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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레나, 이계사냥기 154화

무료소설 아레나, 이계사냥기: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조회 863회 작성일

소설 읽기 : 아레나, 이계사냥기 154화


나는 내가 영주가 될 것 같다는 소식을 차지혜에게 자랑했다.
하지만 차지혜는 늘 그렇듯 무덤덤한 반응이라 나를 재미없게 했다.
“그렇습니까. 잘됐습니다.”
“…….”
“기반이 생겼으니 앞으로 시험에 유리한 측면이 더 생기…… 왜 그러십니까?”
“몰라서 물어요?”
“예, 몰라서 묻습니다. 왜 그렇게 심통이 난 표정이십니까?”
“제가 이렇게 기뻐하는데 같이 기뻐해 주면 얼마나 좋아요?”
내 딴죽에 이번에는 차지혜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흐흐, 당황했군.
내색하진 않지만 난 알아차릴 수 있었다. 옆에 붙어 지낸 시간이 좀 길어야지.
“그런 일에 익숙하지 않습니다. 죄송합니다.”
“익숙하지 않으면 연습을 하면 되겠네요, 그죠?”
“……그게 무슨 뜻이십니까?”
“말 그대로예요. 자, 어서 기뻐해 주세요.”
“…….”
차지혜의 무표정에 당혹이 더 두렷하게 드러났다.
“손뼉 치면서 영주님이 되셨다니 너무 기뻐요, 축하해요, 하고 영혼을 담아 소리쳐 보세요.”
“싫습니다.”
“저를 위해 기뻐해주는 게 싫다고요?”
“그게 아니라…….”
“에이, 됐어요.”
나는 고개를 돌려 삐진 척을 했다. 그러자 우물쭈물하던 차지혜가 나직이 입을 열었다.
“2시간.”
“3시간.”
“좋습니다.”
나는 차지혜의 머리를 쓰다듬기 시작했다. 차지혜는 무언가 불만 가득한 눈빛이 되었다.

***

나는 오딘이 있는 아렌드 왕국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일부러 아젠 연대장에게도 작별 인사를 하지 않고 훌쩍 떠나버렸다.
아만 제국에 있어봐야 좋을 게 없다는 예감이 들어서였다.
나에 대한 소문이 널리 퍼졌다면, 아만 제국 왕실에도 전해졌을 터. 그럼 술탄이 나를 부를지도 모른다. 아니, 그럴 가능성이 농후하다.
하지만 난 그게 싫다.
귀찮은 것뿐만이 아니라, 아만 왕실에 해적단·흑마법사 조직 등과 결탁한 인간들이 우글거릴지도 모르는 노릇이었다.
그런 복마전 같은 곳에 내 발로 기어 들어갈 까보냐?
우리는 MSM-2를 타고 빠르게 아렌드 왕국으로 향했다.
운전을 하며 돌아가는 길에 나는 차지혜와 영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사람들을 다스리는 일인데 역시 힘들겠죠?”
“계급사회이기 때문에 생각처럼 어렵지 않을 겁니다. 대체로 열악한 여건에 살고 있음에도 아레나의 평민 이하 계급들은 곧잘 순응하는 편입니다.”
“그럴 수도 있겠네요.”
나는 라이칸스로프 실버 씨족에게 사육당했던 마을 주민들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괴물들에게 길들여져 가축 취급을 당한 삶이라니.
자유와 인권에 대한 개념이 있는 현대 지구인으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순응이었다.
그래도 세금 걷고 일처리 하려면 힘든 일이 많겠지? 사람들도 통제해야 하고…….
조직생활이라고는 학교와 군대밖에 없었던 나로서는 영 불안했다.
난 물끄러미 차지혜를 바라보았다.
“만약에 저 영주 되면 도와주실 거죠?”
“물론입니다.”
흐흐흐, 그럼 됐어. 차지혜라면 이런 일을 똑 부러지게 잘 하겠지.
“아예 제 부인이 되시는 건 어때요?”
“청혼입니까?”
“아레나에서요. 제가 영주, 지혜 씨는 영주 부인. 그러면 제 영지를 다스릴 지위가 확보되잖아요.”
“굳이 그럴 필요가…….”
“현재 아레나에서 지혜 씨는 오딘에 충성하는 기사의 신분으로 되어 있잖아요. 그런데 제 영지에서 통치에 관여하면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이상해질 수 있죠.”
즉석에서 급조한 핑계인데도 말이 청산유수로 나온다.
“게다가 현실에서 결혼은 쉽게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지만 아레나에서는 상관없잖아요. 어때요?”
“그, 그게…….”
놀라운 일이었다.
저렇게 말을 더듬는 차지혜의 모습은 처음이었다. 거기에 저렇게 빨개진 얼굴이라니.
‘내가 실수를 했나?’
다른 여자도 아닌 차지혜가 저런 반응이라니. 혹시 결혼이라는 게 차지혜에게 굉장히 중요한 의미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죄송해요. 제가 너무 경솔하게 제안을 했나요?”
“아, 아닙니다.”
“그런데 왜…….”
“현실은 아니지만 가족이 된다는 게 조금 이상한 기분이었습니다.”
“아…….”
나는 가족에 대한 의미가 남다른 차지혜의 입장을 생각지 못했다.
조금 미안해져서 나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운전을 하던 차지혜가 잠시 후에 입을 열었다.
“좋습니다.”
“네?”
“영주 부인이 되겠습니다.”
차지혜는 가공간에서 목각반지를 꺼냈다.
생명의 나무로 만든 선물. 바로 엘프들이 선물해 준 결혼반지였다.
나는 뛸 듯이 기뻤다.
나도 가공간에서 목각반지를 꺼내 손에 꼈다.
나는 씨익 웃었고, 그녀도 오랜만에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이번 시험 최고의 보상이었다.

***

울펜부르크 백작가.
사전에 교신기로 여러 차례 연락했던 터라 도착했을 즈음 오딘과 마리가 마중을 나왔다.
“현호!”
어디서 튀어나왔는지 마리가 벼락같이 내 품에 뛰어들었다.
늘 그랬듯 포옹해 주었지만 나는 못내 차지혜의 눈치가 보였다. 마리 요한나 이 여자도 서둘러 선을 그어야 할 텐데 큰일이다.
“안녕하십니까.”
다행히 차지혜는 아무렇지 않은 듯 인사하며 마리의 머리로 손을 가져갔다. 쓰다듬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흥.”
마리는 새침하게 고개를 홱 돌렸다. 그 바람에 쓰다듬기에 실패한 차지혜는 아쉬운 듯 손을 거두었다.
마리가 귀여워서 좋다는 게 진심인 모양이었다.
우리는 울펜부르크 백작가 저택 안으로 들어가 응접실에서 식사를 했다.
내가 가공간에서 따끈따끈한 피자 두 판을 꺼내자 오딘도 마리도 반색을 하며 좋아했다.
드넓은 가공간을 가진 나이기에 보관할 수 있는 지구의 음식이었다.
“가끔 지구의 인스턴트 음식을 싸오긴 하는데, 피자 한 판을 통째로 꺼내 먹을 수 있다니, 이건 정말 각별하구려.”
“맛있어!”
우리는 피자를 맛있게 먹었다.
아마 두 사람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조미료가 턱없이 부족한 아레나의 음식에 질렸으리라.
콜라까지 꺼내자 마리의 눈이 뒤집혔다.
그렇게 식사를 하면서 오딘은 슬슬 본론을 꺼냈다.
“국왕이 김현호 씨를 보고 싶다고 했소.”
“국왕은 어떤 사람이죠?”
“아렌드 왕국의 현 국왕은 알세르폰 3세요. 나이는 74세, 벌써 40년째 이 나라를 통치하고 있소.”
40년?
왕 노릇 되게 오래 했네. 나름 골치 썩는 자리일 텐데.
내가 감탄하는 동안 오딘의 설명이 이어졌다.
“수많은 귀족가문을 잘 조율하면서 왕실의 영향력을 유지할 줄을 아는 노련한 군주요. 하지만 강한 결단으로 모두를 따르게 만드는 힘은 약하지. 뭐든 모두가 납득하게끔 타협적인 결정을 내리오.”
알 것 같군.
요컨대, 눈치와 타협의 달인이렷다?
자기 약점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속뜻도 꽁꽁 숨기는 능글능글한 노인네가 머릿속에 그려진다.
남은 시험 기간이 얼마 없었기 때문에 우리는 다음 날 곧바로 국왕이라는 노인네를 만나러 출발했다.
마차를 타고 아렌드 왕국의 수도로 향하는 길에 나는 오딘에게 영지 통치에 대해 조언을 구했다.
“통치는 크게 외치와 내치로 구분할 수 있겠구려.”
오딘은 울펜부르크 백작령을 다스린 경험을 토대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외치는 바로 외교요. 주변의 적대세력에게 위협받지 않도록 우호세력을 만들어야 하는데, 당신의 경우는 갈색산맥과 울펜부르크 백작령과 가까운 곳에 영지를 받을 테니 그 점은 문제가 없구려.”
“내치는요?”
“아레나는 지구보다 정보처리와 전산이 뒤처지다 보니 일처리도 엉망이고 주먹구구요. 그것을 체계적으로 합리적인 시스템으로 바꾸는 데 주력해야 할 거요.”
난 그 말에 머리를 싸쥐고 고민하다가 차지혜를 바라보았다.
“아셨죠?”
“이해했습니다.”
역시 믿음과 신뢰의 차지혜였다.
한참을 움직인 끝에 우리는 왕도(王都) 지크프리트에 도착했다. 아렌드 왕국을 건국한 초대왕의 이름을 딴 수도였다.
“와!”
창밖을 둘러보며 나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여기저기 고층건물들이 즐비했고, 마차가 잘 통행하도록 도로도 질서정연하게 정비되어 있었다.
건축양식도 지구에서는 보기 힘든 독특함이 있었고, 간간히 마법이 응용된 장식도 있어 감탄을 자아냈다.
확실히 일국의 수도라 다르긴 다르다.
거리를 쭉 가로지르니 도로는 중심부에 있는 왕궁으로 이어졌다.
삼엄하게 왕궁 정문을 지키는 병사들과 기사들이 우리 마차를 곧장 통과시켜 주었다. 오딘의 마차임을 알아본 모양이었다.
난생처음 와 보는 왕궁이라 나는 행동거지가 조심스러워졌다.
마차에서 내린 뒤로 오딘의 뒤만 졸졸 따라갔다.
“폐하께서 현재 정무회의 중이시라 알현하려면 기다리셔야 합니다.”
시녀로 보이는 여자가 나타나 말했다.
“알고 있다.”
“접객실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시녀는 우리는 호화롭게 생긴 방으로 안내해 주었다.
화려하게 수놓아진 카펫이 바닥에 깔려 있고, 가죽소파와 옷장, 테이블, 의자까지 하나같이 범상치 않았다.
앤티크를 좋아하는 억만장자의 방이 이럴 것 같았다.
한참을 수다를 떨며 시간을 보낼 때였다.
별안간 접객실에 중무장을 한 기사 몇이 들어왔다.
그들은 접객실의 각 사이드에 위치해 섰다.
이윽고 옷을 멋지게 차려 입은 키 큰 노인이 걸어 들어왔다. 호리호리한 체격이 슈트 비슷하게 생긴 옷을 날렵한 느낌으로 잘 소화하고 있었다.
얼굴의 주름은 많은 나이를 짐작케 했지만, 큰 눈은 빛나고 있고 얼굴 표정에 쾌활함이 있어 실제 나이보다 젊게 느껴졌다.
어쩐지 젊었을 적에는 꽤나 여자들을 홀리고 다녔을 듯한 인상이 들었다.
“울펜부르크 백작, 왔나.”
“예, 폐하.”
그랬다.
그가 바로 이 나라의 국왕 알세르폰 3세였다.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딘은 오른손을 가슴에 얹으며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나는 눈치껏 오딘을 따라했다. 그러자 알세르폰 3세의 시선이 나를 응시했다. 그의 눈빛이 흥미로 물들었다.
“자네가 그 킴 준남작인가?”
“예, 폐하.”
“얘기는 들었네. 생각보다 더 젊군. 그 나이에 대단해.”
“감사합니다.”
“흐흐, 자네는 귀족다운 느낌도 안 나는군. 사교계에 물들지 않은 깨끗한 인상이라 더 마음에 들어.”
알세르폰 3세는 우리에게 앉으라고 손짓했다.
“사교계에 잔뼈가 굵은 작자들 상대하려면 이래저래 피곤하거든. 하나하나 말꼬리 잡는 것도 어찌나 많은지. 다 웃기는 짓인데, 그게 내 일이라서 더 골 때려.”
그리고 그 일을 40년이나 하며 살아온 작자가 바로 이 사람이라는 거군.
“자네에 대한 얘기는 많이 들었네. 갈색산맥에서 엘프들을 도와서 흑마법사들을 처치했고, 아만 제국에서는 해적을 토벌했다지.”
“예.”
“대륙 최남단의 갈색산맥에서 활약, 대륙 서쪽 끝의 바다에서 또 맹활약. 짧은 사이에 동분서주하며 싸웠더군. 방랑기사라기보다는 무언가 뚜렷한 목적을 갖고 움직이는 것처럼 보여.”
“…….”
“정말 궁금한데. 킴 준남작, 자네는 어떤 사람인가?”
알세르폰 3세는 갑자기 핵심을 찔러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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