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레나, 이계사냥기 18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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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74회 작성일소설 읽기 : 아레나, 이계사냥기 188화
갈색산맥에 전운이 감돌았다.
교역소 출입은 베테랑 엘프 전사 몇 명에게만 허용되었고, 갈색산맥 내부에서도 어린 엘프와 여성 엘프는 안전한 마을 인근만 다니도록 하였다.
데릭을 비롯한 베테랑 엘프들은 철통같이 갈색산맥 구석구석을 다니며 정찰을 시작하였다.
헤인스 영지에 교역소가 생기고서 엘프와 인간 간의 활발한 거래가 이루어진 지 2년도 채 지나지 않았다.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동안 갈색산맥의 엘프들은 부흥기를 맞이하였다.
교역소를 통해 인간과 거래하면서 엘프들이 사회적인 영향력을 발휘하게 되었고, 노예로 잡혀 있던 동족 엘프들도 거래를 통해 많이 구하게 되었다.
그렇게 구한 엘프들은 마을 구성원이 되어서 갈색산맥의 엘프들 전력이 크게 확장되었다.
덕분에 갈색산맥은 역사상 가장 많은 숫자의 엘프가 모여 살게 되었다.
세 그루의 생명의 나무에서 뿜어져 나오는 풍성한 대자연의 기운을 받으며, 엘프들은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엘프들로서는 만들기 어려운, 고도의 열처리 기술과 마법이 적용된 무기류도 인간 상단으로부터 구매하여 전사들에게 지급되었다.
데릭에게도 경량화와 내구도 강화가 적용된 마법검 두 자루가 지급되어서 전보다 훨씬 강한 힘을 발휘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제 평화가 끝나고 다시 시련이 도래하려 하고 있었다.
‘부흥도 위기도 모두 인간에게서 비롯되는군.’
데릭은 베테랑 엘프 전사들 몇 명과 함께 정찰을 하며 생각했다.
갈색산맥의 생명의 나무가 세 그루가 된 것은 인간인 킴의 도움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위협받는 처지에 놓은 것 또한 인간들 때문.
‘우리들 엘프는 인간을 어떠한 태도로 받아들어야 하는가?’
인간이지만 엘프들의 친구인 킴은 인간과 교류하라 권했다.
적극적으로 교류하면서 친구가 될 수 있는 인간과 그렇지 않는 인간을 구별하라고 조언했다.
그 말대로 갈색산맥의 엘프들은 킴과 오딘이라는 우방이 생겼고, 수많은 상단과 정기적으로 교류를 하며 필요한 것을 주고받는 사이가 되었다.
그로 인하여 일어난 변화는 분명 좋은 것이었다.
노예로 잡혀 있었던 엘프들이 다수 해방되었고, 마법이 걸린 무기들을 손에 넣으면서 엘프 전사들은 더더욱 강력해졌다.
하지만 그것은 마치…….
‘우리들도 인간 사회의 구성원이 된 것 같지 않은가.’
누구보다도 긴 세월을 산 엘프라고 자부하는 데릭은 이게 좋은 변화인지 나쁜 변화인지 판단하기가 어려웠다.
그렇게 점점 엘프들의 생활 방식에 인간의 영향이 강해져 가는 것이 낯설었다.
하지만 그것이 엘프들이 이 세상에서 도태되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이라면 받아들여야 한다.
‘내가 고민한다고 될 일도 아니고.’
데릭은 쓸데없는 상념을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엘프가 앞으로 인간 사회의 구성원이 되면서 어떤 변화를 맞이하더라도, 이곳 갈색산맥만은 엘프들만의 성지로서 지켜내야 한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었다.
“아직까지는 별다른 징후가 없군.”
한 엘프가 말했다.
데릭과 비슷한 연배의 베테랑 엘프 전사였다.
데릭은 고개를 저었다.
“놈들은 징후를 드러내고 찾아오지 않아. 다른 곳으로 가세.”
“그러지.”
그들은 갈색산맥의 서쪽 끝자락을 향해 빠르게 이동했다.
주기적으로 정령을 소환하여서 주변을 탐색하며 쉬지 않고 달리는 그들.
갈색산맥을 수호하려는 그들의 의지가 얼마나 강력한지 알 수 있는 모습이었다.
장시간에 걸친 살인적인 일정의 정찰이었지만, 날카롭게 벼려진 데릭의 집중력은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흠칫!
데릭의 발걸음이 우뚝 멎었다.
그 때문에 함께 움직이던 베테랑 전사들도 덩달아 멈췄다.
“무슨 일인가?”
“왜 그래?”
데릭은 대답 대신 남쪽 방향을 응시했다.
“그쪽에 뭔가가 있는 건가?”
“우리는 못 느꼈는데?”
의문을 표하는 동료들.
데릭이 말했다.
“먼저들 가게. 확인하고 뒤따르지.”
“그렇게 하지.”
“천천히 따라오라고.”
베테랑 엘프들은 먼저 갈 길을 떠났다.
홀로 남겨진 데릭은 미세한 기척이 감지된 남쪽으로 움직였다.
몹시도 미세한, 하지만 불길한 느낌이 드는 어떤 감각.
감각을 매우 예민하게 곤두세우고 있던 데릭만이 간신히 알아차릴 수 있었던 미약한 존재감이었다.
수풀을 해치고 나아가자 마침내 데릭은 무언가를 발견할 수 있었다.
녹색의 작은 구슬이 허공에 둥실 떠 있었다.
녹색 구슬은 마치 눈알처럼 데릭을 응시했다.
데릭은 녹색 구슬을 똑바로 노려보았다.
“네놈은 누구냐?”
데릭이 물었다.
녹색 구슬은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하지만 데릭은 상대가 자신의 말을 듣고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네놈이 카자드 푼 아만이냐?”
-들켰군.
요사스러운 흑마력으로 울려 퍼지는 음성. 하지만 낭패라기보다는 어쩐지 유쾌해하는 목소리였다.
데릭은 피부로 느껴지는 흑마력의 기척에 눈살을 찌푸렸다.
-나의 탐스러운 양식을 직접 눈으로 보고 싶었는데 말이지. 내 심연의 눈동자의 기척을 알아차리다니 제법 대단한 엘프로군.
“양식?”
-생명이 나무 말이다.
데릭의 얼굴에 노기가 드러났다.
“그것이 너의 양식이란 말이냐?”
-그렇다.
“그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알고 있느냐?”
-안다.
“그런데도 그것을 노린단 말이냐?”
-그렇게 됐군.
“그렇다면 본인 스스로가 올바르지 않다는 것은 자각하고 있겠군.”
-너희에게 피해가 간다고 해서 그것이 그릇된다는 뜻이 되지는 않지.
“뭐라고?”
-살기 위해 다른 짐승을 잡아먹는다고 그것이 죄가 되지는 않지. 애당초 옳고 그름이라는 것은 기준이 없는 것이니까.
“주절주절 헛소리를 늘어놓는 걸 보니 잘못을 알긴 아는 모양이군. 난 너 같은 궤변론자를 싫어한다.”
-…….
“우리의 생명을 너에게 내어줄 것 같으냐? 기필코 네놈을 내 손으로 없애겠다.”
-흐흐, 기대하지.
슈칵!
일순간, 데릭의 오른손에서 섬광이 뿜어졌다.
검집에서 마법검이 뽑혀 휘둘려지기까지가 물 흐르듯 해 빛처럼 보였던 것이다.
깔끔하게 토막이 난 심연의 구슬은 가루처럼 소멸되어 버렸다.
“카사.”
불의 거인 같은 모습의 카사가 소환되었다.
데릭이 말했다.
“앞서간 동료들에게 돌아오라고 전해다오. 마을로 가야겠다.”
고개를 끄덕인 불의 거인은 쏜살같이 서쪽으로 날아갔다.
데릭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정말 징후를 드러내다니.’
***
울펜부르크 백작가에서 시험자들과 함께 머무르고 있을 때였다.
아렌드 왕실에서 알세르폰 3세의 어명이 적힌 서신이 도착했다.
[아만 제국군이 본국을 향하여 진군을 시작한 바, 이제 전쟁은 피할 수 없는 기정사실이 되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이로 인하여 명하니, 울펜부르크 백작과 그 우방들은 본국을 수호하기 위해 지정된 날짜에 지정된 장소로 집결하라.]
우방들이란 시험자들을 뜻하는 말이었다. 알세르폰 3세는 시험자에 대해 정확히는 모르지만, 오딘의 주변에 신비한 강자들이 많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이제 슬슬 가야 할 때가 되었구려.”
오딘이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작전대로 되기를 기대해야죠.”
오딘은 시험자들을 모두 불러 모아 왕의 서신에 대해 알렸다.
다 함께 전쟁에 참여하는 문제는 사전에 동의되었으므로 이제 와서 이견이 생길 일은 없었다.
다들 서신에 적힌 집결지를 향해 출발하기로 했고, 나는 출발에 앞서 교신기를 꺼내 통신을 걸었다.
통신 대상은 바로 내 영지에서 군대를 조련하고 있는 레이먼 준남작이었다.
-킴 백작님?
“예, 교신기 사용법은 많이 익숙해지셨어요?”
-이제 그럭저럭 당황하지 않고 사용할 정도는 되었습니다. 세상에 이런 신기한 물건도 다 있었군요.
“하하, 다행이네요. 아무튼 저희는 전쟁을 치르러 떠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없는 동안 영지를 잘 부탁드립니다.”
-염려 놓으십시오. 짧은 시간이었지만 이제 우리 군대도 슬슬 훈련의 성과가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믿음직스럽네요. 그럼 또 연락드리겠습니다.”
-예, 백작 각하의 무운을 빌겠습니다.
“고마워요.”
연락을 마친 뒤 차지혜와 함께 떠날 차비를 간단하게 마쳤다.
나는 갈큇발 독수리 12마리를 모두 꺼냈다.
본래는 10마리였는데, 2마리를 얼마 전에 추가로 복종시켰다.
마스터 레벨이 되면서 동물조련 스킬로 복종시킬 수 있는 동물은 총 12마리로 늘어났었다.
2마리는 다른 종류의 동물로 길들일까 싶었지만, 고민 끝에 그냥 갈색산맥에서 다 자란 갈큇발 독수리 암수 한 쌍을 잡아 길들였다.
새로운 녀석들은 열한째, 열두째라 이름 지었다. 풀어 놓고 몇 개월간 잘 먹이니 성장촉진 스킬에 의해 덩치가 3배로 커졌다.
아무튼, 갈큇발 독수리 12마리는 전부 꺼내자 시험자들이 2명씩 올라탔다. 나는 차지혜와 함께 첫째 위에 올라탔다.
그러고도 미처 타지 못한 시험자들은 쭈뼛거리며 나에게 다가왔다.
“아, 진짜 꺼림칙한데.”
“정말 아무 이상 없는 거지?”
“거기서 숨을 못 쉬거나 하면…….”
겁먹은 그들의 심정을 내 어찌 이해 못하랴.
나는 한숨을 쉬었다.
“괜찮다니까요. 아까도 시범을 보여드렸고요.”
그랬다.
독수리에 타지 못한 이들은 내가 가공간에 넣어서 데려가기로 한 것이었다.
그들은 가공간에 들어간다는 사실에 무척 꺼림칙해했다. 그래서 차지혜를 가공간에 넣었다 꺼내며 시범을 보여줬음에도 여전히 불안해하는 눈치였다.
“자자, 이리들 오세요.”
“제길, 어쩔 수 없지.”
시험자들이 포기하고 한 명씩 다가왔다. 나는 그들을 차례로 가공간에 넣어버렸다.
그중에는 내심 거부감을 느꼈는지 가공간에 들어가지지 않는 여자 시험자도 있었다. 본인이 거부하면 내가 강제로 가공간에 넣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내가 째려보자 백인 여성 시험자는 찔끔했는지 어색하게 웃으며 사과했다. 나는 그녀까지 가공간에 마저 넣었다.
“그럼 출발합시다.”
이를 지켜본 오딘이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곤 갈큇발 독수리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12마리의 거대한 맹금류가 일제히 날갯짓을 하며 비상했다.
철새들처럼 쐐기 대형을 이룬 채 우리는 북서쪽으로 날았다.
이동 중에도 데이나는 노트북을 펼쳐놓고 정찰위성을 계속 컨트롤하는 여유를 보였다.
“아만 제국군의 병력이 북부 국경지대에 집중되고 있습니다. 물자 보급도 대대적으로 이루어지는 걸 보아, 확실히 침공이 곧 시작될 것 같습니다.”
데이나는 정찰위성으로 확인한 첩보를 우리에게 곧잘 알려주었다.
“계속 주시하시오. 대병력을 집결시켜 우리의 이목을 쏠리게 한 뒤에 다른 곳을 기습적으로 치는 전략을 구사할지도 모르오.”
오딘이 말했다.
오딘은 우리들 중 전쟁을 직접 지휘해 본 유일한 시험자였기에 이번 작전의 리더 역할을 맡았다. 명망이나 실력으로 봐도 부족함이 없었고 말이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대답한 데이나는 계속해서 노트북으로 정찰위성이 보내는 정보를 분석했다.
비행기 좌석도 아니고 살아 움직이는 갈큇발 독수리의 등 위인데도 저렇게 여유를 부리다니, 확실히 보통 인물은 아니었다.
“아름답습니다.”
문득 내 앞에 탄 차지혜가 말했다.
뒤에서 그녀의 허리를 꽉 끌어안고 있던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예? 뭐가요?”
그녀는 묵묵히 서쪽을 가리켰다.
서쪽 하늘로 노을이 붉게 물든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정말이네요.”
그 멋진 광경을 보고 있노라니, 어쩐지 먹먹한 기분이 들었다.
앞으로 펼쳐질 유혈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풍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