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했더니 검신이었다 7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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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61회 작성일소설 읽기 : 회귀했더니 검신이었다 76화
조우
우스웠다.
방금 전까지 아주 괴인 취급을 하더니 지금은 극진한 하오체에 ‘뭣들 하느냐! 손님상을 대령해!’ 하며 시중들을 닦달하기까지 했다.
팽영권.
듣던 대로 누구든 힘으로 굴복시키지만, 정작 그 자신도 힘 앞에 굴복하는 자였다.
“파천에서 왔습니다.”
“파천… 변두리에서 대협 같은 귀인이 나다니… 아! 파천을 욕하려는 건 아니오.”
변두리보다 더한 말을 해도 상관없었다.
사실이니까.
그런데 괜히 자기 혼자 찔려서 변명을 늘어놓고 있었다. 어떤 식으로든 무신의 심기를 거스르기 싫은 것이다.
팽영권이 뒷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혹, 내 무례했다면 용서해 주시오.”
팽영권은 무려 화경에 달하는 고수였다.
마음만 먹으면 태산(太山)도 움직일 그가 이토록 저자세로 나오는 이유야 뻔했다.
그의 기압보다 방금 전 무신의 기압이 훨씬 컸다.
“안으로 들어가 차 한잔하는 게 어떻소?”
이제 팽영권에게 아들의 머리통은 안중에도 없었다.
그까짓 자식 목숨이야 ‘알아두면 두고두고 도움이 될 인맥’ 앞에선 길바닥 풀떼기만도 못한 것이다.
하지만 정작 무신이 그의 제안을 받아들일 마음이 없었다.
“다음에 하시지요.”
“아…….”
말끝에 아쉬움이 가득했다. 팽영권은 그 와중에도 모용선화에게는 시선 한번 던지지 않았다.
하기야.
제 아들도 내팽개친 판에 며느리가 무어 대수겠는가.
그가 아차 싶은 얼굴로 물었다.
“존함이 어찌 되시오?”
“최무신입니다.”
“최무신이라… 대협 정도의 고수의 이름이 낯설다는 것은… 출사표를 던진 지 얼마 안 된 것 같소?”
벌써 2년.
하지만 강호에서의 2년은 매우 짧은 시간이었다.
무신이 ‘예, 맞습니다’ 하자 팽영권이 탄성을 터뜨렸다.
“놀랍구려.”
“밖에서 열심히 수련하다 오면 2년이 아니라 2개월만 되도 문제는 없을 줄 압니다.”
“그렇기야 한데… 나이도 젊어 보이오.”
무신은 실은 제 나이가 22만 살이 넘는다고 하려다 말았다. 팽영권을 안 믿고 못 믿고를 떠나 굳이 그 부분까지 까발리고 싶지는 않았다.
하북팽가.
팽영권.
여러모로 썩 좋은 부류는 아니었다.
항간에는 처자식도 죽인단 말이 있었으니 그의 뒤통수쯤은 아무렇지 않게 칠지도 모른다.
‘제 아들 머리통을 이리 방치하는 걸 보면 틀린 예감은 아니겠지.’
그는 확신하며 모용선화를 가리켰다.
“모용 소저는 제가 데려다주겠습니다.”
“알겠소.”
팽영권이 ‘그러고 보니…’ 하며 말을 이었다.
“최 대협이 어찌 그 자리에 있었고, 또 그 아이와는 어찌 하북에 요령까지 함께 가는 사이가 된 거요?”
“어찌랄 게 있겠습니까?”
무신은 차분히 답했다.
“말을 몰고 가던 중에 칼부림 소리가 나길래 그 자리로 갔고, 녹림과 마교의 기압이 넘실거리니 곧장 놈들을 죽였지요. 다행히 모용 소저만은 목숨을 건져 이렇게 하북에도, 그리고 요령에도 함께하게 됐습니다.”
“최 대협 정도 되는 분이 굳이 그런 수고를 할 필요가 있소?”
최 대협 정도 되는 분.
틀린 말은 아니었다. 현 강호에서 모용세가의 입지를 생각하면 무신이 모용선화의 등에 올라타 그녀를 말처럼 부려도 모자랐다.
하지만 입지보다 더 중요한 게 있었다.
“사내라면 응당 여인을 지키고 보살피는 게 도리인 줄 압니다. 헌데 그것을 수고라 표현하시다니요.”
“아니, 그게 아니라…….”
“초면입니다만 팽 가주께 좀 실망입니다.”
사내다움은 팽가의 가교였다.
그것을 걸고넘어지니 팽영권이 안절부절못해하며 아주 난색을 표했다.
“이제 와서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사실 모용 소저는 살아남았을 뿐이지 이번 일의 가장 큰 피해자 중 하나입니다. 하루아침에 낭군을 잃은 여인의 아픔을 생각해보셨습니까? 헌데 눈길 한번 안 주시더군요.”
아픔은 개뿔이었다.
자신을 괴롭히던 추악한 팽방호가 죽었음에 모용선화는 오히려 기뻐했다.
단지 혼인이 깨져 가문에 도움을 줄 수 없음에 안타까워했을 뿐.
하지만 팽영권이 그 사실을 알 리 없었다.
“내 미안하다.”
“아니에요, 아버님.”
“약속대로 너희 집안에 지원은 해줄 터이니 그리 알거라.”
예상치 못한 전개에 흠칫 놀란 것은 비단 모용선화만이 아니었다.
무신도 조금 눈을 치켜떴다.
‘알고 있던 것보다 사내다움을 더 중시하는 건가.’
놀란 것도 잠시 그는 남몰래 웃었다.
사대다움이든 뭐든 애당초 다 거짓말이었다.
그는 오로지 본인의 이득을 위해서 모용선화를 보필한 것이다.
그녀의 가문, 모용세가를 제 팔 안쪽으로 넣기 위해.
팽영권이 다시 그를 쳐다봤다.
“이 아이는 우리가 모용가로 데려다주겠소. 최 대협은 더 신경 안 써도 되오.”
“괜찮습니다. 어차피 그곳에 볼 일도 있으니 제가 가지요.”
“괜히 귀찮지 않겠소?”
“귀찮은 거 뭐 있겠습니까? 이리 아리따운 여인과 동행하니 가는 내내 즐겁겠지 싶은데.”
순간 모용선화의 얼굴이 귀까지 빨개졌지만 팽영권도 무신도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팽영권이 ‘최 대협 뜻이 그러하다면… 내 알겠소’ 하며 다른 화두를 던졌다.
“다음에 볼 적에는 말 편히 하시오.”
“연배가 못해도 강산 세 번 변할 시간은 날 텐데 어찌 편히 하겠습니까?”
“강호에선 나이보다, 심지어 가문보다 힘이 우월시 되는 법 아니겠소? 예컨대 내가 백발 성성한 화산파의 장문이었다 해도 말이오.”
전혀였다.
강호는 팽영권의 말처럼 무(武)를 위주로 돌아가는 곳이지만, 근본은 예(例)에 더 있었다.
정(正)을 추구하는 정파일수록 더더욱.
그럼에도 팽영권이 백발성성한 화산파의 장문이란 가정까지 꺼내 든 것은…….
자신과 안면을 트고 지내잔 소리였다.
무신은 대충 알겠다고 대답했다.
하오체를 쓰든 뭘 쓰든 어차피 오늘 보고 말 사이였다. 그에게는 팽영권과 안면을 트고 지낼 마음이 처음부터 없었다.
“마차를 내어드리겠소.”
물론 호의마저 거절하지는 않았다.
요령까지는 못해도 일주일.
무신이야 괜찮지만 모용선화는 그 긴 시간 딱딱한 안장을 버티지 못할 것이다.
여인네의 여린 살결으로는 말이다.
“저도 괜찮은데…….”
무신은 잘못 들었나 싶었다.
그가 ‘예?’ 하고 되묻자 모용선화가 뺨을 붉히며 다시 말했다.
“계속 말 타고 가도 돼요…….”
“불편하실 텐데.”
“괜찮던 걸요……?”
그녀의 말끝이 묘하게 흐려졌지만, 무신은 ‘얼마 안 타셔서 그렇게 느끼셨을 겁니다. 한 사흘만 타도 엉덩이에 굳은살이 박히십니다’ 하며 팽영권으로부터 마차를 받았다. 무려 네 마리나 묶인 사두마차였는데, 얼마나 신경을 썼으면 모용선화가 원래 타던 것보다도 좋았다.
팽영권이 달 밝은 하늘을 보며 물었다.
“시간이 많이 늦었는데, 하루 묵고 가는 게 어떻소?”
“저는 근처 객잔에서 머물 테니 모용 소저만 좀 재워주십시오.”
“최 대협은 왜……?”
차를 거절한 것과 마찬가지였다.
굳이 신세를 지기 싫었다.
무신은 ‘그냥 객잔이 편합니다’ 하고 대강 넘기며 몸을 돌렸다.
떠나가는 그의 팔을 누군가가 붙잡았다.
모용선화였다.
그녀가 작게 속삭였다.
“저도 같이 갈까요?”
같이 자잔 뜻은 아니었다.
객잔만이라도 함께하잔 뜻이었다.
하지만 자신의 아들과 혼인 관계였던 여인이 이 야밤에 외간 남자와 동행하는 것을 팽영권이 좋게 볼 리 만무했다.
물론 무신은 상관없었다.
모용선화가 문제였다. 괜히 밉보였다가 모용세가로의 자원이 도로 끊기면 곤란해진다.
무신은 똑같이 조용히 속삭였다.
“정중히 사양하겠습니다.”
“네…….”
대답은 했으나 그녀의 얼굴은 왜인지 시무룩했다.
무신은 의문스러웠다.
뭐가 그리 미안하단 말인가.
“안 미안하셔도 됩니다.”
“그게…….”
“예?”
“아니에요…….”
무언가 체념한 듯 모용선화는 더 이상 입을 다물었다.
싱거운 여자라고 생각하며 무신은 그대로 팽가를 빠져나갔다.
이후 그의 행선지는 말한 대로 근처 객잔이었다.
깔끔한 시설에 주정뱅이도 잘 없는 곳.
팽영권의 ‘하북에서 가장 좋은 객잔으로 안내해 주겠소’ 하는 말을 받았다면 정말 지금보다 더 좋았겠지만, 어차피 오래 묵을 곳도 아니었다.
애당초 가부좌 틀고 앉아 운기조식만 치를 수 있다면 만족스럽기도 했고.
“우육면 좀 내와.”
“예.”
1층에서 간단히 허기를 달랜 후.
무신은 요 며칠 통 쓰지 못했던 백산자화신공의 운기에 들어갔다.
화르륵!
마치 불꽃이 일듯 그의 내공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발화점은 비단 단전만이 아니었다.
온몸이었다.
그는 금세 무아지경에 빠졌다.
미지의 세계에서 오색 빛깔 꽃이 피었다.
남들은 수년을 수련해도 보지 못한다는 것을 그는 일각도 안 되어 체험했다.
아니, 일각도 길었다.
백을 세기도 전에 그는 신검합일의 오의, 그리고 그 다음마저 밖으로 끄집어냈다.
그다음.
진정한 화경의 힘이라는 이기어검이었다.
신검합일과 달리 수년은커녕 십 수 년으로도 어림없는 것이지만, 이번에도 그에게는 식은 죽 먹기였다.
츠츠츠!
검이 허공에서 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 춤사위가 약 한 시진 동안 이어지고서야 그는 비로소 몸을 뉘였다.
반쯤 열린 휘장 사이로 몇 줌의 달빛이 들어왔다.
잠들기 좋은 시간이었다.
***
“어제 말씀드린 대로 내 무림맹과 논의해 마교와 담판을 지을 생각이오.”
이른 아침.
모용선화를 데리러 온 무신에게 팽영권이 그렇게 말했다.
무신은 현실적인 답을 내놓았다.
“마교를 상대로 그리 했다가는 많이 껄끄러우실 텐데.”
“그렇다고 이 일을 간단히 넘어갈 수는 없소.”
무신 또한 그 부분에는 동의했다.
아들.
제 피붙이가 죽었으니 껄끄럽고 어쩌고를 따질 상황이 아니었다.
설령 상대가 마물이었어도 마찬가지겠지.
하지만…….
‘간단히 못 넘어간다는 놈이 왜 나한테만 관심을 주셨대?’
무신은 기가 차서 웃었다.
확실히 어제의 팽영권은 제 아들 머리통이 아닌 무신에게 온 신경을 기울였었다.
“그럼 살펴 가시오, 최 대협.”
“예.”
“다음에 보거든 꼭 편히 말해주길 바라오.”
보거든이 아니라 아주 먼저 찾아올 기세였다. 팽영권의 두 눈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무신은 ‘그러지요’ 하고 건성으로 답하며 조신하게 서 있는 모용선화를 쳐다보았다. 새벽이슬이라도 먹었는지 얼굴에 광채가 났다.
“피부가 원래 그리 좋으셨습니까?”
“그, 그런가요?”
모용선화가 양손을 두 뺨에 갖다 대며 무신의 눈을 피했다.
무신은 제 말이 무슨 파장을 낳는지도 모른 채 느낀 그대로 줄줄 읊었다.
“어제는 백설기 정도였는데, 오늘은 거기에 꽃장식이 얹어진 것 같습니다.”
“아, 아니에요. 꼬, 꽃까지야.”
“하기야 모용 소저 자체가 꽃인데 더 이상 얹어질 게 뭐 있겠습니까?”
이번에도 빈말은 아니었다.
확실히 모용선화의 용모는 출중했다. 길 가다 마주치면 꼭 뒤를 돌아볼 만큼.
무신은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어제 본 사두마차가 바로 앞에 대기 중이었다.
“자, 타시지요.”
“네, 네.”
모용선화가 무신의 손을 잡고 황급히 마차에 올랐다. 홍당무를 통째로 삼켰는지 뺨이 울긋불긋했다.
무신은 마차 대신 말을 택했다.
편의야 당연히 전자가 압승이지만, 이동 중에 적이 나타나면 가장 먼저 튀어 나아가야 할 무인이 편히 앉아가는 것은 우스운 일이었다.
“하, 한 방에 나가떨어졌어!”
“저, 저게 가능한 일이야?”
쉴 새 없이 내달리던 마차가 하북 북부에 다다라 돌연 멈춰 섰다. 관도 한편의 공터에 족히 일백은 될 듯한 인파가 몰려 있었다.
마침 점심때가 되기도 해서 무신은 말에서 내렸다.
보아하니 근방 무인들이 모여 힘 대결을 하는 모양이었다. 하북에선 흔한 일이었다.
“저자가 지금 몇 명을 꺾은 거야?”
“어제까지 해서 스물은 되지.”
“스, 스물? 대체 뭐하는 사람이길래?”
“응? 저자를 몰라?”
“누군데?”
구경꾼들의 대화를 파고 들어가니 과연 덩치 좋은 무인 둘이 어깨를 맞댄 채 잔뜩 핏대를 세우고 있었다.
콰콰콰콰쾃!
그런데 보통 힘겨루기가 아니었다. 범인은 스치기만 해도 죽을 내공이 사방팔방으로 난무했다.
놀란 구경꾼들이 열댓 걸음도 더 뒤로 물러났다.
검이나 창 따위를 찬 무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자칫 스치기만 해도 골로 갈 그들의 내공을 맞는 자는 무신이 유일했다.
그리고, 곧 승자가 정해졌다.
“하북을 떠나려던 참에 한번 해보았는데, 별거 없구려. 너무 싱거워.”
게거품을 물고 쓰러진 상대를 뒤로 하며 승자는 계속해서 거드름을 피웠다.
“혹, 아직도 날 이겨보겠단 자가 있소? 이제 정말 떠날 터이니 나오려거든 지금 나오시오.”
무신은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남다르게 다부진 체격.
각진 턱.
작은 눈.
그자였다.
분명 그자였다.
허세란 허세는 다 부리는 저 성격마저도 해주에서 만났던 그때와 똑같았다.
무신은 번쩍 손을 들고 앞으로 나섰다.
“나와 한번 해보겠소?”
“이 상황을 보고도 설마 또 나서는 자가 있을… 허억!”
혓바닥을 날름거리며 다음 먹잇감을 노리던 맹수가 그 자리에서 망부석처럼 굳었다.
정말이었다.
다리에 힘이 안 풀린 게 다행이었다.
그리고 소리쳤다.
“최 소협!”
“하하, 오랜만이오.”
무신은 자신을 경의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승자… 아니, 장차 화열권(火裂拳)이라 불리게 될 이에게 다가갔다.
강호에 출사표를 던지던 날, 하북으로 갔던 하성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