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레나, 이계사냥기 139화
무료소설 아레나, 이계사냥기: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776회 작성일소설 읽기 : 아레나, 이계사냥기 139화
“잠깐 저랑 가볍게 대련 좀 해주시겠어요?”
“좋습니다.”
우리는 가볍게 맨손으로 대련을 하기로 했다.
쌍곡도가 없지만 그녀의 본래 특기는 무에타이였다.
마주 보고 서자마자 거침없이 프런트 킥을 날리며 들어왔다.
준비동작도 없는 재빠른 선공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녀의 다리가 내 복부를 향해 뻗어 나는 것이 흐릿한 영상으로 보이는 게 아닌가.
나는 놀라서 한 발짝 뒤로 물러나 피했다.
“계속 갑니다.”
차지혜는 스텝을 밟으며 과감하게 접근해서 원투 잽을 날렸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녀의 주먹이 얼굴을 향해 뻗어오는 것이 흐릿한 영상으로 미리 보였다.
나는 그 흐릿한 영상을 참고하여서 어렵잖게 피했다.
‘이게 동체시력 마스터의 효과구나!’
그 흐릿한 영상은 바로 동체시력 스킬이 그녀의 동선을 미리 보여준 것이었다.
“방어 상관 마시고 무조건 빠르게 공격해 주세요. 피하기만 할게요.”
“좋습니다.”
차지혜는 아예 바짝 가까이 다가와 펀치와 킥을 무차별로 날렸다.
피하기 힘든 근거리임에도 나는 모든 공격을 피하거나 막았다.
원투 잽에 이어 날카롭게 들어오는 미들 킥 콤비네이션도 간단하게 막아냈다.
그녀는 점점 고난이도의 기술을 쓰기 시작했다. 펀치 모션으로 들어갔다가 팔꿈치로 가격하는 기교도 부렸지만, 나에게는 먹히지 않았다.
공격이 모조리 막히자 차지혜는 공격을 중단했다.
“제 공격이 전부 보이십니까?”
“네.”
“묘한 기분입니다.”
“뭐가요?”
“오래전에도 이렇게 스파링을 한 적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아…….”
내가 막 2회차를 넘긴 애송이였던 시절, 차지혜와 스파링을 했었지.
그때 이 여자는 내게 가차 없이 카운터를 먹인 후에 무차별로 두들겨 팼더랬다.
“제게는 16년이나 된 일입니다.”
“제게도 4년이 지났어요.”
시간의 괴리.
그리고 함께 공유하고 있는 추억.
이제는 내가 그녀의 공격을 얼마든지 피할 수 있을 정도로 성장했다.
현실에서는 1년밖에 안 되었는데도, 우리에게는 추억이라고 부를 만한 일이 되어버렸다.
“한 번 더 하죠.”
묘한 분위기가 흐를 때, 차지혜가 입을 열었다. 그제야 나도 아련한 기분에서 깨어났다.
“아, 예.”
차지혜는 다시 공격을 시도했다. 빠르고 짧게 끊어지는 펀치를 속사포처럼 이어나갔다.
다양한 방향에서 얼굴을 노리는 펀치세례.
하지만 동체시력 마스터로 인하여 모두가 느리게 보이고 펀치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미리 알 수 있었다.
답안지를 보고 문제를 풀듯이 나는 고개를 좌우로 저어서 펀치를 모조리 흘렸다.
그런데 그 순간, 차지혜의 레프트 잽과 함께 로우킥이 내 정강이를 강타했다.
퍼억!
나는 움찔했다.
체내에 흐르는 자연의 기운 덕분에 고통은 완화되었지만, 그래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보는 것에 너무 집중해서 시야에 들어오지 않는 공격에 취약해지셨습니다.”
“아, 그렇네요.”
운동신경 마스터. 테크닉 측면에서도 나는 차지혜에게 밀리지 않을 터였다.
하지만 정신적으로 방심하면 이런 일격을 먹게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스킬로는 다 채워지지 않는 정신적인 부분.
아마 일반 시험자와 리창위 같은 무술가 출신 시험자의 차이가 이런 것이리라.
“한 번 더 부탁드릴게요.”
“좋습니다.”
차지혜는 다시 공격을 시도했다. 이번에는 시야 밖에서 들어오는 공격까지 꼼꼼하게 방어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차지혜가 라이트 훅으로 내 주의를 빼앗으며 달려들었다.
그대로 내 품에 파고들더니, 내 몸을 와락 끌어안고 번쩍 들어 올렸다.
나름대로 들리지 않으려고 두 발을 땅에 붙이고 방어했지만, 이상할 정도로 큰 힘에 내 몸이 들어 올려졌다.
‘……?!’
차지혜는 그대로 나를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나는 차지혜의 힘에 깜짝 놀랐다.
인공근육슈트를 입은 것도 아닌데, 제대로 무게중심을 잡고 있던 나를 억지로 들어서 내리꽂다니!
차지혜는 내 위에 올라타서 주먹을 내려쳤다.
파앗!
고개를 돌려 피한 나는 두 팔로 그녀를 끌어안았다. 딱히 주짓수나 레슬링 같은 걸 배운 적은 없지만, 몸에 배인 운동신경에 의해 본능적으로 방어에 나선 나였다.
뒤얽혀 엎치락뒤치락하다가 문득 내가 물었다.
“체력보정 올리셨어요?”
“예, 상급 1레벨입니다.”
허…….
중급 5레벨보다도 한 단계 위 등급이었다. 그래서 완력에서 나를 압도한 것이군.
하지만 그녀의 그래플링은 무에타이처럼 능숙하지 않았다.
나는 금세 뿌리치고 빠져나와, 역으로 그녀의 허리를 뒤에서 끌어안았다.
끌어안은 채 그대로 반 바퀴 뒹굴며 반대편으로 차지혜를 뒤집었다. 상위 포지션을 점유한 뒤에 주먹을 내려쳤다.
물론 주먹은 그녀의 얼굴 앞에서 멈췄다.
“몸싸움에 약하다는 약점도 있었네요.”
“상대방과 거리를 유지하는 것도 주의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야겠어요.”
대화가 중단되자 문득 이상한 분위기가 또다시 흘렀다.
그러고 보니 우리는 아주 가까이 밀착한 채 누워 있었다.
그녀의 체향이 물씬 풍겼다.
인공근육슈트를 벗어주었을 때 맡을 수 있었던 그 자극적인 향기였다.
“…….”
“…….”
숏컷이 잘 어울리는 강한 인상의 예쁜 얼굴.
다양한 감정을 잘 담는 큰 눈이 무표정의 딱딱함을 중화시킨다.
세삼 이렇게 가까이서 보니 차지혜는 굉장히 아름다웠다.
차지혜의 큼직한 두 눈이 나를 가만히 응시한다.
그녀는 특유의 사무적인 어조로 비켜달라고 하지 않았다.
그냥 가만히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나는 그녀의 눈빛에 빨려 들어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내 얼굴이 그녀의 얼굴에 점점 다가갔다.
입술이 맞닿았다.
차지혜는 순순히 내 입술을 받아들였다. 서로의 온기를 주고받는 동안, 그녀는 가만히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그녀가 오른손을 들어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것이 신호였다. 그녀도 나도 보다 격렬하게 키스를 했다.
한참 뒤.
우리는 입술을 떼고 서로를 보았다.
“집으로 돌아갈까요?”
내가 물었다.
“예.”
차지혜도 동의했다.
우리는 서로 마음이 통한 것처럼 자리에서 일어났다.
숙소로 돌아온 나는 옷가지를 가방에 챙겨 넣으며, 한국행 비행기 티켓을 예매했다.
갑작스런 결정이었지만 퍼스트 클래스는 자리가 많이 남아 있어서 쉽게 예약할 수 있었다.
갑자기 떠난다니 오딘을 비롯한 노르딕 시험단 사람들이 섭섭함을 표했지만 100일이 지나기 전에 다시 보자고 약속했다.
쫓아가겠다고 난리 치는 마리도 떼어놓고서 우리는 떠났다.
코펜하겐 국제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덴마크를 떠났다.
비행기를 타고 한국으로 향하는 동안에도 차지혜와 나는 한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어색한 그런 침묵이 아니었다.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우리는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을 뿐이었다.
인천공항에 도착하고 택시를 타고 부천에 도착.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는 동안 내 심장이 점점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숨이 점점 가빠왔다.
그런 내 흥분을 들킬까 봐 그녀와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하지만 비밀번호를 누르고 마침내 집에 돌아왔을 때, 우리는 현관에 가방을 내팽개치고 서로를 끌어안았다.
혀가 뒤얽히며 강하게 탐닉했다. 입을 맞추며 나는 그녀를 안아 올렸다.
침대에 그녀를 내려놓았다. 키스가 계속되는 동안 그녀도 나도 옷을 하나씩 벗고 있었다.
거칠게 숨을 쉬는 그녀의 호흡이 자극적으로 들려왔다.
한 번도 평정을 잃지 않았던 그녀의 감정적인 모습.
내 가슴속에는 커다란 구멍이 있었다.
아레나에서 시험을 치른 시간들.
하지만 현실로 돌아왔을 때는 그게 모두 거짓말인 것처럼 하루도 지나지 않아 있었다.
그것을 몇 번이고 반복했다.
누구와도 공유할 수 없는 시간들.
오딘도 마리도 그저 조력자일 뿐 함께 싸우고 고민한 동료는 아니었다.
그렇게 좋아했던 민정이도 결국은 그 구멍을 채워주지 못했다. 지금 생각하면 나는 그저 외로웠을 뿐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바로 지금 이 순간.
나는 텅 빈 가슴이 무언가 따스한 것으로 가득 채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차지혜는 나보다 더 기나긴 시간의 여백을 갖고 있었다.
나는 내 빈 공간에 그녀를 넣었고, 그녀 또한 부족한 부분을 나로 메웠다.
함께 뜨겁게 뒤얽혀 보내는 지금 이 시간은 바로 그런 의미였다.
달콤하지도 야릇하지도 않게, 우리는 그저 탐욕적으로 서로에게 매달려 무언가를 갈구했다.
***
나는 체력보정 중급 5레벨이었다.
차지혜는 무려 상급 1레벨.
그런 우리가 지쳐서 숨을 몰아쉴 정도면 대체 얼마나 긴 시간을 보낸 것일까?
“배고픕니다.”
차지혜가 한국으로 오고 나서 처음으로 한 말이 그거였다.
뜬금없이 나는 웃음이 나왔다. 둘 사이의 묘한 긴장감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저도요.”
“밥을 새로 해야 하는데 장을 보지 않아서 찬거리가 없습니다.”
“나가서 먹을까요?”
“그게 좋겠습니다.”
우리는 이불을 들추고 침대에서 기어 나왔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그녀의 나신이 눈에 들어왔다.
조금의 군살도 없이 잘 단련된 탄력적인 몸매. 조각을 깎아놓은 듯한 완전미가 느껴졌다.
‘내가 저런 여자와 잤단 말이야?’
나도 어쩔 수 없는 남자일까. 저 아름다운 나신을 보면서 뿌듯함을 느꼈다.
차지혜는 몸을 고스란히 내놓고도 당당했다. 오히려 내가 그녀의 기세에 압도되어 살짝 위축될 정도였다.
난 내 침실에 딸린 욕실에서 샤워를 했고, 차지혜는 거실 쪽 욕실에서 씻었다.
옷을 입고 나서면서 나는 스마트폰을 확인해 보았다.
부재중 전화가 3통이나 와 있었다.
메시지도 와 있었는데, 다름 아닌 현지였다.
‘얘는 또 왜?’
일단은 메시지 내용을 확인해 보았다.
[현지: 오빠 아직 덴마크야?]
[현지: 한국 언제 와?]
[현지: 좀 연락 좀 받아!!]
이렇게 집요하게 연락을 해댄 걸 보니 뭔가 바라는 게 있다는 뜻인데.
그냥 무시해 버릴까 싶었는데, 문득 현지가 잡고 있는 내 약점이 생각났다.
가족들은 내가 차지혜와 사귀는 걸로 알고 있다. 현지가 그걸 민정에게 고자질해 버린다면……!
‘설마 말할까 싶지만, 생각해 보면 얘들은 별의별 비밀 얘기를 다 공유했지.’
후환이 두려워서 일단은 현지에게 연락을 해보았다.
-오빠~!
징그럽게 애교가 들어간 현지의 목소리.
“아직 안 잤냐?”
-밤 11시밖에 안 됐는데 뭘 벌써 자. 오빤 어디야? 아직 덴마크?
“한국이다. 오늘 막 왔어.”
-진짜? 지금 집에 있어?
“지혜 씨랑 막 나가려던 참이야. 배고파서.”
-잘됐다, 잘됐다. 나도!
“잘 못 들었니? 지혜 씨랑 막 나가려던 참이야. 배고파서.”
-응응, 나도 배고파.
“단둘이 가는데 끼고 싶냐?”
-중요한 할 얘기도 있고 해서 그래. 응?
“…….”
나는 현지의 무개념에 할 말을 잃었다.
그런데 뒤에서 차지혜의 목소리가 들렸다.
“저는 상관없습니다.”
-거봐, 상관없으시대잖아. 히히히.
그 말을 들었는지 현지가 뻔뻔하게 말했다.
그만 한숨이 나왔다.
나는 현지에게 데리러 가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