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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했더니 검신이었다 96화

무료소설 회귀했더니 검신이었다: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조회 987회 작성일

소설 읽기 : 회귀했더니 검신이었다 96화

이 세상 모든 것

 

 

같은 경지라고 해서 다 같은 경지는 아니다.

예컨대 이런 것이다.

막 초절정이 된 자와 십 년째 초절정인 자가 겨루면 십중팔구는 후자가 승리한다.

영약이나 모략의 힘을 빌리지 않으면 전자가 승리할 가능성은 아예 전무하겠지.

적라성과 무신의 경우가 그런 경우였다.

적라성이 이제 막 화경에 이르렀다면, 무신은 십구만 년째 화경이었다.

상대가 되려야 될 수가 없었다.

영약이나 모략?

그것의 힘을 빌린들 적라성이 무신을 상대로 이길 가능성은 적었다.

아니, 불가능했다.

당장 도어검(導馭劍)만 봐도 알 수 있었다.

혈성검은 적라성의 손에서 기껏해야 다섯 장 멀어지는데 반해 흑라신검은 무신의 손에서 오십 장 이상 멀어지는 것도 가능했다.

열 배가 넘는 차이였다.

멀어지는 게 얼마나 중요하겠느냐마는, 도어검이란 게 애당초 무엇인가.

손을 쓰지 않고 상대를 제압하는 검술이다.

더 먼 거리에 갈수록 활용도가 높아질 수밖에 없다.

적라성의 도어검이 무신보다 낮은 이유는 비단 경험의 차이만은 아니었다.

육신과 검이 하나가 되는 것.

신검합일(身劍合一).

그것에 대한 깨달음이 부족한 까닭도 있었다.

정신수양의 부족이라 해야 할까.

무신은 그것을 이십만 년이 넘도록 해왔으니 깨달음을 넘어 아예 통달을 해버렸다.

그래, 마음만 먹으면 오십 장이 아니라 오백 장 밖으로도 검을 날릴 수 있는 그였다.

결과적으로 적라성이 도어검에 마지막 승부를 건 것은 매우 미련한 짓이었던 셈.

무신이 망령의 숲에서 폐관수련한 것을 몰라서 그런 것일 테지만 말이다.

무신은 흑라신검이 머물러 있는 곳을 향해 걸어갔다.

그곳이 바로 적라성이 있는 곳이었다. 흑라신검은 그의 목덜미에 예리한 칼날을 겨누고 있었다.

무신이 손가락만 까딱해도 그의 머리통은 차디찬 바닥을 구를 것이다.

 

“도, 도어검을 썼어……!”

“저 검객도 화경이었단 말이야?!”

“거, 걸면 안 되는 승부였어! 미친 짓이었다고!”

 

교도들 중에 답을 아는 자가 있었다.

걸면 안 되는 승부.

우백관이 당했을 때 도망갔더라도 늦지 않았을 것이다.

혈교를 잃어버릴지언정 목숨은 부지했겠지.

하지만 지금은 늦었다.

늦어도 너무 늦었다.

여기 있는 모든 교도들은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무신은 자신을 경악스럽게, 그리고 경이롭게 바라보는 교도들을 그냥 지나쳤다.

벌레들 따위에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그들이 뒤통수를 칠 수도 있으나 그럴 가능성은 모기에 물려 죽을 가능성보다 적었다.

도어검을 봐놓고 달려들 바보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물론 적라성은 여전히 꼼짝도 못 하고 있었다.

흑라신검이 거의 종이 한 장 차이로 그의 목덜미와 간격을 두고 있었기에 자칫 잘못 움직였다가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 꼴이 될 것이다.

굳이 무신이 손을 쓰지 않더라도 말이다.

 

“기분이 영 안 좋겠어? 최후의 보루로 쓴 것이 이리 허망하게 막혔으니.”

 

무신은 적라성의 앞에 몸을 반쯤 숙이고서 물었다.

놈이 엎어져 있는 탓에 그래야 눈높이가 맞았다.

 

“왜 말이 없지? 아, 입도 제대로 못 뗄 처지였군.”

 

무신은 흑라신검을 손으로 가져왔다.

동굴에서 빼낸 이후로 단 한 번도 도어검을 쓴 적이 없기에 녀석은 계속 흥분 상태였다.

줄기줄기 내공을 뿜어댔다.

무신은 아까운 힘이 쏟아지지 않도록 검신 안에 잘 갈무리했다.

흑라신검을 뺐으니 적라성에게 채워졌던 족쇄를 풀어준 셈이 되겠지만, 그것은 양팔 잃은 자에게 겁을 먹는 격이었다.

적라성은 이미 혈성검을 잃었다. 놓친 것도 아니고 아예 부서졌다.

검객에게 있어 검을 잃었다는 것은 양팔을 잃은 것과 같으니 걱정할 필요가 전혀 없었다.

 

“…네놈도 화경이었나?”

“그럼. 봤다시피.”

 

적라성이 한숨과 함께 말했다.

 

“어처구니가 없구나. 화경이나 되는 고수가 이때까지 아무런 소문도 나지 않았다니.”

“음, 소문이 나기는 났지. 화경으로는 아니었지만 말이다.”

“소문이 났다고?”

“세간에서 내가 사신성이라 불린다더군.”

 

사신성(四新星).

당가의 당비청, 화산파의 한철룡, 그리고 마교의 마준환과 함께 그곳에 속해 있다고…….

 

‘빙궐대 대장 백충일이 말해주었지.’

 

무신은 피식 웃었다.

돌이켜 봐도 놀랍고 신기했다.

삼류무사였던 자신이 차후 강호를 호령할 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는 게.

 

적라성이 다시 또 한숨을 쉬며 말했다.

 

“사신성이라… 네놈에겐 너무 좁은 우물이 아니냐?”

“오, 날 인정해 주는 건가?”

“이 꼴이 났으니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지.”

“태생이 혈교라 그저 쓰레긴 줄만 알았더니 무인으로서의 면모도 가지고 있군.”

 

무신 특유의 비아냥거리는 어조에도 적라성은 아무런 분노도, 반박도 하지 못했다.

그의 목은 무신에게 들려 있었다.

입 한 번만 잘못 벙긋해도 송장 신세였다.

물론…….

 

“내게 재생의 기회를 다오.”

“재생?”

“이미 죽은 목숨이겠지만, 살 수 있는 기회를 달라 이것이다.”

 

무신은 아예 쪼그려 앉았다.

 

“그래? 일단 한번 지껄여봐.”

 

지껄여 보란 말조차 이제는 아무렇지 않게 받아내는 적라성이었다.

 

“시시껄렁한 제안은 하지 않겠다.”

“그러니까 지껄여 보라고, 어디.”

 

적라성이 제 왼쪽 가슴을 가리켰다.

혈교를 상징하는 혈 자의 문양이 엄지만 한 두께로 새겨져 있었다.

 

“이것을 네게 넘기겠다.”

 

문양을 넘기겠다는 것은…….

무신은 금방 알아챘다.

 

“교주 자리를 주시겠다?”

“그래.”

“교주인 널 이겼으니 그건 이미 나 혼자서도 가질 수 있는 자리다.”

 

예상한 대답이라는 듯 적라성이 바로 말을 받았다.

 

“자리에는 앉을 수 있겠지. 허나 혈교 교주 대대로의 각인은 받지 못할 것이다.”

“각인?”

“이 문양은 단순히 물감 따위로 칠한 게 아니다. 선대교주들로부터 인정을 받은 게지.”

“주술 같은 걸 받는단 건가?”

“그렇다.”

 

몰랐던 사실이었다.

물러날 때가 오면, 그저 악수 한번 하고 다음 교주에게 자리를 넘겨주는 줄 알았다.

 

‘하기야 교주 자리가 어디 시장 바닥 싸움 대장은 아니니.’

 

무신은 적라성의 말을 이해했다.

적라성이 기회를 잡았다는 듯이 덧붙였다.

 

“어떤가? 끌리지 않나? 수백, 수천의 교도들의 추앙과 오만 가지 보물과 혈교 대대로의 비기까지. 한마디로 이 세상 모든 것을 누릴 수 있다. 네가 최고가 되는 것이다.”

“…….”

“혹, 사파인 게 꺼려진다면 그것은 단단한 착각이다. 요 근래 정파의 소문을 너도 들었지 않나? 약자를 등쳐먹고 자신들이 최고인 줄 알며 늘상 거들먹거리기나 하는 밥맛없는 놈들. 내 말이 틀렸나?”

“…….”

“아, 물론 네가 따로 소속이 없다는 것쯤은 이미 알고 있다. 그래서 하는 제안이다.”

“…….”

“말은 내 재생의 기회를 부탁하는 것이나 너도 손해 보는 장사가 아니다. 혈교 교주. 누구나 앉고 싶어 하는 자리. 심지어 정파 놈들도 구미가 당길 조건. 그래, 손해고 뭐고 너는 그냥 이득만 보는 거야.”

“…….”

“네가 해줄 것은 단지 날 살려주기만 하면 된다. 그럼 모든 걸 넘겨주마.”

“…….”

 

길고 긴 말이었으나 결국은 자신을 살려달라는 게 핵심이었다.

그러나 적라성의 입꼬리는 살짝 말려 올라가 있었다.

나름대로 ‘충분한’ 조건을 제시했다고 본 것이다.

무신은 가만히 그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요즈음 정파가 정파답지 않게 이상한 짓거리 하는 것쯤이야 나도 알고 있다.”

“그래, 그래. 그렇대도.”

“그러니 네 말은 정파나 혈교나 거기서 거기니 신경 쓸 것 없다 이 말 아닌가?”

“말귀를 잘 알아먹는구나.”

 

무신은 ‘거기서 거기인데…’ 하며 말을 이었다.

 

“왜 신경 쓸 것 없단 식으로 되지?”

“그게 그러니까 내 말은…….”

 

내 말은 개뿔이.

더 들을 것도 없는 말이었다.

 

“둘 다 똑같으면 둘 다 들 필요가 없는 것이다. 신경 쓸 게 없는 게 아니라.”

“아, 아니, 내 말을 들어보라니…….”

“닥쳐라. 입을 찢어버리기 전에.”

 

적라성이 눈을 파르르 떨며 꾹 입을 다물었다.

무신은 말을 이어갔다.

 

“설령 그것을 무시하고 내가 혈교의 교주가 된다고 해도 말이다.”

“…….”

“어찌 이 세상 모든 것을 얻을 수 있지?”

 

무언가 반박하고 싶은 눈치였으나 입을 찢어버린다는 말이 두려웠는지 적라성은 계속 침묵했다.

무신은 기도 안 찬다는 듯 웃었다.

 

“수백, 수천 교도들의 추앙을 얻든 평생 가도 못 쓸 일확천금을 얻든 남궁가나 화산파의 것보다 대단한 비기를 얻든 그게 이 세상 모든 것을 얻은 게 되지는 않는다. 진짜 이 세상 모든 것은…….”

 

무신은 왼 손바닥을 폈다.

 

“천하를 이 손바닥 안에 넣는 것이다.”

“…….”

“혈교의 교주 따위는 그것의 새 발의 피도 되지 않아.”

“…….”

“그러니 다시 한번 말해보거라.”

 

적라성이 비로소 입을 뗐다.

 

“무, 무엇을…….”

“혈교의 교주 말고 네가 재생의 기회를 얻어야만 하는 이유를 말이다.”

 

있을 리가 만무했다.

 

“없는 모양이군.”

“기, 기다려 봐라! 내, 내 더 좋은 조건을 내걸…….”

“생각해 보니 더 좋은 조건을 내걸 수가 없겠구나. 네 입으로 혈교의 교주가 가장 좋은 조건이라 했으니.”

“아, 아니다! 마, 말실수다!”

 

적라성은 체면도 잊은 채 말을 더듬었다.

교도들이 모두 지켜보고 있었으나 그 따위 알량한 자존심은 부릴 것도 없단 모습이었다.

무신은 그 모습에 웃음보가 터질 뻔했다.

강약약강.

그것을 가장 악랄하게 이용하는 자가 한낱 검객에게 오두방정을 떨고 있었다.

살려줘!

제발 살려줘!

죽기 싫다!

무엇이든 하겠다!

적라성의 얼굴은 딱 그것이었다.

 

“헌데 뭘 착각하는 모양인데, 나는 널 죽일 생각이 없다.”

 

갑자기 뿌려진 희망의 씨앗에 적라성이 반색했다.

 

“새, 생각이 달라진 게냐? 혈교 교주를 할 테야?”

“전혀. 그럴 리가.”

“그럼 왜 나를…….”

 

무신은 한 반 시진만 더 있으면 애벌레가 알을 까놓을 것 같은 시체들을 가리켰다.

그에게 죽은 강시들이었다.

 

“널 저렇게 만들 생각이다.”

“…뭐?”

“활강시가 되려거든 일단 살아 있는 게 최우선이잖아?”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게냐!”

“말도 안 될 게 무엇이지?”

 

무신은 어깨를 으쓱했다.

 

“내가 그렇게 하겠다는데.”

“혈교의 교주가 어찌 활강시가 되느냔 말이다!”

“어찌고 저찌고 너야말로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릴 하는지 모르겠군.”

 

일그러진 적라성의 표정은 참으로 가관이었다.

무신은 또 웃음보가 터질 뻔했다.

 

“네가 혈교의 교주든 저 마교의 교주든 살아만 있다면 활강시가 될 수 있는 거 아니냐?”

“아니 네놈 따위가 감히 나를 어…….”

“네놈 따위. 그래, 그게 네 본색이었겠지.”

 

무신은 그만 몸을 일으켰다.

적라성과의 눈높이가 다시 멀어졌다. 하지만 이제 더는 맞출 필요가 없어졌다.

일이 끝났다.

계획에도 차질이 없다.

그러니 자리를 지키는 것은 그저 시간 낭비일 뿐이었다.

 

무신은 ‘아차차’ 하며 말했다.

 

“고맙단 말은 해야겠군. 네가 장로들을 시켜 미리 준비를 해둔 덕에 이대로 바로 강시술에 들어갈 수 있겠어.”

“이, 이 쳐 죽일 놈이!”

 

적라성이 눈알을 부라리며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무신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무의미한 반항이었다.

그는 검도 없었고, 뭘 어떻게 할 여력도 없었다.

툭.

무신이 살짝 팔만 뻗은 것에 그는 석 장 밖으로 나가떨어졌다.

 

무신은 빙긋 웃으며 물었다.

 

“어디야? 강시술을 쓸 수 있는 곳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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