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했더니 검신이었다 7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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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001회 작성일소설 읽기 : 회귀했더니 검신이었다 72화
표적
그날, 산서 서쪽 평야에서의 전투.
아무렴 폭혈단을 씹었다고는 해도 무기창은 혈교 내에서 서열이 그리 높지 않은 편이다.
그런 그에게 고전을 면치 못했다.
때마침 유림의 검의 힘이 발동되지 않았다면 지금쯤 저세상에 가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도망쳤다면야 얼마든지 도망칠 수는 있었다.
하지만 졌을 것이란 게 중요하다.
당시의 상황만 놓고 보면 무신은 지금 결코 ‘재밌겠는걸’이라 할 입장이 못 되었다.
‘아니, 지금은 돼.’
지금의 무신은 당시의 무신이 아니었다.
하루도 거르지 않은 운기조식.
그리고 마물의 심장.
내공을 비약적으로 끌어 올렸다.
다시 무기창이 나타나 폭혈단을 씹는다 해도 손쉽게 처리가 가능하다.
‘혈교 교주가 적라성이었지.’
혈추귀(血追鬼)란 별호를 가진 자.
무신은 괴물 같았던 그의 모습을 상상하며 비좁은 골목을 향해 들어갔다.
행선지는 정해졌지만 걸음을 떼기엔 아직 이르다.
이것저것 준비할 게 많다.
그때.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웬 소년이 나타났다.
너무 작은 기운이라 쥐 새끼인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사람이었다.
무신은 허리를 반쯤 굽혀 벌벌 떠는 소년을 바라보았다.
“다 봤겠구나.”
“아, 아니요……! 저, 저는 아무것도……!”
“아니기는.”
모퉁이 하나만 돌면 석가장 무사들의 시체가 산더미였다. 못 봤으면 눈이 먼 것이요, 못 들었으면 귀가 먼 것이다.
무신은 소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물었다.
“혹, 네가 날 고발했느냐?”
“아니요! 안 했어요!”
죽기는 싫은 모양이었다. 소년은 그 말만큼은 똑 부러지게 잘도 말했다.
무신은 괜찮다는 듯 재차 물었다.
“날 발견하면 돈을 준다든?”
“저는 그냥 지나가다 여기 있었을 뿐이에요!”
소년은 강건하게 부정했다. 하지만 무신의 눈에는 변명 내지 회피로 보였다.
무신은 마지막으로 물었다.
“또 누가 돈을 준다고 하면 나에 대해 말하겠구나?”
“아, 아니래두요!”
무신의 얼굴이 순간 싹 굳었기에 소년은 이번만큼은 똑 부러지게 말하지 못했다. 미성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그리고, 거기까지였다.
무신은 더 물을 것 없이 소년을 죽였다.
범이나 멧돼지 따위보다 못한 어린 인간의 목숨은 목덜미 한 번 내려치면 금방이었다.
그라고 이렇게까지 잔혹하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회귀 전, 코흘리개 애에게 당해 목이 날아갈 뻔한 적이 있었다.
지금도 그렇게 되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다.
내일 아침 석가장 무사들과 함께 치워질 소년을 뒤로하며 무신은 다시 골목 속으로 들어갔다.
***
“허대건이 나선다고?”
원로들만이 자리한 혈교 본거의 집회장.
혈교 서열 1위의 고수가 ‘일개 검객’ 한 명을 잡으려 움직인단 말에 그곳이 들썩였다.
“허대건이라면 응당 그놈을 처리하겠으나… 너무 위상 떨어지는 일 아니오?”
“나도 같은 생각이오. 하룻강아지 잡자고 범이 나서는 꼴이니.”
“나 원 참, 무기창이 당했다고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대부분은 이번 일에 대해 불만을 가졌다.
하지만 이견도 있었다.
“그 검객이 하룻강아지는 아니지.”
“허대건에 비해 그렇다는 거잖소.”
“그렇게 따져도 하룻강아지라고는 볼 수 없소.”
나이 지긋한 원로들 중에서도 유독 늙은, 광대에 검버섯이 잔뜩 핀 노인이었다.
나성로.
그가 복잡한 얼굴로 말을 이어갔다.
“무기창은 항시 폭혈단을 들고 다니오. 그것을 쓰고도 졌을 경우를 생각해 보시오.”
“크흠.”
시끌벅적하던 집회장에 순간 헛기침만 맴돌았다.
하지만 이내 누군가 반박했다.
“무기창이 폭혈단을 씹어도 어차피 허대건보다 아래 아니오?”
“맞네, 맞아. 그게 중요하지.”
나성로가 ‘그렇소. 무기창이 그래봤자 당연히 허대건보다 아래겠지’ 하고 동조하며 말했다.
“허나 내 말은 결국 그만큼 무시 못 할 상대라 이 말이오. 그러니 허대건을 보내 깔끔하게 죽이는 편이 낫지.”
“아무리 그래도 우리의 위상이…….”
“내가 보기에는 적 교주도 그래서 허대건을 보냈지 싶은데.”
혈교 교주 적라성.
수틀리면 제 친지도 죽이는 냉혈한의 이름이 나오자 더 이상 반박하는 자가 없었다.
그래, 애당초 혈교 내 최고 권력자가 지시한 일이었다.
원로들이 왈가왈부할 게 못 되었다.
나성로가 ‘아차차’ 하며 말했다.
“그나저나 그거는 아시오들? 허대건이 이번에 새로 만든 활강시를 데려간다던데.”
“그 검객 잡는 데에 말이오?”
나성로가 고개를 끄덕이자 원로들이 그제야 반색했다.
“그러면 그렇지! 활강시를 시험해 보려는 것이었구만!”
“위상이고 나발이고 오히려 잘됐어! 그 정도 실력자면 활강시의 완성도를 충분히 알아볼 수 있겠지!”
“헌데… 강시 제작은 금술 중에서도 금술이라 들키면 각지에서 가만 안 있을 텐데… 괜찮다 하오?”
걱정 많은 원로 하나가 찬물을 끼얹었으나 고민할 필요도 없는 문제였다.
나성로가 그에 대한 답을 했다.
“활강시란 산 자를 강시로 만드는 주술이잖소? 면밀히 뜯어보지 않은 한은 그냥 사람이나 다름없어.”
“싸워보면 티가 나지 않소?”
못 참겠다는 듯 다른 원로가 끼어들었다.
“당연히 티가 나겠지. 헌데 싸워서 질 리가 없잖소? 그러면 우리가 활강시를 쓴단 말을 전할 사람도 없는 거요.”
“그러게 말이오. 왜 우리가 진다는 식의 전제를 까는지.”
다시 나성로가 입을 열었다.
“진다는 식의 전제를 깔지 않아도 우리가 활강시를 쓴단 말이 전해질 가능성은 있소.”
“가능성? 무슨 가능성?”
“그 검객이 싸우다 도주하는 게지.”
“나 원로 현역 때도 허대건에 활강시까지 갖춘 혈교의 타격대를 상대로 줄행랑을 치진 못할 거요.”
나성로가 껄껄 웃으며 말했다.
“그냥 해본 소리요 설마하니 도주할 수 있을까.”
나성로의 말을 마지막으로 사안에 대한 논의는 끝이 났다.
물론 논의랄 것도 없었다.
굳이 허대건까지 보내야 하느냔 투정에 가까웠다.
그게 교주의 지시였고, 또 활강시를 시험해 보기 위한 작업이란 사실에 오히려 기대를 하게 된 것이고.
하지만 그들은 몰랐다.
오늘 이 사안이 이렇게 가벼이 넘길 사안이 아니란 것을.
***
혈교의 본거는 흑룡강에 있었다. 산서성에서는 제법 먼 여정이었다.
이른 아침.
무신은 운기조식으로 하루를 시작하며 본격적으로 그 준비에 나섰다.
여정이 길다 하여 거창할 것은 없었다.
그간 땀에 쪄든 무복을 세탁하고, 파천의를 손보고, 흑라신검을 보수하고, 먹을거리를 사고…….
실상은 달랐다.
막상 준비하려니 한도 끝도 없었다.
하지만 어디 뒷동네 마실 나가는 것도 아니고 무려 혈교였다. 만반의 채비를 갖추지 않으면 송장 신세를 면치 못할 것이다.
“남궁세가가 절 쫓고 있다고요?”
“아니, 그게 저…….”
정신없이 시장을 활보하던 무신이 산서 분타의 분타주 학도건을 만난 것은 해가 질 무렵이었다.
만났다기보다는 학도건이 은밀하게 그를 찾아왔다.
“정확히는 그때 그 일을 저지른 자를 찾기 위해 혈안이 돼 있습니다.”
그때 그 일.
남궁성, 그리고 남궁선검대를 죽인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무신은 ‘그렇겠지요’ 하며 말을 받았다.
“저인지 몰라야 정상이지요.”
“예…….”
“헌데 왜?”
“벌써 몇 개월째 저러고 있으니 혹여나 밝혀질까 우려되어서… 이렇게 찾아뵈었습니다.”
“아, 저는 괜찮습니다.”
무신은 손까지 휘휘 내저었다.
“밝혀지면 또 어떻습니까?”
“예?”
“농입니다, 농. 절 쫓는다니 저도 식겁했습니다.”
단신으로 혈교도 치겠다 마음먹을 만큼 강해진 무신이었지만, 남궁세가는 아니었다.
혈교와 세력 자체만 비슷할 뿐 핵심 인물들의 수준은 천양지차.
무림맹주와도 자웅을 겨룬다는 남궁천만 보더라도 말이다.
물론 그 무시무시한 곳을 상대로 칼부림을 일으킨 무신은 정신 줄 한 부분이 끊겨 나간 게 분명했다.
학도건이 어색하게 웃으며 물었다.
“헌데 정말 혼자 그 일당을 전부 죽이신 겁니까?”
“예.”
“…처음 만나뵐 때부터 동경했습니다.”
앞으로 잘 봐달란 아양이었다.
무신은 ‘별말씀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배웅하려던 학도건이 무언가 생각난 듯 급히 말했다.
“저희들 입은 걱정 마십시오. 절대 누설할 일은 없…….”
“당연히 믿습니다.”
무신이 말하는 것은 단순히 신뢰 따위가 아니었다.
그는 각 분타, 그러니까 개방에서 가장 민감하게 작용될 부분을 걸고 넘어졌다.
“누설하면 배 장로 뒤통수를 치겠단 건데 설마 그러겠습니까? 안 그래요?”
“예, 예예! 맞습니다!”
학도건이야 배춘삼을 들먹이지 않아도 관짝에 들어갈 때까지 함구할 모양새였지만.
무신은 가벼운 마음으로 산서 분타를 나섰다.
벌써 해가 져 있었다.
‘1552년 3월 17일…….’
객잔으로 돌아온 그는 날짜를 헤아렸다.
목청수의 수련을 거치며 그새 한 해가 훌쩍 지났고, 그로도 모자라 다음 해의 한 분기도 지났다.
그의 나이도 이제 27세.
서른을 바라보는 나이였다.
‘나이 먹은 것 같지도 않군.’
망령의 숲에서의 그는 22만 살이 넘었다.
27세는 그저 우스웠다.
하지만 나이만 먹는 것과 세월까지 같이 먹는 것은 엄연히 다른 문제였다.
언젠가 이 짱짱한 피부에 주름이 죽죽 새겨질 것이다.
그는 ‘섭리를 두려워할 필요는 없지’ 하고 생각하며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혹, 나중에 가서 대수롭지 않게 넘기지 못하더라도 괜찮았다.
반로환동.
그것이면 지금보다 더 짱짱한 피부를 가질 수도 있었다.
‘그나저나 1552년 3월 17일이면… 곧 그 일이 터지겠는데.’
1552년 3월 25일의 일이었다.
모용세가의 육녀 모용선화가 정략결혼을 위해 하북팽가의 사남 팽방호와 하북으로 넘어가던 중, 근방 녹림 세 채의 급습을 받았다.
결과야 뻔했다.
두 남녀를 비롯해 호위 무사들까지 전부 죽었다.
팽방호가 강호에서 알아주는 신성이었고, 또 그와 모용선화의 호위 무사들이 어떤 실력을 가졌든 그것은 중요치 않았다.
녹림 72채.
개중 세 채가 움직였으니 그들로서는 막을 방도가 없었다.
‘팽가는 별로 내키지 않지만, 모용가는 품어두면 분명 도움이 돼. 지금이야 오대세가에서 밀려나 있어도 차후 다시 옛 위상을 되찾으니까.’
무신은 운기조식으로 하루를 마무리하며 생각을 굳혔다.
여건이 되거든 그 일에 끼어들기로.
‘정략혼인 중에 있는 이들을 구해줬으니 은인 정도가 아니라 숭배받을지도 몰라.’
과장된 해석은 아니었다. 모용세가는 특히나 은혜를 중요시하기로 유명한 집안이었다.
다만, 문제가 있었다.
‘3월 25일까지 거기에 도착하느냐가 관건인데.’
무신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때까지 도착하지 못하면 그냥 도착하지 못한 것이다. 모용세가와 인연을 트면 좋다 뿐 무조건 틀어야 한다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이부자리를 펴고 몸을 뉘였다. 온종일 시장을 활보했더니 금방 물밀 듯 잠이 몰려왔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이른 아침이었다.
3월 18일.
그 일이 있기 정확히 일주일 전.
그는 마구간에서 갈기가 잘 뻗은 말을 한 필 구입해 산서 서부를 향했다.
“거기! 잠깐 정지!”
거침없이 달리던 말이 웬 무사들에 의해 멈춰졌다.
백색 무복에 허리춤의 칼.
거기까지는 흔하디흔한 검객이었다.
그런데 그들의 왼쪽 어깨에 강호인이라면 누구에게나 익숙할, 무신에게는 특히 더 익숙할 문양이 박혀 있었다.
남궁세가.
분명 그곳의 문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