했다.
천년적화초와 신검이 사라져 버렸으니. 무엇보다 천년적화초와 함께 사라진 비급은 백 년 전 사대고수의 일인이었던 무아검객의 유품으로 짐작되고 있었다. 계획대로였다면 그는 무아검객의 절기를 잇고 그 무공에 가장 적합한 천년적화초로 내공을 다졌을 것이다. 그 모든 계획이 송두리째 날아가 버렸다.
실소를 머금던 그는 어느 순간 눈앞에 나타난 인영을 향해 소리를 버럭 질렀다.
“넌 또 무슨 일이냐!”
그의 바로 옆 나뭇가지에 언제 나타났는지 자의 궁장을 입은 한 여인이 앉아 있었다.
자의 여인이 앉은 나뭇가지 역시 조금도 휘지 않고 바람에 자연스럽게 흔들거렸다. 그 자세만으로도 극 상승무공을 익혔음을 대변했다.
“호호, 저야 항상 오라버니의 고민을 해결해주는 사람이잖아요.”
자의 여인은 마교에서 세 번째 소교주란 신분을 지닌 여인이다. 그녀의 이름은 은옥상. 지닌바 무공은 사마극에 못지않다고 알려졌다. 어려서부터 마교 교주의 은총을 받아 성격이 제멋대로였다.
갑갑한 것을 참지 못한 그녀는 이미 숱하게 중원 나들이를 자주 하였고 그때마다 크고 작은 문제를 일으켰다. 물론 중원에서는 그녀의 진정한 정체를 몰랐다. 중원에서 그녀는 구유일미라 불렸다. 별호에서 풍기는 심상은 음산하고 사악한 마녀 같은 존재였다.
은옥상을 확인한 사마극은 안면을 찌푸렸다.
“그래서 제가 한번 확인해볼까 하는데 어때요?”
“아서라. 생각보다 만만한 녀석들 아니다.”
물론 그가 은옥상의 안전을 걱정해서 하는 말은 아니었다. 괜히 소란을 피워 무림맹의 경계심만 키울까 염려해서다.
은옥상은 그의 내심을 알아챈 듯 방긋 웃었다.
“혹시 알아요? 멋진 남자라도 만날지.”
사마극의 입가에 조소가 묻었다.
과거에 은옥상이 중원에 출현한 멋진 기재라며 확인하러 갔던 때가 있었다.
대부분 실망해서 돌아왔고 그 가운데 절반은 그 기재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만큼 그녀는 자신의 감정에 따라 중구난방이었고 손속에 사정을 두지 않았다.
“알아서 해라.”
사마극이 귀찮은 듯 손을 저어 내쳤다.
“호호, 신검의 행방을 알아오면 되죠? 그 유력한 용의자는 무림맹의 장후성과 남궁이화.”
“그러든가.”
“이왕이면 장후성이 멋진 남자였으면 좋겠네요.”
그녀의 말에 사마극이 피식 웃었다. 장후성이 멋진 남자였나? 물론 남자가 보는 눈과 여자가 보는 눈이 다르다지만 그의 눈에는 장후성이 그렇게 보이진 않았다.
“그럼 다녀올게요.”
은옥상이 그를 향해 의미심장한 미소를 보냈다.
“정체를 들키지나 마라…….”
황급히 대꾸하던 사마극이 안면을 찌푸렸다. 어느새 눈앞의 나뭇가지에서 은옥상의 그림자가 사라지고 없었다.
그는 혀를 차며 시선을 하늘로 돌렸다.
“쯧쯧, 진짜 남자를 찾아 돌아다니는 건지, 아니면 다른 재미 때문인지…….”
어두워진 하늘에 별들이 하나둘 나타나고 있었다. 하늘을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도 별처럼 반짝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