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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레나, 이계사냥기 94화

무료소설 아레나, 이계사냥기: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조회 784회 작성일

소설 읽기 : 아레나, 이계사냥기 94화

 

‘왜 연락이 없지?’
시간이 흘러 어느새 밤 10시가 지나고 있었다. 그런데 민정에게서는 아무런 연락도 없었다.
‘애도 아니고 술자리에서 늦게까지 놀 수는 있지만…….’
그래도 내가 데리러 간다고 했는데 이 시간까지 연락이 없는 건 좀 그랬다.
나는 문자를 보내봤다.

[나: 잘 놀고 있어? 지금 안 데리러 가도 돼?]

그때 민정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여보세요? 천안이야?”
-히히, 우리 자기! 내 전화 애타게 기다렸어요? 우쭈쭈.
음, 술에 취한 목소리였다.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지.”
-왜에? 왜에?
“보고 싶으니까.”
-히히히, 보고 싶었어? 우쭈쭈, 그래그래!
“거기 어디야?”
-히히, 잘생긴 우리 자기.
딴소리를 한다.
고주망태의 특성이 발휘되기 시작했구나.
“……내가 잘생기긴 했지.”
-돈 많고 몸 좋고 잘생긴 우리 자기!
“그래그래, 돈 많은 호구 오빠 여기 있단다.”
-히히히히히!
민정이 꺄르르 웃었다. 아주 술에 꽐라가 되어 있었다.
“거기 어디야, 민정아.”
-여기 아르페지오.
“아르페지오? 거기가 어디야?”
-아르페지오는…… 아르페지온데. 히히!
아마 술집 이름이지 싶었다.
“천안이지?”
-응!
“지금 갈게 기다려.”
-히히, 우리 자기 온다. 보고 싶었는데 이리 온다. 히히히.
‘에휴.’
통화를 끊은 나는 옷을 갈아입고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갔다.
내비게이션에 ‘천안 아르페지오’를 검색하니까 정말로 그런 술집이 있었다.
포르쉐 카이엔을 몰고 바람처럼 천안으로 달려갔다.
저렇게 술에 취하도록 마시다니! 저러다 웬 사내새끼가 업어갈지 누가 안단 말인가.
고속도로를 따라 거의 바람처럼 달렸다. 과속딱지 몇 개를 끊었을 것 같았다.
길거리에 차를 세워놓으니 지나가던 몇몇 사람이 내 차를 쳐다본다.
아, 잊고 있었다. 내 차 좋은 차였지. SUV라서 겉보기에 화려하진 않은데, 포르쉐 로고는 다들 알아본다.
‘그러고 보니 민정이 친구들도 있겠네. 나 괜찮나?’
난 내 옷차림을 슥 훑어봤다. 대충 입고 나왔는데도 나쁘지 않았다.
스튜어디스 이수현이 코펜하겐에서 코디해 줬던 옷차림이었다.
돈이 많아진 후로 기본적으로 비싸고 좋은 옷만 사서 그런지 뭘 입어도 대충 기본은 하는 나였다.
무엇보다 몸이 좋아지니까 뭘 입어도 옷걸이다.
‘이 정도면 괜찮지.’
자화자찬을 하며 나는 술집으로 들어섰다.
길잡이 스킬로 쉽게 민정이 있는 자리를 찾아갔다.
그런데…….
‘뭐야, 저 새끼는?’
나는 어안이 벙벙했다.
술자리라면서? 친구들은 다 어디로 갔단 말인가?
민정은 술에 취한 나머지 잠들어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웬 어린 남자의 어깨에 기대고 있다는 점이었다.
이제 갓 스무 살을 넘긴 듯한 앳된 청년은 민정에게 어깨를 빌려준 채 가만히 있었다.
‘이게 무슨 경우지?’
키도 크고 잘생긴 놈이라 더 열 받는다.
1년 만에 민정과 재회한 거였는데, 저딴 모습을 봐야 한다니.
“아, 민정 누나 남친분 맞으시죠?”
청년이 날 보더니 알은체를 해왔다.
놈은 자기 어깨에 기대고 있는 민정을 보고는 멋쩍은 얼굴이 되었다.
“죄송합니다. 누나가 워낙 취하셔서.”
“다른 친구분들은요?”
계속 어처구나가 없어서 가만히 있다가 내가 물었다.
“다들 먼저 일어나셨어요.”
“그래요? 알겠습니다.”
나는 민정을 부축했다. 어깨를 흔들며 깨워봤지만 일어나지 않는다.
혀를 차고는 민정을 들쳐 업었다.
“가볼게요.”
가볍게 인사하고 떠나려 할 때였다.
청년이 뜬금없이 날 붙잡았다.
“잠깐만요.”
“뭐죠?”
가뜩이나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아서 내 목소리에 짜증이 묻어나왔다.
청년은 잠시 뜸 들이는가 싶다가 말했다.
“말씀 많이 들었어요. 돈도 많고 되게 잘나가신다고요.”
“그래요?”
“좋은 차 끌고, 입고 계신 옷도 신발도 전부 다 명품이시고, 잘생기셨고, 주변에 여자 많으시겠어요.”
이 새끼가 대체 뭔 소릴 하려는 걸까?
“근데? 그래서 어쩌라고?”
이제 내 말투가 더는 곱게 나갈 수 없게 되었다.
“진지한 마음이 아니시면 민정이 누나 저한테 양보해 주실 수 없나요?”
“뭐?”
“전 정말 진지해요. 민정이 누나가 좋아서 미칠 것 같아요. 실례인 건 알지만 꼭 좀 부탁드릴게요.”
그러면서 90도로 허리를 숙이는 꼬락서니가 가관이었다.
나는 어이가 없어서 청년을 바라보았다.
“야.”
“네.”
“어릴 때부터 착하다, 예의 바르다, 소리 많이 듣고 산 타입이겠다. 생긴 것도 멀쩡하고 많이 사랑받고 살았겠어.”
어리둥절한 청년에게 내가 계속 말했다.
“근데 그렇게 착한 척, 예의 깍듯한 척, 사랑에 목숨 바친 순정인 척 다 하면, 그런 좆같은 소리를 해도 용서받을 줄 알았어?”
“……?!”
청년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내가 더 맞춰볼까? 이딴 일 생기고 나면 내가 민정이랑 대판 싸우다가 헤어지기라도 바랐나 보지? 임자 있는 여자가 술 취해 잠들었더니 어깨까지 빌려주고, 아주 그림 좋게 있더라. 너 정말 죽고 싶냐?”
“아, 아니, 전 그게……!”
“넌 한 번만 더 내 눈에 띠면 그 아가리를 뜯어놓는다.”
내가 똑바로 노려보자 청년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순한 녀석이라 아쉽다. 적당히 싸가지도 없었으면 패기 있게 덤볐을 게 아닌가. 그럼 개 패듯 쥐어 팼을 텐데.
카운터에 물어보니 술값은 먼저 떠난 친구들이 계산한 모양이었다.
난 민정을 조수석에 태우고 안전벨트를 메어주었다.
시동을 켜고 신경질적으로 엑셀을 밟아 출발했다. 차가 좋아서 몇 초 만에 속력이 나왔다.
속이 부글부글 끓어서 이성을 유지하기가 힘들었다.
‘내가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거야?’
저런 새끼가 주변에 얼쩡거리고 있었던 거야? 그런데 버젓이 같이 술자리에 참석했어?
흘깃 민정을 보았다.
참 남의 속도 모르고 잘도 자고 있다. 자는 모습도 참 예쁜데, 그래서 더 부글부글 끓는다.
1년 만에 돌아왔더니, 마치 내 빈 자리를 그 어린 새끼가
그러다가 문득 웃음이 터져 나왔다.
나는 나직이 웃었다.
‘이게 뭐 하는 짓이지?’
내가 왜 이딴 하찮은 연애질로 마음이 상해야 하는 거야?
여러 목숨 달린 전쟁을 치르고 죽은 동료의 복수까지 마치고 돌아왔다.
그러고 나서야 얻은 100일 간의 휴식 시간인데, 왜!
그에 비하면 시답잖은 이런 문제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아야 하냔 말이다!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나는 스마트폰을 꺼내 현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 오빠 왜?
“민정이 오늘 네 방에서 재워라.”
-왜?
“꼴 보기 싫어서.”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술 취해 꼴아 있었고 단둘이 같이 있던 사내새끼는 나더러 민정이 양보해 달란다.”
-으악.
“지금 그리로 간다.”
-아, 알았어.
나는 집에서 가까운 현지의 원룸에 민정을 내려놓았다.
“오빤 괜찮아?”
“응.”
“안 괜찮아 보이는데.”
“아냐. 그냥 좀 짜증나서 그래. 다 귀찮다. 이게 뭐 하는 짓거린지.”
“오빠, 그래도 화 좀 삭혀. 민정이 바람피울 애 아니야.”
“나도 알아.”
“알면 오빠가 참지 그래.”
“내가 왜 그런 스트레스를 참아가며 연애해야 하는데? 연애가 그렇게 중요해?”
“…….”
“됐어. 아무튼 갈게.”
“응.”
그대로 집에 돌아온 나는 옷을 아무렇게나 벗어던지고 침대에 드러누웠다.

***

“우웅, 오빠.”
민정은 침대에서 뒤척이면서 본능적으로 옆 사람의 품속에 파고들었다.
그런데 문득 들려오는 여자 목소리.
“징그러 이년아. 누가 오빠야?”
“……?”
민정은 눈을 부스스 떴다.
뚱한 표정을 한 현지가 보였다.
비로소 현지의 품에서 빠져나온 민정은 어리둥절해서 주위를 쳐다보았다.
12평 남짓한 원룸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여기 어디야?”
“내 방이지 어디야.”
“내가 왜 여기에 있어?”
“오빠가 너 여기 내려놓고 갔어.”
“현호 오빠?”
“다른 오빠도 있냐?”
그제야 민정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 맞다! 나 오빠한테 연락했던가?”
“했다던데. 그러니까 너 데리러 갔었지.”
민정은 급히 스마트폰을 꺼내 통화기록을 살폈다.
다행히 현호와의 통화기록이 있었다. 그런데 그걸 보고 민정은 어리둥절해졌다.
“근데 왜 오빠가 날 여기 내려놓고 간 거야?”
현지는 혀를 쯧쯧 찼다.
“아무것도 기억 안 나냐?”
“응, 너무 많이 마셔서…….”
“쯧쯧, 요즘 술 좀 자제한다 싶었더니 또 필름 끊길 때까지 퍼마셨냐.”
“학원 사람들이랑 마지막 날이라……. 근데 무슨 일 있었어? 오빠 왜 나 집에 안 데려가고 여기 내려놓은 거야?”
“너 사고 쳤어, 이년아.”
“뭐? 무슨 사고?”
민정의 얼굴에 두려움이 어렸다. 설마 무슨 실수라도 했단 말인가?
“단둘이 같이 있었다던 그 사내놈은 누구야?”
“다, 단둘이?!”
“그랬다던데. 술집 가보니까 친구들은 없고 너랑 남자랑 단둘이 있었대.”
“뭐, 뭐야. 딴 애들은 다 가버렸다고?”
“그래.”
“아이 씨, 어떡해! 그래서 어떻게 됐어?”
“오빠더러 너 포기할 수 없냐고 물었다더라. 그 당찬 놈은 누구야?”
민정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렸다.
“어떡해! 오빠 많이 화났어?”
“화났으니까 너 여기 버려놓고 갔지.”
“어, 얼마나 화났는데?”
“다 귀찮대. 이게 뭐 하는 짓거린지 모르겠다고. 자긴 그런 스트레스를 감당할 정도로 연애가 중요하지 않대. 잘못하면 너 이거 한 방에 훅 가겠다.”
민정의 얼굴에 두려움이 어렸다.
민정은 후다닥 일어나 옷을 입었다.
“어디 가, 이 시간에?”
“집에 가야지!”
“새벽이야, 이것아.”
“그래도 가야 해! 빨리 가서 빌지 않으면 늦는단 말이야!”
“알긴 아네. 택시 불러주랴?”
“응!”
현지는 전화를 걸어 택시를 불렀다.
민정은 안절부절못하면서 계속 현지에게 오빠 많이 화나 보였냐고 물어댔다.
“차라리 머리끝까지 화났으면 다행이지. 그럼 화 풀어주면 되니까.”
“그럼?”
“다 귀찮다고 때려 칠 기세였다니까.”
“아이 씨! 나 어떡해! 완전 망했어!”
“그러게 누가 끼 부리고 다니래? 또 여기저기 썸 타고 다녔어?”
“그런 거 아니란 말이야!”
민정은 울상이 되어서 소리쳤다.
“학원 친구들이 장난으로 술자리에 걔 불렀단 말이야! 아이 씨, 나 이제 어떡해!”
“어떡하긴. 빌어도 안 되면 마는 거지.”
“너 남 일 아니라고 그렇게 말할래?!”
민정이 화를 냈다.
깜짝 놀란 현지가 물었다.
“그렇게 진지한 거였어?”
“그래! 그럼 내가 현호 오빠랑 장난으로 노는 것처럼 보였어?”
“응, 너 원래 그랬잖아. 오빠도 그거 다 알고 사귄 거 아냐?”
그 말에 민정은 멍해졌다.
이 일로, 현호의 눈에도 자신이 그렇게 보이고 있을지도 모른다.
현호는 조신하고 처신이 깔끔한 여자를 좋아했다. 그래서 민정은 그동안 현호만 바라보며 많이 노력하며 신뢰를 쌓아나갔다.
자신이 현지와 함께 어울리며 가볍게 놀던 여자라는 걸 현호도 알고 있기에, 그 이미지를 벗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던가.
그런데 겨우 이런 사건 하나로 그동안의 신뢰가 송두리째 잃어버릴지도 몰랐다.
택시가 집 앞에 도착하자 민정은 허겁지겁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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