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림 속의 엑스트라 2화
무료소설 무림 속의 엑스트라: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170회 작성일소설 읽기 : 무림 속의 엑스트라 2화
2화. 무림을 가다 (2)
“허억!”
검이 눈앞으로 뻗어오자 무흔은 몸이 굳어 꼼짝하기 어려웠다.
박무훈이 평생 살면서 지금처럼 칼 맞을 일이 있었을 리가 없다. 설사 영화에서 봤다고 해도 기껏 작은 나이프나 식칼이 전부다. 지금처럼 대도가 눈앞을 오가는 현실은 차원이 다른 문제다.
그 순간 놀라운 현상이 일어났다.
손에 쥐고 있던 싸구려 장검이 반사적으로 앞을 가로막았다.
쨍-
검과 반월도가 부딪히며 불꽃이 튀었다. 도에 실린 상대의 묵직한 기세를 옆으로 흘려내며 무흔은 가까스로 위기에서 벗어났다.
아! 이게 되네. 흡사 몸이 기억하고 있다고 할까. 그의 몸은 본능적으로 삼재검법을 구현하고 있었다. 팔목에 적힌, 삼재검법을 5성까지 익혔다는 표식이 진짜였다.
얼떨결에 상대방 초식을 맞받아친 후 혼란스러워하고 있자니 그를 공격했던 산적 또한 어벙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녀석은 꽤 몸집이 좋아 힘 하나는 장사처럼 보였다. 그는 자신의 공격이 막힌 것에 불만이 많아 보였다.
“쥐새끼 같은 놈이 제법이구나!”
녀석이 다시 반월도를 잡고 휘둘러왔다.
무흔을 얕잡아 보는 기색이 역력했다.
앞선 공격에서 무흔은 정신이 없어 제대로 반응하지 못했으나 이제는 달랐다. 의식하자마자 몸이 저절로 움직이며 녀석을 향해 검을 맹렬하게 휘둘렀다. 어디에서 그런 용기가 생겼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째챙-
다시 검과 도가 서로 부딪히며 불꽃이 일었다. 검을 쥔 손으로 충격이 전해졌지만 처음보다 확실히 덜했다.
무엇보다 달라진 것은 상대의 검로가 보인다는 점이었다.
산적 녀석이 휘두르는 검초가 얼마나 엉터리이고 마구잡이인지 바로 보였다. 덕분에 도를 두려워하지 않게 됐다.
비록 삼재검법이었으나 산적을 처리하기에 충분했다. 가로 베기로 녀석의 검을 튕겨내고 세로 베기로 위협해서 자세를 흩트린 다음 찌르기가 들어갔다.
“크윽!”
검이 녀석의 어깨에 꽂히고 허공으로 피가 튀었다. 인상을 찡그리며 허겁지겁 뒤로 물러난 녀석이 상처 입은 어깨를 감싸고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현실이 아닌 소설 속이란 생각 때문인지 사람을 해쳤다는 심리적 타격은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한 녀석을 해치웠다는 자부심 속에 무흔은 주변을 둘러봤다.
채채챙-
무백 아저씨는 산적 두 녀석을 몰아붙이고 있었다.
기세가 보통이 아니었고 검의 움직임이 무척 화려했다. 삼재검법과는 완전히 격이 다른 수준. 저것이 바로 일류고수의 위엄인가 보다.
무흔은 무백 아저씨의 싸움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놀랍게도 무백이 사용하는 초식이 마치 슬로비디오 화면을 보는 것처럼 동작 하나하나 눈에 들어왔다.
‘오오! 저게 바로 검법인가!’
무백 아저씨는 손쉽게 두 녀석을 상대했다. 녀석을 갖고 노는 것을 보니 무공 수준에서 확연하게 차이가 났다.
무흔은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남은 산적 셋이 한꺼번에 백단영을 위협하고…… 아니, 오히려 위협당하고 있었다.
백단영의 검이 부드럽게 허공을 가르자 산적의 무기가 깨지거나 날아갔다. 여긴 차이가 훨씬 명백했다.
그가 보기에 그녀의 무공 수준은 무백 아저씨를 능가했다.
그녀가 엄청난 기재라 하더니 정말이었다. 그녀의 검법은 우아했고 날렵했다. 얼핏 모양을 중요시한 느낌이 들긴 했으나 어쨌든 효과적으로 녀석들을 봉쇄했다.
같은 편이 이기면 재미있다. 하물며 백단영의 검무는 그의 시선을 완전히 빼앗았다. 무흔은 그녀의 모습을 넋이 나간 듯 쳐다봤다.
“커흑!”
산적 녀석들이 잇달아 무너지며 무릎을 꿇었다.
“사…… 살려주십시오!”
한 녀석이 고개를 조아리자 다른 녀석들도 황급히 주저앉았다. 도저히 상대할 수 없음을 간파한 녀석들의 술수였다.
모두 여섯.
백단영이 미간을 찌푸리며 녀석들을 노려보았다.
무백 아저씨가 엎드린 녀석들의 머리를 툭툭 치며 물었다.
“이 녀석들을 어떻게 할까요?”
무흔도 목에 힘을 줘 봤다.
“이것들아! 제대로 머리 안 숙여?”
“아이고, 어르신! 사, 살려…….”
“시끄러! 입 다물어라!”
그의 고함에 녀석들이 기겁하고 납작 엎드렸다. 어째 기분이 찝찝하다.
무흔은 소설의 내용을 떠올렸다. 소설 속에서 이들은 바로 풀려났다.
백단영은 마음이 여려 함부로 살상하지 않는다. 그녀는 천부적인 재능을 품고 태어났지만 마음이 여렸다. 적에게 가끔 아량을 베풀었고 그것이 훗날 오히려 그녀를 곤경에 빠트리곤 했었다.
그녀의 이런 성향은 훗날까지 두고두고 문제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사람을 죽이지 않는 인성을 단점이라 할 수 없으나 적어도 무림에서 가끔 걸림돌이 되는 것은 사실이었으니까.
지금 이 순간에 그는 백단영의 다음 결정을 예상할 수 있었다. 산적이 나쁜 놈이긴 하지만 죽일 정도는 아니라고 풀어줄 것이다. 그다음에는 어떻게 되었더라.
중요한 장면이 아니어서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가 머릿속으로 복잡한 생각을 굴리고 있을 때 백단영이 산적을 향해 소리쳤다.
“내가 너희들을 죽여야 마땅하지만…… 앞으로 절대 양민을 괴롭히지 않고 바르게 살아가겠다고 약속한다면 놓아주도록 하겠다.”
그녀의 서릿발 같은 호통에 산적이 머리를 굽신거렸다.
“나리……. 앞으로 절대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한 녀석이 읍소하자 다른 녀석들도 따라서 합창했다.
맹세한다면 살려주겠다는데 거짓으로라도 말하지 않을 자 없다. 하지만 이들이 할 줄 아는 것이라고는 도둑질밖에 없으니 이들은 절대 산에서 내려가지 못한다.
무흔은 결론 하나를 내릴 수 있었다. 훗날 그녀를 살리려면 그녀의 이런 심성을 고쳐야 한다.
풀어주지 말고 관가에라도 넘기자고 말하려는 찰나 백단영이 먼저 결단을 내렸다.
“좋아. 어서 가라. 마음 바뀌기 전에.”
“가……감사합니다.”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녀석들이 후다닥 숲으로 사라졌다.
무흔은 그녀에게 다가가 처음으로 말을 걸었다.
“아, 아가씨. 산적을 놓아주면 다시…….”
그 순간.
“으악!”
숲속에서 처절한 비명이 울렸다.
세 사람의 안색이 급변했다.
영문을 모르는 상태에서 그들은 다시 검을 쥐고 경계심을 높였다.
나뭇가지가 흔들리나 싶더니 숲에서 두 사람이 걸어 나왔다. 두 사람 모두 이십 대 초반의 젊은 청년이었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이 백단영을 보는 순간 표정이 쓱 변했다. 얼핏 보기에 그녀의 미모에 놀란 듯했다.
“어, 어째서…….”
백단영의 의문을 띤 표정에 한 사람이 앞으로 나서며 설명했다.
“저런 자들은 살아 봐야 쓸모없는 버러지일 뿐입니다. 당연히 처리하는 것이 세상을 위해서 좋은 일이죠.”
방금 도망친 산적들을 직접 죽였다는 뜻이다.
상대의 잔인함에 백단영의 안면이 살짝 찌푸려졌다.
“반갑습니다. 저는 곤륜의 구진광이라 합니다.”
어째 곤륜이라는 말에 힘이 팍팍 들어간 모양새다. 청년이 예의 바르게 포권을 취하며 고개를 숙였다.
나타났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주요인물 한 사람이. 무흔은 자신도 모르게 미간에 힘을 주었다.
‘첩자!’
구진광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이 말이 가장 적합했다. 물론 훗날 이야기다.
곤륜파는 무림맹의 중추인 구대 문파의 일원으로 주로 검을 사용했다. 구진광이라면 현 장문인의 직계제자로 장래가 촉망되는 인물이다. 현 무림의 후기지수 가운데 꽤 이목을 집중시키는 기재이기도 했다. 검을 잘 다루어 후기지수 가운데 일검(一劍)으로 불렸다.
다만 구진광은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그는 무림맹의 적인 마교 쪽에 붙어 첩자 구실을 했던 것으로 기억났다.
상대가 정중하게 인사해오자 백단영도 마찬가지로 응대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백가상단의 백단영이라 합니다.”
“아, 상단 쪽이셨군요.”
구진광의 안면에 살짝 실망이 어렸다. 갑자기 녀석의 목이 뻣뻣해지더니 금방 안색을 수습하고 다시 물었다.
“혹시 이쪽으로 오신 이유가…… 개봉에 가시는 길입니까?”
“네. 용봉대에 가입하려고 개봉으로 가고 있어요.”
“아하, 역시!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진광의 환대에 백단영의 안색이 환해졌다.
동료가 될 사람을 만나 기쁨을 감추지 못하는 백단영과 달리 정작 구진광의 미래를 기억하는 무흔은 찝찝했다.
하필이면 처음 만난 사람이 이런 녀석이라니.
“이분들은?”
구진광이 그녀의 뒤에 선 무흔과 무백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녀가 옆으로 비켜서며 인사를 시켰다.
“아, 제 호위무사들입니다.”
“무백입니다.”
“무흔입니다.”
무흔은 무백을 따라 포권을 취해 인사했다.
구진광이 거만하게 인사를 받고 옆에 있는 사람을 소개했다.
“이 사람은 제 사제입니다. 강호에서 진풍(振風)이라 불리지요.”
이십 대 초반으로 보이는 진풍이란 자가 고개를 까닥였다. 둘이 비슷한 분위기다. 이자 역시 첫인상부터 거들먹거린다.
구진광과 백단영이 대화를 주고받는 동안 진풍이란 자는 무흔 쪽으로 비웃음을 내뿜고 있었다.
무흔의 기억 속에 진풍이란 사람은 없었다. 소설에 나오지 않았거나 나왔더라도 엑스트라로 잠시 나왔다가 사라져서 기억하지 못하는 인물임이 분명했다.
“흠, 끼니 준비 중이셨군요? 이 길로 쭉 가면 객잔이 있어요. 오늘 저녁에는 그곳에서 끼니를 때우는 게 어떻습니까?”
무흔은 날아갈 듯 기뻤다.
‘캬! 이 녀석 이건 마음에 드네.’
야외에서 밥을 해 먹는 것보다 객잔에서 사 먹는 것이 월등히 편하니까. 무흔은 대답을 들을 것도 없이 재빨리 짐을 챙겼다.
그의 재빠른 행동에 백단영이 실소를 머금으며 제안에 동의했다.
구진광이 백단영의 옆에 바짝 붙어 친절하게 길을 안내했다. 그 모습에 두 사람의 뒤에서 무흔은 애꿎은 돌부리만 걷어찼다.
***
태평객잔.
산길이 끝나는 지점 부근에 큼지막한 객잔이 자리 잡고 있었다.
나무로 지어진 허름한 이 층 객잔으로 아래층은 주점이었고 위층은 숙박 장소였다. 개봉으로 이동하는 사람들이 마지막으로 머무는 장소라 매우 북적였다.
백단영과 구진광 일행은 태평객잔의 한쪽 구석에 자리를 잡고 음식을 시켰다. 먼 길을 왔다는 생각에 푸짐하게 먹기로 했다. 만두와 소채에 돼지고기볶음요리까지 곁들여서 한 상이 차려졌다.
무흔은 구진광과 같이 합석하여 내심 불만이었으나, 그렇다고 밖으로 드러낼 수 없었다. 무엇보다 그는 무림에 익숙하지 않아 이 세상에 적응하려면 약간 더 시간이 필요했다.
“맛있네요.”
백단영이 환한 미소를 지으며 부지런히 젓가락을 놀렸다.
“하하, 그렇죠? 여기가 나름 유명한 곳입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당연하죠. 백 소저라면.”
호탕하게 대답하는 구진광의 태도에서 그녀에게 향하는 관심이 분명하게 드러났다. 그 원인은 그녀의 미모. 꾸미지 않고 남장하듯 차려입었음에도 미모가 가려지지 않았으니.
무흔은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들으며 음식을 먹었다. 신기하게도 음식이 입에 잘 맞았다. 지금과 같은 환경이라면 100시간 정도는 이렇게 머물다가 현실로 돌아가더라도 전혀 문제가 없어 보였다.
물론 무림이란 세상이 이처럼 쉬울 리가 없겠지만.
무흔은 재차 상황을 정리했다.
앞으로 남은 그의 역할이 무엇이었더라.
내일 무림맹에 도착하면 백단영과 작별 인사를 하고 백가상단으로 돌아가면 끝이다. 즉 그는 초반에 몇 줄 나왔다가 사라지는 엑스트라다.
이 부분이 문제였다. 이 흐름에 끼어들어 어떻게 훗날 백단영의 죽음을 방지한단 말인가.
‘어휴, 내가 엑스트라라서 문제네, 문제!’
갑자기 입맛이 없어졌다.
무흔은 점차 자신의 임무를 깨닫게 됐다.
지금 이곳에서 백단영을 살리는 일은 당장 중요하지 않았다.
현재의 위치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의 능력이 문제였다. 이 한 번의 출연 후에도 그녀의 옆에 붙어 있어야 뭔가를 해볼 수 있었다.
즉 최종 목적을 위해 그는 엑스트라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 흐름에 주도적으로 끼어들어야 한다. 하지만 어떻게? 그 답은 소설 줄거리나 설정 속에 나와 있지 않았다.
‘GOD 작가, 그 자식의 흉계였나? 절대로 내일 백가상단으로 돌아가면 안 돼. 그럼 끝이야. 무조건 무림맹에 머물러야 해.’
단순히 머무르는 것만이 아니다.
어떻게든 고강한 무공을 익혀서 최소한 천향무후인 그녀를 보조해줄 강한 고수가 되어야 한다. 그래야 흐름을 변화시켜 히로인을 구한다.
모든 것이 분명해졌다.
이제 시작이다. 그는 백단영을 구해야 할 무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