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레나, 이계사냥기 112화
무료소설 아레나, 이계사냥기: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824회 작성일소설 읽기 : 아레나, 이계사냥기 112화
결국 1억 프랑을 받고 그녀를 14일간 치료해 주기로 했다.
생명의 불꽃이 그녀의 정신을 치료해 줄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지만, 오딘은 쾌히 그 금액을 지불하겠다고 해왔다.
사실 나로서도 노르딕 시험단과의 관계를 생각해서 파격 할인을 해준 것이다.
가격은 맥런 회장에게 받은 대가의 거의 반값.
게다가 치료 기간이 고작 14일이지만, 하루에 불꽃을 두 개씩 주기로 한 것이다.
불꽃을 먹은 이후로 마리가 발작하는 빈도가 상당히 줄어들었다.
생명력을 돋우자 정신적으로도 안정을 찾은 듯했다.
다만 부작용이 하나 있었는데,
“헤헤.”
내 옆에 찰싹 붙은 마리.
하얀 얼굴과 금발을 아무렇게나 늘어뜨린 그녀는 실실 웃으며 내 곁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보기에는 이래도 23회차의 베테랑이라 이거지?’
스테이크를 순식간에 조각내 버린 나이프 솜씨를 잊을 수가 없었다.
그러고 보니 신경질 난다고 오딘에게 포크를 던지기도 했지. 일반인이었으면 그대로 즉사였다.
나는 노르딕 시험단 본부에 머물면서 인공근육슈트를 입고 수련을 했다.
인공근육의 파워에 익숙해지기 위해서였는데, 가장 좋은 수련은 대련이었다.
오딘에게 대련을 부탁했더니, 그는 내 옆에 찰싹 붙어 있는 마리를 가리켰다.
“무기를 들지 않고 맨손으로 대련을 한다면 나보다 마리가 더 좋은 상대가 될 거요.”
그제야 나는 바보처럼 웃고 있는 이 미친 여자를 바라보았다.
내 시선을 받고 푸른 눈동자를 동그랗게 뜨는 마리.
내가 물었다.
“저랑 대련을 해볼래요?”
“응.”
마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마리도 같은 슈트를 입으세요.”
나는 가공간에 넣어둔 11벌의 인공근육슈트 중 한 벌을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그런데…….
“으악! 뭐 하세요!”
그녀는 그 자리에서 티셔츠와 바지를 훌렁훌렁 벗어던지는 게 아닌가!
내가 뭐라고 하자 마리는 속옷차림이 된 채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녀는 인공근육슈트를 입었다. 입는 도중에 불편했는지 브래지어까지 벗어던지는 만행을 저질렀다.
나는 민망해서 오딘을 쳐다보았다.
오딘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싸우자.”
슈트를 다 입은 마리가 폴짝폴짝 뛰며 손짓했다. 인공근육으로 증폭된 파워에 곧장 적응한 눈치였다.
그녀와 마주한 상태에서 나는 망설였다.
아무래도 상대가 가녀린 여자다 보니 주먹을 뻗기가 힘들었다.
그런데,
파앗!
마리가 선뜻 덤벼들었다.
훌쩍 날아와 발차기를 하자 나는 급히 왼쪽으로 피했다.
그랬더니 그녀는 반대 발로 날렵하게 내 가슴팍을 걷어찼다.
퍼억!
양팔로 가드해서 막았지만 뒤로 몇 걸음 밀려났다.
그런데 그녀가 보이지 않았다.
뒤늦게야 그녀가 바닥에 납작 엎드린 채 내 발밑까지 접근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결과적으로, 나는 대련하는 내내 막거나 피하기에 바빴다.
그녀는 전후좌우뿐만 아니라 위아래로 능수능란하게 움직이며 나를 공격했다.
그래도 엘프들과 술래잡기 하던 게 있어서 곧잘 피했다.
그러다 보니 정말로 대련 자체가 술래잡기처럼 되었다.
“재밌어.”
마리는 몹시 즐거운 얼굴이었다. 요리조리 잘 피하는 나에게 제대로 한 방 먹이려고 열심히 뛰어다닌 것이다.
체력보정 중급 5레벨임에도 지쳐서 기진맥진한 나는 멀쩡해 보이는 그녀에게 물었다.
“혹시 체력보정이 몇이세요?”
“상급 2레벨.”
“역시…….”
맛이 간 듯이 보여도 나보다 4배쯤 더 시험을 치른 베테랑다웠다.
***
나와 차지혜는 남은 휴식 시간을 쭉 덴마크에서 보냈다.
노르딕 시험단은 안전한 장소였고, 훌륭한 훈련 시설도 있어서 다음 시험을 준비하기에 좋았다.
노르딕 시험단의 연구진은 그사이에 통신기기를 완성했다.
연구총책 빌헬름은 오딘과 함께 통신기기를 들고 나타났다.
“이것이 전파송수신기요.”
“이게요?”
가로 20㎝, 세로 14㎝, 높이 7㎝의 작은 상자가 3개 보였다.
“이 붉은색 스위치를 누르면 고출력의 전파를 송출하는데, 전파가 닿는 범위는 대략 1,850㎞요.”
오딘이 설명했다.
“이것을 갈색산맥의 느티나무 마을과 울펜부르크 영지에 설치하는 거요.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당신이 가야 하는 방면에 설치하시오.”
“음성통화가 되는 건가요?”
“음성통화도, 문자메시지도 가능하오. 이걸로 교신을 하면 되오.”
이번에는 구형 폴더폰처럼 생긴 교신기를 주었다. 교신기는 총 15개였다.
“어떻소? 가공간에 전부 수납할 수 있겠소?”
“한번 넣어볼게요.”
나는 전파송수신기와 교신기를 전부 가공간에 넣어 보았다.
다행히 모두 들어갔다.
“전부 넣긴 했는데 식량을 따로 챙겨가지는 못할 것 같네요.”
“그건 염려 마시오. 내 영지에 방문하면 건량을 넉넉하게 챙겨주겠소.”
“네, 그렇게 해주세요.”
그렇게 모든 준비가 끝나고서 7회차 시험이 다가왔다.
그사이에 많은 일이 있었다.
14일의 치료가 끝난 뒤에 마리는 정서적으로 안정을 찾았다.
마리 요한나는 본래 실연의 상처로 자살을 택했던 여자로, 본래부터 정신적으로 취약했다고 한다.
그런 그녀가 심인성 저주에 걸렸으니 남들보다 후유증이 심할 수밖에 없었다.
치료가 끝나고 심신이 안정된 후에도 퇴행된 정신연령은 돌아올 줄을 몰랐지만, 차차 나아질 거라고 한다.
하지만 내가 그녀에게 궁금한 것은 그런 것들이 아니었다.
“그 저주를 누구에게 받으셨죠?”
내 물음에 마리는 화난 얼굴로 말했다.
“허여멀건 한 놈이 그랬어. 대신 그놈은 내가 죽였어.”
“흑마법사였나요?”
“응.”
“그 흑마법사를 죽이는 게 시험이었고요?”
“응응.”
마리는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역시 그 흑마법사 집단이야.’
23회차의 베테랑인 그녀라면 시험의 최종 목적에 어느 정도 근접했다고 생각된다.
23회차 시험이 흑마법사를 암살하는 거였다면, 시험의 궁극적인 목적은 그 흑마법사 집단과 깊은 연관이 있다는 뜻이었다.
아무튼 일단은 7회차 시험을 한번 겪어봐야 알 일이었다.
***
“그럼 건투를 빌겠소.”
“예, 아레나에서 봬요. 차지혜 씨도 힘내시고요.”
“네.”
우리는 시험에 임하는 시험자들을 위해 마련된 방으로 들어갔다.
나를 따라 들어오려는 마리를 쫓아낸 뒤에 방문을 잠갔다.
방은 일반 원룸처럼 잘 꾸며져 있었다.
고시원 같았던 한국 아레나 연구소보다 훨씬 잘되어 있었다.
‘정말 오랜만이군.’
100일이나 쉬었더니 시험이 정말 오랜만으로 느껴졌다.
하지만 긴장감은 별로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기대된다.
‘정말 많은 준비를 했으니까.’
미친 파괴력을 자랑하는 대물 저격소총 AW50F.
20배의 근력을 내는 인공근육슈트.
전파송수신기와 교신기.
게다가 스마트폰과 터치펜, 태양열 충전기도 챙겼다.
실프를 정찰 보낼 때,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게 할 생각이었다.
터치인식이 불가능한 실프를 위해 터치펜을 따로 챙긴 것이다.
스마트폰 다루는 법을 가르쳐 주니 실프는 곧잘 사용해 냈다.
사진도 잘 찍어오고, 스케치어플을 실행시켜 터치펜으로 그림까지 그렸다. 그림 실력이 굉장해서 깜짝 놀랄 정도였다.
‘실프에게 정찰 다닐 때마다 지도를 그리게 해야겠어.’
가공간이 중급 1레벨이 되어서 전자기기의 수납이 가능해지니 이렇게 편해진다.
나는 기대 어린 심정으로 7회차 시험을 기다렸다.
휴식 시간이 끝나자 스르륵 눈이 감겼다.
다시 눈을 떴을 때, 보이는 것은 지겹도록 새하얀 세계.
“기다리셨던 시험 시간이에요!”
참새처럼 퍼덕퍼덕 날아다니며 아기 천사가 나를 반겼다.
“어이.”
“왜요?”
“너도 자꾸 보다 보니 정든다.”
아기 천사는 활짝 웃었다.
“웬일로 그런 개소리를 다 하세요?”
“그러게. 내 입에서 그런 개소리가 나온 걸 보니 컨디션이 아주 좋은가 봐.”
“이야, 의욕 만만하시네요.”
“그런데 뭐 하나 묻자.”
“싫어요.”
“…….”
아, 열 받아.
혈압 올라서 이마에 혈관이 꿈틀거릴 것 같다.
“마리 요한나 알지?”
“알죠. 제 담당은 아니지만요.”
“그 여자가 23회차에서 흑마법사와 싸웠더라고.”
“그런데요?”
“누구는 23회차나 되어서야 맞닥뜨린 그 흑마법사 집단을 왜 난 6회차에서 싸운 거야?”
“글쎄요.”
“내가 빠르게 성장할 것이라는 걸 전부 고려한 것이라면, 너희는 나한테 뭔가 바라는 게 있는 거지?”
“시험을 클리어하길 바라죠. 당연한 걸 물으세요?”
“아니, 생명의 불꽃이나 가공간도 그렇고, 내게 주어진 조건이 너무 좋아서.”
내가 이어 말했다.
“만약에 그 모든 것이 율법의 안배라면, 너희는 나에게 무언가를 더 바라는 게 아닐까 싶은데.”
아기 천사는 씨익 웃었다.
“모든 답은 길의 끝에 있죠. 그 길을 걸어가면 곧 알게 될 일을 벌써부터 궁금해할 필요는 없죠?”
“그도 그렇군.”
따악.
아기 천사가 손가락을 튕겼다.
시험의 문이 나타났다.
“가서 확인해 보세요. 걷다 보면 답이 나오겠죠.”
“오냐.”
나는 시험의 문을 열고 들어섰다. 환한 빛이 시야를 온통 하얗게 물들였다.
***
갈색산맥.
느티나무 마을의 거대한 생명의 나무 위에서 나는 눈을 떴다.
술래잡기를 하며 시끌벅적하게 놀고 있는 어린 엘프들이 보였다.
그 위쪽에는 성인 남성 엘프들이 전투적으로 술래잡기를 한다.
지난번 언데드 무리와의 전쟁으로 술래잡기 훈련의 효과를 확인한 엘프들은 그때보다 더 열심이었다.
‘일단 슈트부터 입자.’
나는 으슥한 곳으로 가서 인공근육슈트를 입었다.
손가락 발가락까지 전부 감싸인 안정적인 착용감. 벌써부터 힘이 솟는 기분이었다.
“석판 소환.”
석판이 나타났다.
-성명(Name): 김현호
-클래스(Class): 21
-카르마(Karma): 0
-시험(Mission): 타락한 시험자를 1명 이상 사살하라.
-제한 시간(Time limit): 무제한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당연히 흑마법사 집단을 추적하는 시험이 나올 줄 알았는데!’
타락한 시험자라니!
중국 시험자들처럼 시험 클리어를 포기하고 돈벌이에 치중하는 시험자들과 싸우라는 뜻이었다.
‘왜 이런 시험이…….’
순간 나는 이 시험의 의도를 깨달았다.
이건 단순히 본래 의무를 저버린 시험자들을 응징하는 게 아니었다.
돈벌이에 미친 타락한 시험자들은 마정의 지속적인 확보를 위하여 의도적으로 다른 시험자의 시험 클리어까지 방해한다고 들었다.
결국 시험의 최종 목적 달성을 방해하는 그들을 처치하라는 것이다.
‘어차피 언젠가는 부딪쳐야 했지만, 그래도 너무하잖아?’
이제 7회차인 나더러 대부분이 베테랑들인 타락한 시험자 무리와 싸움을 붙이다니.
대체 타락한 시험자들은 어디서 찾아야 하는지 막막했다.
‘오딘에게 물어봐야지. 뭔가를 알지도 모르니까.’
아마도 타락한 시험자들은 마정을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는 ‘작업장’을 구축하고 있을 터였다.
라이칸스로프들이 ‘인간 목장’을 만들었듯이 말이다.
‘우선은 전파송수신기부터 설치하자.’
가장 높은 곳에 설치하는 게 좋겠지.
나는 생명의 나무 위에 하나를 설치하기로 했다.
힘껏 점프를 했다.
인공근육의 위력으로 내 몸이 하늘로 솟구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