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레나, 이계사냥기 80화
무료소설 아레나, 이계사냥기: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873회 작성일소설 읽기 : 아레나, 이계사냥기 80화
인터넷으로 바이올린을 알아보았다.
일단 느낀 건 더럽게 비싸다는 것?
바이올린 본체는 정말 미친 듯이 비싸고, 활도 비싸고, 그걸 넣는 케이스도 비싸다.
인터넷 쇼핑몰에서 비싼 순서로 정렬해 놓고, 중간지점을 봤는데 뭔 1천만 원인지.
이탈리아제의 19세기 제품이니 어쩌니 하고 설명이 되어 있었다.
이제 막 배우려는 내가 이런 걸 가져봤자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인데…….
‘오케이, 주문.’
뭐 어때, 나 돈 썩어나는데.
생초짜 주제에 나는 그 1천만 원대의 바이올린을 주문해 버렸다.
능숙해지면 가장 비싼 걸 사야지.
아예 판매자에게 전화해서 퀵서비스로 보내달라고 요청까지 했다.
“예, 지금 당장 보내드리겠습니다.”
선뜻 고가의 물건을 구매한 고객이었으므로 판매자는 매우 협조적이었다.
“제품만 멀쩡하면 받는 즉시 구매확정 누를게요.”
“어휴, 그럼 감사하죠. 품질은 걱정 마시고요. 그런 고가 제품에 하자 있으면 큰일 납니다.”
그럼 바이올린은 됐고, 이제 다시 웹서핑.
부천 지역의 바이올린 교습 선생을 찾아보았다.
일감을 찾는 전공자가 워낙 많아 어렵지 않았다.
-여보세요?
여자 목소리였다. 명문 음대생이라는 소개 글은 봤는데 딱 그 정도 나이의 목소리였다.
“바이올린 교습하시죠? 블로그에 올리신 글 보고 전화드렸어요.”
-아, 네!
“저는 완전 초보고요, 외국에서 온 어린애 하나 있는데 걘 좀 잘해요.”
-아, 그 아이 분은 한국말 하나요?
“전혀요. 제 이름도 못 불러요.”
여자가 나직이 웃었다.
-아무튼 알겠습니다. 일단 직접 뵙고서 수준을 본 뒤에 결정할게요.
“네.”
-그럼 언제 찾아뵈면 될까요?
“오늘 바로요.”
-예? 아, 예. 오늘 몇 시가 괜찮으세요?
“저녁 8시 괜찮으세요?”
-네.
음, 그야말로 일사천리다. 돈이 있으니 이렇게 편하군.
몇 시간 후에 퀵서비스가 도착해서 바이올린을 주고 갔다.
“벨라야.”
방에서 바이올린을 신 나게 연습하던 벨라가 쪼르르 달려왔다.
“이거 봐봐.”
벨라는 눈을 빛내며 내 바이올린을 만지작거렸다.
들어서 턱에 대려고 했으나 너무 커서 자세가 잘 안 잡혔다. 하하, 저런 모습도 너무 귀엽다.
하지만 용케 붙들고서 활로 바이올린을 켰다.
“어때?”
나는 엄지를 치켜 올리며 물었다. 벨라는 고개를 끄덕이며 똑같이 엄지를 들었다.
음, 괜찮나 보다.
같이 악기를 만지작거리며 노는 사이에 민정이 저녁을 해주었다.
오늘도 진수성찬이라 나는 민정에게 말했다.
“힘들겠다. 앞으론 간단히 차려줘.”
“곧 한식조리기능사 실기 시험이라 연습하는 거예요. 자격증 따면 간단하게 할게요.”
“딸 수 있을 거야. 이렇게 솜씨가 좋은데.”
“헤헤.”
내 칭찬에 민정은 수줍어하며 좋아했다. 얘, 얘가 왜 이러지. 평소처럼 우쭐하지 않고.
밥을 먹고 TV를 보다가 저녁 8시가 되자 연락했던 교습선생이 왔다.
“아, 안녕하세요.”
“어서 오세요.”
민정이 교습선생을 맞았다.
민정은 가늘게 뜬 눈으로 날 흘깃 노려본다. 또 나왔구나, 저 블로킹 본능.
근데 교습선생이 눈에 띠는 미인이라 그럴 만도 했다.
머리 자르기 전의 민정과 비슷한 긴 생머리에 또렷한 이목구비가 전체적으로 청순한 인상이었다.
“편히 쉬세요. 간식거리 내올게요, 여보.”
민정의 말에 나는 흠칫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 어, 그래, 여보.”
“아내분이 미인이세요.”
“그렇죠?”
“되게 젊으시다.”
“예, 워낙 동안이라서.”
사실은 실제로도 젊다. 아직 20대 초반밖에 안 됐으니까.
아마 민정은 부엌에서 귀를 쫑긋 세우고 이 대화를 듣고 있겠지.
나는 벨라도 소개시켜 준 후에 교습을 시작했다.
“악보부터 볼 줄 아셔야겠네요.”
“네.”
“그리고 벨라는 스즈키 2권쯤 되는 수준이네요.”
“스즈키가 뭐예요?”
설명을 들으니 가장 유명한 10권짜리 바이올린 교본이란다. 3권까지는 쉽고 그 뒤부터 무진장 어려워진다나?
워낙 대중적인 교재라 아마추어 사이에서 실력을 나타내는 척도로도 쓰인다고 한다.
나는 악보 보는 법을 배웠다.
옆에서 같이 듣던 벨라가 선생이 하는 말을 앵무새처럼 따라했다. 졸지에 한국말 수업이 병행되었다.
열심히 필기해 가며 배우는 도중에 민정이 간식을 가져다주면서 살쾡이 같은 눈빛으로 선생과 날 슥 보기도 했다.
그렇게 2시간의 수업이 끝났다.
“수업은 일주일에 몇 번이나 하면 될까요?”
선생이 물었다.
“매일 되나요?”
“매, 매일이요?”
“네, 돈은 넉넉하게 드리겠습니다.”
선생은 승낙했다.
***
일단 악보 보는 법을 배우니 본격적으로 재미있는 바이올린 수업이 시작됐다.
바이올린은 더럽게 어려운 악기였다. 제대로 소리를 내는 것조차도 쉽지가 않았다. 그런데도 선생은 놀라워했다.
“어떻게 그렇게 빨리 배우시죠?”
“빠른 건가요?”
일주일째 배우는데도 제대로 된 소리를 내는 게 벅찬 나로서는 의아스러웠다.
“정말 빠르신 거예요. 직장인 분들이 취미로 도전하시다가 포기하는 이유가 제대로 된 소리를 내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려서죠.”
그런 건가?
정말 빌어먹을 악기로군.
새삼 바이올린 연주자들이 얼마나 대단한 건지 알 수 있었다.
“벨라가 대단한 거네.”
옆에서 능숙하게 연주를 하는 벨라를 보며 내가 중얼거렸다.
벨라가 눈을 동그랗게 뜨자 나는 엄지를 치켜세웠다. 너 짱이라고.
벨라는 활짝 웃었다.
“어휴, 귀여워라.”
“그러게요.”
선생도 덩달아 넋을 잃는다.
생명의 불꽃을 매일 2개씩 투여되면서 팔팔해진 벨라는 바이올린 실력이 일취월장했다.
초보자인 내가 봐도 일취월장하는 것이 느껴질 정도였다.
병 때문에 억압받던 재능이 마침내 만개한 게 아닌가 싶었다.
벨라는 자기 손가락이 마음대로 움직인다는 기쁨에 바이올린을 신 나게 연주하고 있었다.
그렇게 2주가 흘렀다.
지난 2주간 바이올린에만 매달렸다.
실프에게 소음차단을 시키고 테라스에서 미친 듯이 바이올린을 켰다.
‘누가 보면 이게 웬 미친 짓인가 싶겠구나.’
실제로 민정이 가끔 그런 눈으로 날 보고 있다.
근데 이건 훈련이었다.
웬만한 무술을 익히는 것보다 운동신경 스킬레벨을 올리는 게 이득이었다.
운동신경.
몸을 움직이는 요령.
어쩌면 가장 근본적인 무술인지도 몰랐다.
바이올린은 그 스킬레벨을 올릴 수 있는 가장 빠른 훈련수단이었다.
‘분명히 통한다.’
운동신경 중급 1레벨이 적용되어 일반인보다 훨씬 빠르게 바이올린 실력이 늘고 있는 나였다.
그러니 바이올린을 열심히 연마하면 운동신경의 레벨이 오르는 게 당연했다.
격렬한 운동은 엘프 마을에서 많이 했지만, 손가락 하나하나를 타이밍 맞게, 섬세하게 움직여야 하는 운동은 처음이라 상당히 강도 높은 훈련이 되었다.
“오, 오빠, 일은 안 해요?”
“응, 일 안 해도 돼.”
“바이올리니스트가 되려고요?”
“아니, 취미야.”
“무슨 취미를 귀신에 홀린 것처럼 하세요?”
“재미있어서.”
종일 바이올린만 붙잡는 백수 같은 날 걱정하는 민정이었다.
하지만 성과가 있었다.
2주 후, 난 스즈키 1권의 마지막 곡 가보트를 연주해 낸 것이다.
“세상에…….”
선생은 믿기 힘들다는 눈치였다.
벨라도 놀라움 가득한 얼굴로 박수를 쳤다.
“제가 빨리 배우는 편인가요?”
“너무 빨라요! 현호 씨는 천재예요, 천재! 왜 진즉에 음악을 하지 않으신 거죠?”
“그, 글쎄요.”
선생의 격렬한 반응에 내가 다 쑥스러웠다.
나는 곧바로 스즈키 2권의 첫 곡 ‘개선의 합창’으로 넘어갔다.
미칠 듯한 학습 스피드였다.
***
“흐아아앙!”
벨라가 울음을 터뜨렸다. 털썩 주저앉아 두 다리를 마구 차며 울었다.
오딘은 쓴웃음을 지었다.
오늘은 12월 31일.
벨라가 덴마크로 돌아가는 날이었다.
아버지인 오딘이 직접 마중 나왔고, 벨라는 가기 싫다고 울었다. 그동안 우리와 많이 정이 든 것이었다.
민정이 벨라를 달래는 사이, 오딘은 나와 함께 테라스로 나와 단둘이 대화를 나눴다.
아레나의 언어로 대화하는 걸 누가 들으면 안 되기 때문이었다.
“벨라가 저렇게 펑펑 우는 건 오랜만에 보오.”
“많이 정 들었거든요. 저도 섭섭한걸요.”
“기쁘오.”
“예?”
“울며 때 쓰고 버둥거리는 걸 봐도 벨라의 건강 상태를 알 수 있소. 한눈에 정말 많이 좋아졌다는 걸 알겠소.”
“하하하…….”
“정말 고맙소.”
오딘은 내 손을 꽉 붙잡았다.
“많이 좋아졌다고 생각되지만 병까지 치유됐을지는 모르겠네요.”
“경과를 지켜보고 필요하면 다시 신세를 지도록 하겠소.”
“그러세요.”
“그럼 다음에는 아레나에서 뵙겠구려.”
“예.”
오딘과 벨라가 떠나는 것을 인천공항까지 배웅했다.
벨라는 떠나기 전에 민정의 품에 안겨서 엉엉 울었다. 귀여운 소녀가 서럽게 우니 우리도 자연히 눈시울이 붉어졌다.
집으로 돌아가면서 민정이 말했다.
“벨라 예쁘죠?”
“그러게.”
“힝, 저도 그런 딸 갖고 싶어요.”
“…하나 줄까?”
내 개드립에 민정이 깔깔 웃음을 터뜨렸다.
다행히 그 얘긴 거기서 끝났다.
어쩐지 점점 민정이 결혼을 원하는 것 같은 낌새라 나는 불안했다.
지금 난 그런 것에 신경 쓸 여력이 없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데 남겨질 가족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
함께 새해를 맞이하고 1월 중순에 이르렀을 때, 민정은 가산디지털단지에 있다는 친척 오빠의 회사에 출근하게 되었다.
함께 한가롭게 붙어 있으며 놀던 나날은 끝난 것이다.
“에휴, 좋은 날은 다 갔네요.”
“먹고 살려면 일해야지.”
“치, 오빠가 저 책임지면 되잖아요.”
“어허, 자기 인생은 자기가 책임지는 거야.”
“치이.”
민정은 약간 섭섭하다는 표정으로 출근했다.
이것아, 농담이라도 내가 먹여 살리겠다고 하면 또 결혼 무드가 되잖아. 그건 안 되지.
혼자가 되자 수련이 더 용이해졌다. 나는 민정 눈치 때문에 하지 못했던 스킬 훈련을 시작했다.
“순간이동.”
파앗!
순간 몸이 붕 뜬 느낌이 들더니, 순식간에 나는 목인장 앞에 서게 되었다.
“무장 닐슨 H2, 바람의 가호.”
양손에 쌍권총이 나타나고 바람의 가호가 발동되었다.
나는 사뿐히 스텝을 밟아 좌우로 빠르게 움직이며 목인장을 쳤다.
장수(樁手)들 사이로 손을 비틀어 넣어 권총으로 몸통을 겨누는 행위를 기계적으로 반복했다.
바람을 이용한 점프력으로 순식간에 거리를 벌렸다가, 다시 도약해 거리를 좁히며 다시 겨눈다.
순식간에 반대편으로 날아 샌드백을 걷어차면서 동시에 쌍권총은 목인장을 겨눈다.
적당히 땀을 흘리며 수련을 끝낸 뒤엔 바이올린을 켰다. 실프로 소리를 차단해 놓고 지금껏 배웠던 곡들을 반복해서 연주했다.
바이올린은 요령이 쉬운 악기가 아니라서 조금이라도 연습을 소홀히 하면 곧바로 티가 난다고 한다.
이왕 켠 김에 다음에 배울 곡까지 예습했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운동신경(합성스킬): 몸을 움직이는 요령이 향상됩니다.
*중급 2레벨: 몸을 쓰는 모든 일에 천재적인 오성을 발휘합니다.
“아자!”
나는 바일올린과 활을 치켜들고 소리를 질렀다.
역시나 운동신경의 레벨이 올랐다.
중급 1레벨로 상당히 높아진 스킬을 근 1개월 만에 올렸으니 대단한 성과였다.
엘프들과 술래잡기를 하고 절벽에 매달려 좀비들과 싸워도 초급 5레벨에서 중급 1레벨로 올리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는데 말이다.
‘해보지 않은 생소한 훈련이 더 도움이 되는 모양이야.’
바이올린에 익숙해지면 다른 악기도 해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