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레나, 이계사냥기 155화
무료소설 아레나, 이계사냥기: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860회 작성일소설 읽기 : 아레나, 이계사냥기 155화
“전…….”
나는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
뭐라고 말하면 좋을까?
알세르폰 3세는 시험자에 대해 전혀 모를 터였다.
정의를 위해서 대사제들의 음모를 막고자 한다!
……같은 소리는 알세르폰 3세도 믿지 않을 터였다.
생각 끝에 입을 열었다.
“저는 그냥 여행자일 뿐입니다. 엘프들의 친구가 되면서 정령술을 익혔고, 자연히 엘프들을 해하려는 흑마법사들과 적대 관계가 되었습니다. 어떤 정의감 때문은 아니지만, 저는 이상한 음모를 꾸미는 그들을 이 세상에서 없애고 싶습니다.”
“흐음…….”
알세르폰 3세는 가만히 나를 바라보았다.
잠시 후 그의 입이 열렸다.
“질문이 잘못됐군. 자네는 무엇을 원하나?”
“전 원하는 게 없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다니면서 싸우는데 원하는 것은 없다?”
“예, 없습니다.”
“무언가 사정이 있나 보군.”
“…….”
“하지만 자네의 목적이 무엇이든 짐과 관련된 정치적인 일은 아닌 것 같아. 그러니 자네의 정체를 더는 캐묻지 않겠네.”
“감사합니다.”
“하지만 그보다 짐이 더 궁금한 게 하나 있지. 지난 행보로 보아 자네는 분명 정체 모를 흑마법사 조직과 돌이킬 수 없는 적대 관계야.”
“맞습니다.”
“만약에, 아만 제국 전체를 적으로 돌려야 한다 해도 자네는 싸울 수 있나?”
“예? 아만 제국 전체를요?”
“그러네, 아만 제국 전체. 짐의 생각인데 흑마법사 무리와 싸우다 보면 결국은 아만 제국을 적으로서 맞닥뜨리게 될 거야.”
내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아만 제국 내에 해적들과 결탁하고 그들의 만행을 용인한 귀족은 많이 있었다. 그 덕에 해적단이 토벌되지 않고 승승장구했다.
그 점을 미루어 보면 흑마법사들과 연관된 귀족들도 아만 제국 내에 상당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걸 두고 아만 제국 전체를 적으로 돌려야 한다고 볼 수는 없었다.
“짐의 의견에 납득이 안 가는 모양이군.”
알세르폰 3세가 설명했다.
“아만 제국은 영토 전역을 술탄이 직접 다스리네. 술탄이 임명한 집정관을 파견해서 임기 기간 동안 관리하게 하지. 때문에 아만 제국은 다른 나라보다 훨씬 사회 전반에 대한 통제와 결속이 강하고, 그게 한때 대륙을 정복했던 원동력이네.”
“…….”
“해적과 아만 제국의 귀족과 흑마법사로 이루어진 거대한 카르텔이, 하필이면 다른 국가도 아닌 아만 제국에 존재한다는 게 이상하지 않나? 그런 카르텔이 아만 제국에서 술탄의 눈을 피할 수 있을까?”
알세르폰 3세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을 이었다.
“차라리 우리 아렌드 왕국에서 그런 놈들이 있다고 하면 믿지. 이 나라에 짐의 눈과 귀가 닿지 않는 곳은 아주 많으니까. 하지만 아만 제국은 술탄에게서 벗어날 수 있는 지역이 조금도 없어.”
“그렇다면 폐하께선 흑마법사와 술탄이 결탁했다고 보시는 겁니까?”
오딘이 물었다.
알세르폰 3세는 고개를 저었다. 이어지는 그의 대답은 충격적이었다.
“아닐세. 난 그 흑마법사 무리의 수괴가 바로 술탄이 아닐까 생각하는데.”
“옛?!”
우리는 깜짝 놀랐다.
“내가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몇 가지가 있어.”
알세르폰 3세가 말했다.
“아만 제국이 대륙 통일을 이룬 것은 3대 술탄인 카자드 푼 아만 시절이지.”
카자드 푼 아만.
나도 아레나에 관한 자료를 노트북으로 읽으면서 공부하면서 알게 된 이름이었다.
중국 역사로 치자면 진시황쯤 되는 어마어마한 인물이다.
그의 사후, 아만 제국이 분열되고 끝내 대륙이 다시 여러 나라로 갈라진 것까지도 진시황과 비슷했다.
다만 차이점이 있다면, 만리장성과 아방궁 등의 실정을 펼친 진시황과 달리 카자드 푼 아만은 그럭저럭 통치를 잘했다는 점이다.
“인류사 최고의 업적을 세운 그 카자드 술탄이 말년에 흑마법에 관심을 가졌다는 기록을 찾았네.”
“그게 정말입니까?”
놀란 오딘의 물음에 알세르폰 3세는 고개를 끄덕였다.
“흑마법사 문제가 터지고서 짐도 나름대로 마법사들과 학자들을 시켜서 조사를 했네. 그 덕에 얼마 전에 건진 사료지.”
“카자드 술탄만 한 인물이 말년에 흑마법에 손댈 이유가 무엇입니까?”
오딘이 물었다.
“모든 것을 이루었고 모든 것을 가진 사람이 늙어 죽을 때가 가까워지면 무엇이 간절해지겠나?”
“불노불사…….”
나는 진시황이 생각나서 중얼거렸다.
“맞네. 그래서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는 학문에 손을 댄 걸세. 죽어 무덤에 간 걸 보니 실패한 게 분명하지만, 지금의 흑마법사 조직이 거기서 출발했다고 추측할 수는 있지. 어떤가? 그럴듯하지 않나?”
“저 역시도 폐하의 추측에 동의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오딘이 동의했다.
나와 차지혜 또한 고개를 끄덕여 같은 생각임을 표했다.
아무리 사회적 인프라가 지구보다 턱없이 미흡하다지만, 흑마법사들이 저지른 짓거리는 너무 스케일이 컸다.
그 배후에 가장 강력한 나라의 군주가 있다고 한다면 모든 것이 맞아 떨어지는 것이다.
“이제 본론으로 돌아오지. 킴 준남작, 자네는 필요 시 아만 제국과 싸울 각오가 되어 있나?”
***
“아마 중국 시험단은 그 사실을 알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오딘이 말했다.
차지혜도 동의했다.
“리창위는 대사제 알란과도 교류를 했습니다. 시험의 존재나 우리의 신상 같은 정보를 넘겼다면, 그 대가로 알게 된 비밀도 있었을 겁니다.”
“비단 중국 시험단만이 아닐 거예요.”
내가 말했다.
우리는 현재 울펜부르크 백작가로 돌아가는 마차 안이었다.
결국 나는 알세르폰 3세로부터 백작의 작위와 영지를 하사받았다.
하사받은 영지는 예전에 오딘과 전쟁을 해서 끝내 패망한 바스티앙 자작가와 인접한 지역이었다.
본래 그 지역을 다스렸던 영주가문은 헤인스 자작가.
헤인스 자작가는 바스티앙 자작가와 사돈을 맺을 정도로 친밀한 관계였다고 한다.
하지만 바스티앙 자작가가 몰락하고, 그 영지를 울펜부르크 백작가가 송두리째 장악한 채 세력을 신장시키자 위협을 느꼈던 모양이었다.
그래서 결국은 영지를 왕실에 팔고 도망가듯 떠나버렸다.
알세르폰 3세는 인수한 지역을 나에게 하사했고 말이다.
동쪽과 북쪽으로는 울펜부르크 백작령.
남쪽으로는 갈색산맥.
하사받은 영지는 위치상 나에게 아주 용이했다.
주변이 내 우군으로 가득하니 안보는 문제가 없겠다.
아무튼 지금은 영지가 문제가 아니었다.
“타락한 시험자들은 중국에만 있는 게 아니죠. 대사제들은 리창위를 통해 시험에 대해 알게 됐고, 리창위처럼 타락한 다른 시험자를 포섭하려 들었을 거예요.”
“상당수 포섭했겠지. 뒷배가 아만 제국 같은 강대국이라면, 타락한 시험자들도 기꺼워했을 테고.”
타락한 시험자들로서는 아만 제국 같은 탄탄한 배경을 얻을 수 있으니 좋아했을 것이다.
술탄도 시험자들 같은 강력한 재원에게 엄청난 혜택을 기꺼이 제공했을 테고.
“상황이 골치 아프게 되었소. 공개적인 활동이 불가능한 범죄조직이 아니라, 아만 제국 왕실 같은 대륙 최강의 공권력을 가진 세력이 우리의 적이니 말이오.”
“타락한 시험자만 그들과 결탁한 게 아닐 수도 있고 말입니다.”
차지혜가 거든다.
오딘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찌 되었든 김현호 씨에게 국왕이 작위와 영지를 하사한 것은 그 일에 대비한 것이오. 아만 제국이 준동할 시에 그에 맞설 수 있는 세력을 김현호 씨가 구축하기를 원하는 거요.”
“갈색산맥의 엘프들을 생각하고 있겠죠?”
“그 점 역시 크겠지. 최근 왕도 지크프리트에서 엘프 노예에 대한 단속이 강화된 점도 지금 상황과 무관치 않을 것이오.”
나쁘지 않은 거래였다.
나는 어차피 시험 때문에 흑마법사들과 싸워야 한다. 그 배후에 아만 제국이 있다 해도 말이다.
갈색산맥의 엘프들 입장에서도 생명의 나무를 해하려 드는 흑마법사들에 대항해야 하고.
알세르폰 3세가 암묵적으로 제안한 이 협력 관계는 모두에게 이로운 것이었다.
“그나저나 영지를 키우는 일도 문제이겠군. 당신이 받은 그 지역은 인구도 적고 딱히 특산물도 없어 성장성이 매우 낮소.”
“그런가요?”
“헤인스 자작가가 영지를 포기한 데도 다 이유가 있소. 딱히 애착이 가는 땅이 아니었거든.”
그래서 정세가 불리하게 돌아가자 돈 받고 팔아넘겼다는 것이군.
영지를 사고파는 거래가 아레나에서는 그리 특별한 일이 아닌 모양이었다.
울펜부르크 백작가에 돌아와 여장을 풀고 쉬면서 나는 차지혜와 이야기를 나눴다.
“목축은 어떻습니까?”
“목축이요?”
“현호 씨 스킬이라면 목축으로 영지를 성장시킬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생각해 보니 그랬다.
동물조련 스킬은 10마리라는 제한이 있지만, 특수스킬 성장촉진은 제한 없이 3배 빠르고 크게 성장시킬 수가 있다.
내가 목장을 키우면 그야말로 괴물에 가까운 우량 가축들이 탄생하는 것이다.
……가만?
‘괴물?’
순간 내 머릿속에 묘한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동물들을 몇 쌍 지구로 데려가서 목축을 할까?’
아레나의 동물들은 마정을 품고 있다.
외딴섬 같은 곳에서 번식시키면 굳이 시험자를 통하지 않아도 마정을 얻을 수 있게 된다.
그렇다면 정부나 진성그룹도 만족하고 시험 클리어를 지원해 줄 것이다. 마정을 안정적으로 공급받을 수만 있다면, 굳이 시험자에게 계속 위험을 강요할 필요가 없어지는 것이었다.
‘한번 시도해 볼 가치가 있겠는데?’
나는 이 의견을 차지혜에게 들려주었다. 그녀 또한 동의했다.
“나쁘지 않은 생각입니다. 어쩌면 우리나라 정부와 진성그룹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자본가를 한편으로 만들 수 있는 카드도 될 겁니다. 어쩌면 현호 씨로 인해 장차 산유국과 같은 지위를 얻게 될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산유국이라니!
상상만 해도 대단하군. 그럼 난 완전 갑부가 되겠는데.
아무튼 일단 시도는 해볼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일단 번식력이 높고 헤엄을 못 치는 동물을 찾아봐야겠네요.”
전 지구에 아레나에서 데려온 동물이 퍼져 생태계가 망가지는 걸 막으려면 외딴섬에 가둬놓고 키워야 하니까.
***
“이야, 오셨어요?”
오늘은 요란법석하지 않게 우리를 맞이하는 아기 천사였다.
아기 천사는 재수 없게 실실 웃으며 말했다.
“재미있는 시도를 하려고 하네요.”
가공간에 포획해 놓은 동물 암수 세 쌍을 말하는 듯했다.
“왜, 안 되냐?”
“아뇨. 습득한 스킬로 무엇을 하든 시험자의 자유죠.”
“뭘 해도 허용된다고?”
“네.”
아기 천사는 씨익 웃으며 말을 이었다.
“여태껏 시험자 김현호는 시험을 클리어하면서 우리가 길을 딱 하나만 제시했다고 생각하셨죠.”
“그래, 사실이잖아.”
“천만에요. 선택의 기로를 주었을 뿐이죠. 길을 선택하는 건 언제나 시험자, 즉 인간의 몫이에요.”
아기 천사는 날개를 파닥거리며 점점 나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그리고 의미심장하게 들리는 한마디를 덧붙였다.
“아셨죠? 중요한 건 김현호의 판단입니다. 시험에서 가장 중요한 건 바로 그거예요.”
“시험의 목적을 클리어하는 게 아니고?”
내가 물었다.
아기 천사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시험의 문을 소환했을 뿐이었다.
나는 더는 대답을 듣지 못하고 차지혜와 함께 시험의 문을 통과했다.
그렇게 9회차 시험이 종료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