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레나, 이계사냥기 131화
무료소설 아레나, 이계사냥기: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724회 작성일소설 읽기 : 아레나, 이계사냥기 131화
“보기와 달리 놀고 있었던 건 아닌데. 너무 기분 나빠 마시죠.”
헤이싱은 책을 옆에 내팽개치며 말했다.
책은 벗은 여성의 사진으로 가득한 성인잡지였다.
성인잡지를 빤히 본 리창위는 피식 웃었다.
“과연. 그래 보이는군.”
“그런 겁니다.”
“지난번에 왜 실패했는지 알 것 같기도 해.”
그러자 헤이싱의 표정이 처음으로 딱딱하게 굳었다.
“실패라니 말이 심하시군요.”
“그럼 성공인가?”
“돌발 상황이라는 겁니다. 그때 거기서 노르딕의 오딘이 나타났을 줄을 누가 알았을까.”
헤이싱은 히죽거리며 말을 이었다.
“게다가 대장님이 포획에 실패한 김현호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 말이지요. 얼마 전에도 한국에 갔다가 소득 없이 돌아오셨다는데, 그래도 되는 겁니까? 대장님 입지는 말이죠.”
“내 입지를 걱정해 주다니 퍽 친절하군. 걱정 마라. 그래서 이렇게 왔으니까.”
“그게 무슨 뜻입니까?”
“너로는 부족할 지도 몰라 이렇게 친히 왔다는 뜻이다.”
헤이싱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나로는 부족할 것 같다? 그게 진심이십니까?”
“그렇다.”
“그 판단은 대장님 개인적으로 내리신 것 같군요. 해적 파트는 제 소관이고, 저는 대장님의 관여를 필요치 않습니다.”
“글쎄, 내가 도와주면 더 수월할 텐데 그럴 필요가 있나?”
“대장님이 계시면 일 진행이 더 불편해집니다. 게다가…….”
헤이싱은 번뜩이는 눈으로 도발을 하며 말을 이었다.
“제가 역부족인 것처럼 폄하려는 건 대장님의 연이은 실책을 얼버무리기 위함은 아닙니까?”
리창위는 피식 웃었다.
하지만 이윽고 살기가 쏟아지는 눈빛으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헤이싱은 겁먹지 않고 눈을 마주했다.
리창위가 말했다.
“지난번에 해적 파트에서 일을 못했을 때 불려가서 질책 받은 사람은 누구지?”
“대장님이죠.”
“그럼 내가 관여하려는 이유도 알겠지?”
헤이싱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똑같은 눈높이에서 서로를 노려보며 헤이싱이 말했다.
“대장님이 피해 받을 일은 없을 겁니다. 곧, 당장, 데포르트 항구 일을 깔끔하게 정리할 테니까.”
“그러길 바라지. 지켜볼 거야.”
리창위는 뒤돌아 떠났다.
헤이싱이 나직이 말했다.
“개새끼가. 잘난 척 유세 떠는 날도 머지않았다.”
나이도 비슷하고 실력도 거의 따라 잡았다.
그리고 헤이싱 또한 시험자 이전에 무술가였다.
무술가였던 리창위는 자신 외에 다른 시험자를 전부 아마추어처럼 여기는 경향이 있는데, 헤이싱은 그 오만한 시선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인물이었다.
‘아무튼 서둘러야겠군.’
데포르트 항구를 치는 일을 좀 더 서둘러야 할 듯했다.
리창위에게 보란 듯이 성과를 보여주려면 말이다.
***
“일주일 후에 몬스터 토벌이 있을 예정이오.”
아젠 연대장이 기가 찬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지난번에 해적의 출현으로 못다 한 몬스터 토벌을 마무리 짓는다는구려.”
“이젠 아주 대놓고…….”
“개자식들.”
“앗셀, 이 나쁜 놈!”
어부들이 분노를 성토했다.
“그래도 노골적인 덕분에 해적들이 언제 습격해 올지 쉽게 예측할 수 있겠네요.”
내가 말했다.
아젠 연대장은 한숨을 쉬었다.
“그러게 말이오. 불행인지 다행인지 모르겠구려. 아무튼 계획을 단행해야 하는데, 정말 가능하겠소?”
앗셀 집정관과 데커 연대장을 암살하는 일을 의미하는 것이리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얼굴도 파악해 뒀고, 마음먹으면 언제든 가능합니다.”
그동안 나는 데커 연대장을 먼발치에서 확인하여 얼굴을 파악해뒀다.
해적이 습격해 오는데 두 작자가 데포르트 항구에 남아 있을 턱이 없었다.
군대를 끌고 출정하는 때, 둘 다 저격해 버릴 생각이었다.
그러면 아젠 연대장이 혼란에 빠진 군대를 수습하고 복귀한 뒤, 해적의 습격에 대비하는 것이다.
늙은 어부 빈센트와 함께 배를 타고 작전 포인트에도 몇 차례 가보았다.
빈센트의 배는 낡은 돛단배였는데, 낡은 외견과 달리 그럭저럭 바다를 잘 다녔다.
실프가 바람으로 밀자 배는 돛으로 그 바람을 받으며 쭉쭉 나아갔다.
빈센트는 실프가 불어주는 바람을 곧잘 받으며 배를 잘도 조종했다.
이 정도면 해적들과 맞닥뜨려도 잘 도망칠 수 있을 것 같았다.
“저희도 준비를 끝마쳤습니다.”
“가족과 이웃들한테 피난 갈 준비를 미리 해두게 했습죠.”
“작살 같은 무기도 챙겨뒀습니다. 이번엔 놈들이 나타나면 기필코 한 방씩은 먹여줄 생각입니다.”
용감한 뱃사람답게 어부들은 전의로 가득 차 있었다.
아젠 연대장이 말했다.
“나도 준비는 끝났소. 믿을 만한 부하들에게 해적의 습격에 대피한 병력 배치를 지시해 두었소. 사태가 벌어지면 즉각 움직일 수 있소.”
“그럼 이제 행동에 옮기는 일만 남았네요.”
이쪽도 시험의 성패가 걸렸다. 거대한 적과 충돌하게 되니 단단히 각오를 해두어야 한다.
***
앗셀 집정관은 병사들의 도움을 받아 힘겹게 말 위에 올라탔다. 그것도 모자라 병사 한 명이 고삐를 잡고 걸어야 했다.
말도 제대로 못 타는 작자가 몬스터 토벌에 앞장선다니 병사들의 불만이 대단했다.
쓸모없는 인간이 상관으로 있으면 얼마나 귀찮아지는지 오랜 군복무를 통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앗셀 집정관은 전투와 상관없는 쓸모없는 명령을 주구장창 내리는 타입이었다.
군에 대해 아는 건 없는데 지휘관 티는 내고 싶어 하는 유형인 것.
“두 연대 모두 모였나?”
“옛!”
“옛!”
앗셀 집정관의 물음에 두 연대장이 대답했다.
아젠 연대장과 데커 연대장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데커 연대장은 구질구질한 군복 차림의 중년 사내인 아젠 연대장과 달리 번듯하게 생긴 젊은 사내였다.
데커 연대장은 씨익 웃어 보였다.
“이번에도 잘 부탁드립니다, 아젠 연대장님.”
“그러지.”
평소 같았으면 겉으로만 예의 바른 척하는 가증스러운 그를 노려보았을 터였다.
하지만 오늘따라 아젠 연대장의 표정은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곧 죽을 놈이니.’
죽은 자를 앞에 두고 화를 낼 이유가 없지 않나.
곧 죽을 놈이라고 생각하니 도리어 측은해졌다.
‘인생무상이로군. 곧 죽을 놈이 뭘 얼마나 잘 살겠다고 해적과 내통을 했을까.’
데커 연대장을 보며 인생의 허망함을 느끼는 아젠 연대장이었다.
군대가 출발했다.
앞장서고 있는 앗셀 집정관 때문에 속도는 매우 느렸다.
데포르트 항구를 떠나는 군대의 행렬을 보는 사람들의 눈길은 곱지 않았다.
“하는 일도 없는 놈들이 그놈의 몬스터 토벌은…….”
“해적을 좀 토벌해 보란 말이야.”
“꼭 상황이 끝나면 뒤늦게 나타나서 뒷수습이나 하는 놈들이…….”
“군대가 아니라 청소부들이지.”
좋지 않은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면서도, 앞장서서 나아가는 앗셀 집정관의 웃는 얼굴은 변함이 없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퍼억―!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갑작스러운 사태에 누구도 반응을 하지 못했다.
웃고 있는 얼굴 그대로 앗셀 집정관의 머리가 수박 쪼개듯 폭발한 것이다.
그리고 연이어……,
퍼억!
데커 연대장 또한 가슴에 뻥 뚫린 구멍에서 피를 철철 쏟아냈다.
“꺄아아아악!”
한 여성이 비명을 질렀다.
그것이 신호라도 된 것처럼 사방에서 비명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으아아악!”
“저, 저게 뭐야!!”
데포르트 항구는 혼란에 휩싸였다.
병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앞장서던 앗셀 집정관과 데커 연대장이 잇달아 즉사해 버리니 어찌할 바를 모르고 멍청히 서 있을 뿐이었다.
누구로부터 무슨 공격을 받았는지조차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때였다.
“침착해라! 전원 회군!”
아젠 연대장이 우렁찬 목소리로 소리쳤다. 혼란에 휩싸인 와중에도 쩌렁쩌렁하게 들리는 고함이었다.
“민간인들도 여기 모여 있지 말고 모두 대피하라!”
아젠 연대장은 말을 타고 이리저리 다니며 명령을 했다.
사람들이 그제야 두려움에 질려 허둥지둥 각자 집으로 달아났다.
군대는 아젠 연대장의 지시에 따라 회군하기 시작했다.
‘지금이 기회다. 빠르게 움직여야 해.’
아젠 연대장은 병사들의 특성을 잘 알고 있었다.
데커 연대장 휘하의 병사들을 휘어잡으려면 혼란에 빠진 지금이 기회였다.
어찌할 바를 모를 때, 강하게 휘어잡고 명령을 내려야 한다.
척척 지시를 내려서 질서를 안정적으로 유지시키면 병사들의 마음은 자연스럽게 아젠 연대장에게 기울 터였다.
아젠 연대장은 발 빠르게 움직였다.
앗셀 집정관과 데커 연대장의 죽음을 해적의 소행이라고 선포하고, 항구의 주민들에게 대피 준비를 내렸다.
혼란 와중이라 아무도 아젠 연대장의 강력한 주장에 의문을 제기할 생각을 못했다.
해적의 상륙을 막기 위한 최적의 병력 배치가 이루어지고, 군함들이 일제히 바다로 나아가 정찰을 개시했다.
군함들이 인근 해역에 넓게 정찰을 펼친 지 반나절.
한 군함이 항구를 향해 신호를 보내왔다.
해적 출현!
어마어마한 숫자의 해적선들이 항구를 향해 항해중임이 확인된 것이다.
아젠 연대장은 민간인으로 하여금 피난령을 내렸다.
이미 피난을 떠날 준비를 해두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질서정연하게 항구를 탈출할 수 있었다.
아젠 연대장은 데커 연대장의 휘하였던 병력 한 대대를 붙여서 피난을 떠나 있는 사람들을 돌보게 했다.
항구를 벗어나면서도 사람들은 의아해했다.
“아젠 연대장이 저런 사람이었던가?”
“이번에는 군대가 제 역할을 제대로 하는 것 같은데?”
미리 대피 준비를 시켰고, 해적의 출몰을 미리 파악하여 안전하게 피난 보냈다.
게다가 병력을 따로 붙여주어서 안전을 돌보기까지.
그동안 자신들이 알던 아젠 연대장이 아니었다.
사람들은 점차 아젠 연대장에 대한 인식을 달리 하기 시작했다.
***
일전에 타락한 시험자 넷을 죽였던 그 언덕이었다.
저격 포인트로 더없이 적합한 이곳에서 나는 앗셀 집정관과 데커 연대장을 사살하는 데 성공했다.
AW50F를 챙기고 바람의 가호를 펼쳐 한달음에 항구로 달려갔다.
병사들이 잔뜩 배치된 선착장에는 차지혜와 늙은 어부 빈센트가 기다리고 있었다.
“오셨습니까.”
차지혜가 늘 그렇듯 딱딱한 목소리로 날 반긴다.
“예, 어서 가죠.”
우리는 함께 빈센트의 돛단배를 향했다. 그런데 선착장에 배치된 병사들이 우리의 앞길을 가로막았다.
“지금은 해적의 출현으로 출항이 금지되었습니다.”
내가 귀족임을 알아보고 공손히 말해온다. 나는 손을 저었다.
“아젠 연대장님의 명령을 받았다.”
“연대장님께서요?”
병사들이 당혹해한다.
쉬이 믿기가 힘든 게 당연했다.
그러자 빈센트가 나섰다.
“이보게들. 거짓말이 아닐세. 날 못 믿겠나?”
“빈센트 아저씨.”
“하지만 저희는 선착장 통제를 명령 받아서…….”
병사들도 이곳 출신이라 빈센트와 잘 아는 사이인 모양이었다.
‘빈센트 이 노인 생각보다 더 명망 있는 인물이군.’
빈센트는 병사들에게 타이르듯이 말했다.
“명령이 아니고서야 우리가 이 와중에 미쳤다고 바다로 나가겠나?”
“그야 그렇지만…….”
“거짓말이 아니니 날 믿고 비켜주시게.”
병사들은 서로를 보며 상의하더니, 이윽고 길을 비켜주었다.
“알겠어요. 조심하세요, 아저씨.”
“그래. 자, 어서 가십시다.”
용감하게 앞장서는 빈센트를 우리는 조용히 뒤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