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했더니 검신이었다 112화
무료소설 회귀했더니 검신이었다: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882회 작성일소설 읽기 : 회귀했더니 검신이었다 112화
빙궁
양쪽으로 끝도 없이 이어진 높다란 성벽에 새하얀 눈이 쌓여 있었다.
안쪽의 뜰도 마찬가지였다.
그야말로 온 세상이 겨울을 잔뜩 맞아 있었다.
북해에 들어온 이후 처음으로 눈이 아름답게 보였다.
빙궁(氷宮).
과연 그 이름에 걸맞는 분위기였다.
무신은 육각형으로 겹겹이 쌓인 성벽을 손으로 쓸어내렸다.
굳지 않은 눈이 바사삭거리며 떨어졌다.
촉감이 묘했다.
눈이 아니라 허물을 벗기는 느낌이었다.
아, 그는 뒤늦게 알아챘다.
이것은 정말 눈이 아니었다.
강기 비슷한 것이 씌워진 방벽이었다.
그를 안내하던 빙궐대 대장 백충일이 하하하 웃어젖히며 말했다.
“워낙 외세의 침입이 많아 이렇게 미리 대비를 해놓습니다.”
“외세요?”
“마교야 뭐 말할 것도 없고, 북방에 적이 많습니다. 아, 마교는 최근에 좀 잠잠합니다만.”
“정마대전 때문이군요.”
“예.”
무신은 절도 있게 걸어가는 빙궐대 대원들과 이하 빙궁무사들을 보며 말했다.
“저리 훌륭한 자원이 많은데 마교가 침입한들 두려울 게 있겠습니까?”
“그리 봐주시니 감사합니다.”
사실, 입에 발린 말이었다.
빙궁이 아무렴 대단해도 마교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남궁가와 팽가 정도의 차이랄까.
그럼에도 빙궁이 버틸 수 있는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사시사철 한파가 몰아치는 지리적 요건이고, 다른 하나는 빙궁의 궁주였다.
청영풍(靑影風) 해영월.
마교 교주와도 대적할 자였으니 마교가 함부로 침입하지 못할 만도 했다.
‘진짜 목숨 내놓고 싸우면 마교 교주가 이기겠지만.’
그 상상은 속으로만 삼키며 무신은 내궁에 들어섰다.
그의 입에서 절로 감탄이 쏟아졌다.
고풍스러움.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바로 그것이었다.
강호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특이한 양식의 건물이 그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정확히는 특이한 게 아니라 추운 날씨를 견디기 위한 방편이겠으나 뭐 어떤가.
보기에 좋으면 되었다.
그는 문득 궁금해졌다.
빙궁이 이 정도인데 ‘진짜 환상’이라는 색목인들의 세상은 어떠할지.
말 나온 김에 조만간 가봐야겠단 욕구가 솟았다.
그는 혀를 날름거리며 고개를 들었다.
백충일과 무사들이 왠지 분주하다 싶었는데, 곤룡포 비슷한 것을 입은 자가 저 멀리서 걸어오고 있었다.
왼쪽 가슴의 주(主)의 문양이 눈에 띄었다.
틀림없었다.
저자가…….
“궁주님을 뵙습니다.”
무신은 양손을 가지런히 내리고 머리와 상체를 살짝 숙이며 인사를 올렸다.
해영월.
북해빙궁 궁주에 대한 예의였다.
해영월이 허허허 기분 좋은 미소와 함께 반응했다.
“귀인에게 내 무슨 대접을 받는지 모르겠구먼.”
“대접이라니요. 당연히 해야 할 일입니다.”
하고 대답하면서도 무신은 귀인이란 지칭이 더 신경 쓰였다.
아니, 그도 해영월처럼 허허허 웃고 싶은 심정이었다.
세상에 일개 검객이 빙궁의 귀인이 된다는 게 말이나 되는가.
화경의 경지에 오른 일개 검객은 천하를 통틀어도 없겠지만 말이다.
해영월이 손을 내밀었다.
“만나서 반갑네.”
“영광입니다.”
맞잡은 해영월의 손은 사포처럼 거칠었다.
크기도 워낙 커서 인간의 그것이 아니라 맹수의 그것 같았다.
무신은 흥미롭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신장은 6척 정도로 그와 비슷한데, 체구는 두 배도 더 컸다.
어깨에 바윗덩어리를 껴놓은 것 같았다.
이 몸으로 신속(神速)이라 불리기도 한다니 한번 보고 싶었다.
‘뒤통수를 치고 도망가볼까.’
그는 상상으로만 남겼다.
해영월이 인자한 미소와 함께 말했다.
“우선 안으로 들어가 얘기하지.”
“예.”
등을 돌리는 해영월을 따라 무신은 조금 더 깊숙이 빙궁 안으로 들어갔다.
그가 들어설 때마다 일을 보던 빙궁인들이 꾸벅 허리를 숙였다.
멋모르는 어린 소년 소녀 무사들도 덩달아 넙죽 엎드렸다.
흑룡강에서의 행례가 고수를 향한 것이었다면, 이곳에서의 형례는 그냥 사람을 향한 것이었다.
심법도 못 뗐을 이들이 고수를 구분해 봐야 얼마나 구분하겠는가.
무신은 피식 웃으며 나란히 선 해영월을 쳐다보았다.
중후한 얼굴에 선이 굵었다.
소싯적에 여인들 좀 꽤나 홀렸을 것 같았다.
워낙 실력이 출중해 외모가 영 아니었더라도 여인들이 양쪽으로 달라붙었겠지만.
아니다 다를까 해영월을 모시는 시녀들은 자그마치 서른도 넘었다.
실시간으로 일부다처제의 현장이 벌어지고 있었다.
기분 나쁘게 볼 것은 없었다.
로마에 가면 로마의 법을 따르듯이 일부다처제도 이곳의 하나의 문화일 뿐이었다.
그런데 개중에서 가장 눈에 띠는 자는 의외로 궁후였다.
해영월과 마찬가지로 초로에 가까운 나이였는데, 얼굴에 주름살이 하나 없었다.
화장으로 가렸다기에는 눈이나 입술 주위의 치장이 연했다.
‘이분도 소싯적에 좀 날리셨겠는데. 딸이 있었으면 어머니 닮아 예쁘겠어. 아, 있군. 해연수였지, 아마.’
무신은 그녀에게도 예를 갖추었다.
“최무신입니다. 궁후를 뵙습니다.”
“어서 오세요.”
짧은 인사말에 그녀가 다 담겨 있었다.
귀가 간질간질한 아름다운 미성에 상대를 배려하는 손동작, 그리고 기품 넘치는 미소까지.
모르긴 몰라도 그녀만큼 궁후에 어울리는 여인은 없을 것이다.
양쪽으로 줄지어 늘어선 시녀들이 아무렴 날고 기어도 말이다.
“입에 맞을지 모르겠네.”
“아주 착 맞습니다. 맛있어요.”
“그래? 거 다행이구먼.”
무신은 해영월, 그리고 궁후와 함께 만찬의 자리를 먼저 가졌다.
시간도 시간이거니와 내내 암향표를 발동하느라 그의 뱃가죽은 등가죽에 붙어 있었다.
그는 걸신들린 것처럼 접시 위 음식을 집어 들었다.
허기 때문인지 몇몇 입맛에 안 맞는 것도 맛있게 느껴졌다.
그가 식사를 마친 것은 반 시진이 지나서였다.
차를 마시며 이런저런 얘기까지 나누니 반 시진도 금방이었다.
그리고, 결의를 중심으로 한 본격적인 대화가 시작되었다.
해영월이 깍지를 껴 양 손을 탁상 위에 올려놓았다.
궁주란 직함 때문인지 별것 아닌 행동이 격식 있게 보였다.
“자네 뜻은 대강 들었네. 우리가 빙월대 대장직을 주면, 우리와 결의를 맺기로 말일세.”
“예.”
“허나…….”
해영월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빙룡정에 들어가는 것을 조건으로 달았다지?”
“그렇습니다.”
“후…….”
해영월은 말끝을 계속 흐렸다.
그것이 그의 착잡한 심경을 대변했다.
“다른 조건으로 대신하면 안 되겠나?”
“어려울 것 같습니다.”
“이유는?”
무신은 덤덤하게 답했다.
“제가 빙룡정에 들어가려는 것은 오로지 빙룡검을 얻기 위함입니다. 세상에 빙룡검을 대체할 수 있는 게 뭐 있겠습니까? 만약 있다면, 알려주십시오. 그대로 따르겠습니다.”
“아예 못을 박는구만. 그래, 없지. 빙룡검과 대체할 수 있는 것은.”
“꼭 빙룡을 잡아서 나오겠습니다.”
무신의 눈이 매의 그것처럼 매섭게 타올랐다.
확고한 의지였다.
“혼자 말인가?”
“예.”
“나도 실패했네. 심지어 나는 우리 빙궁의 내로라하는 고수들도 여럿 대동했는데도 불구하고.”
해영월이 단호하게 말을 이었다.
“헌데 자네가 무슨 수로 빙룡을 잡아?”
“해보기 전에는 모르는 법이지요.”
“도전 정신은 내 인정하겠네만, 자칫 무턱대고 들이댔다가 된통 당하는 식으로 결말이 날 수 있네. 아니, 된통 당하다뿐이겠나? 사지가 갈려 시체도 남지 않을 게야.”
상황만 놓고 보면 해영월의 말이 더 맞았다.
그냥 미친 짓이었다.
하지만 무신의 경우는 달랐다.
그는 빙룡정이 어떤 곳인지 잘 알았다.
빙룡의 영기(靈氣).
그것만 막으면 충분히 승산 있는 싸움이었다.
결코 무턱대고 들이대는 게 아니었다.
그러나 해영월이 그 사실을 알 리 만무했다.
“우리의 든든한 버팀목이 될 자를 그리 허망하게 잃을 수는 없네.”
“궁주님의 마음은 이해합니다만, 결의를 위한 제 조건입니다.”
“그래, 알지, 알아. 아는데도 보낼 수가 없다는 걸세.”
무신은 골치가 아파졌다.
예상은 했는데 이 정도로 강건하게 나올 줄은 몰랐다.
‘빙룡의 영기를 막기 위해 필요한 것은 오로지 강기. 같이 강기 대결이라도 한번 해서 압도적으로 이겨 버리면 좀 마음이 바뀌려나.’
그는 진지하게 고민했다.
하지만 고민뿐이었다.
긍지 높은 북해빙궁의 궁주에게 그것은 상당히 무례한 행동이었다.
그런데 의외의 상황이 연출됐다.
“잠깐 자리를 옮길 수 있겠나?”
“예?”
“말했듯 나도 해내지 못한 일이네. 그러니 자네가 나보다는 낫단 것이 증명돼야 들어갈 명분이 생기지 않겠어? 어떤가, 나와 누구의 강기가 더 강한지 대결이라도 한번 해볼 텐가?”
해영월이 먼저 제안을 던져준 것이다.
무신은 냉큼 받았다.
“그리하겠습니다.”
“하겠다고?”
“애당초 빙룡정에 들어가는 것을 조건으로 온 곳이지만, 궁주께서 이리 반대하시는데 억지로 들어가고 싶지는 않습니다. 허나 명분을 만들어주신다면 할 수밖에요.”
“허허.”
해영월의 웃음소리는 그 의미가 묘했다.
제안을 던진 것은 그이지만, 설마 하니 무신이 수락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가 깍지를 풀며 오른손으로 주먹을 쥐어 보였다.
“여기에 쥐어지는 게 무엇인 줄 아는가?”
“제가 찾는 것. 빙룡검이겠지요.”
“잘 아는구만.”
해영월이 ‘그럼 여기에 담긴 것은 무엇인 줄 아는가?’ 하며 단전을 가리켰다.
역시 무엇인지는 뻔했다.
“현경입니다.”
현경(玄境).
경지로 따지면 무신보다 한 단계 높을 뿐이지만, 그렇게 되기까지의 과정은 수십 년도 더 될 것이다.
보통의 무인들을 기준으로는 말이다.
하지만 무신에게는 그저 말 그대로 한 단계 높을 뿐이었다.
아니, 실상은 오히려 그가 더 높았다.
그는 현경을 수천, 수만 배는 초월하는 검신이었다.
“빙룡검을 쥔 현경을 상대할 자신이 있나?”
“그야…….”
그는 이번에도 덤덤하게 답했다.
“있으니 드리는 말씀입니다.”
그의 대답에 자리에 일순 정적이 흘렀다.
그가 무례하다고 생각해서가 아니었다.
그가 정말 자신 있어 해서였다.
그러니 가장 놀란 쪽은 해영월이었다.
“하기야 빙룡정이 어떤 곳인지 알고도 들어가는 사람에게 오히려 나는 쉽게 느껴지겠지.”
“쉽게 보는 것은 아닙니다.”
해영월이 ‘아차차’ 하며 말을 이어갔다.
“나도 그런 뜻은 아니었네.”
“괜찮습니다.”
미안하다는 듯 손바닥을 펼쳐드는 해영월을 보며 무신은 조금 신기했다.
저 정도 자리에 있으면 위선을 부릴 법도 한데, 해영월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본인과 상대를 동일시했다.
물론 무신이 이곳의 귀인이란 점도 작용했겠지만.
해영월이 더 볼 것 없다는 듯 자리를 박찼다.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바로 시작하지.”
“예.”
궁내 대련장.
무신은 그곳에서 해영월과 마주 보고 섰다.
차기 빙월대 대장이 될 수도 있는 자와 현 북해빙궁 궁주의 대결이었으니 장내는 벌써부터 뜨거웠다.
강기만 보는 게 아니라 진짜 대련을 하는 것이었다면 이보다 갑절은 더 뜨거웠겠지.
자리에는 궁후도 함께 했는데, 웬 묘령의 여인이 그녀의 옆에 서 있었다.
길게 늘어뜨린 머리칼에 녹주석을 박아 넣은 듯한 눈동자.
빙궁의 눈꽃처럼 새하얀 살결은 쓸어내리면 그대로 쭉 미끄러질 것 같았다.
그러나 가장 시선이 끌리는 것은 몸이었다.
늘러 붙는 천옷에 유독 가슴만 툭 튀어나와 있었다.
무신은 그것으로 그녀의 정체를 눈치챘다.
해연수.
이나희와 달리 이미 삼봉(三鳳)의 반열에 올라 있는 여인이었다.
‘해영월의 딸이었지.’
무신은 그녀의 미모에 감탄하며 해영월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다시 말해주자면, 나와의 강기 대결에서 자네가 이기면 자네는 그대로 빙룡정에 들어가면 되는 게야. 허나 자네가 지면…….”
빙룡정에 들어가는 것을 깨끗이 포기하면 되었다.
해영월이 바라는 것은 그것일 것이다.
그러나 무신은 해영월이 혹할 만한 말을 했다.
“이 자리에서 바로 빙궁과 손을 잡겠습니다.”
“손을 잡아?”
“결의를 맺겠단 것이지요.”
해영월이 당최 이해할 수 없단 눈을 했다.
그의 입장에서는 무신이 ‘이길 가능성이 전무한 일’에 괜한 호기를 부리는 것으로 보였다.
그가 해연수를 돌아보며 말했다.
“나도 하나 추가하지. 자네가 이기면 내 딸을 줌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